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 중세철학 (2022)(완성)

(-) SEP의 중세 철학에 대한 번역입니다. (Medieval Philosophy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원 글은 더 자세하고 다양한 논의들이 있지만, 철학사를 다루는 부분만 발췌해서 번역했습니다. (중입니다.)

(0) 서론

"중세 철학"의 뜻은 지난 20년간 전문가들 사이에서 변했다. 다만 변화는 연대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중세 철학의) 연대에 대한 입장은 서로 나뉜 채 유지되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최소한 500-1500년 정도의 시기가 중세 철학이라는 데 동의하지만, 몇 학자들은 시작점을 올리거나, 끝나는 지점을 늦추자 주장한다.

변화는 지역에 관한 것이었으며, 언어와 문화에 관한 것이었다. 19/20세기에 중세 철학은 서유럽에서, 대부분 라틴어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파리와 옥스퍼드가 가장 중요한 중심지라 여겨졌다. 아랍어로 쓰여진 무슬림/유대 지식인들의 글은 오직 그 글이 라틴어로 번역되어 그리스도교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경우에만, 논의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중세 철학"은 라틴어로 쓰여진 그리스도교 학자들의 글만을 다루지 않는다. 비잔틴 제국에서 그리스어로 쓴 그리스도교 학자의 글도, 아랍어로 쓰인 무슬림/그리스도교 학자의 글도, 이슬람권역에서는 아랍어로, 그리스도권역에서는 히브리어로 쓴 유대교 학자의 글도 포함한다.

비록 서로 다른 흐름을 다루는 정도를 고르지 않다. 여전히 라틴 철학이 가장 많이 연구되지만, 아랍 철학에 대한 연구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으며, 다른 영역들은 여전히 무시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 다양한 언어와 국가에서 이루어진 중세 철학-하기는 단일한 전통에서 갈라진 것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 거슬러 올라가, 상이한 언어들 간에 이루어진 일련의 번역 작업을 통해 정합성이 유지된 전통 말이다. 그렇기에 "중세 철학"이 동일한 시대의 인도, 중국 혹은 다른 지역에서 이루아진 철학의 성취와 구분되어 다루어져야 한다.

이 글은 중세 철학의 구성 요소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1)의 설명은 특히, 중세 철학이 문헌과 그에 대한 주석을 중심으로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이 문헌들이 어떻게 중세 철학의 네 갈래로 전해졌는지 살펴볼 것이다. (2) 다음 부분은 이 시기의 철학하는 서로 다른 스타일들을 살펴볼 것이다. (3) 그 다음 부분은, 중세 철학에서 특히 관심을 보이는 것 중 세 가지를 중점으로 살펴볼 것이다 - 종교적 관심이 추론(reasoning)과 어떻게 상호작용했으며, 네 갈래가 어떻게 다른지 말이다. (4) 논리학과 이 시기 논리학이 가진 흔하지 않는 중요성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5) 중세 철학의 연대기에 관해 말할 것이다.

(1) 중세 철학의 구성 요소
(1-1) 문헌과 주석 전통

다른 시기와 마찬가지로, 중세에 철학은 다양한 형태의 글로 이루어졌다. 백과사전 - 개요서 - 모노그래프 - 짧은 에세이, 시적 - 알레고리적 - 소설적 표현에서 학교/대학의 학습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텍스트까지 말이다. 하지만 현대에는 그 중요성이 사라졌지만, 네 갈래의 전통의 중심을 차지한 글쓰기 장르는 주석이다. 가장 중요한 중세 철학 작업은 주석의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단순히 텍스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해하는 것보다 더 나아간다. 최소한 분석 철학 전통에서, 오늘날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가 "문제들"로 이루어졌다 여긴다. 이 문제들은 다른 사람들이 이에 대해 말한 것에 '도움'을 받아 다루어진다. 이와 반대로 중세 철학은 텍스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비록 이 문헌을 해석하려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해석의 전통은 대체로 (논의되는 텍스트와) 미미한 연관성만이 있는 새로운 사고로 이어졌다.

그리스-라틴-유대 -12세기까지의 아랍 철학자들이 주석한 핵심적인 텍스트는 아리스토텔레스였다. 비잔틴 철학자들은 그리스어 원본을, 라틴/아랍 철학자들은 번역본을, 히브리어 유대 철학자들은 (아랍어에서 번역된 발췌/요약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다루었다. 어떠한 고대 철학자의 텍스트도 이정도 수준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다만 라틴 전통에서는 보에티우스에 대한 여러 주석이 있고, 플라톤에 대한 주석도 산발적으로 있긴 하다. 또한 성경/쿠란에 대한 주석은 때로 상당한 철학적 논의를 포함하곤 했다.)

라틴 전통에서 17세기까지 아리스토텔레스에 직접 주석을 다는 것이 고등 교육의 핵심으로 남아있었다. [5-2 참고] 하지만 아랍 전통에서는 12세기부터 직접 주석을 다는 것을 멈추었으며, 스페인 밖에서는 더 일찍 그만두었다. 대신 그들은 이븐 시나의 아리스토텔레스 재해석에 주석을 달았다. [2-3, 2-10 참고] 이븐 시나에 대한 주석은 계속 쓰여졌지만, (이븐 시나 자체가 아닌) 시나의 설명을 재해석/재서술한 후대의 학자들에 대한 주석이었다. 이슬람 학자들에게 주석은 존경 받는 오래된 텍스트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최근 문헌에 대해서 논의하는 방식이었다. 비록 주석의 대상이 되는 문헌이 대체되는 것은 라틴 전통에서는 낯선 것이지만, 세 중세 라틴 문헌이 많은 주석의 대상이 되었다. 대학 신학부의 교재였던 성경과 롬바르드의 피터가 1155년 경 저술한 <명제집>이다. (<명제집>은 아우구스티누스를 광범위하게 인용해, 신학에 있어 문제적인 질문과 가능한 답변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문헌이다.) 1250-1550년 사이에 이루어진 최고의 신학적/철학적 작업들은 <명제집>에 대한 주서이지만, 롬바르드의 저서는 그저 논쟁의 디딤돌이었을 뿐이다. 스페인의 피터가 쓴 인기 있던 논리학 <논문>에도 여러 주석이 달렸으며, 당대의 가장 훌륭한 철학적 시였던 단테의 <신곡>에도 주석이 달렸다.

