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이루는 밤에 비트겐슈타인 단상

5시에 일어나야 해서 지금은 꼭 자야 하는데, 오늘 voiceright님과 논쟁한 내용을 고민하다 보니 도저히 잠이 오지 않네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http://forum.owlofsogang.com/t/topic/106?u=youn

처음에는 단순히 "내가 비트겐슈타인의 논의를 내 편의대로 취사선택해서 억지로 짜맞췄을 수도 있지."라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지만, 계속 고민하다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제 입장이 맞는 것 같습니다?!

마음/세계 : 소여
적용/규칙 : 해석
낱말/감각 : 사적 언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서 핵심은 위의 이분법적 구도에 대한 '해소(dissolving)'입니다. 즉, 마음과 세계, 적용과 규칙, 낱말과 감각을 근본적으로 분리시킨 채 둘 사이를 '소여', '해석', '사적 언어'로 다시 연결시키고자 하는 시도를 비판하는 거죠. 이러한 비판은 단순히 문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식으로 수행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은 두 축이 동떨어져 있다고 전제한 상태에서 다시 두 축이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태도가 자기 모순에 빠진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내일 중으로 꼭 「어떻게 비트겐슈타인을 읽어야 하는가?」라는 글을 올빼미에 올려야겠네요. (1)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변화를 놓고 보더라도, (2)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한 내용을 놓고 보더라도, (3) 비트겐슈타인의 후계자들이 강조한 문제를 놓고 보더라도 제 입장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voiceright님이 꼭 「어떻게 비트겐슈타인을 읽으면 안 되는가?」라는 글로 응수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브랜덤이 『명시적으로 만들기(Making It Explicit)』 제1장에서 비트겐슈타인의 규칙 따르기 논증을 사용하여 자신의 규범적 화용론을 성립시키자 맥도웰이 「『철학적 탐구』를 어떻게 읽으면 안 되는가(How Not to Read Philosophical Investigations)」라는 매우 직설적인 제목의 비판을 썼죠. 근데 사실 둘이 절친이라 이렇게 서로 까도 맨날 책에서 헌정사 쓰고 애칭으로 이름 부릅니다.

다들 좋은 밤 되세요. 올-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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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웰의 "How not to read —"에 대해 예전에 써놓은 글이 있네요. 깨알 홍보합니다.

https://blog.naver.com/pried02/221262227508

두 분의 논쟁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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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핵심이 비트겐슈타인의 목적이라기보단 선생님의 목적에 가깝다고 느낍니다. '분리시킨채'나 '상정'같은 표현에 미루어 보았을때, 이분법이 자의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인상을 주고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철학적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분리의 원인을(그게 상정된 것인지 결정된 것인지) 직접적으로 해명하지 않습니다. 서술을 통해 개념을 구분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상정'이라는 표현은 상대의 서술을 억지로 주장의 형태로 만드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해석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고 새로운 관점의 해석은 생산적인 논의를 가능하게 합니다. 하지만 '상대의 관점을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또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상대의 관점을 이해했을때 그것이 제 관점과 다르다면, 이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주장하는게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통약불가능성은 통약가능성을 전제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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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핵심적 문제의식이 언어/세계 이분법에 대한 극복이라고 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석적 근거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철학적 대결 상대로 "『논고』의 저자"(PI, §23)를 들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논고』의 저자"의 기본 사상이 바로 이름과 대상 사이의 지시 관계와 명제와 사태 사이의 대응 관계라는 사실도 널리 받아들여집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탐구』의 가장 앞부분(PI, §1-138)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지시주의적 언어관과 그 입장이 내포한 함의를 집요하게 비판합니다.

