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자세한 비트겐슈타인과 칸트
이제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칸트 철학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가겠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비트겐슈타인과 칸트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고싶다. 앞서 언급했듯이, 비트겐슈타인은 물자체에 대한 관념과 선험적 종합명제, 범주표를 포기했다. 누군가는 비트겐슈타인은 "자연주의"적인 칸트주의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윌리엄 제임스가 이야기 하듯이,) 하지만 여기서 "자연주의"가 의미하는 건 뭘까? "자연주의"가 환원적 물리주의와 종종 연결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자연주의"는 위험한 표현이다. 그렇지만 비트겐슈타인은 환원주의자가 아니므로, "자연주의"는 축소주의 라는 의미에서 가장 적절할 것이다. 우리가 세계를 있는 그 자체로 서술할 수 없다는 표현은 칸트의 관점을 보여주기에 가장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건 로티가 비트겐슈타인과 동의한 지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이론화불가능성 전략에 충실하게) 여기에 흥미로운 이론이 없다는 점을 우리에게 설득시키려 애쓴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사이비-명제를 부정하는 명제는 사이비-명제다. 무의미한 명제를 부정하는 명제 역시 무의미한 명제다. 우리가 만약 "우린 가끔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데 성공해요"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는 절대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데 성공할 수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 역시 똑같이 이해할 수 없다는걸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없어요"는 심지어 더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상한 철학적 "할 수 없다"를 도입하기 때문이다) 이 굉장한 로티주의 논제는 사실의 환영이고, 우주 발견의 환영이다.
사실 철학자들이 우리가 무언가 할 수 없다고 말할 때, 무언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 전형적으로 그들이 우리에게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특징이라고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면, 물리학자가 "당신은 무한동력을 만들 수 없어요" 라고 말하거나 건널 수 없는 벽을 말하는 것처럼, 철학자가 우리에게 주는 무력감은 사실 신기루거나 더 터무니없는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우리는 언어를 배우고 바꾸고 발명할 수 있고, 언어 안에서 실재를 그려낸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맞아요, 근데 그건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리는게 아녜요."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의 유명한 마지막 줄에서, 말이 안되는 것을 우리는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의 희생양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표현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확히 말하는 것이다. (제임스 코넌트는 그게 의도적인 모순이라고 주장했다. ⌜논고⌟는 내가 지금 말하는 요점을 만들기위해 자신을 심연으로 집어넣는다.)
요약하면, 우리는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없다고 말하면서 로티가 품고있는 칸트의 어조와 그의 독자가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있다"거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없다"고 말하고 싶어하지 않도록 하려는 비트겐슈타인의 어조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일급 개념 체계"(과학적 이미지)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이해가능한 진실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한 아주 사소한 예시에 의해 축소된다. 예를 들어 내가 누군가에게 "여기에 대충 서 있어"라고 지시하고, 나중에 "나는 그에게 대충 서 있으라고 했고, 그리고 나서 그의 사진을 찍었어"라고 말하면서 일어난 일을 설명한다면, 나는 확실히 "뭐가 사실인지 말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는 대충 거기 서 있었다"는 것은 콰인의 "일급 개념 체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신칸트주의자로서 우리가 "세계에 대한 도덕적 이미지와 세계의 과학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대신에, 윤리적 단어 역시 우리 언어에서 사용되는 단어라고 간단히 말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가 우리에게 친숙한 철학적 관점을 보게끔 한다는 사실은 철학적인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이따금 미국식 초월주의의 한 측면을 상기시킨다. 소로가 "모든 곳에 단단한 바닥이 존재한다."라고 표현했듯이, (물론 그것은 무서울만큼의 진흙 아래에 놓여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소로에 걸맞는 구절에서 자신의 목적을 "우리의 말을 그들의 언어의 집으로 되돌리는 것"이라 묘사한다. 비트겐슈타인과 칸트 사이의 심오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비트겐슈타인같은 철학자의 실천에 대해 비판적일지라도, 칸트와 같은 위대한 형이상학자는 단지 위대하거나 심오한 실수를 저지른 사람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렵게 얻은 진정한 통찰은 칸트에게 분명히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이 배운 그런 통찰은 칸트라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보지 못했을 것이었다.