주석의 종류는 다양했다. (예컨대 12세기 라틴어로 된 논리학 해설처럼) 초심자들을 도와주기 위한 목적에서 쓰인 단순하고 문헌에 충실한 해설.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처럼) 높은 수준인 저자의 주장을 설명하는 문헌에 충실하지만 복잡한 주석. 산만한 논의와 여담이 길게 포함된 라인 바이 라인 주석 (모든 문장을 주석하는 것)(보에티우스-아벨라르의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주석, 이븐 루시드의 대주석). 때때로 새로운 내용과 생각, 강조점이 추가된 기존 문헌에 대한 패러프레이즈/개작 형태의 축약 (이븐 루시드의 개요서와 중간 주석) 옛 저자의 저서의 모든 부분에 대한 산만한 재해석. (이븐 시나와 대 알베르투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저서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 (유대/기독교 전통의 성경 해석, 중세 초기에 이루어진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대한 주석, 보에티우스에 대한 단테의 주석)
라틴 대학에서 이루어진 특한 형태의 주석은 "질문 주석"이다. 이는 책의 한 부분이나 (모호하지만) 더 넓은 단위의 내용과 관련된 질문을 제기하는 형태로 주석을 다는 것이다. 때론 텍스트는 그저 주석자가 가진 고유한 철학적 논의를 고정하기 위한 핀으로서 작용할 뿐이다.

(1-2) 늦고대의 플라톤 학파
그리스-라틴-아랍-유대, 중세 철학의 네 갈래의 중요한 뿌리는 두 가지 거대한 학파,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의 플라톤 학파이다. (비록 각 갈래가 각자의 고유한 뿌리 역시 가지지만 말이다.) 플로티누스에 의해 형성된 새로운 형태의 플라톤주의는 (스토아, 에피쿠로스, 회의주의와 같은) 헬레니즘 학파들을 대체하하며, 고대 로마 제국의 지배적인 철학이 되었다. 하지만 플로티누스의 유명한 제자인 포르피리우스는 스승의 가르침에 결정적인 변화를 주었다. 플로티누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을 플라톤의 반대자로 생각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에 적대적이었다. 하지만 포르피리우스는 지각-감각 가능한 세상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가 초-지각적 실재에 관한 플라톤의 사고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여겼다. 포르피리우스의 길을 따라, 플라톤 학파의 학생들은 (논리학을 시작으로) 모든 아리스토텔레스 문헌을 공부한 다음에, 플라톤의 대화록으로 넘어갔다. 중세 철학의 네 갈래에서, 부분적으로든 전체로든 살아남은 것은 이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커리큘럼이었다. 그러므로 중세 철학은 얼마간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역사다. 다만 이는 플라톤주의의 맥락에서 전승되었으며, 각기 다른 종교 전통 아래에서 형성되었고, 다양하고 변화하는 문화적 상황에서 개별 사상가들에 의해 계승되었을 따름이다.

(1-3) 번역 운동
(1-4) 다른 철학적 근원

(2) 중세 철학의 스타일
(2-1) 비잔틴 철학 (450-1450)

(자신들은 스스로를 로마인이라 여겼던) 동로마제국의 사상가들은 우리를 비잔틴이라 부른다. 이들은 고대 학파의 유산에 접근하기 위해 특별한 번역 운동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론적으로, 그들은 모든 고대 전통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단지 이것만이 (비잔틴 철학의) 백과사전적 경향을 추동한 것은 아니다. (백과사전적 경향은 포티오스의 <비블리오테카>의 사례에서 볼 수 있다. 이 책은 철학자를 포함한 고대 저자들에 대한 광범위한 모음집이다.) (고대 유산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은) 교회 인사들로 하여금, 논리를 넘어선 주석가들 "헬레니즘"이라는 죄를 범할 것이라 의심하게 만들었다. 기독교 교리보다 자신들의 그리스의 문화적 전통을 중시하는 죄 말이다. 가장 모험적이었던 세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가 미카엘 프셀로스, John Italos, Eustratius of Nicaea 중 오직 미카엘만이 이러한 비난을 피할 수 있었다. 400년 후, 비잔틴 제국의 몰락기에서, Gemistos Plethon는 플라톤와 이교도 플라톤주의에 대한 숭배를 통해 이러한 공포가 근거가 없던 것이 아님을 보여줬다.

