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해소하기를 통해 보여주기(3)

4. 해소하기를 통해 보여주기

데카르트 이후로 형이상학자들은 '언어/세계', '적용/규칙', '낱말/감각'이 서로 동떨어져 있다는 강한 확신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데카르트주의는 우리가 오직 '현상(appearance)'의 영역에 대해서만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생각을 근대철학에 널리 퍼트렸다. 즉, '실재(Reality)'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는 결코 분명하지 않다. 언어 바깥의 세계가 어떠한 모습인지, 적용 이전의 순수한 규칙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 낱말로 표현되기 전의 감각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지닌 인식의 범위를 벗어나 있다. 형이상학자들은 바로 이러한 생각을 너무나 당연한 전제처럼 받아들인 나머지 모순적 철학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애초에 자신들이 떨어뜨려 놓은 두 축이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를 해명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형이상학자의 문제를 치료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하나는 형이상학의 언어 게임이 지닌 모순을 폭로하여 그 언어 게임이 고민하는 문제를 '해소하기(dissolving)'이다. 다른 하나는 형이상학의 언어 게임 이외의 다른 여러 가지 언어 게임의 가능성을 제시하여 형이상학자에게 문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기(showing)'이다. 두 가지 치료의 방식은 결코 서로 분리되지는 않는다. 다만, 해소하기가 보여주기보다 논리적으로 앞선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강조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내용을 바탕으로 그 이유를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독해의 정확성이라는 관점에서'와 '비트겐슈타인이 지닌 철학적 정당성의 관점에서' 해명해 볼 수 있다.

(1)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단일한 논리적 통사론( 『논고』 )을 해소하여 다양한 언어 게임의 문법( 『탐구』 )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후기에서 제시된 다양한 언어 게임의 문법에 대한 조망은 결코 그 자체로 정당성을 지니는 작업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서 전회가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일한 논리적 통사론에 대한 고찰이 심각한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세계', '적용/규칙', '낱말/감각'이 분리되어 있다는 근본 전제를 포기한 채 우리에게 주어진 '현상' 뒤편에 '실재'가 숨겨져 있다는 형이상학자들의 생각을 비판한다. 즉, 말콤(N. Malcolm)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잘 요약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숨겨져 있지 않다(Nothing is hidden)." 오히려 "모든 것이 드러나 거기 있으므로, 설명할 것은아무것도 없다."(PI, Ⅰ, §126)

(2) 형이상학자에게 단순히 다양한 언어 게임의 문법을 보여주고자 하는 시도는 또 다른 언어의 형이상학을 낳을 뿐이다. '보여주기'는 자칫 "너는 언어 게임을 잘못 이해하고 있고, 나는 언어 게임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라는 일방적 선언이 될 여지가 있다. 즉, '신의 관점(God's eye-view)'을 상정한 채 문법에 대한 특정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내세우는 태도처럼 여겨질 위험이 있다. 사실 형이상학자는 언어에 대한 자신의 직관이 잘못되었고 비트겐슈타인주의자의 직관은 옳다고 인정해야 하는 아무런 이유도 지니고 있지 않다. '보여주기'만을 강조하는 입장은 형이상학자에게 단순히 또 다른 형이상학적 직관을 내세운 채 독단적으로 기성 형이상학을 비난하는 모습으로 비춰질 뿐이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형이상학자와 비트겐슈타인주의자 중 어느 쪽의 언어에 대한 직관이 더 올바른지를 따지는 진흙탕 싸움만 생겨날 뿐이다.** 오늘날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이 결코 언어에 대한 직관을 바탕으로 형이상학자를 비판하고자 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히려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은 형이상학자가 모순적 시도 속에서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따라서 우리는 '해소하기'를 통해 '보여주기'로 나아가는 과정이야 말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대한 올바른 독해이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가장 강력한 형태로 활용하는 방법이라고 결론내려야 한다. 비트겐슈타인 본인이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철학적 전회에 이르렀고,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 역시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형이상학을 비판하고 있다. 즉, 형이상학의 언어 게임이 지닌 모순에 대한 폭로가 다양한 언어 게임의 문법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는 작업에 앞선다. 단순히 다양한 언어 게임의 문법을 보여주고자 하는 시도만으로는 형이상학의 언어 게임이 왜 문제를 지니는지가 하나도 해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형이상학의 언어 게임이 자신이 상정한 전제 사이의 충돌로 자승자박에 빠지고 만다는 사실이 지적될 때에야 비로소 다른 언어 게임의 가능성에 대한 고찰이 시작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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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박정일은 『논고』 에서 『탐구』 로의 전회가 단순히 언어를 바라보는 패러다임의 변화만으로 해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매우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박정일, 「비트겐슈타인은 왜 『논고』를 포기했는가?」, 논리연구, 한국논리학회, Vol. 7(2), 2004, 71-104 참고.).

