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문제를 해소하는데 성공했는가? - YOUN과 voiceright의 논쟁에 대한 단상 (1)

최근 올빼미에서 벌어졌던 논쟁 중 가장 심도 있고 가장 첨예한 언어로 각을 세우는 글을 보고 감명을 많이 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 특정 학자, 특히 비트겐슈타인같이 난해한 학자를 해석하는 일은 저한테는 너무 벅찬 일이라, 존경의 눈으로 두 분의 논의를 봤습니다. 다만, 저는 이 문제가 단순히 비트겐슈타인 해석에 그치지 않는,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론철학이 내적으로 모순을 지니는, 그것도 사용을 지니지 못하는 모순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실패한 언어게임을 보이는 식으로 철학적 문제를 해소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론철학자들이 좇는 "철학적 요구"를 언어게임의 문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줌으로써 해소하는 방식으로 철학적 문제를 해소하는 문제인지가 저에게는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밀한 텍스트적 근거를 들기보다는 단상을 위주로 쓴 글이니 혹시 문헌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시면 지적해주시길 바랍니다.

  1. 비트겐슈타인의 칸트적 독해 vs 헤겔적 독해

저는 두 분의 논쟁을 보면서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두 분의 해석하는 비트겐슈타인이 한 쪽은 칸트를(voiceright), 다른 한 쪽은 헤겔의(YOUN) 길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voiceright님의 주장입니다.

제 이해가 맞다면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독단적 형이상학과 회의주의의 이율배반을 해소하기 위해 지식의 조건, 선험적 조건을 탐구합니다. 또 명제를 선험적이고 분석적인 명제, 경험적이고 종합적인 명제, 선험적이고 종합적인 명제 이렇게 세 가지가 가능한 명제라고 구분하며 가능한 명제의 목록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독단적 형이상학과 회의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voiceright님이 읽은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칸트의 연장선에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사 비트겐슈타인이 포기한 단일하고도 이상적인 관점이 칸트가 저지른 실수와 유사하다고 해도, 지식의 조건 내지는 언어게임의 문법을 보여줌으로써 독단적인 철학적 문제가 상정하는 요구가 불합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궤를 같이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YOUN님의 비트겐슈타인은 상당히 헤겔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식의 조건을 제시하고 그것을 벗어나는 문제는 물자체 내지는 신의 영역으로 알 수 없다고 말한 칸트에 대해 헤겔은 반대하면서 그렇게 지식의 안과 바깥을 상정하는 것 자체가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는 주장합니다. 이론철학자들이 틀린 이유는 그들이 지식의 조건, 선험적인 조건, 언어게임의 문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들이 수용될 수 없는 이분법, 모순을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지식인 것과 아닌 것, 문법을 따르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것은 또 다른 이분법을 낳고 또 다른 신적 관점으로 안과 밖을 상정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점에서 헤겔과 YOUN님의 비트겐슈타인은 한 쌍을 이룬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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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명확하게 헤겔적 변증법을 염두에 두고 비트겐슈타인을 독해하고 있고, 실제로 그와 관련된 내용을 글에다 쓸지 고민도 했습니다. 그런데 voiceright님이 과연 "칸트적 독해"라는 용어를 받아들이실지는 다소 의문스럽네요. voiceright님은 의미와 무의미의 격자를 사용 이전에 미리 상정하려는 칸트적 태도를 명확히 거부하실 거라고 생각되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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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 이전에 "이상적인 관점을 상정해서" 의미와 무의미를 구별하는건 칸트와 중기까지의 비트겐슈타인이 저지른 실수라고 해도 사용의 맥락 안에서도 각 언어게임의 문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이를 통해 독단적 형이상학의 요구를 해소한다는 점에서는 voiceright님의 비트겐슈타인은 최소한 포스트ㅡ칸티안의 작업과 궤를 같이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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