비트겐슈타인은 실용주의자인가? : 힐러리 퍼트남, ⌜실용주의⌟ (3)

좀 더 자세한 비트겐슈타인과 칸트

이제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칸트 철학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가겠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비트겐슈타인과 칸트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고싶다. 앞서 언급했듯이, 비트겐슈타인은 물자체에 대한 관념과 선험적 종합명제, 범주표를 포기했다. 누군가는 비트겐슈타인은 "자연주의"적인 칸트주의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윌리엄 제임스가 이야기 하듯이,) 하지만 여기서 "자연주의"가 의미하는 건 뭘까? "자연주의"가 환원적 물리주의와 종종 연결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자연주의"는 위험한 표현이다. 그렇지만 비트겐슈타인은 환원주의자가 아니므로, "자연주의"는 축소주의 라는 의미에서 가장 적절할 것이다. 우리가 세계를 있는 그 자체로 서술할 수 없다는 표현은 칸트의 관점을 보여주기에 가장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건 로티가 비트겐슈타인과 동의한 지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이론화불가능성 전략에 충실하게) 여기에 흥미로운 이론이 없다는 점을 우리에게 설득시키려 애쓴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사이비-명제를 부정하는 명제는 사이비-명제다. 무의미한 명제를 부정하는 명제 역시 무의미한 명제다. 우리가 만약 "우린 가끔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데 성공해요"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는 절대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데 성공할 수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 역시 똑같이 이해할 수 없다는걸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없어요"는 심지어 더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상한 철학적 "할 수 없다"를 도입하기 때문이다) 이 굉장한 로티주의 논제는 사실의 환영이고, 우주 발견의 환영이다.

사실 철학자들이 우리가 무언가 할 수 없다고 말할 때, 무언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 전형적으로 그들이 우리에게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특징이라고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면, 물리학자가 "당신은 무한동력을 만들 수 없어요" 라고 말하거나 건널 수 없는 벽을 말하는 것처럼, 철학자가 우리에게 주는 무력감은 사실 신기루거나 더 터무니없는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우리는 언어를 배우고 바꾸고 발명할 수 있고, 언어 안에서 실재를 그려낸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맞아요, 근데 그건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리는게 아녜요."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의 유명한 마지막 줄에서, 말이 안되는 것을 우리는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의 희생양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표현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확히 말하는 것이다. (제임스 코넌트는 그게 의도적인 모순이라고 주장했다. ⌜논고⌟는 내가 지금 말하는 요점을 만들기위해 자신을 심연으로 집어넣는다.)

요약하면, 우리는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없다고 말하면서 로티가 품고있는 칸트의 어조와 그의 독자가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있다"거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없다"고 말하고 싶어하지 않도록 하려는 비트겐슈타인의 어조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일급 개념 체계"(과학적 이미지)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이해가능한 진실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한 아주 사소한 예시에 의해 축소된다. 예를 들어 내가 누군가에게 "여기에 대충 서 있어"라고 지시하고, 나중에 "나는 그에게 대충 서 있으라고 했고, 그리고 나서 그의 사진을 찍었어"라고 말하면서 일어난 일을 설명한다면, 나는 확실히 "뭐가 사실인지 말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는 대충 거기 서 있었다"는 것은 콰인의 "일급 개념 체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신칸트주의자로서 우리가 "세계에 대한 도덕적 이미지와 세계의 과학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대신에, 윤리적 단어 역시 우리 언어에서 사용되는 단어라고 간단히 말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가 우리에게 친숙한 철학적 관점을 보게끔 한다는 사실은 철학적인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이따금 미국식 초월주의의 한 측면을 상기시킨다. 소로가 "모든 곳에 단단한 바닥이 존재한다."라고 표현했듯이, (물론 그것은 무서울만큼의 진흙 아래에 놓여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소로에 걸맞는 구절에서 자신의 목적을 "우리의 말을 그들의 언어의 집으로 되돌리는 것"이라 묘사한다. 비트겐슈타인과 칸트 사이의 심오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비트겐슈타인같은 철학자의 실천에 대해 비판적일지라도, 칸트와 같은 위대한 형이상학자는 단지 위대하거나 심오한 실수를 저지른 사람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렵게 얻은 진정한 통찰은 칸트에게 분명히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이 배운 그런 통찰은 칸트라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보지 못했을 것이었다.

