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은 실용주의자인가? : 힐러리 퍼트남, 「실용주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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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나의 주제는 후기 비트겐슈타인 철학이 가진 실용주의자의 긴장을 다루고 있지만, 어떤 면에서 오해 될 수 있다. 내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칸트의 철학과 관련짓는 만큼, 윌리엄 제임스의 철학과도 관련지어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강의록은 이렇게 부를수도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신칸트주의자(Neo-Kantian)인가? 이런 이중 비교를 통해, 나는 비트겐슈타인이 단지 "철학의 종말"의 철학자라는 통념에 대처하려 한다. (즉, 후기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전체적인 "메세지"가 철학은 노이로제와 비슷하며, 비트겐슈타인의 작업이 가진 목적은 단지 우리가 철학을 그만둘 수 있게끔 한다는 통념)

후기 철학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한가지 어려운 점은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이론을 진술하는 것을 매우 의도적으로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가 설명하는 목적은 이론을 말하는게 아니라 우리의 관점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는 철학에 이론이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철학을 하찮은 것으로 여길 것이라 말한다. 그래서 내가 카르납과 한스 라이헨바흐를 예를 들어 내가 철학에서 근본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설명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단순히 비트겐슈타인의 논제를 영구히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나는 한 측면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성찰이 어떻게 칸트의 성찰의 일부에서 흘러나와 계속되고 그것들이 어떻게 실용주의의 특정한 긴장에 대치함을 바라보는 건 우리가 그의 통찰을 더 잘 볼 수 있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우리가 우리의 관점을 바꾸고, 사물을 보는 방식을 바꾸고, 또한 왜 그런 변화를 "이론"의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지를 알아보기를 바랐던 점에서)

칸트

칸트부터 시작해보자. 만약 내가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에서 영구히 옳은 것을 말해야 한다면 (그리고 나 자신도 칸트의 모든 책에는 영구히 옳은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칸트의 실수들(예를 들어, 선험적 종합판단)이 무엇이든 간에, 나는 칸트가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 단순히 그것을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제로 처음 본 사람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칸트는 인간이 세상의 어떤 것을 묘사할 때마다 우리의 묘사는 우리 자신의 개념적 선택에 의해 형성된다고 보았다.

(우리가 그것이 1미터 길이라고 말하거나, 또는 39.9인치 정도 길다고 말함으로써 무언가를 묘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할때처럼) 나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묘사가 우리 자신의 개념적 선택에 의해 형성된다고 말함으로써 그것들이 사소한 의미론적 규약성을 보여준다고 말하는게 아니다. 칸트는 우리가 다른 목적을 위해, 예를 들어 과학적 목적과 도덕적 목적을 위해 세계를 묘사하고, 우리의 도덕적 이미지와 우리의 과학적 이미지가 모두 옳을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이 기술들 중 어느 것도 다른 것으로 환원되거나 통약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칸트는 스스로 혼란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 혼란은 우리의 개념적 선택에 의해 형성되는 서술이 어떻게든 그것의 대상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설명이 아니라고 가정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그 실수를 저지르자마자, 우리는 "글쎄, 우리의 서술이 우리의 관심과 본성에 의해 형성되는 서술일 뿐이라면, 그것들 그 자체 에 있는 사물들에 대한 서술은 뭐지?"라는 질문의 문을 열었다. "물자체"는 상당히 공허하지만, 사물이 "물자체"에 어떻게 있는지를 묻는 것은 사실상 세계가 어떻게 세계 고유의 언어로 묘사되는지를 묻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 고유의 언어 같은 건 없다, 단지 우리 언어 사용자들이 우리의 다양한 목적을 위해 발명하는 언어들뿐이다. (실제로, 나는 칸트 자신이 순수이성비판에서 반복적으로 "물자체"라는 개념이 공허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항상 그 사실에 대한 자신의 생각에서 물러난다고 믿는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심지어 순수이성비판의 시기에도 사실에 관한 어떤 지각이 있다고 주장한다.)

비록 세계에 대한 우리의 설명이 우리의 관심과 본성에 의해 형성되는 우리의 개념적 선택에 의해 형성된다는 칸트의 인식은, 한편으로는 "물자체"의 개념에 의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개념적 선택은 어떤 종류의 두꺼운 초월적 이성의 구조에 의해 최종적으로 고정된다는 개념에 의해 손상되고 결점이 있다. 그럼에도 칸트는 세계에 대한 어떤 기술도 단순히 세계의 복사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포기 하는데 있어서 이전의 모든 철학자들을 능가하는 결정적인 진보처럼 보인다. 심지어 우리는 초월적 이성의 구조에 대한 생각을 폐기한다는 칸트에서 차용한 생각이 비트겐슈타인 이전의 독일 철학에서 어디에나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쇼펜하우어가 칸트주의의 기이한 버전으로 의지에 의한 이성(Reason by Will)의 대체가 있었고, 우리는 어린 비트겐슈타인이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는 것을 안다.