몇 사학자들은 비잔틴 철학을, 아리스토텔레스, 때때로 플라톤과 그의 후계자들의 고대 문헌에 기반한 (위 문단에서 설명한) 전통으로만 한정한다. 하지만 비잔틴에는 두 가지 다른 갈래의 철학이 있었다. 하나는 1200년 이후, 라틴 철학을 살펴본 사상가들이었다. [1-3-5 참조]
또 하나는, 철학으로 경도된 그리스 교부들, 무엇보다 (성 바오로에 의해 개종한 아테네인 판관인 디오니시우스의 이름을 따서) 5세기 후반 일련의 글을 쓴 시리아인 수도자로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이다. 이 저자는 평범한 존재자들을 넘어, 궁극적으로 일자에 의해 탄생하는 다층 우주를 구상한 동시대 사람인 플라톤주의 이교도 프로클로스의 저서를 읽었다. 위 디오니시우스는 일자를 기독교 신으로 대체하였고, 프로클로스가 세 층위로 이루어진 자신의 만신전에 이교의 신들을 수용할 공간을 만든 곳에 천사와 교회들을 배치하였다. (고대 철학을 배웠지만 이에 적대적이었던) 고백자 막시무스는 위 디오니시우스, 특히 그의 부정 신학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비잔틴 사상은 아토스 산 [정교회의 가장 중요한 성지이자 수도원이 모인 곳]의 수도자, 그레고리 팔라마스의 작업에서 가장 강하게 드러난다. 그는 "신의 알수 없음"이라는 테마와 신이 특별한 종류의 고요한 기도를 통해 도움을 받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낸다는 아이디어를 결합시켰다.

(2-2) 지배적 규칙과 두 가지 예외 ; 라틴 철학 800-1100

9세기에서 11세기 사이 라틴 유럽권에서, 철학적 사고는 수도원과 (나중에는) 성당 학교에서 이루어졌다. 비록 그 첫번째 태동은 샤를마뉴의 궁전에서 8세기경, 알쿠인 - 오를레앙의 테오돌프 등의 학자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말이다. 7개의 자유 교과 [산학 교육을 위한 필수적인 7개의 예비 교육 과정 ; 문법/수사학/논리학 - 음악/산수/기하/천문]를 기반으로 이루어졌지만, 철하적 사고는 주로 문법과 논리학에 집중했다. 문법은 기초적인 언어 학습에서부터 복잡한 의미론적 분석까지 포괄했다. (처음에는 백과사전의 언급과 로마 시대 자료를 통해 알려진) 논리학은 10세기부터 보에티우스가 번역/주석한 포르피리우스의 <이사고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명제론> 그리고 보에티우스 자신의 저서를 통해 공부되었다. 보에티우스의 <짧은 신학적 테제>와 <철학의 위안> 또한 수업 교재로 쓰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는 교재는 아니었지만, 널리 읽혔으며 (그렇기에) 철학자들에게 정보 - 영감을 주는 또다른 자료였다. 이 시기, 라틴 철학은 (보다 고대의 자료에 접근이 가능해진) 12세기에 본격적으로 발전해, 대학 교육에 남아있게 될, 언어학적 분석과 논리를 강조하는 학풍을 확립하였다.

이 시기, 두 명의 뛰어난 라틴 사상가들은 이러한 스타일의 사고 방식과 어느정도 유사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예외적이었다.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는 850-870년 북부 프랑스에 있던 샤를 2세의 궁전에서 일하던 아일랜드 사람이었다. 그는 그리스어를 배워, 위 디오니시우스와 고백자 막시무스를 번역하였고, 그들의 아이디어를 흡수하였다. 에리우게나의 걸작 <자연의 구분에 대하여>는 프로클로스(와 궁극적으로는 플로티누스 - 플라톤으로 가닿는) 생각들을 체계화하여, 이를 이성적인 결론으로 이끌었다. 에리우게나는 당대 사람들이 선호하던 논리학 교재,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을 요약한 라틴어 교재를 활용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신은 자신이 어떻게 나타날지 보여주기 전까지는,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있지 않으며, 자신 스스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창조와 멸망 그리고 마지막 재림이라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형태로 드러내신다.

아오스타에서 태어난 안셀무스는 북 프랑스의 벡 수도원에서 수도사가 되었고, 최종적으로 캔터베리의 추기경이 되었다. 고대든 교부든 사상가들이 자신의 권위의 근거를 과시적으로 언급하던 시대에, 안셀무스는 권위 있는 저자들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 대화록과 논문을 썼다. 보에티우스의 논리학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의 여러 요소를 완전히 흡수하여, 안셀무스는 이 둘을 자기 고유의 추론에 사용할 수 있었다. 그는 전례 없는 새로운 신 존재 증명 (존재론적 증명)을 주장했을 뿐 아니라, 자유의지 관념을 옹호하는 정교하고 기발한 논의를 했다. (자유의지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부정되었으며, 이는 스코투스와 칸트, 그 이후까지 지속적으로 논의되었다.)

(2-3) 팔사파(falsafa)

