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대한 카벨의 해설에 대한 코넌트의 해설에 대한 나의 해설

(1) 제임스 코넌트(J. Conant)의 「스탠리 카벨의 비트겐슈타인」을 읽었다.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스탠리 카벨의 해석이 기존 학자들의 해석과 어떠한 점에서 독특한 차이를 지니는지 강조하는 글이다. 논문은 기존 학자들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일종의 '의미에 대한 사용 이론(use-theory of meaning)'으로 이해하였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이러한 해석이 발화의 '내용(content)'에 대한 이론 옆에 발화의 '맥락(context)'에 대한 이론을 병렬적으로 성립시키고자 하는 시도였다고 지적하며, 카벨의 해석을 통해 발화의 맥락과 분리된 발화의 내용이 애초에 존재할 수조차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즉, 카벨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의미론과 통사론 옆에 화용론을 하나 더 추가하고자 한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사용의 맥락과 분리된 언어가 근본적으로 '의미의 환각(hallucination of meaning)'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비판한 인물이다.

(2) 코넌트의 논문은 우선 난해하기로 유명한 카벨의 비트겐슈타인 해석을 평이한 언어로 풀어주고 있다는 점에서 유익하다. 흔히 카벨은 코라 다이아몬드(C. Diamond) 및 존 맥도웰(J. McDowell)과 함께 2000년대 이후 미국 학계에서 등장한 소위 '새로운 비트겐슈타인(New Wittgenstein)' 진영을 이끄는 선구적인 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카벨의 글쓰기 스타일은 대단히 난삽한 나머지 국내에는 그가 쓴 주요 텍스트가 거의 번역되어 있지 않고, 그의 비트겐슈타인 해석에 대한 논의도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 영어권 학자들조차 카벨의 논지를 오해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가령, 코넌트는 카벨을 잘못 해석한 대표적 사례로 마이클 윌리엄스(M. Williams)와 마리 맥긴(M. McGinn)을 지적하기도 한다.) 따라서 카벨과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코넌트의 해설을 참조하여 주제에 접근하기 위한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코넌트 본인 역시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의 중요한 학자이기도 한 만큼, 그의 글은 신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글 자체가 또 다시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을 대변하는 자료로서도 흥미롭게 읽힐 수 있을 것이다.

(3) S대에서 비트겐슈타인을 공부하는 지인 K씨는 이 논문의 내용을 바탕으로 해커(P. M. S. Hacker)를 통해 대표되는 정통 영국 학계의 비트겐슈타인 해석과 카벨(S. Cavell)을 통해 대표되는 신진 미국 학계의 비트겐슈타인 해석 사이의 차이를 발견하기도 하셨다. 해커의 비트겐슈타인 해석은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언어 사용 이전에 명확하게 나누는 반면, 카벨의 비트겐슈타인 해석은 언어 사용 이전에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미리 나누는 입장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아직 이 구분이 얼마만큼 정당한 것인지 판단하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K씨가 제시한 도식을 전제한 상황에서는 카벨의 해석이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닐 수 있다고는 생각한다. 즉, 기성 형이상학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은 분명 형이상학의 언어를 미리 설정된 '규칙의 격자판(grid of rules)'에 끼워 맞추어 재단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은, 카벨이 잘 강조한 것처럼, 형이상학의 언어가 '언어 놀이 바깥에서(outside language games)' 제시되고 있는 나머지 자기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게 되는 상황에 빠진다는 사실을 비판할 뿐이다. 확실히, 해커는 때때로 "아프다.", "생각한다.", "안다."와 같은 술어의 문법을 먼저 제시한 뒤 기성의 형이상학이 그 문법을 잘못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는 점에서 마치 언어의 의미를 고정시키려는 것처럼 보일 때가 종종 있기는 하다. 이러한 입장은, 비트겐슈타인이 거부하였던 것처럼, 기성의 형이상학을 비판하기 위해 다시 언어의 형이상학에 의존하는 시도라고 여겨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4) 나는 카벨을 통해 비트겐슈타인의 '치유적(therapeutic)' 철학과 데리다의 '해체적(deconstructive)' 철학 사이의 접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식론적 회의주의에 대한 카벨의 비판은 치유적 철학과 해체적 철학이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내용 같았다. 즉, 카벨이 잘 지적하고 있듯이, 인식론적 회의주의는 자기 모순에 빠진다. 모든 지식을 의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의심의 근거조차도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결국 인식론적 회의주의는 자신이 도대체 무슨 의심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나에게는 이러한 카벨의 비판이 (a) 인식론적 회의주의가 내재하고 있는 균열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해체적'인 동시에, (b) 그 균열을 통해 인식론적 회의주의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는 점에서 '치유적'이라고 생각되었다.