그 이후 등장하는 규칙 따르기 논증과 사적 언어 논증도 이러한 비판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습니다. 가장 교과서적인 비트겐슈타인 해석자들로 잘 알려진 해커와 베이커도 (그리고 그들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맥도웰도,) 이 논의들이 각각 규칙과 규칙의 사용을, 감각 언어와 내적 감각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한 마디로, 규칙 따르기 논증과 사적 언어 논증 역시 결국 언어의미(세계)가 이분법적으로 떨어져 있다고 전제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논고』의 저자를 포함한) 전통적 형이상학자들이 언어와 세계의 이분법을 '상정'하여는지 '결정'하였는지의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그들의 주장이 그런 이분법을 내포한 상태에서는 제대로 된 의미를 지닐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상대의 관점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관점이 언어의 문법을 제대로 준수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적어도, 그 관점이 우리의 문법 내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가령, 우리는 "나파파파"라는 말의 문법이 주어지기 전까지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없고, "나파파파하기"라는 규칙의 문법이 주어지기 전까지 이 규칙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사실입니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내포한 이분법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는데도, 형이상학자들은 자신들이 말하고 있는 내용에 대해 적절한 문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후기 비트겐슈타인 해석이 수많은 연구자들에게 상당히 널리 통용될 뿐더러, 쉽게 반박되기 어렵다고 봅니다. 서로 구체적인 방향성은 상당히 다르지만, 해커, 베이커, 퍼트남, 로티, 더밋, 크립키, 브랜덤, 맥도웰 등 비트겐슈타인의 아이디어에 주목하는 수많은 인물들이 언어와 세계 사이의 이분법 비판이라는 관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을 읽어냅니다. 세부 논증은 서로 다르지만, 이 모든 인물들은 기존 철학이 언어와 세계 사이의 이분법을 무비판적으로 상정한 채 표상주의, 진리 대응론, 지시 이론 등을 성립시키고자 하였다는 점을 비판합니다. 저는 제 비트겐슈타인 해석의 세부적인 주석 부분은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언어와 세계의 이분법 비판이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핵심 사상이라는 큰 틀이 어긋나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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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는 "언어라고 하는 도구와 그 사용법의 다양성, 낱말이나 문장의 종류의 다양성을, 논리학자가 언어의 구조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다(또 <논리철학논고>의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도)."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서술이 어떻게

라는 주석적 근거가 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보기엔 조금 당혹스럽군요. 그리고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상대의 서술이 어떤 배경적 조건을 '가정'하고 있다고 보는지 아니면 어떤 상호의존성 사이에서 '결정'하고 있다고 보는지를 해석할때 주효하기 때문입니다. 상대와의 논의에 앞서 상대의 대언적 필연성을 추론하는건 대화를 매끄럽게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논증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지를 판단할 수 있기에 중요합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던 해석이지만,

'제대로 된 의미'라는건 결국 선생님의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어게임 밖에서 '제대로 된 의미를 지닐 수 없다.'고 비판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언어의 문법을 제대로 준수하는 것'은 어떤 기준에서 판단됩니까? '우리의 문법'은 어떠한 맥락에서 보아야 할까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주장을 제 나름대로 재구성해보자면 '상대의 관점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게 나의 관점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라고 하시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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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문제들을 구분해야 할 것 같습니다.

1. "『논고』의 저자"에 대하여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의 저자였던 전기의 자기 자신을 비판한다는 사실은 주류 해석에서는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여집니다. 이 사실은 기존의 연구들을 완전히 전복시키는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해석이 제시되지 않는 이상 거의 부정될 여지가 없습니다. §23의 맥락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다양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다양성을 소위 "논리학자들"이 간과하였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논리학자들이 언어의 구조에 대해 말했던 것"이란 바로 단일한 논리적 통사론(logical syntax)입니다. 바로 이런 단일한 논리적 통사론이 후기에는 다양한 문법(grammar)으로 대체된다는 것이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문법을 간과한 채 단일한 논리적 통사론만 강조한 '논리학자들'의 목록에 "『논고』의 저자"인 자기 자신 역시 포함되었다는 것이 §23의 의미입니다. (그 외에도 §46-47, §97에서도 『논고』는 비판적으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들에 대해서는 더 많은 해설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

2. 언어의 문법을 제대로 준수하는 것: 주석적 관점에서

주석적 관점에서,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문법을 거스르는 무의미한 진술들을 비판하였다는 사실도 주류 해석에서는 부정하기 힘들 만큼 널리 통용됩니다. "철학의 문제들은 언어가 쉬고 있을 때 생겨나기 때문이다."(PI, §38), "우리가 하는 일은 낱말들을 그 형이상학적 쓰임에서 그 일상적인 쓰임으로 되돌리는 것이다."(PI, §116), "우리가 혼란에 빠지는 경우는 이를 테면 언어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헛돌 때 생겨난다."(PI, §132), "내가 허구에 관해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문법적 허구에 관한 것이다."(PI, §307)와 같은 구절들은, 철학에서 언어가 헛도는 경우들이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지적합니다. 당연히,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비판적 시선을 통해 프레게, 무어, 러셀 같은 자신의 동시대 분석철학 선배들을,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지시주의적 언어관의 대표적 인물을, 더 나아가 서구 형이상학 기원인 플라톤을 비판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 점과 관련된 구절들은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전부 거론할 수도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언어를 공회전시킨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으로, 더 정확히 말해 언어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것으로, 다시 말해 언어의 문법을 무시한 것으로 비판받는 것입니다.

3. 언어의 문법을 제대로 준수하는 것: 철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반론은 형이상학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적 비판과 상대주의적 비판을 혼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관점'이라는 단어 속에 몇 가지 논의의 층위가 뒤섞여 있어서 구분이 필요합니다.