그리스 철학 문헌의 광대한 번역은 이슬람 세계의 사상가들로 하여금, 그리스 스타일의 철학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러한 철학함을 자신들 스스로 팔사파라 명명하였다. 팔사파의 주창자들은 이슬람 법학을 근간으로 한 교육 시스템에 잘 융화되진 않았다.
맨 처음 팔사파를 한 사람은 왕자이자 박식가인 알 킨디로, 그는 특히 플라톤에 이끌렸다. 다음 세기, 바그다드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를 깊게 연구하고 주석을 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 무슬림, 기독교인 그룹이 융성하였다. 이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인 알 파라비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짧은 주석과 긴 주석을 모두 썼는데, 여기에는 의미론과 결정론에 관한 자기 고유한 생각이 가득한 <명제론>에 대한 두서없는 해설도 포함된다. 다른 저서에서, 알 파라비는 언어-철학-종교의 기원에 대한 자연주의적 주장을 하며, (다른 팔사파들에게도 널리 수용된 견해인) 자신들의 학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론 후서>에 묘사된) 증명적 과학을 제공한다 보았다. 이상적인 국가에 대한 그의 견해는 (요약본을 통해 얻은) 플라톤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며, 이는 프로클로스의 일자에서의 방출과 프톨레마이오 우주론을 결합한 우주의 질서에 대한 본인의 견해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의심의 여지 없이 (다음 세대의 아랍 이슬람 전통에서 불가결할뿐 아니라, 유대/라틴 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팔사파는 이븐 시나다. 이븐 시나는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났으며, 이슬람권 동부 지역의 여러 왕들을 섬기면서 살았다. 그는 자신의 접근법을 "서부 사람들", 바그다드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과 선명히 구분했다. 시나도 그들처럼 자신을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라 여겼다. 다만 서부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에 한줄한줄 주석을 달아 설명하고자 한다면, 자신은 스스로의 지성이 아리스토텔레스 문헌 밑에 있는 진리를 알도록 허락했기에, 문헌을 재구성/사유/체계화함으로서 그걸 드러낼 수 있다 여겼다. 따라서 이븐 시나의 작업물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다루었던 대부분의 영역에 대한 철학적 백과사전이다. <치유의 서>처럼 긴 것이든, <지시와 충고의 서>처럼 짧은 것이든,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과 상당히 차이나며, 주로 그의 아랍쪽 계승자들에 의해 연구되었다.

이븐 시나는 알 파라비처럼, 신이 단순히 목적인/궁극인으로서 우주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천체와 일련의 지성을 아래의 지성적 존재에게 방출하여, 현세의 존재에게 형상을 주는 자로서, 자연의 지속되는 규칙성을 보증하는 자로서 기능한다 보았다. 그의 혁신은 이 최초의 원인을 하나의 필연적 존재, 즉 그 스스로 필연적인 존재와 동일시했다는 점이다. 신의 본질은 존재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다른 모든 것들은 그저 가능할 뿐이며, 다른 것 (신)에 의해서 필연성을 가져 필연적 존재가 될 뿐이다 이븐 시나의 신은 (알 파라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선택하거나 의지를 가진 존재가 아니기에, 신 스스로과 다른 것들의 필연성에 대한 시나의 이론은 온 우주의 역사를 굉장히 강고한 충족이유율에 속박시킨다.

(2-4) 칼람(Kalam)

알 킨디보다 한 세기 전, 매우 다른 스타일의 철학함이 이슬람 세계에 출현했다. 이는 칼람이다. 기실 팔사파가 자신이 칼람보다 세상을 설명하는 더 나은 방법이라는 주장을 통해, 칼람을 비판하면서 성립되었다 보는 학자도 있다. 칼람은 쿠란에 내재한 문제에 기반하지만, 기독교인이 철학에 기반한 비판에서 이슬람교의 교리를 옹호하는 것에 영향을 받았고, 고대 그리스 전통에서 몇 가지 아이디어를 수용했을지 모른다. 9세기의 지배적인 칼람 학파는 무타잘리였다. 이들은 신의 정의와 반드시 상응하는 도덕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인간 이성의 능력을 매우 확신했다. 또한 이들은 신의 단일성을 매우 강조했으며, (다른 칼람 사상가들과 동일하게) 원자론적, 물질주의적 물리학을 발전시켰다. (이는 자연종이 실체[substance]을 가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적/안정적인 세계관과 매우 다르다.) 칼람의 유대교 버전은 Saadya의 작업물에서 찾을 수 있다.

알 아사리(Al-Ashari)는 칼람의 방향성을 바꾸었다. 그는 신의 완전한 전능성을 강조하며, 매순간순간의 원자의 배열과 인간 의지와 행동이 신에게 달려있다 말했다. 한 세기 후, 알 주와이니(Al-Juwayni)는 이븐 시나의 사상을 칼람에 도입하였고, 그의 제자인 알 가잘리는 여기서 더 나아갔다.

알 가잘리는 칼람 신학, 이븐 시나 철학과 수피즘을 공부하였으며, 이 세 주제에 관한 책을 모두 쓴 동시에 가장 훌륭한 이슬람 법학자이기도 하다. 그의 저서는 (이븐 시나의 짧은 철학적 백과사전에 기반한) <철학자들의 의도>도 있지만, 이븐 시나로 대표되는 팔사파를 비판하는 <철학자들의 모순>도 있다. 이 책은 매우 영향력이 있었으며, 이슬람 세계의 철학함의 종말을 가져오는데 큰 영향을 미친 철학의 원수라는 악명을 알 가잘리에게 주었다. 하지만 사실, 알 가잘리가 이븐 시나와 그의 이단적 후계자들의 주장 중 유죄라 본 것은 고작 세 개였다. 세상의 영원성, 신의 지식을 우주로 한정한 것. 마지막으로 육신의 부활을 부정한 것. 그의 비판이 보여주는 것은, 이 세 가지 결론만 피한다면, 이븐 시나의 철학이 무슬림에게 수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실 알 가잘리 본인도 시나의 철학에서 두 가지를 크게 변화시킨 후 수용했다. 신은 의지가 있으며, 대안들 사이에서 실제 선택을 할 능력이 있다. 나아가, 이븐 시나와 같은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주장과 다르게, 증명적 지식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 주장의 시작이 모두 자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학자들처럼, 그들의 추론은 역시 변증적이었다.