칸트 사상의 또 다른 매력적인 측면은 내가 초기 다원주의(incipient pluralism)라 부르는 것이다. 나는 칸트의 철학이 단지 하나의 세계의 이미지가 아니라 두 개의 세계의 이미지, 즉 과학적 세계의 이미지와 도덕적 세계의 이미지가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이전에 암시한 바가 있다. 물론 이것은 다원주의보단 이원론이라 불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특히 판단력 비판과 칸트의 후기비판 저술에서 진정한 다원주의로의 경향을 본다고 생각한다. 칸트는 아마 저항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획에서 그러한 경향은 드러난다. 구체적으로, 세계의 과학적 이미지와 도덕적 이미지의 단순한 이원론을 보는 대신에, 우리는 세계의 도덕적 이미지와 과학적 이미지의 상호의존성으로부터 오는 파급효과와 (추후에 이야기하겠지만) 감성과 경향성이 있는 순수한 실천이성의 상호작용에서 오는 다양한 파급효과를 바라본다.

사실상, 칸트는 세계의 도덕적 이미지와 세계의 과학적 이미지에 대해 말하기 시작할 뿐만 아니라, 세계의 도덕적 이미지에 종속되는 종교적 이미지의 (이성의 범위 내에서의 종교에서) 또한 말하기 시작한다. 종교적 이미지는 세계의 도덕적 이미지에 종속되지만, 자신의 자율성을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또한 세상의 미적 이미지, 그리고 세계의 법적 이미지 등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확실히, 칸트는 우리 시대의 콰인처럼, 세계의 과학적 이미지만이 "지식"이라고 적절하게 부를 수 있는 것을 담고 있다고 계속해서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칸트의 사상의 특징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뿐만 아니라 윌리엄 제임스에 의해 의문시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이미 내 강의의 하나의 "이론"를 진술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실행(pratice)은 "전통적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단순한 거부로 이해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특정한 종류의 철학적 성찰을 거부하는 것만큼이나 철학적 성찰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확실히 거부의 지점은 비트겐슈타인에 있다. 그건 냉혹하고, 어떤 면에서 충격적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에게 형이상학과 인식론의 전통적인 사업은 실패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종말의 날에서 실패한 게 아니라 태초의 날에 사산한 것이다. 형이상학과 인식론의 발생을 위해 가정된 질문들은 무의미하다. 예를 들어 인식론은 종종 "지식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지식에 "본성"이 있다는 바로 그 가정은 우리가 뜻을 부여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 가정이라고 말하려 한다. 그리고 "지식의 개념에 대한 분석은 무엇인가?" 또는 "아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와 같이 형식적인 발화 방식의 재진술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알고 있다"는 단어가 모든 사용 맥락에 수반되는 "아우라"와 같이, 그 문맥에서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결정하는, 그것을 둘러싼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과적 지식 이론"과 "정당하고 참된 믿음" 이론 모두에 공통되는)은 환상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아는"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수많은 다른 일을 할 때 사용하는 단어다. 당신은 확실하게 "아는"이라는 단어가 수행하는 다양한 직업들을 서술할 수 있겠지만, 전통적인 인식론이나 심지어 루돌프 카르납 스타일의 현대적이고 비전통적인 인식론을 할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 여러분은 미래에 어떤 "아는"의 사용이 합법이거나 합리적일 것인지, 그리고 어떤 "아는"의 사용이 불법이거나 비합리적인지를 아는 기준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누가 단 한번에 영원히 말할 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놀라워하는 존재다. 우리는 항상 새로운 언어 게임을 창조해왔고, 우리는 계속해서 새로운 언어 게임을 창조해 낼 것이다. 우리는 항상 "알다"라는 단어의 사용을 확장하고 수정해왔고, 우리는 계속해서 "알다"라는 단어의 사용을 확장하고 수정할 것이다.

참조

Hilary Putnam, Pragmatism-An Open Question, Blackwell, 1995, 27-32.

  1. 가독성을 위해 원문의 맥락에 따라 문단을 구분하고 글의 목적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괄호로 문단을 정리했습니다.
  2. 요약 실력이 부족한 탓에 분량을 나누다보니, 본의아닌 제목낚시(?)를 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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