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적 전통과 학술언어 그리고 민중어

(0) 태그가 참 애매해서...일단 중세 철학으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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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에 관한 몇 가지 글을 썼는데, 여기에서 다양한 시공간적 범위의 학문 공동체에서 나는 공통된 경향을 한 가지 적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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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 학문 전통은 그 학문에 참여/교류하는 사람들이 쓰는 '언어'로 정의되는 경향이 있다. 서유럽 중세 철학이라면 라틴어, 인도 철학이라면 산스크리스트어, 중국 철학이라면 고전 한문이다. 이들 언어는 굉장히 '특별한데', 이미 '중세 시기'라면 이들 언어는 일상적 구어(민중어)로서는 사실살 사멸하고, 학술 공동체의 문어로만 살아남아 있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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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굉장히 흥미로운 현상을 하나 목격할 수 있다. 바로 학술 언어와 대비된은 민중어/일상 언어에서 최초의 텍스트가 탄생할 때, 이 텍스트들은 (시공간적 다양성에서 불구하고) 하나의 공통된 경향을 보인다.

(a) 우선 대체로 민중어의 구전 공동체에서 '형식적으로' 잘 확립된 장르들이 활자화되는 경우가 흔하다. 예컨대, 유럽에서 라틴어가 아닌 민중어로 기록된 최초의 내용들은 당대 서사 시인들 (흔히 바드라 불리던 사람들)이 부르던 서사시였고, 인도에서도 산스크리트어가 아닌 타밀어/프라크리트어로 기록된 최초의 내용들은 전문 예능인들이 불렀던 (혹은 그리 추정되는) 서사시다.

(b) 그리고 학술 언어를 사용하는 학술 공동체의 배경을 반영하는 번역 텍스트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각 민중어로 번역된 성경이라던가, 각 언어로 번역된 라마야나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대체로 인도에서도 각 지역 민중어가 보존된 첫 텍스트는 그 지역 문법/언어학/시학인 경우가 많다.)

(c) 그리고 일상과 밀접히 관련된 굉장히 실용적인 기록들이 남는다. (사전, 상업 기록 등등. 사실 당대에는 이걸 독서를 위한 문헌이라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기록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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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최초의 민중어로 자신들만의 학술 '담론'을 형성할 때, 흥미로운 텍스트들이 산출된다.

이들은 기존 '학술 언어'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대체로 독자층을 기존 학술 공동체가 아닌, '민중'을 대상으로 하며, 그렇기에 굉장히 독자적이고 (어떤 의미에서 비체계적인) 사상을 만들어낸다.

인도 철학에서도 산스크리트어가 아닌 각 지역어로 작성된 '의미 있는 철학적/학술적 담론들'은 각 지역 공동체의 박티 신앙을 표현한 문헌들이 최초다. (특히 타밀 시바파에서는 타밀어로 작성된 이 찬송시들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
서유럽에서도 상황은 유사하다. 중세와 르네상스 사이에 등장한 '기이한' 신비주의자/철학자들은 보통 민중어로 자신들의 텍스트를 작성하는 경우가 흔했다. 독일 신비주의로 흔히 통칭되는 마이스터 에카르트, 야코브 뵈메, 안겔루스 질레지우스 등은 (라틴어로 쓰는 경우도 있었지만) 독일어로 자신들의 사상을 표현했다.
한국도 유사하다.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은 한문으로 쓰여졌지만, <용담유사>는 한국어로 쓰여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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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nacular로 씌인 1세대 사상들이 소위 신비주의적 면모를 띄는 것은 애초에 왜 Lingua Franca가 아닌 vernacular로 써야 했는지에 대한 정당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일한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동일한 역사/문화/정치 공동체를 (상상적으로) 표상하거나 규정지을 수 있게 해준다는 사실은 이미 역사학/정치사상/민족주의 연구에서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자신의 사상을 보편적 학술언어가 아닌 vernacular로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곧 자신과 자신의 사상 그리고 자신의 독자들이 학술언어의 외연이 아닌 다른 외연을 가진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함축하죠. 예컨대 라틴어로 쓰기를 포기하고 지역 이탈리아어나 지역 독일어로 쓴다는 것은, 다른 유럽지역의 지식인들을 (직접적인) 독자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더 나아가면, 지역 독일어로 씌여진 나의 사상이 라틴어로는 표현될 수 없다고 생각했거나, 라틴어를 사용하는 화자들은 독일어로 씌여진 나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배타적 정체성을 상징하기도 하죠. 이러한 배경에서 vernacular 사상이 신비주의적인 색채를 띄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봐요. 어쩌면 이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사상 자체보다는 자신들이 사용하는 vernacular의 효용과 정체성을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죠. 이러한 지점들은 단순히 철학사의 문제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나 정치사상 연구에서 굉장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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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제가 말한 사례가 얼만큼 @Herb 님이 말하신 것처럼 해석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는 동의하는 바이지만,

이 역시도 '독립적인' 주장으로는 나름 수용할 수 있지만

이 둘의 결합이 제가 말한 사례에 해당하는지는 조금 더 고민해봐야 할 문제 같습니다.

즉, 이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이러한, 정체성과 관련된 주장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생각합니다. 정체성과 언어는 관련성이 있을 수도 있지만, 관련성이 없을 수도 있으니깐요. 그저 자신의 모국어라서 더 편했던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당시 라틴어 출판계에서는 상업성 등의 이유로 수용될 수 없는 장르였을 수도 있고, 버내큘러 언어를 선택할 만한 다른 요인을 온전히 배재할 수는 없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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