실천 이성의 우위

그렇지만 칸트의 사유에는 다른 면도 존재한다. 우리가 실천 이성의 우위라 부르는 그 측면은 실용주의와 바로 맞닿아있다. 칸트 연구가들에게 칸트의 많은 부분이 정치적 응용 뿐 아니라 직접적인 정치적 영감을 주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칸트가 ⌜실천이성비판⌟과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에서 사용하는 "자기입법"의 중심 개념은 루소에게서 직접 영감을 받았고, 사회가 자기입법을 통한 시민의 자유로운 연합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당시에 혁명적인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나는 실천 이성의 우위에 대한 다른 측면을 언급하고 싶다. 그리고 이것은 (⌜순수이성비판⌟의 방법론 부분의 원칙에서) 이론적 이해나 귀납적 일반화 자체만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의 통일된 법칙 체계 (이를 통해 칸트가 우리가 물리, 생물학 등을 가정하는 궁극적인 과학의 이상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뉴턴 물리학에 도달하지 못했을거라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로서 과학의 개념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을 거라는 칸트의 유명한 주장이다. 과학적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자연의 규범적 개념이 필요하다. 즉, 당신에게는 개별 규칙이 아니라 규칙 체계에 의해 지배되는 자연이라는 관점이 필요하다. 칸트는 그런 관점이 이론적 이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순수 실천 이성에서 온다고 보았다. 칸트는 이론과학의 성취를 이끄는 규범들은 탐구의 완전성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에서 파생된다고 말한다. (이건 내가 ⌜이성, 진실, 역사⌟에서 주장해 온 것이다. 즉, 인지적 이상은 인간의 번영에 대한 생각의 일부로 간주될때만 타당하다.)

칸트에게 실천 이성의 우위에 대한 생각은 철학 그 자체로 확장된다. 칸트는 우리가 참인 가치 판단의 존재에 대한 선험적 증명을 찾아다니면서 세계의 도덕적 이미지를 구성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유명한 칸트식 전략은 그 반대다.(그러나 오늘날 버나드 윌리엄스와 같은 철학자들은 칸트를 비판할 때 종종 이를 잊어버린다). 전략은 다음과 같다. 매일 가치판단을 하는 존재로서, 나는 당연히 참인 가치판단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전념한다. 예를 들어 참인 가치판단이 존재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어떤 세계에 진정한 가치판단이 있을 수 있는가?

칸트의 전략을 이런 방식에 둔다면, 존 듀이의 글에서 선험적이진 않지만 같은 전략을 찾을 수 있다. 나는 ("순수한" 실천 이성은 아니지만) 실천 이성의 우위에 대한 생각이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지금 너무나도 중요하다. 빈 학파 시기에 반-형이상학자가 되는 것은 아주 쉬워 보였다. 반-형이상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관찰에 의해 예측이나 통제가 가능한 것으로 지식을 제한하면 되었다. 그리고 모두가 "관찰 가능한"게 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형이상학자' 혹은 '경험주의자'였다. 문제는 내가 처음 철학에 뛰어들었을때, 에른스트 마흐와 그 추종자들이 단지 하나의 형이상학을 다른 형이상학으로 갈아끼운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데 있었다. 그들은 전자(electron)가 "실제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논쟁을 당연히 사이비-질문이라 보았고, 단순히 이런저러한 방식으로 이동하는 전자를 관찰가능하다는 사실이 전자의 존재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단지 초월적 실재론을 물리치기 위해 현상주의를 주장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 채 말이다.

전자가 전선을 통해 흐른다고 말할 때 내가 관찰가능한 대상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전자가 그 자체로 사물이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실증주의가 그 자체로 하나의 형이상학이란 깨달음은 가능세계 이론같은 과잉된 형이상학 이론을 이끌었다. '수가 실재로 존재하는가'같은 중세시대에도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던 질문들이 오늘날 책과 논문의 주제이다. 지난 5년동안 이런 질문을 다루는 책들이 적어도 2권 이상 나왔다. 그러나 이런 류의 철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는 어렵다. 성인 남녀가 숫자 3이 "실제로 존재하는가"에 대해 논쟁하는 광경은 터무니없다. 존 듀이가 철학의 주요 과제는 이런 종류의 형이상학, 즉 "모든 것의 이론"을 구성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문화에 대한 비판이어야 한다고 제안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지나친 형이상학을 담고 있음에도 칸트의 철학은 문화비판, 즉 사회정의가 미덕에 비례한다는 공식으로 나아가는 계몽된 사회를 위한 계획으로 의도되었다.