(2-5) 12세기 파리 학교들

12세기 라틴권 유럽에서 파리는 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왜냐하면 교구의 권력자들이 하나의 학교를 운영하는 대신, 서로 경쟁하는 다수의 학교를 허락했기 때문이다. 뛰어난 학자들이 여기 보이자, 전 유럽의 학생들도 파리에 모이기 시작했다.

이들 뛰어난 학자들은 10세기 후반 이후 거의 변하지 않는 논리학 커리큘럼에 집중했다. 다만 여기에 사용된 텍스트들이 이제는 철저히 흡수되었을 따름이다. 이 논리학 커리큘럼은 학자들에게 논리학을 발전시킬 기회를 줄 뿐 아니라,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대신) <범주론>에 기반한 형이상학을 발전시킬 기회였다.
이들 형이상학자 중 가장 용감한 사람은 피터 아벨라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은 개별적인 실체 (이 남자)와 개별적인 형상(이 흰색)뿐 아니라 보편적인 실체/형상 역시 함축하는 듯하다. 아벨라르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어떠한 보편자의 존재도 주장하지 않는 세계꽌과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을 하려 노력했다. 그는 또한 문장이 말하는 것(dicta)의 존재론적 지위에 대해서도 사유했다. Dicta는 아벨라르의 참에 대한 이해와 논리적 귀결에 대한 이론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아벨라르는 dicta가 딱히 중요하지 않다 우겼다.) Gilbert of Poitiers는 이보다 복잡한 형이상학적 체계를 만들었다. 이 체계는 담론의 종류에 따른 구분에 기반한다. (자연적, 수학적, 신학적, 윤리적)

12세기 후반기에 활동한, 이 두 학자와 그들의 혁신적 후배들은 신학에 대해서도 썼다. 사실 길버트에 남아있는 문헌은 모두 신학 문헌으로,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보에티우스의 짧은 신학적 테제들에 대한 주석이다. 길버트는 (성공적이진 않지만) 보에티우스의 <짧은 신학적 테제들>에서 확립한 방법을 사용하여, 자연적 현상과 신성한 신비를 최대한 유사하게 보는 동시에, 어느 기점이 (동일시를) 멈춰야 하는 기준인디 제시하려 했다. 삼위일체에 대한 합리화된 접근과 (인간과 다르게) 신은 자신이 한 행동과 다르게 행동할 수 없다는 아벨라르의 고유한 신학적 아이디어는 대체로 거부되었으며, 몇은 이단적이라 비난받았다. 하지만 권위있는 문헌들 간의 표먼적 모순을 개념 분석을 통해 조화시키려는 그의 시도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널리 수용되었으며, 후대 중세 신학의 기초를 형성하였따.

논리학과 신학에 중점을 덜 둔 다른 철학적 접근 역시 발전되었는데, 특히 파리 바깥에서 그랬다. William of Conches는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대한 자세한 설명에 집중했으며, 플라톤을 진리로 삼아 물리 과학에도 집중했다.

(2-6) 이슬람권 스페인 1050 - 1200

12세기 파리에서 특유의 철학적 방법이 성장한 것처럼, 그와 동시대의 이슬람권 스페인 역시 고유한 스타일의 사고방식이 출현하였다. 이는 그리스 전통의 과학과 철학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는 스타일이었다. 첫번째로 가장 중요한 사상가는 유대인인 솔로몬 이븐 가비롤로, 플라톤주의의 강한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세상이 필연적인 방출이 아닌 신의 의지로 만들어졌다는 주장도 하며, 질료는 (지성적 창조물들을 포함해) 모든 단계의 창조물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븐 투파일은 유일한 저서인 <하이어 이븐 야크잔>이라는 철학 소설로 유명해졌다. 이 소설은 Hayy가 사막인 섬에 자연스럽게 성장하여, 스스로를 관찰과 이성적 사고로 가르쳐, 이븐 시나의 철학 - 이슬람 교리의 내적/영적인 가르침과 완전히 동일한 내용에 도달했는지 기술한다.

이븐 루시드(아베로에스)는 이슬람 법관이자 법 이론가로, 극도로 반-유대/반-기독교적인 알모하드 왕조에 봉사하였다. 또한 그는 중세의 가장 헌신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일 것이다. 이슬람 동부의 학자들이 이븐 시나를 통해 팔사파를 공부했다면, 이븐 루시드는 바그다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처럼 아리스토텔레스 문헌에 주석을 다는 형태의 작업을 했다. 그는 거의 모든 아리스토텔레스 문헌에 대한 짧은/중간 패러프레이즈한 주석, (모든 단락에 구체적인 설명을 적은) 몇몇 텍스트에 대한 대 주석을 적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번역을 통해 이 저서를 접한 기독교/유대교 학자들에게 귀중한 것이었다. 다만 <영혼에 대하여>에 대한 그의 대주석은 매우 논쟁적이었다.

모세 벤 마이몬 (마이모니데스)는 스페인에서 교육받았지만, 알모하드 왕조의 정책에 의해 떠날 것을 강요받아 이집트에 정착했다. 이븐 루시드처럼, 마이몬은 아리스토텔레스 문헌 자체와 알 파라비를 연구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능한 가장 완벽한 과학을 성취했다 믿었다. 하지만 이 과학이 얼마나 유대교의 교리와 합치할까? 유대법에 대한 그의 방대한 저서에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증명적 과학이 문자 그대로의 진실을 제공한다는 견해를 수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생애 후반기에 쓴 <방황하는 자들의 안내서>에서 마이몬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유대교 교리 간의) 불일치를 탐구하면서, 표면적으로는 세상이 영원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심적 주장을 논박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는 유대교 법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내서>의 서두에 마이몬은 자신이 때론 자신의 의미를 숨겨놓는다 설명한다. 그리고 몇 학자들은 정확히 해석할 경우, <안내서>가 아리스토텔레스 관점을 옹호한다 믿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 결론을 회의적으로 바라본다.

