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윤리적인 목표
내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에 "실천이성의 우위"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내가 그의 후기 철학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해 부언할 필요가 있다. 간략하게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나의 해석과 다른 독서와 대조하면서 진행하겠다. 이건 마이클 윌리엄스와 폴 호리치가 제안한 비트겐슈타인을 읽는 방법이다. 호리치의 관점은 더 길게 발전되었기 때문에, 호리치에 초점을 맞추겠다.
(우리가 주장 언어에 집중한다면) 호리치의 관점에서 언어게임은 "주장가능성 조건"을 가진 문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주장가능성 조건은 특정한 관측가능 조건을 가진 문장이 참이거나 적어도 "확인"되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드러난다. (주장가능성 조건은 특정한 관측가능 조건에서 우리가 특정한 소음을 내거나, 특정한 표시를 하는것이 허용되며, 또한 관측가능 사건이나 다른 사람들의 특정한 반응을 기대하도록 드러낸다고 생각하자) 솔직히 이 모델은 루돌프 카르납이나 한스 라이헨바흐의 모델(자연 언어의 화자-청자 모델)과 아주 비슷하다. 주장가능성 조건의 핵심 아이디어는 어떤 상황에서 어떤 문장이 확인되는지 안다면 문장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참"은 "탈인용적으로(disquotationally)"²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문장이 참이라는게 그냥 동어반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타르츠키 조건문"은 우리가 진리의 개념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말해준다.) 이 설명은 우리의 단어 사용을 지배하는 "기준"이 (어떤 경우에는) 확실성보다 낮은 주장가능성의 정도를 제공한다는 사실에서 로티의 설명과 다르다는 점에 유의하자. 그럼에도, 이 모델에서 같은 방식으로 언어를 이해하고 같은 증거를 갖는 화자들은 모두 같은 정도의 주장가능성에 동의해야 한다. (로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그림의 기초가 되는 가정은 단어 사용 이 관찰 가능한 상황에, 화자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용"은 이론적인 개념이며, 그곳에는 임의의 언어 게임에서 표현의 사용을 설명하는 표준적인 방법이 존재한다. 나는 이것을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실증적 해석이라고 부르겠다.
(사회과학의 아이디어에서 피터 윈치가 제안하거나 거의 제안한)실증적 해석은 다음과 같다 : 언어 게임에서 단어의 사용은 게임에 사용된 개념과 관련된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는 설명될 수 없다. 윈치는 "원시적인" 사람들의 언어 게임을 논의했지만, 나는 같은 지점이 과학적인 언어 게임에도 적용된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훌륭한 전기 기사의 언어 게임을 생각해 보자. 그는 "전류가 전선을 통해 흐른다"같이 나이든 실증주의자가 좋아하는 문장의 사용을 배운다.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실증적 해석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전기 기사가 이 문장을 이해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브리지맨과 초기 카르납처럼) 예를 들면, 전기 기사는 전압계 바늘이 꺾이면 이 문장을 이해할 수 있고, 어떤 것이 전압계라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그것이 특정한 외관을 가진다는 사실을 인지한다.(아마도 "전압계"라고 쓰여있을 것이다)
우리는 앞서 로티에 관한 토론에서 이 풍경이 뭐가 잘못됐는지 보았다. 실력있는 기사는 확실히 이런 의미에서 "기준"에 의존하지만, 일이 잘못될 때기준을 버리는 것과 언제 기준을 버려야 하는지에 대한 지식은 규칙에 의해 학습되는게 아니다. (자신의 기계를 수리하거나 자동차를 고쳐본 사람은 누구나 실생활에서 많은게 잘못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은 내가 앞서 인용한 구절에서 다른 사람이 가지지 않은 감정을 가진척 하는걸 배우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사람들은 인간에 통달한 지식을 배울 수가 있는가? 물론.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배울 수가 있다. 그러나 수업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그때 다른 사람이 그의 교사가 될 수 있는가? 분명히.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적절한 신호를 준다. 여기에서는 '배운다'는 것과 '가르친다'는 것이 그렇게 보인다. 사람이 외우는 것은 그 어떤 기술도 아니다. 사람들은 적절한 판단을 배우는 것이다. 규칙도 있지만 그것들은 체계를 이루지 않고 경험 있는 자만이 이들을 올바르게 이용할 수가 있다. 계산 규칙과는 달리. (wittgenstein, 1953, p227)³
나는 하버마스가 ⌜의사소통 행위 이론⌟에서 만들어낸 얼마간의 요점에 대한 발언을 여기에 적용하고 싶다. 가령, 언어 게임의 "요점"을 보지 못하고 상상력이 부족한 참여자는 "기준"이 합리적으로 적용되는지, 불합리하게 적용되는지 판단할 수 없다. 참여자(전기 기사)가 관찰 가능한 특정 상황에서 특정 소음을 낸다고 게임을 묘사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반면에, "전기는 전선을 통해 흐른다"의 사용에 대한 설명을 생각해 보자 : "전선을 통해 전기가 흐르는지 확인하기 위해 전압계를 사용한다. 전압계는 이러이러한 방법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관찰 언어가 아닌 전압계의 '작동'에 대한 설명을 상상해보자.) 전압계를 사용할 때는 판독의 정확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전자기장이 없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 . ."