이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도 도덕적 목적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특히 그의 철학은 이론 철학에 대한 혐오에서 생겨난 일종의 사심 없는 치유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역시 도덕적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칸트의 철학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주제, 즉 실천 이성의 우위를 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고 주장하면서 마무리 짓고 싶다. 비록 특징적으로 축소주의적인 양식이긴 하지만 말이다.

참조

Hilary Putnam, Pragmatism-An Open Question, Blackwell, 1995, 39-45.

  1. 가독성을 위해 원문의 맥락에 따라 문단을 구분하고 글의 목적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괄호로 문단을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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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은 실용주의자인가? : 힐러리 퍼트남, 「실용주의」 (1) 요약문

비트겐슈타인은 실용주의자인가? : 힐러리 퍼트남, 「실용주의」 (2) 요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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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For Wittgenstein, the negation of a pseudo-proposition is a pseudo-proposition; the negation of nonsense is nonsense." (p. 39.): 이 부분은 퍼트남이 핵심을 정말 잘 잡았다고 생각해요. 저도 항상 비트겐슈타인을 설명할 때 강조하는 부분이거든요. 형이상학적 실재론이 무의미하다면, 형이상학적 반-실재론 역시도 무의미하다고요.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서 보면, 해소되어야 하는 건 애초에 실재론/반-실재론이라는 이분법 자체죠. 그렇지 않고서 실재론을 극복하기 위해 반-실재론을 다시 도입하는 건 결국 자신이 비판하는 논리에 그대로 빠지게 되는 꼴이 되어버리죠.

(2) "'We can't describe reality as it is in itself'. This great Rortian thesis is the illusion of a truth, the illusion of a cosmic discovery." (pp. 39-40.): 저는 퍼트남이 이 부분에서 로티를 오해했다고 봐요. 로티는 결코 "우리는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없어요."라고 주장한 적이 없거든요. 오히려 로티는 더밋의 반-실재론과 자신의 실용주의를 엄격하게 구분하죠. 또 실재의 문제와 관련해서 자신이 퍼트남과 같은 진영에 있다고도 수 차례 강조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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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에 대한 반론 : 로티는 정말 "우리는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없어요."라고 주장한 적이 없는가?

저도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1)의 논제에 백번 동감하면서도, (2)에 대해선 퍼트남이 "우리는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없어요."를 로티적(?)인 명제로 바라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실용주의의 결과⌟에서 로티는 직관적 실재론자들과 실용주의자의 관계에 대해

"But how do we know whether to say, "So much the worse for the solubility of philosophical problems, for the reach of language, for our 'verificationist' impulses," or whether to say, "So much the worse for the Philosophical ideas which have led us to such an impasse"?" ( Rorty, Richard, Introduction to Consequences of Pragmatism ,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2, xxxiv)

즉, 우리가 어떻게 실용주의자의 검증주의적 태도와 교착 상태에 놓인 질문으로 우리를 이끄는 직관적 실재론자의 태도중, 어느 것이 더 나쁜가를 알 수 있냐고 반문합니다. 여기까지는 선생님께서 보시는 로티의 입장이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뒤로 가보면

The intuitive realist thinks that there is such a thing as Philosophical truth because he thinks that, deep down beneath all the texts, there is something which is not just one more text but that to which various texts are trying to be "adequate." The pragmatist does not think that there is anything like that. He does not even think that there is anything isolable as "the purposes which we construct vocabularies and cultures to fulfill" against which to test vocabularies and cultures. But he does think that in the process of playing vocabularies and cultures off against each other, we produce new and better ways of talking and acting-not better by reference to a previously known standard, but just better in the sense that they come to seem clearly better than their predecessors. (ibid, xxxvii)

직관적 실재론자들은 모든 텍스트에 하나의 텍스트가 아닌 다양한 텍스트가 "적절"하게끔 하는 뭔가, 즉 철학적 진실과 같은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용주의자는 철학적 진실같은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심지어 어휘와 문화를 시험하기 위해 "우리가 완성해야 할 어휘와 문화를 구성하는 목적"으로 고립될 수 있는 어떤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고 로티는 말하죠.