(2-7) 대학 철학 [대체로 우리가 아는 스콜라 철학과 일치한다. 다만 스콜라 철학 이후 대학 제도권의 철학까지 포괄하고자 대학 철학이라는 생소한 명칭을 사용한듯 하다.]

1200년경, 파리의 학교들은 대학이 되었으며, 거의 동시기에 옥스퍼드에도 대학이 생겼다. 대학은 인문학부와 신학/법학/의학의 상위 학부로 나누어진다. 인문 학부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속한 곳이었으며, 상위 학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더 연장자이며, 대체로 인문학부나 이에 상응하는 곳에서 교육을 받고 왔다. 문법과 논리학에 대한 공부가 교육의 초반부부터 이루어졌다. 하지만 몇십년 간의 기독교적 반대를 뚫고, 13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 문헌 전체의 번역서가 점차 수업 시간에 활용되었으며, 인문학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에 따라 커리큘럼이 나누어지는 사실상의 아리스토텔레스 학부가 되었다. 비록 대학이 교회의 후원 아래 있었지만, 인문학부의 공부는 자연에 대한 지식에 한정되는 것으로 상정되었으며, 이 지식의 기원인 이교도 아리스토텔레스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지식의 최고의 대표자로 여겨졌다. (신학적/계시로) 드러난 진리에 대한 (순수한 철하적 여담이 가득한 고도의 논쟁적인 형태로 이루어진) 탐구는 신학부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는 곧 대부분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의 수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13세기 중반, 대학 철학자들은 이븐 시나의 수정에 찬사를 보내며, 이븐 루시드의 주석에 도움을 받아 이해하면서 새롭게 접근 가능해진 아리스토텔레스 문헌에 열광하였다. 1260대와 1270년대에 연구하던 두 명의 유명한 파리 인문학 대학자인 SIger of Brabant/Boethius of Dacia는 (인문학부에게 요구된 대로) 드러난/계시된 교리와 독립적일 뿐 아니라, 기독교의 가르침과 모순되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는 상태에서 자신들 고유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발전시키려 노력했다. 도미니코회 수사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보다는 덜 열광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지만,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진리임에 틀림 없는 증명적 결론에 도달하였으며 이는 (진리라는 점에서) 기독교 교리와 모순되지 않을 것이라는 무제한적인 확신을 가졌다. (비록 기독교 교리에는 계시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말이다.) Siger/Boethius of Dacia는 1277년 파리 대주교가 대학의 사상가들에게 행한 정죄의 목표물이 되었다. 그쯔음에 죽은 아퀴나스 역시 이 정죄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기에, 논쟁적인 인물로 남게 되었다. 비록 도미니크회의 권력자였지만 말이다.

다음 세대에서 이 정죄를 내린 위원회의 구성원인 겐트의 헨리가 가장 영향력 있는 파리의 신학자였다. 하지만 파리에 교육자로서 파견된 옥스퍼드 출신의 프란체스코회 수사 둔스 스코투스가 논의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온전히 흡수하였지만, 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이 틀렸다 보았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신 개념은 (신에게) 신성한 선택(divine choice)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양상 개념을 거부하며, 신성의 전능성을 강조하며 신성한 의지가 선/악을 결정하는 요인이라 보았다. 형이상학에서 스코투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도식을 복잡하게 만드는 미묘한 구분을 다양하게 도입하였다. (교황의 수사를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바르비아 황제를 따르기 전, 옥스퍼드와 런던에서 일했던 프란시스코회 신학자 오컴의 윌리엄은 신의 의지에 대해서는 스코투스의 견해를 따랐지만, 스코투스의 형이상학을 매우 희미한 존재론으로 대체하였다. 이 오컴의 존재론은 스코투스가 실제라 믿은 구분이 사실 심적 언어를 통해 만들어졌다 본다. 오컴은 또한 훌륭한 논리학자로서 그와 그의 뛰어난 동시대 옥스퍼드인들은 (아벨라르나 12세기 파리 사상가들과 다르지 않은) 논리학적/언어학적 분석을 했다. 십년 가량 파리의 인문 학부를 이끈 대 학자였던 John Buridan 또한 훌륭한 논리학자로서 유사한 프로그램을 따랐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자로서 이교 텍스트에 충실하면서도, 기독교 교리의 궁극적 진리를 동시에 존중하고자 분투하였다.

비록 14세기 중반 라틴 대학 철학의 대부분은 희미해지지만, 이러한 철학의 방식은 최소한 3세기를 더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 시기는 유럽 각지에 대학이 성립된 시기이기도 하다. 14세기 후반, 옥스퍼드에서 교육받은 John Wyclif는 정교하고 우상파괴적인 신학-철학 체계를 주장했다. 이 사상은 자신의 시대에 가장 뛰어난 논리학자인 Paul of Venice에 의해 계씅되었다. 이탈리아 대학의 인문학부는 특히 15세기 후반과 16세기에 번성했다. 이 학자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은 피에르토 폼포나치다. 그는 기독교 교리와 차이가 있든 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정한 사상에 대해 탐구하는 인문학부의 특권을 가장 대담하게 옹호한 사람이기도 했다. 이러한 대학 철하의 전통은 이탈리아에서는 GIacomo Zabarella 같은 사상가를 통해, 스페인/포르투갈의 많은 중요한 인물들을 통해, 거의 두 세기는 더 지속되었다.

