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가지 문제들을 구분해야 할 것 같습니다.
1. "『논고』의 저자"에 대하여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의 저자였던 전기의 자기 자신을 비판한다는 사실은 주류 해석에서는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여집니다. 이 사실은 기존의 연구들을 완전히 전복시키는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해석이 제시되지 않는 이상 거의 부정될 여지가 없습니다. §23의 맥락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다양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다양성을 소위 "논리학자들"이 간과하였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논리학자들이 언어의 구조에 대해 말했던 것"이란 바로 단일한 논리적 통사론(logical syntax)입니다. 바로 이런 단일한 논리적 통사론이 후기에는 다양한 문법(grammar)으로 대체된다는 것이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문법을 간과한 채 단일한 논리적 통사론만 강조한 '논리학자들'의 목록에 "『논고』의 저자"인 자기 자신 역시 포함되었다는 것이 §23의 의미입니다. (그 외에도 §46-47, §97에서도 『논고』는 비판적으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들에 대해서는 더 많은 해설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
2. 언어의 문법을 제대로 준수하는 것: 주석적 관점에서
주석적 관점에서,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문법을 거스르는 무의미한 진술들을 비판하였다는 사실도 주류 해석에서는 부정하기 힘들 만큼 널리 통용됩니다. "철학의 문제들은 언어가 쉬고 있을 때 생겨나기 때문이다."(PI, §38), "우리가 하는 일은 낱말들을 그 형이상학적 쓰임에서 그 일상적인 쓰임으로 되돌리는 것이다."(PI, §116), "우리가 혼란에 빠지는 경우는 이를 테면 언어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헛돌 때 생겨난다."(PI, §132), "내가 허구에 관해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문법적 허구에 관한 것이다."(PI, §307)와 같은 구절들은, 철학에서 언어가 헛도는 경우들이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지적합니다. 당연히,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비판적 시선을 통해 프레게, 무어, 러셀 같은 자신의 동시대 분석철학 선배들을,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지시주의적 언어관의 대표적 인물을, 더 나아가 서구 형이상학 기원인 플라톤을 비판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 점과 관련된 구절들은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전부 거론할 수도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언어를 공회전시킨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으로, 더 정확히 말해 언어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것으로, 다시 말해 언어의 문법을 무시한 것으로 비판받는 것입니다.
3. 언어의 문법을 제대로 준수하는 것: 철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반론은 형이상학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적 비판과 상대주의적 비판을 혼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관점'이라는 단어 속에 몇 가지 논의의 층위가 뒤섞여 있어서 구분이 필요합니다.
(1) 삶의 형식으로서의 관점
'관점'이라는 말이 '삶의 형식'을 의미한다면, "상대의 언어가 나의 관점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라는 진술은 참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진술을 옹호합니다. "삶의 형식에서의 일치"가 없다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리는지" 자체가 없어진다고, 곧 해당 발화가 무의미해진다고 말입니다(PI, §239 참고).
오히려 이 진술을 부정하는 입장이야 말로 개념 상대주의나 형이상학적 독단주의에 빠집니다. 언어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참/거짓을 결정해줄 수 있는 형이상학적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우리가 일단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관점(삶의 형식)에서는 이해되지 않지만 여전히 의미를 지닌 언어"라는 말 자체가 자가당착이 되어버립니다. 즉, (a) 어떤 발화가 '우리의 삶의 형식'에서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 발화의 참/거짓을 의미 있게 결정해줄 수 있는 기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b) 어떤 발화가 의미 있게 참/거짓으로 결정된다면, 그 발화는 '우리의 삶의 형식'에서 이해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점(삶의 형식)에서는 이해되지 않지만 여전히 의미를 지닌 언어"란 마치 '보이지 않는 색깔'이라는 단어처럼 형용모순입니다. "우리에게 이해될 수 없지만 여전히 저 발화는 의미 있어!"라고 주장하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적 통찰을 받아들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삶의 형식 바깥의 형이상학적 실재에 호소하고 있는 갈팡질팡하는 태도입니다. (참고로, 바로 이 점을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비트겐슈타인 이외의 다른 인물 중 하나가 도널드 데이비슨입니다. 데이비슨의 유명한 논문 「개념적 도식이라는 바로 그 생각에 관하여」가 바로 "우리의 개념적 도식에서 이해되지 않지만 참인 언어"를 주장하려는 시도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글입니다.)
(2) 형이상학적 가정으로의 관점
그러나 반론으로 제기하신 내용이 "A라는 형이상학적 관점이 무의미하다고 비판하기 위해선는 B라는 형이상학적 관점이 다시 요구된다."라면, 이 주장은 틀렸습니다. 소위 '상대주의의 역설'("모든 진리가 상대적이라고 한다면, 모든 진리가 상대적이라는 진리 역시 상대적이다.")은 형이상학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적 비판에 적용되지 않습니다. 애초에 비특겐슈타인은 상대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건 단지, "너의 주장은 나에게 이해될 수 없다. 너가 너의 주장을 사용하는 법을 보여주지 않는 이상, 나는 너의 주장의 참/거짓을 의미 있게 평가할 수 없다."입니다.
즉, 이 비판은 형이상학에 대해 어떠한 적극적인 입장도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형이상학자들이 스스로 자신만만하게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들의 주장이 실제로는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가 대단히 막연하다는 점만을 지적하고 있을 뿐입니다. 적어도, 그들의 주장은 그들이 처음에 의도한 방식대로는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형이상학자들은 '감각 소여', '주/객 이분법', '사물 자체', '사적 언어' 따위의 개념들을 토대로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소 자신들의 체계가 성립한다고 믿지만, 실제로 그 개념들은, 마치 헛돌고 있는 브레이크 페달처럼(§6), 아무런 역할도 수행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이 비판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은 형이상학적 입장 A에 대해 참/거짓의 판단 자체를 내리지 않습니다. 그 입장이 무의미하다는 건, 그 입장이 판단의 대상으로 고려되기에는 너무나 막연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마치 "나바사팔라"라는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평가하기에는 애초에 그 말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겠다는 고백과도 같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자면, 어떤 입장이 무의미하다는 지적이란, 그 입장을 가지고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123) 혹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WLFM, 박정일 역 271-272)는 것입니다. 즉, 형이상학자들이 제시한 개념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4. 결론
따라서 gnuyhnow님의 반론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 가지 요건이 만족되어야 합니다. (a) 후기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주류 연구에 반대하여,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의 저자"를 비판하지 않았다는 새로운 해석을 정당화하셔야 합니다. (b) 마찬가지로, 주류 연구에 반대하여,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의 언어가 지닌 무의미성을 비판하지 않았다는 새로운 해석을 정당화하셔야 합니다. (c) '감각 소여', '주/객 이분법', '사물 자체', '사적 언어' 같은 형이상학의 개념들이 어떻게 해야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셔야 합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주장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이론적 부담을 짊어져야 합니다. 적어도, 제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작업이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