여기서 로티(실용주의자)와 직관적 실재론자의 입장을 본문의 요약을 사용해 재구성하면, 직관적 실재론자는 "우리는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데 성공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고, 로티는 (퍼트남이 말했듯이) "우리는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없어요"라고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둘이 말하는 실재는 '어떤'실재론이긴 하지만요. 그렇기 때문에

라는 퍼트남의 지적은 너무나 합당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로티는 정말 말해버리니까요. "왜 직관적 실재론자들이 말하는 철학적 진실이 없다고 생각해?"라고 물으면 로티는 당당하게 응수하지 않을까 싶어요. ⌜실용주의의 결과⌟에서 로티가 그랬던 것 처럼요. 로티의 '검증주의적'인 태도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관찰가능한 대상"을 연상하게끔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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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말씀하신 내용이 로티에 대한 지나친 비난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인용하신 부분만으로 로티가 “우리는 실재를 그려낼 수 없다.”라고 주장한 것으로 비판받아야 한다면, 퍼트남도 동일하게 그런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퍼트남도 로티와 동일하게 ‘마술적 지시 이론’을 거부하고, 그런 지시 이론이 상정하고 있는 ‘형이상학적 실재’ 혹은 칸트적 ‘사물 자체’를 거부하니까요. (실제로, 퍼트남은 이 점 때문에 분석적 형이상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종종 반실재론자로 오해받기도 합니다. 데빗 같은 사람은 퍼트남이 실재론에서 반실재론으로 변절을 했다는 표현까지 사용하죠.) 오히려 로티와 퍼트남의 차이는 실재의 문제가 아니라 합리성의 문제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퍼트남은 실용주의를 주장하면서도 여전히 각 사람의 문화적 지평을 초월하는 객관적 합리성이 가능하다고 보는 반면, 로티는 그러한 합리성조차 결국 허구라고 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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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제시하신 구절이 로티의 입장을 "우리는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없다"로 요약할 만한 논거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해당 구절에서 로티가 하고 있는 주장은, 문화적 전통들과 독립적이면서 실재를 적합하게 포착하는 궁극적인 철학적 진리 같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런 식의 (대문자) 철학적 진리라는 관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철학적 진리가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고 해서, 로티가 일상에서 잘 작동해 왔던 상식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로티는

세계의 대부분은 그것에 관해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든 간에 거의 그대로이다. (바꿔 말해서 우리의 신념은 매우 제한된 인과적 효력을 갖고 있다.) (Rorty, Richard, 『실용주의의 결과』, 김동식 역, 민음사, 1996, 43)

같은 상식적인 주장을 얼마든지 인정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로티가 '실재론자'여서가 아니라, 이 믿음이 이제껏 의심할 여지 없이 실용적으로 잘 작동해왔기 때문입니다.

실재론을 극복하기 위해 반실재론을 주장하기보다 실재론-반실재론의 구도 설정 자체를 거부해야 한다는 퍼트남과 비트겐슈타인의 이야기는 이미 인용하신 『실용주의의 결과』에서 로티가 대놓고 하고 있는 주장입니다.

실용주의자는 [...] 덤밋처럼 진위에 대한 '양가성'의 문제에 휘말려서도 안 된다. (Rorty, 1996: 46)

만일 실용주의자가 오직 관념이나 문장에 대해서만 존재론적 관여를 하고, 진술을 참이게 해주는 어떠한 것도 '저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준관념론적 형이상학자로 파악된다면, 그 실용주의자는 덤밋의 구도에 딱 들어맞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실용주의자가 본 자기 모습은 물론 아니다. 그는 스스로 '어떤' 종류의 형이상학자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저 바깥에 ...이 존재한다'는 관념을 ('공간상의 어떤 위치'를 의미하는 문자 그대로 '저 바깥'이라는 의미를 제외하고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Rorty, 1996: 47-48)

즉 로티에 의하면 "우리는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있다"는 실재론적 논제를 부정하는 것은 그대로 "양가성의 문제"에 빠지는 것이며, 반면 실용주의자는 이런 형이상학적인 문제 설정으로부터 애초에 벗어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있냐 없냐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로티는 "그려낼 수 없다"고 말하기보다는 그러한 문제 설정 자체가 부당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상의 이유에서, 저는 로티의 입장을 "우리는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없다"라고 요약하는 이해에 로티가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Ps. 원문의 37쪽을 봤다가 완전히 다른 내용이 나와서 원문을 찾는 데 시간을 좀 썼네요. 보통 서양권 문헌에서 서문 및 서론의 페이지는 보통 본문 페이지와 구별하기 위해 아라비아 숫자가 아니라 로마숫자로 표기하기 때문에, 인용도 그대로 해주시는 게 좋습니다.