"전류가 전선을 통해 흐른다"의 "사용"을 아는 것은 이런 것이다 . 그리고 당연하게도, 기술사회의 사회화나 그 밖에 수반되는 많은 것이 전제된다. 언어 게임을 이해하는 것은 삶의 형식을 공유하는 것 이고, 삶의 형식은 과학적이든, 종교적이든, 또는 오늘날 서구의 산업 사회에서 고정된 실증적인 메타-언어로 묘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말 많은 경우에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해석에서, "낱말의 의미는 언어 안에서의 그 사용이다"라는 유명한 경구가 의미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음에 주목하자. (비록 "의미론"의 요구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의심할 수 있는 관점의 표현이지만, 어떤 맥락에서 "의미론"은 형이상학적으로 유용한 정보를 줄 수 있다.)
두가지 요점만 더 들고, "실천 이성의 우위"로 돌아가보자.
(1) ("문장"이 아닌)명제가 어떤 조건에서 주장가능성을 가지는지는 어떤 조건에서 그것이 참인지 또는 참일 가능성이 있는지 아는 것이다.
주장가능성 조건이 소음을 내는 조건이라는 생각은 비트겐슈타인의 의미를 완전히 왜곡한 것이다. "주장가능성"과 "참"은 내적으로 연관된 관념이다 : 언어 게임 안에 서서 그 "요점"과 주장가능성과 참을 판단함으로써 두가지를 모두 이해하게 된다.
(2) 마이클 윌리엄스는 이러한 류의 "비트겐슈타인주의"가 사실/가치 이분법을 (나처럼) 거부하고, 주장 가능성 조건 자체가 개량될 수 있다고 부연하면서 순진한 실증주의라는 비판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추가는 마치 이론가가 이용할 수 있는 하나의 고정된 개념인 것처럼 언어 게임을 "개량"하는 관념을 사용한다. 전기 기사의 언어 게임을 개량하기 위해 뭐가 중요한지 알기 위해서는 게임의 요점을 알아야 한다. 가령, 회로가 어떻게 동작하고 있는지, 그리고 회로에 수리나 설치, 설계가 필요할 때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아야 한다. 만약 여러분이 언어 게임을 특정한 관찰 가능 상황에서 소리를 내는 게임이라고 생각한다면, 소리를 내는게 목적을 도울 것이란 희망에서, 규칙을 "개량"하는 유일한 관념은 제한된 실증성이다 : 사실상 우리는 "과학의 목표는 예측과 통제다"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전기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그럴듯해 보일 수 있지만, 대부분의 인간 언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성, 진실, 역사⌟ 에서 언급했듯이, 언어 게임의 목적은 해당 게임이나 관련 게임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밝힐 수 없다.)