(1) 삶의 형식으로서의 관점

'관점'이라는 말이 '삶의 형식'을 의미한다면, "상대의 언어가 나의 관점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라는 진술은 참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진술을 옹호합니다. "삶의 형식에서의 일치"가 없다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리는지" 자체가 없어진다고, 곧 해당 발화가 무의미해진다고 말입니다(PI, §239 참고).

오히려 이 진술을 부정하는 입장이야 말로 개념 상대주의나 형이상학적 독단주의에 빠집니다. 언어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참/거짓을 결정해줄 수 있는 형이상학적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우리가 일단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관점(삶의 형식)에서는 이해되지 않지만 여전히 의미를 지닌 언어"라는 말 자체가 자가당착이 되어버립니다. 즉, (a) 어떤 발화가 '우리의 삶의 형식'에서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 발화의 참/거짓을 의미 있게 결정해줄 수 있는 기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b) 어떤 발화가 의미 있게 참/거짓으로 결정된다면, 그 발화는 '우리의 삶의 형식'에서 이해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점(삶의 형식)에서는 이해되지 않지만 여전히 의미를 지닌 언어"란 마치 '보이지 않는 색깔'이라는 단어처럼 형용모순입니다. "우리에게 이해될 수 없지만 여전히 저 발화는 의미 있어!"라고 주장하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적 통찰을 받아들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삶의 형식 바깥의 형이상학적 실재에 호소하고 있는 갈팡질팡하는 태도입니다. (참고로, 바로 이 점을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비트겐슈타인 이외의 다른 인물 중 하나가 도널드 데이비슨입니다. 데이비슨의 유명한 논문 「개념적 도식이라는 바로 그 생각에 관하여」가 바로 "우리의 개념적 도식에서 이해되지 않지만 참인 언어"를 주장하려는 시도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글입니다.)

(2) 형이상학적 가정으로의 관점

그러나 반론으로 제기하신 내용이 "A라는 형이상학적 관점이 무의미하다고 비판하기 위해선는 B라는 형이상학적 관점이 다시 요구된다."라면, 이 주장은 틀렸습니다. 소위 '상대주의의 역설'("모든 진리가 상대적이라고 한다면, 모든 진리가 상대적이라는 진리 역시 상대적이다.")은 형이상학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적 비판에 적용되지 않습니다. 애초에 비특겐슈타인은 상대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건 단지, "너의 주장은 나에게 이해될 수 없다. 너가 너의 주장을 사용하는 법을 보여주지 않는 이상, 나는 너의 주장의 참/거짓을 의미 있게 평가할 수 없다."입니다.

즉, 이 비판은 형이상학에 대해 어떠한 적극적인 입장도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형이상학자들이 스스로 자신만만하게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들의 주장이 실제로는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가 대단히 막연하다는 점만을 지적하고 있을 뿐입니다. 적어도, 그들의 주장은 그들이 처음에 의도한 방식대로는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형이상학자들은 '감각 소여', '주/객 이분법', '사물 자체', '사적 언어' 따위의 개념들을 토대로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소 자신들의 체계가 성립한다고 믿지만, 실제로 그 개념들은, 마치 헛돌고 있는 브레이크 페달처럼(§6), 아무런 역할도 수행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이 비판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은 형이상학적 입장 A에 대해 참/거짓의 판단 자체를 내리지 않습니다. 그 입장이 무의미하다는 건, 그 입장이 판단의 대상으로 고려되기에는 너무나 막연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마치 "나바사팔라"라는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평가하기에는 애초에 그 말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겠다는 고백과도 같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자면, 어떤 입장이 무의미하다는 지적이란, 그 입장을 가지고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123) 혹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WLFM, 박정일 역 271-272)는 것입니다. 즉, 형이상학자들이 제시한 개념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4. 결론

따라서 gnuyhnow님의 반론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 가지 요건이 만족되어야 합니다. (a) 후기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주류 연구에 반대하여,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의 저자"를 비판하지 않았다는 새로운 해석을 정당화하셔야 합니다. (b) 마찬가지로, 주류 연구에 반대하여,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의 언어가 지닌 무의미성을 비판하지 않았다는 새로운 해석을 정당화하셔야 합니다. (c) '감각 소여', '주/객 이분법', '사물 자체', '사적 언어' 같은 형이상학의 개념들이 어떻게 해야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셔야 합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주장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이론적 부담을 짊어져야 합니다. 적어도, 제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작업이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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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료하게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해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해소(dissolving)나 극복의 의미를

라고 이해하지 않고, 이원론을 해결하는 일원론자라고 생각해서 일어난 문제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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