Rorty, Richard, Introduction to Consequences of Pragmatism,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2, xxxvii.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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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 : 로티가 "우리는 실재를 그려낼 수 없다."라고 주장한 것으로 비판받아야 한다면, 퍼트남도 동일하게 그런 비판을 받아야 하는가?

퍼트남이 형이상학적 실재를 거부한다는 진술은 좀 더 명료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건 퍼트남이 이론철학을 '증명'하는 시도로서 형이상학적 실재를 도입하는 이론들을 거부한다는 진술이지, 각각이 가진 어떤 믿음 자체를 퍼트남이 거부한다는 진술로 해석되어서는 안됩니다. 제가 볼때 퍼트남은 앞서 본문에서 살펴본 비트겐슈타인의 이론화불가능성 전략의 의미를 이해할 뿐더러, 자신의 철학적 입장에도 이 전략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자체를 거부하는"입장으로서 로티와 함께해도, "물자체는 없다"고 말하는 로티에게

because it introduces the peculiar philosophical "can't"

"물자체가 없다고 말하려면 우리는 이상한 철학적 '없다'를 도입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숫자의 실재성, 소여의 실재성같은 생각들은 우리의 이론 자체가 인과적 위상을 가지게 하려는 목표에서 출발합니다. 만약 '3'이라는 표현이 대언(de dicto)적인게 아니라 대물(de re)적이라면 우리는 '3'의 존재성을 증명할 수 있게 됩니다. 이건 데닛의 '감각질(qualia)'이나 촘스키의 '언어 습득 장치(LAD: Language acquisition device)'같은 아이디어와도 같은 입장에 서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존재론적 개입을 통해 이론을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사이비 문제를 발생시킨다는 점을 이해할때, 그리고 그런 행동들이 부질없다는 사실에 동의할때 우리는 그런 행동을 멈출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보편철학을 위한 이론을 비트겐슈타인은 축소(deflated)한다고 퍼트남은 지적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숫자 3은 정말로 실재하는가?"라는 질문 자체를 멈추길 바랍니다. 그리고 저 또한 생각에 동의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앞서 연재된 글들을 살펴보았을때 로티에 대한 퍼트남의 평가는

고 퍼트남이 로티를 평가할 이유를 제공하는 것이고,

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로티와 퍼트남, 비트겐슈타인은 모두 "우리가 세계를 있는 그 자체로 서술할 수 없다"는 논제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로티는 그러한 논제를 주장하려고 하고, 퍼트남과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주장, 이론을 거부합니다. (없다고 주장하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론화불가능성'이라는 지점에 섰을때, 로티는 다시 칸트의 어조로 돌아가고 있음을 퍼트남은 지적합니다. 퍼트남과 비트겐슈타인은 (로티도 마찬가지여야겠지만) 논제의 주장이 타당성을 가지기 위해 도입하는 괴상한 실재들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로티가 "우리는 실재를 그려낼 수 없다."라고 주장한 것으로 비판받아야 한다면, 퍼트남도 동일하게 그런 비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퍼트남은 그런 주장들을 그만둬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주장들이 "할 수 없다"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로티가 그렇게 말하길 바랍니다. 퍼트남도 로티가 그렇게 말하길 바랄 것 같습니다. 로티의 주장이

하는 지점에서 멈춘다면 로티와 퍼트남,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서 충돌하는 지점은 사라지고 로티에 대한 퍼트남의 비판은 불필요해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로티는