실천 이성의 우위
그렇지만 칸트의 사유에는 다른 면도 존재한다. 우리가 실천 이성의 우위라 부르는 그 측면은 실용주의와 바로 맞닿아있다. 칸트 연구가들에게 칸트의 많은 부분이 정치적 응용 뿐 아니라 직접적인 정치적 영감을 주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칸트가 ⌜실천이성비판⌟과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에서 사용하는 "자기입법"의 중심 개념은 루소에게서 직접 영감을 받았고, 사회가 자기입법을 통한 시민의 자유로운 연합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당시에 혁명적인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나는 실천 이성의 우위에 대한 다른 측면을 언급하고 싶다. 그리고 이것은 (⌜순수이성비판⌟의 방법론 부분의 원칙에서) 이론적 이해나 귀납적 일반화 자체만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의 통일된 법칙 체계 (이를 통해 칸트가 우리가 물리, 생물학 등을 가정하는 궁극적인 과학의 이상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뉴턴 물리학에 도달하지 못했을거라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로서 과학의 개념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을 거라는 칸트의 유명한 주장이다. 과학적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자연의 규범적 개념이 필요하다. 즉, 당신에게는 개별 규칙이 아니라 규칙 체계에 의해 지배되는 자연이라는 관점이 필요하다. 칸트는 그런 관점이 이론적 이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순수 실천 이성에서 온다고 보았다. 칸트는 이론과학의 성취를 이끄는 규범들은 탐구의 완전성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에서 파생된다고 말한다. (이건 내가 ⌜이성, 진실, 역사⌟에서 주장해 온 것이다. 즉, 인지적 이상은 인간의 번영에 대한 생각의 일부로 간주될때만 타당하다.)
칸트에게 실천 이성의 우위에 대한 생각은 철학 그 자체로 확장된다. 칸트는 우리가 참인 가치 판단의 존재에 대한 선험적 증명을 찾아다니면서 세계의 도덕적 이미지를 구성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유명한 칸트식 전략은 그 반대다.(그러나 오늘날 버나드 윌리엄스와 같은 철학자들은 칸트를 비판할 때 종종 이를 잊어버린다). 전략은 다음과 같다. 매일 가치판단을 하는 존재로서, 나는 당연히 참인 가치판단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전념한다. 예를 들어 참인 가치판단이 존재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어떤 세계에 진정한 가치판단이 있을 수 있는가?
칸트의 전략을 이런 방식에 둔다면, 존 듀이의 글에서 선험적이진 않지만 같은 전략을 찾을 수 있다. 나는 ("순수한" 실천 이성은 아니지만) 실천 이성의 우위에 대한 생각이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지금 너무나도 중요하다. 빈 학파 시기에 반-형이상학자가 되는 것은 아주 쉬워 보였다. 반-형이상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관찰에 의해 예측이나 통제가 가능한 것으로 지식을 제한하면 되었다. 그리고 모두가 "관찰 가능한"게 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형이상학자' 혹은 '경험주의자'였다. 문제는 내가 처음 철학에 뛰어들었을때, 에른스트 마흐와 그 추종자들이 단지 하나의 형이상학을 다른 형이상학으로 갈아끼운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데 있었다. 그들은 전자(electron)가 "실제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논쟁을 당연히 사이비-질문이라 보았고, 단순히 이런저러한 방식으로 이동하는 전자를 관찰가능하다는 사실이 전자의 존재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단지 초월적 실재론을 물리치기 위해 현상주의를 주장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 채 말이다.
전자가 전선을 통해 흐른다고 말할 때 내가 관찰가능한 대상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전자가 그 자체로 사물이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실증주의가 그 자체로 하나의 형이상학이란 깨달음은 가능세계 이론같은 과잉된 형이상학 이론을 이끌었다. '수가 실재로 존재하는가'같은 중세시대에도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던 질문들이 오늘날 책과 논문의 주제이다. 지난 5년동안 이런 질문을 다루는 책들이 적어도 2권 이상 나왔다. 그러나 이런 류의 철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는 어렵다. 성인 남녀가 숫자 3이 "실제로 존재하는가"에 대해 논쟁하는 광경은 터무니없다. 존 듀이가 철학의 주요 과제는 이런 종류의 형이상학, 즉 "모든 것의 이론"을 구성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문화에 대한 비판이어야 한다고 제안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지나친 형이상학을 담고 있음에도 칸트의 철학은 문화비판, 즉 사회정의가 미덕에 비례한다는 공식으로 나아가는 계몽된 사회를 위한 계획으로 의도되었다.
이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도 도덕적 목적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특히 그의 철학은 이론 철학에 대한 혐오에서 생겨난 일종의 사심 없는 치유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역시 도덕적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칸트의 철학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주제, 즉 실천 이성의 우위를 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고 주장하면서 마무리 짓고 싶다. 비록 특징적으로 축소주의적인 양식이긴 하지만 말이다.
참조
Hilary Putnam, Pragmatism-An Open Question, Blackwell, 1995, 39-45.
- 가독성을 위해 원문의 맥락에 따라 문단을 구분하고 글의 목적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괄호로 문단을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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