(2-8) 대학 밖에서의 라틴 철학, 1200 - 1500

철하은 중세 라틴 세계에서 대학 밖에서도 이루어졌지만, 사학자들은 이제야 이 흐름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 시기의 가장 유명하고 널리 연구되는 비-라틴어 속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 등등등) 문학의 걸작들은 철학적 문헌이기도 하다. 가장 명확한 예시는 단테의 <신곡>이다. 이는 이탈리아어 운문으로 쓰인, 인간 사후 운명에 대한 알레고리를 통해 사랑과 도덕적 의무를 연구한 저서다. 비록 대학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단테는 (라틴어로 훌륭한 정치학 논문을 썼을 뿐 아니라) (아퀴나스와 그의 스승 대 알베루스와 인문학 대 학자들과 같은) 13세기의 위대한 사상가들을 (무조건적으로 추종하지 않고) 수평적으로 그리고 독자적인 사상가로서 다루었다.

단테는 의인화와 정교한 산문/운문이 교차하는 형식의 철학적 작품인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에서 기원하는 전통 아래에서 작업했다. 위안은 거의 모든 유럽 언어로 번역되었다. <위안>의 영향력은 12세기 <위안>의 영향을 받은 라틴어 작품인 베르나르두스 실베스트리의 <우주론> (이 작품은 <티마이오스>의 영향도 받았다)과 Alain of Lille의 의 영향과 합쳐졌다. 비-라틴어로 쓰인 최초의 철학적 시는 이 유산들과 연속적인 1270년 경, 장 드 뫼의 <장미 이야기>이다. 장 드 뫼는 파리 대학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법률가였다. <장미 이야기>와 <신곡>을 모두 염두해 두고, 14세기 후반 영국 작가들인 초서와 랭런드가 철학적 시를 썼다. (초서는 <트로일루스와 크리세이드>, 랭런드는 <농부 피어스의 꿈>을 썼다.)

[보론 ; <장미 이야기>의 저자는 두 명이다. 1부는 기욤 드 로리스가 썼으며, 2부의 저자가 장 드 뫼다.]

나아가, 라틴어로 작업한 몇 고등 교육을 받은 철학자들도 대학 밖에 있었다. Ramon Llull는 카탈루냐어는 물론, 라틴어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아랍어로까지 작업을 했다. 그는 대학의 논리학과 무관한 자신만의 논리 체계를 고안하여, 신과 신의 속성을 생각하며 기독교의 진리를 증명하고자 했다. 15세기 대학에 속하지 않은 철학자로는, 추기경-교황의 외교관이었던 쿠사의 니콜라스, 궁정인지아 교황의 비서였던 Lorenzo Valla,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는 Marsilio Ficino, 귀족인 피코 데 미란돌라 등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대학의 철학들과 다른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며, 고대의 고전들을 높게 평가하였다.Ficino는 유명한 플라톤주의자였고, 피코는 카발라에서부터 대학 신학까지 모든 가능한 자료에서 지혜를 찾으려 했다.

중세의 여성은 대부분의 형태의 고등 교육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매우 적지만) 이들이 특정한 형태의 철학을 공부하고 참여할 기회가 있긴 했다. 이 중 몇몇은 신비주의자로 묘사되며, 철학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예컨데 빙엔의 힐데가르트, Margaret Porete, Mechthild of Magdeburg 등이 있다.) 그리고 Christine de Pizan이 있다. 그녀는 결혼한 여자로, 프랑스 왕의 점성술사였던 아버지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남편 사후, 자신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프랑스어 시를 썼다. 처음은 서정적인 시였던 그녀의 작품은 보에티우스와 아퀴나스를 인용한 점차 철학적인 시가 되었으며, 여성이 처한 제약된 상황과 여성들의 능력에 대한 강한 자의식을 내포한다.

(2-9) 기독교 유럽에서의 유대 철학

이슬람권에서 아랍어로 쓰인 독자적인 유대 철학은 마이몬 사후 사라졌지만, 히브리어와 히브리어로 번역된 아랍어 자료를 사용하는, 주로 스페인/남프랑스/이탈리아 등의 기독교 유럽권에 위치한 유대 공동체의 철학은 부상하기 시작했다. 핵심적인 문헌은 마이몬의 <안내서>, 이븐 루시드의 주석 (특히 그의 중기 저서)이었다. (이븐 루시드의 주석은 때로 유대 사상가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래 작품보다도 선호되었으며, 몇은 여기에 복주를 쓰기도 했디.)

설명했듯, 마이몬은 자신의 <안내서>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지 열어놓았다. 13-14세기의 몇 유대 사상가들은 문자 그대로 읽어도 이 책이 여전히 철학적 생각에 지나치게 치우쳤다 여겼지만, Samuel ibn Tibbon으로 대표되는 얼마간의 사상가들은 비의적 독해를 선호하며, 이는 책을 보다 급진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만들었다. (Tibbon은 마이몬의 책을 히브리어로 번역한 사람 중 한 명이다.) Moses of Narbonne 또한 <안내서>를 이런 방식으로 읽었으며, 철학이 온전한 진리를 가르치며 종교는 이에 대한 비유적인 형태를 제공함으로서,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한다는 이븐 루시드의 입장을 수용했다.

레비 벤 게르숀 (게르소니데스)는 마이몬과 이븐 루시드의 충실한 독자였지만, 가장 뜨겁게 논의되던 질문에 대해선 모든 입장들을 논의한 다음 자신 고유의 관점에 도달하려 했다. 그의 걸작인 <신의 전쟁>에서, 그는 주장에 입각한 자신의 결론이 기실 토라와 어떻게 합치하는지 설명한다. 신적인 예지와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그의 견해는,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입장의) 궁극적인 결론까지 따라가고자 했던 그의 소망에 대한 놀라운 예시다.