라고 말해버리니 이러한 비판을 수행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판에 대한 근거는 YOUN님과의 토론을 포함해서, 위에 제기한 반론들에 제시되어 있으므로 다시 반복하진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s. 오해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외국문헌에 대한 양식에 무지했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slight_sm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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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위에서 했던 이야기는, 위에서 가지고 오셨고 방금 또 가지고 오신 구절이 로티를 그렇게 비판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었습니다. 로티가 단 하나의 철학적 진리라는 아이디어를 파기한다는 점으로부터 로티가 반실재론자라는 결론이 따라 나오지 않습니다. 게다가 로티는 형다님이 "그렇게 말하길 바라"는 그 주장을 제가 바로 위에 전거로 제시한 구절들에서 노골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 재반론에 대해 타당한 대응을 하시려면, 로티가 반실재론적인 입장을 commit한다고 말할 만한 전거를 가져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아까 제시하신 그 구절은 그런 전거가 아닙니다.)

gnuyhnow님이 퍼트남을 옹호하신 바로 그 논리가 로티를 옹호하기 위해 그대로 다시 쓰일 수 있죠. 솔직히, 저는 로티의 대변자도 아니고, 퍼트남을 특별히 싫어하는 입장도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로 gnuyhnow님을 굳이 집요하게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로티/퍼트남의 관계가 상대주의/합리주의나 반실재론/실재론처럼 너무 단순하게 도식화된 나머지, 로티의 중요한 통찰은 간과되고 퍼트남의 결정적인 착각들은 무비판적으로 옹호되는 경우를 자주 접해서, 몇 가지 요점만 분명하게 하려 합니다.

(1) 상대주의와 반실재론에 대한 로티의 수많은 비판을 무시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로티는 정말 수많은 글들에서 상대주의와 반실재론을 비판합니다. 거의 '레퍼토리'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로티의 글에서는 로티 자신이 옹호하는 실용주의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상대주의나 반실재론과 어떤 점에서 다른지 구구절절하게 설명되어 있죠. 지금 이 댓글에서도 언급된 『실용주의의 결과』 서문에서부터, 퍼트남과의 논쟁에서 쓰인 “Hilary Putnam and the Relativist Menace”나 “Solidarity or Objectivity?” 등은 물론이고, (약간 과장하자면) 로티의 모든 글에서 이 주제와 관련된 논의가 반복적으로 나온다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 요지는 gnuyhnow님이 퍼트남을 옹호하시면서

라고 말씀하신 내용과 동일하죠. 여기서 '퍼트남'이라고 쓰여 있는 부분을 '로티'라고 바꾸면 거의 정확히 로티가 평소에 주장하는 내용이 됩니다. 형이상학적 실재에 대한 퍼트남의 비판은 호의적으로 해석하시면서 로티의 비판은 상대주의나 반실재론인 것처럼 규정하시는 것은 공평하지 않은 거죠.

특정 철학적 입장에 대한 해석이란 기본적으로 자비의 원칙(principle of charity)을 따라야 합니다. 상대편이 주장하고 있는 내용을 최대한 논리적으로 강한 형태로 만들어준 다음, 그 강한 입장을 공격해야 비판의 의의가 있는 거죠. 단순히 로티에게서 "The pragmatist does not think that there is anything like that [reality]."라는 구절을 떼어온 다음 로티를 반실재론자로 규정하고서 비판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사실 그다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규정은 로티가 자신의 입장이 상대주의나 반실재론이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제시했던 수많은 설명들을 모두 무시하고서, 단지 로티의 어구를 통해 (로티 본인은 실제로 어떤 입장이든지 간에) 반실재론을 가리켜보이는 걸 목표로 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만약 gnuyhnow님에게 로티가 단지 반실재론을 겨냥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사학적 명칭' 정도의 의미만을 지닌 철학자라면, (그래서 gnuyhnow님에게는 로티의 입장에 대한 상세한 주석 자체가 큰 흥미거리가 아니라면,) 저는 굳이 gnuyhnow님의 로티 이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희는 철학을 하는 것이지 문헌학을 하는 건 아니니까요. 다만, 적어도 로티를 그렇게 반실재론자로 규정해버리시면 로티의 실용주의에서 정말 많은 부분들을 놓치게 된다는 점은 염두에 두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로티를 전혀 반실재론자로 생각하지 않는 다른 입장들과 소통하실 때 굉장히 장애가 많을 수 있다는 점도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이게 바로 데빗 같은 형이상학자들이 퍼트남을 읽고서도 퍼트남에게서 아무런 중요한 통찰도 얻어가지 못한 채 그를 '반실재론자'라고 비난하는 이유죠.)