**기성 의미론을 더 세련된 형태의 의미론으로 대체하려는 기존 언어철학의 작업이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보여주기'만을 강조하는 입장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일종의 '사용 의미론(use-theory of meaning)'으로 성립시켜 다른 의미론과 경쟁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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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해소하기"를 "모순의 폭로"와 동일한 작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모순'이란, 엄밀하게 말하자면, 비트겐슈타인이 "사용을 지니지 않는 모순"이라고 이야기한 모순입니다. 즉, 특정한 언어 게임이 단순히 P & -P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트겐슈타인-튜링 논쟁이 잘 보여주듯이, 비트겐슈타인은 한 체계에 모순된 입장이 포함될 수 있다는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습니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모순이 체계 속에서 아무런 사용도 지니지 못한 채 임의의 명제들만 도출해내는 상황입니다. 그럴 때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언어 게임이 '자승자박'에 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해소하기), 더 나아가 우리의 언어 게임이 지닌 모순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해명하도록 촉구하여(보여주기), 모순에 "시민적 지위"를 새롭게 부여하고자 하죠. 저는 이렇게 해서 "시민적 지위"를 획득한 모순은 의미를 지니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모순은 무의미한 것으로 남게 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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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논쟁 내용이긴 한데, 분석철학회의 논쟁이 제가 다룬 내용과 논점이 일치하는지는 조금 고민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1) '해소(dissolution)'는 '해결(solution)'과 구별되는 방식의 접근입니다. 저는 '해결'이 특정한 문제 P1을 극복하기 위해 보조 전제 P2, P3, ... , Pn을 도입하여 결론 C에 도달하는 작업인 반면, '해소'는 이러한 보조 전제의 도입 없이 애초에 처음 상정된 전제 P1이 '거짓'이거나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폭로하여 문제 자체를 다룰 필요조차 없는 사안으로 만들어버리는 전략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고 봅니다.

(2) 이승종 교수님이 해설하신 모순 개념이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모순 개념과 일치하는지 조금 고민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박정일 선생님의 입장을 좀 더 따르는 편인데, 박정일 선생님은 「비트겐슈타인과 모순」(『논리연구』, 한국논리학회, Vol. 11(1), 2008, 33-65)이라는 논문에서 이승종 교수님의 모순 개념 해설이 지엽적이라고 비판하시거든요.

(3) 제가 비트겐슈타인의 모순 개념에 대한 박정일 선생님의 논문에서 인상 깊게 읽었던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순으로부터 임의의 모든 명제를 도출해내고 다리를 건설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 경우에는 사람들의 인식과 계산 체계의 사용이 개입된다. 그들은 모순으로부터 임의의 (거짓) 수식을 도출해내고, 이를 사용해서 다리를 짓고 또 다리는 붕괴된다. 비트겐슈타인의 대답은 이런 경우에는 과연 그들이 하는 것이 '계산'인지, 또 그들이 지니고 있는 것이 '계산 체계'라고 불리어야 하는지가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의미의 '계산'을 하고 있지 않고, 우리의 의미의 '계산 체계'를 지니고 있지 않다."(박정일, 2008: 58)

즉, 엄밀하게 말하자면, '해소'란 모순을 지니고 있는 체계에 대해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이냐? 당신들이 하는 작업은 적어도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라고 우리의 의미에서 물음을 던지는 작업입니다. 상대가 우리의 의미에서 모순을 해명해 준다면 우리는 상대의 체계를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상대의 체계를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없는 거죠. 한 마디로, '해소'는 입증 책임을 상대에게 떠넘긴 채 상대에게 상대의 작업이 지닌 의미를 해명하라는 요구에서 시작됩니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작업은 말 그대로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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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의 시민적 지위"라는 표현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추가적인 설명이 없다 보니, 이 표현은 충분히 논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PI, Ⅰ, §125에서 몇 가지 분명한 내용은,

(1) 우리는 언어 게임을 위해 규칙을 확립한다.
(2) 모순이 포함된 규칙은 우리가 가정한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3)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자승자박을 당한다.
(4) 따라서 우리는 언어 게임의 규칙을 고치거나 새로운 언어 게임을 하게 된다.

정도가 되겠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걸 "모순의 시민적 지위"에 대해 사유하는 작업이라 본 거고요.

저는 (1)-(4)가 '모순'이 지닌 의미를 반성하고 수정하여 모순이 언어 게임에서 확보하고 있는 "시민적 지위"가 무엇인지를 해명하는 활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박정일 선생님의 경우에는 모순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의미'를 지니긴 지니는데, 경험적 명제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의미'를 지닌다는 내용으로 독해하시네요. 즉, 모순은 언어 게임 내부에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게임 전체의 규칙과 관련된 역할을 한다고 지적하시면서, 바로 그 역할을 "모순의 시민적 지위"라고 말씀하시네요.

저는 박정일 선생님의 독해와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이 양립가능하다고 봅니다. (1)-(4)를 통해 우리가 모순의 의미에 대해 제기한 의문이 제대로 해명되지 않을 경우, 모순은 해당 언어 게임 전체의 규칙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게 만들어 버리죠. 그러니까, 해당 언어 게임 전체의 규칙과 관련된 "모순의 시민적 지위"가 무엇인지를 해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철학적 작업이고, 그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해당 언어 게임이 자신의 규칙 전체를 상실해 버리고 만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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