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론 : 로티가 "우리는 실재를 그려낼 수 없다."라고 주장한 것으로 비판받아야 한다면, 퍼트남도 동일하게 그런 비판을 받아야 하는가?
퍼트남이 형이상학적 실재를 거부한다는 진술은 좀 더 명료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건 퍼트남이 이론철학을 '증명'하는 시도로서 형이상학적 실재를 도입하는 이론들을 거부한다는 진술이지, 각각이 가진 어떤 믿음 자체를 퍼트남이 거부한다는 진술로 해석되어서는 안됩니다. 제가 볼때 퍼트남은 앞서 본문에서 살펴본 비트겐슈타인의 이론화불가능성 전략의 의미를 이해할 뿐더러, 자신의 철학적 입장에도 이 전략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자체를 거부하는"입장으로서 로티와 함께해도, "물자체는 없다"고 말하는 로티에게
because it introduces the peculiar philosophical "can't"
"물자체가 없다고 말하려면 우리는 이상한 철학적 '없다'를 도입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숫자의 실재성, 소여의 실재성같은 생각들은 우리의 이론 자체가 인과적 위상을 가지게 하려는 목표에서 출발합니다. 만약 '3'이라는 표현이 대언(de dicto)적인게 아니라 대물(de re)적이라면 우리는 '3'의 존재성을 증명할 수 있게 됩니다. 이건 데닛의 '감각질(qualia)'이나 촘스키의 '언어 습득 장치(LAD: Language acquisition device)'같은 아이디어와도 같은 입장에 서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존재론적 개입을 통해 이론을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사이비 문제를 발생시킨다는 점을 이해할때, 그리고 그런 행동들이 부질없다는 사실에 동의할때 우리는 그런 행동을 멈출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보편철학을 위한 이론을 비트겐슈타인은 축소(deflated)한다고 퍼트남은 지적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숫자 3은 정말로 실재하는가?"라는 질문 자체를 멈추길 바랍니다. 그리고 저 또한 생각에 동의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앞서 연재된 글들을 살펴보았을때 로티에 대한 퍼트남의 평가는
고 퍼트남이 로티를 평가할 이유를 제공하는 것이고,
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로티와 퍼트남, 비트겐슈타인은 모두 "우리가 세계를 있는 그 자체로 서술할 수 없다"는 논제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로티는 그러한 논제를 주장하려고 하고, 퍼트남과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주장, 이론을 거부합니다. (없다고 주장하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론화불가능성'이라는 지점에 섰을때, 로티는 다시 칸트의 어조로 돌아가고 있음을 퍼트남은 지적합니다. 퍼트남과 비트겐슈타인은 (로티도 마찬가지여야겠지만) 논제의 주장이 타당성을 가지기 위해 도입하는 괴상한 실재들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로티가 "우리는 실재를 그려낼 수 없다."라고 주장한 것으로 비판받아야 한다면, 퍼트남도 동일하게 그런 비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퍼트남은 그런 주장들을 그만둬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주장들이 "할 수 없다"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