(2) 퍼트남은 비트겐슈타인의 대변인인가?

gnuyhnow님은

로티 ↔︎ 후기 비트겐슈타인(=퍼트남)

이라는 구도를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퍼트남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조차도 종종 상대주의로 몰아가곤 하는 철학자입니다. 특히, 퍼트남은 수학이나 논리학에 대한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 비판적이죠. (퍼트남의 입장은 시기에 따라 많이 변하는 데다, 또 제가 퍼트남과 비트겐슈타인의 관계와 관련된 모든 논문을 다 읽어본 것도 아니긴 하지만, 적어도 "Analyticity and Apriority: Beyond Wittgenstein and Quine"라는 논문이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유명합니다.) 퍼트남은 이성의 '초월적' 측면을 옹호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논리학이나 수학조차 사실 인간의 '삶의 형식'에 의존한다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납득할 수가 없던 거죠. 그래서 저는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퍼트남의 이런 비판이 바로

라는 입장에 대한 퍼트남의 비판적 태도에서 나왔다고 봅니다. 언어게임들을 넘어서는 객관성이나 합리성이 있다고 상정하려는 퍼트남의 태도 때문에, 퍼트남은 그런 객관성과 합리성을 거부하는 로티에게 비판적이고, 심지어는 자신이 근거로 삼고 있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에게까지 비판적인 거죠. (물론, 퍼트남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저런 주장을 비트겐슈타인을 통해 옹호하고 싶어하는 것 같지만요.)

더 나아가, 퍼트남은 오히려 이 점에서 (후기 비트겐슈타인보다는) 50년대 이후 분석철학의 대표적인 형이상학자이자 본질주의자인 크립키와 더 가까운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퍼트남이 크립키와 함께 '직접적 지시 이론'을 옹호했다는 사실과 '본질' 개념을 우리 시대 형이상학에 되돌려놓았다는 사실은 굉장히 유명하죠. 물론, 이언 해킹이나 코라 다이아몬드 같은 연구자들은 크립키의 본질주의와 퍼트남의 본질주의 사이의 차이를 다시 구분하고자 하지만, 일반적인 분석철학자들은 크립키와 퍼트남을 하나의 진영 안에 있는 철학자들로 보죠. (당연히, 크립키는 명시적으로 자신의 직접적 지시 이론으로 후기 비트겐슈타인을 공격한 걸로도 유명하고요.)

그래서 저는 퍼트남을 마치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대변인인 것처럼 철학적 진영을 그리시는 것이 그다지 적절하지는 않다고 봅니다. 물론, 퍼트남은 다른 많은 경우에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통찰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퍼트남이 후기 비트겐슈타인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철학자는 결코 아닙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논의를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합리성과 객관성의 근거를 찾고자 하는 인물에 가깝죠. 그래서 바로 이 점 때문에 로티와 부딪히는 거고 로티를 '상대주의자'로 규정하는 거죠.

  • 첨언해서, 저는 퍼트남의 철학자 독해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퍼트남은 로티뿐만 아니라 자기 동시대의 다른 철학자들도 다소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아서요. 가령, 저는 퍼트남이 『존재론 없는 윤리학』에서 콰인의 '존재론적 개입' 개념을 잘못 설명했다고 봅니다. 또 퍼트남이 맥도웰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오해했다고 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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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에 대해서

모르겠네요. 사실 저는

라는 커뮤니티의 목표에 앞서 저희가 토론한 내용이 부합했다고, 즉 양자간의 입장 차이가 분명해졌다고 판단해서 더이상 답변을 달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비판이 "로티에 대한 지나친 비난"이라고 생각하시면서 "특정 철학적 입장에 대한 해석이란 기본적으로 자비의 원칙(principle of charity)을 따라야"한다고 말씀하시는 부분은 이해하기 어렵네요. 선생님께서 어떻게 보시는지는 몰라도, 저는 제가 논의한 지점에서 로티의 입장을 최대한 "자비의 원칙"에 따라 "최대한 논리적으로 강한 형태"로 만들었으니까요. 심지어 제가 로티의 입장을 자의적으로 재구성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 로티가 직접 드러낸 주장을 인용했음에도, "저희는 철학을 하는 것이지 문헌학을 하는 건 아니니까요."라는 선생님의 비난을 저는 정당한 비판으로 바라보고 응수해야 할까요?