<신의 전쟁>은 하스다이 크레스카스의 <주님의 빛>과 라이벌 관계이다. 이 책은 중세 히브리 철학 문헌 중 가장 심오하며 모험적인 저서다. 크레스카스는 게르소데스와 철저히 정반대인, 신적 예지에 관한 대담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스스로를 유대교 정통의 수호자라 여기며,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반대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의 근본적인 신조에 관한 설득력 있는 반박을 제시했다. 그는 공허의 존재, 세계의 다수성, 육신이 없는 시간, 현세와 천상계를 지배하는 공통된 법칙에 대해 주장했다.

유대 사상가들은 자신들 고유의 전통과 아랍 전통의 영향만을 받은 것은 아니다. 게르소니데스는 아마 (비공식적으로) 기독교 대학 철학의 문제와 기술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라틴어 저작들은 히브리어로 번역되었으며. 15세기 Abraham Bibago/Judah Messer Leon 같은 몇몇 유대 사상가들은 라틴 철학계에서 널리 읽혔다. 한편 Eljiah Delmedigo는 라틴어와 히브리어 모두로 저서를 썼으며, 파도바 대학 그룹과 교류하며, 피코 데 미란돌라를 번역했다.

(2-10) 고전기 이후 아랍 철학

"고전기 이후"는 12세기 스페인을 제외한, 이븐 시나 이후의 아랍 철학을 가리키기 위해 전문가들에 의해 사용되는 별명이다. 이 시기는 최근에 들어서야 역사적으로 공부되기 시작한 거대한 재료 뭉치들로 대변된다. (비록 이 시기의 저술은 몇몇 장소에서는 20세기까지도 살아있는 전통이었지만 말이다.) 이는 연구의 흥미로운 최전선이다.

널리 퍼진 논리학에 대한 공부를 차치하고, 네 가지 요소가 이 시기의 철학함을 형성했다. 이븐 시나, 칼람, 수피즘 그리고 (이미 앞선 세 가지 요소를 어느정도 결합한) 알 가잘리. 이븐 시나의 백과사전은 인용 문헌으로서 거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과 주석 전통을 대체하였다. 특히 <지시와 충고의 서>는 몇 세기 동안 계속 주석되었다. 이븐 시나의 전통을 따르는 새로운 백과사전들이 쓰여졌으며, 이 새 백과사전에 대한 주석 역시 쓰였다. 다만 이븐 시나에게도 충실한 추종자가 있었지만, 그의 작업에 대한 학자들의 태도는 대체로 비판적이었다. (삶의 후반기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유대인인) Abū-l-Barakāt al-Baghdādī는 자신의 저서 <신중히 사유된 것들에 관한 책>에서 이븐 시나와 여러 측면에서 다른 차이점을 보여준다. 그의 비판적인 입장은 <지시>에 대한 영향력 있는 주석을 쓴 Fakhr al-Dīn al-Rāzī에 의해 계승되었다. Razi의 비판은 다음 세대의 선도적인 학자인 al-Tusi에 의해 반박받았다. Razi는 또한 선도적인 칼람 신학자였다. 팔사파에 대한 알 가잘리의 비판에 대한 Razi의 응답은 두 묶음의 다른 가르침을 내리는 것이다. 자신의 주석에서는 (바핀에도 불구하고) 이븐 시나의 핵심적인 논리를 수용하는 한 편, 자신의 칼람 저서에는 이븐 시나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 분야의 저서를 모두 쓴) Razi의 사례가 보여주듯, 고전기 이후 시기에 칼람과 철학 (이제 그리스어에서 기원한 팔사파라는 용어 대신, 지혜를 뜻하는 히크마[hikma]라는 용어로 불렸다) 구분은 부드러워졌다. 예컨대, al-Iji의 매우 영향력 있는 저서인 <칼람에 있는 정거장에 대한 책>은 (al-Jurjani에 대해 주석되었는데) 많은 부분 이븐 시나의 가르침을 따왔다. 비록 이에 대부분 반대하지만 말이다.

이븐 시나에 대한 다른 갈래의 반응은 알 수흐와라마르디의 저서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플라톤적인 형상을 수용하는 한편, 개별자에게 보편적 형상이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부정하였다. 대신 우리는 실제로 존재하는 개별자들을 논변을 통한 추론이 아닌 그들의 현존에 의해 직접적으로 알게 된다 주장하였다. 알 수흐와라마르디는 조명 학파를 창시하였다. 수피즘은 풍부한 철학적 용어와 철학적 전통에 대한 밀접한 인용을 통해 정교화되었지만, 여전히 철학과는 구분되었다. 이는 Ibn Arabi의 공로로, 그의 사상은 al-Qunawi에 의해 보다 체계화된다.

이 모든 요소들이 이 이후의 역사에서 결합된다. 예컨대, 이란에서 철학이 번성하는 초기있었던 유명한 논쟁에서, al-Dawani는 수흐와라마르디와 Ibn Arabi의 관점에서 이븐 시나를 읽었다. 한편 그의 비판자는 al-Dashtakis는 이븐 시나의 텍스트 그 자체에 충실했다.

(3) 중세 철학의 세가지 중심 문제
(4) 논리학의 중요상
(5) 그래서 중세 철학은 언제부터 언제까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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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 분량이 꽤 되네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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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이네요. 번역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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