제한된 실증성이 심지어 과학적 언어에서 사실이라면, 우리가 비트겐슈타인의 과학적 언어 이외에도 형식에 대한 다양한 논의 (가령, 종교적 언어, "원시적" 언어 게임, 그리고 ⌜확실성에 관하여⌟에서 다른 "삶의 형식"에 대한 논의)로 눈을 돌렸을 때 이러한 생각들이 특히 중요해진다. 비트겐슈타인은 ⌜종교적 믿음에 관한 강의⌟에서 종교적 언어의 영향 밖에 서 있는 자신이 종교적 언어가 인지적 또는 비인지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그는 이 말을 하는 것은 종교인이 단지 그림을 사용한다는 것, 또는 단지 "태도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비트겐슈타인은
(1) 매우 다른 형태의 삶에 대한 "외재적" 이해의 가능성은 극히 제한적이며,
(2) 종교적 주장이 단순히 "경험적" 주장으로서, 잘못 공식화된 것에 불과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형이상학적 주장처럼 비트겐슈타인에 의해 즉각 거부당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여기서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글에서 도덕적 목적과 철학적 목적을 감지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일종의 공감적 이해를 촉구하고 있다. (⌜프레이저의 "황금 가지"에 관한 진술⌟에서 그가 분명히 말하듯이,) 비트겐슈타인은 세속적인 유럽인들이 다른 모든 형태의 생명체를 "과학적" 또는 "비과학적"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이는 그 차이를 이해하는 것에 관한 저속한 거부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러한 우려를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나에게 있어서, ⌜확실성에 대하여⌟의 말미에 다른 삶의 형식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언급과 ⌜종교적 믿음에 관한 강의⌟, ⌜프레이저의 "황금 가지"에 관한 진술⌟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한 진술들은 언어철학자가 철학자로서, 삶의 형식에서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명제"가 과학언어가 (경험)명제를 구분하는 것과 비교했을때 얼마나 다른지 말해줄 수 없다는 선언이다. 가령, 나는 "나는 절대 저런 식으로 말 안해"라고 말할 수 있고, 반대로 나만의 삶의 형식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철학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의 메타물리학에 대한 거절은 도덕적 거부다 : 형이상학적인 풍경은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서 우리에게 나쁘다.) 우리가 계속해서 직면하게 되는 질문은 삶의 형식이 실용적이거나, 아니면 정신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삶의 형식의 가치는 평가적 관심을 공유할 수 없는 사람들의 언어 게임으로 표현할 수 없다.
이건 실용주의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에게 좋은게 진실이다"라고 말하는 신화적인 실용주의(진짜 실용주의자들 모두가 경멸하는)가 아니고, 듀이가 다음같이 썼을 때 표현했던 태도에 훨씬 더 가깝다.
[철학의] 주된 관심사는 자연스럽게 생겨난 경험의 기능이 가진 좋은점을 명확히 하고, 자유롭게 하고, 확장하는 것이다. 새로운 "실재" 세계를 만들거나, 상식과 과학으로부터 숨겨진 비밀을 파헤칠 필요도 없다. 철학은 특별한 자신의 정보나 지식의 집합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만약 철학이 과학의 경쟁자가 될 때 우스워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특정한 철학자가 과학의 예언자가 되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철학의 사업은 시간과 장소에 대한 가능한 최고의 지식을 받아들이고, 어떤 목적을 위해 활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목적은 신념, 제도, 관습, 정책에 대한 비판이다. 좋음에 대한 그들의 영향과 관련해서 말이다. 이것은 철학 내에서 무언가가 형성되고 달성된 것처럼 좋음에 대한 그들의 영향을 의미하는게 아니다. 철학은 지식이나 진리를 얻기 위한 방법을 고유하게 가지지 않기 때문에, 좋음에 대한 사적인 접근이 없기 때문이다. 철학은 과학과 탐구 능력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사실과 원리에 대한 지식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인간의 경험에서 확산되는 좋음을 받아들인다. 철학에는 모세나 바울에게 주어진 계시의 권위가 없지만, 일반적이고 자연스러운 좋음에 대한 지적, 비판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 .
이 세 강의 중 세 번째 강의에서, 나는 듀이에 대해, 그리고 철학에 대한 이러한 개념이 그에 의해 도출되는 방식에 대해 더 말할 것이다. 오늘 나는 비트겐슈타인이 엄격한 의미에서 "실용주의자"나 "신칸트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실용주의와 함께 특정한 칸트의 유산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실천의 우위에 대한 강조를,
참조
Hilary Putnam, Pragmatism-An Open Question, Blackwell, 1995, 4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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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독성을 위해 원문의 맥락에 따라 문단을 구분하고 글의 목적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괄호로 문단을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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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quotationally"에 대응하는 번역어가 없어 "탈인용적으로"라고 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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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tgenstein, (1953). ⌜논리철학논고/철학탐구/반철학적 단장⌟ . (김양순, 옮김). 서울:동서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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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은 실용주의자인가? : 힐러리 퍼트남, 「실용주의」 (1) 요약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