"논리적으로"라는 표어로 충실하게 로티의 입장을 전개하면, 로티의 입장은 '비일관적'일 뿐더러 수사학으로 어물쩡 넘어가는 태도를 보인다고 평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줄로 정리해 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비일관적'이라는 평가 단 한줄만으로 로티가 가진 입장과 퍼트남, 비트겐슈타인의 차이를 없애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만약 YOUN님께서 제 입장에 대한 "자비의 원칙"을 따르셨다면, 제 입장이 아주 단순하고 영양가없는 논의로 정리될 수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 않으실까 합니다. 정리된 입장에 대해 저는 절대 동의할 수 없겠지만요.

(2)에 대해서

⌜비트겐슈타인은 실용주의자인가?⌟라는 챕터에서 퍼트남이 중요하게 다루고,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서 중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객관성이나 합리성이 있다고 상정한" 것과 "객관성이나 합리성이 있다고 상정하려는" 것을 구분해서 바라보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퍼트남이 적어도 이 글에서 한 명의 주석가로서 충실히 자신의 해석을 진행하고 있다고, 적어도 이 글에서 퍼트남은 비트겐슈타인의 충실한 대변가라고 저는 평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퍼트남과 로티가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위의 구분에 따라 도출되는 결론이 다른 것이지(이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저는 보고, 비트겐슈타인의 서술은 이 구분을 가로지른다고 생각합니다), 네이글의 "박쥐 논변"과 퍼트남의 "대충 서있는 사람의 사진" 예시의 함의가 (아주 우연하긴 하지만, 결과적인 측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저는 로티가 이러한 노력들을 부질없다고 치부해버리는게 제가 로티의 실용주의에서 정말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되는 만큼, 로티가 철학의 핵심적인 부분을 '버리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이 하이데거의 존재 탐구에 대해 (그것의 무의미함에도 불구하고) 공감을 표명했던 것과 다르게, "형이상학적인 헛소리"라고 생각하는 로티의 입장에 결코 동의할 수 없게 되는 거구요. 이런 차이를 전제했을때, 퍼트남의 방향과 로티의 방향에서 각각 실용주의가 따라나오는 과정은 철저하게 구분해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저도 아직 퍼트남의 철학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기 때문에 퍼트남이 "상정"한 이론이 있다면 저는 비판적으로 평가할 생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께서 바라보신 구도는 정확하시지만, 저 역시 본문에서 보이는 퍼트남의 입장을 벗어나서 퍼트남의 철학 전체에 대한 질문으로 "퍼트남은 비트겐슈타인의 대변인인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알아봐야 할 것 같네요.

  • 첨언에 대해, 적어도 이 글에서 퍼트남은 비트겐슈타인의 핵심을 잘 짚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퍼트남의 왜곡된 해석에 대한 비평을 볼 수 있다면 좋겠네요.

이제 제 입장을 어느정도 명료히 밝힌 것 같다고 생각해, 여기에서 입장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답글은 더이상 달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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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에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gnuyhnow님에 대한 어떤한 비판이나 비난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즉, gnuyhnow님의 로티 해석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로티의 구절들을 하나하나 인용하거나 주석하는 작업을 하지는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저에게는 이런 작업으로 논쟁하는 것이 너무나 소모적이라고 보입니다. 저는 철학자에 대한 해석에 언제나 의견대립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때로는 설명의 편의를 위해 특정 철학자를 단순화해서 왜곡하는 것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합니다. (제 자신이 종종 칸트를 인용할 때 고의적으로 그런 왜곡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가령, 칸트에 대한 두 세계 해석과 두 관점 해석 따위를 하나하나 비교하게 되면, 결국 칸트를 도저히 설명할 수조차 없어지니까요.) 그래서 저에게는 특정 철학자의 진의가 무엇인지, 특정 텍스트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따위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각자 자신이 이해하는 방식대로 철학자를 받아들이면 될 뿐이라는 게 제 입장입니다. 저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굳이 gnuyhnow님의 로티 이해를 적극적으로 비난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gnuyhnow님과 같은 로티 이해가 (비록 저에게는 문헌학적으로 전혀 납득이 되지 않더라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데빗의 반실재론적 퍼트남 이해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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