참고

Conant, J., "Stanley Cavell's Wittgenstein", The Harvard Review of Philosophy, Vol. 13(1), 2005, pp. 5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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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가 위에서 적은 것보다 카벨과 해커의 차이를 잘 설명해주셨네요. 말씀하신 것처럼, 둘은 '논리적 통사론의 규칙 위반(violation of the rules of logical syntax)'이 과연 가능한지 그렇지 않은지로 논쟁하죠. (찾아 보니,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에 대한 해커의 비판을 담고 있는 논문인 “Was He Trying to Whistle It?”에 이런 대립이 잘 나타나 있네요.) 적으신 내용에 대해 동의합니다. 저는 의미와 무의미의 격자판을 미리 상정한 다음 "이 말은 의미 있고, 저 말은 의미 없다!"라고 규정하는 태도를 '언어의 의미를 고정시키려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쓰신 댓글의 내용이 이 표현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해설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다만, "회의주의자에게 우리가 하는 것은, [……] 회의주의자에게 우리 언어의 다양한 언어 게임들을 보여줌으로써, 그에게 유효한 의미의 다양한 가능성들의 조망/통찰Übersicht을 제시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 저는 좀 다른 의견을 갖고 있어요. 우리가 회의주의자에게 다양한 언어 게임을 보여줄 수 있다는 식의 태도는, 혹은 회의주의자가 문법을 일목요연하게 조망하게 만들 수 있다는 식의 태도는, '신의 관점(God’s eye-view)'에서 회의주의자에게 문법이 적용되어야 하는 방식을 납득시킬 수 있다는 주장인 것처럼 들려요. 애초에 논리적 통사론의 규칙 위반이라는 게 가능하지 않다면, 우리가 회의주의자보다 더 우월한 지위에서 "문법은 이런 거야!"라고 보여줄 수도 없겠죠.

(3) 차라리 저는 "회의주의자의 발화 속의 뿌리깊은 (논리적 혹은 문법적) 결함"을 폭로하는 방식의 비판이 비트겐슈타인적 접근 방식에 훨씬 더 적합하다고 생각해요. 사용 이전에 미리 정해진 문법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회의주의자는 자신이 참여한다고 믿고 있는 ‘언어 게임’ 혹은 자신이 준수한다고 믿고 있는 '문법’에 의해 스스로 평가받아야 하는 처지에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회의주의자 본인의 언어 게임이 얼마나 엉터리 같이 돌아가고 있는지, 혹은 회의주의자 본인의 문법이 얼마나 자기 모순적인지를 지적할 때에야 비로소 '신의 관점’에 서지 않고도 회의주의자 본인이 "혼동된 관계"와 "비정합적 욕망"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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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가 지적하고 싶은 핵심은, "내가 참여하는 언어게임을 내기 기술"할 수 없다거나 "행위나 상태들을 유형화할 수조차 없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형이상학자와 비트겐슈타인주의자가 서로 대립하는 상황에서, 비트겐슈타인주의자의 주장이 옳다고 손을 들어줄 수 있는 아무런 객관적 기준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형이상학자에게 다양한 언어게임을 보여주면서 "너는 문법을 일목요연하게 조망하지 못하고 있어!"라고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트겐슈타인주의자의 본인의 일방적 주장일 뿐이지 형이상학자를 납득시키는 설명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2)그래서 저는 voiceright님이 지적하신 것과는 달리 단순히 언어게임을 일목요연하게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회의주의자 본인의 언어 게임이 얼마나 엉터리 같이 돌아가고 있는지, 혹은 회의주의자 본인의 문법이 얼마나 자기 모순적인지를 지적"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이런 방식의 접근이 매우 비트겐슈타인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여기에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이름을 붙일 것인지 말 것인지는 솔직히 저에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이 접근을 "실용주의적"이라거나 "해체주의적"이라고 부르신다면 저는 얼마든지 그런 이름을 받아들일 의향이 있습니다. 제가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는 저의 접근법과 voiceright님의 접근법 중 무엇이 진정으로 회의주의자를 비판하기에 적합한지입니다. 적어도 제가 보기에, "너는 문법을 일목요연하게 조망하지 못하고 있어!"라고 일방적으로 주장만 하는 태도는 ‘직관 싸움’ 이상의 생산적 논의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3) 저로서는 카벨에 대해 더 자세하게 설명하신 부분의 내용이 제가 주장한 내용과 본질적으로 어떠한 점에서 차이를 지니는지 모르겠습니다. 특정한 기본 전제를 상정한 채 이론을 쌓아올려가고자 하는 욕망은 소위 '형이상학’을 한다는 사람들이 지닌 기본 성향입니다. 따라서 회의주의자 본인은 자신이 특정한 언어 게임에 참여하고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참여하는 언어 게임에 부합하는 발화를 하기 위해 노력하죠. 그럼 비판자는 이러한 작업이 회의주의자 본인이 상정한 전제들의 충돌이나 그 전제들로부터 귀결되는 결론들의 충돌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면 될 뿐입니다. 그래서 회의주의자가 따른다고 믿었던 규칙들이 사실 아무 규칙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거죠. 저는 회의주의자가 이런 모순 속에서 내뱉는 말들을 “언어게임 바깥에서 하는 말”, “뜻이 통하지 않는 말”, “불명료한 말”, "이해할 수 없는 말"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