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해소하기를 통해 보여주기
데카르트 이후로 형이상학자들은 '언어/세계', '적용/규칙', '낱말/감각'이 서로 동떨어져 있다는 강한 확신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데카르트주의는 우리가 오직 '현상(appearance)'의 영역에 대해서만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생각을 근대철학에 널리 퍼트렸다. 즉, '실재(Reality)'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는 결코 분명하지 않다. 언어 바깥의 세계가 어떠한 모습인지, 적용 이전의 순수한 규칙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 낱말로 표현되기 전의 감각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지닌 인식의 범위를 벗어나 있다. 형이상학자들은 바로 이러한 생각을 너무나 당연한 전제처럼 받아들인 나머지 모순적 철학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애초에 자신들이 떨어뜨려 놓은 두 축이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를 해명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형이상학자의 문제를 치료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하나는 형이상학의 언어 게임이 지닌 모순을 폭로하여 그 언어 게임이 고민하는 문제를 '해소하기(dissolving)'이다. 다른 하나는 형이상학의 언어 게임 이외의 다른 여러 가지 언어 게임의 가능성을 제시하여 형이상학자에게 문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기(showing)'이다. 두 가지 치료의 방식은 결코 서로 분리되지는 않는다. 다만, 해소하기가 보여주기보다 논리적으로 앞선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강조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내용을 바탕으로 그 이유를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독해의 정확성이라는 관점에서'와 '비트겐슈타인이 지닌 철학적 정당성의 관점에서' 해명해 볼 수 있다.
(1)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단일한 논리적 통사론( 『논고』 )을 해소하여 다양한 언어 게임의 문법( 『탐구』 )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후기에서 제시된 다양한 언어 게임의 문법에 대한 조망은 결코 그 자체로 정당성을 지니는 작업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서 전회가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일한 논리적 통사론에 대한 고찰이 심각한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세계', '적용/규칙', '낱말/감각'이 분리되어 있다는 근본 전제를 포기한 채 우리에게 주어진 '현상' 뒤편에 '실재'가 숨겨져 있다는 형이상학자들의 생각을 비판한다. 즉, 말콤(N. Malcolm)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잘 요약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숨겨져 있지 않다(Nothing is hidden)." 오히려 "모든 것이 드러나 거기 있으므로, 설명할 것은아무것도 없다."(PI, Ⅰ, §126)
(2) 형이상학자에게 단순히 다양한 언어 게임의 문법을 보여주고자 하는 시도는 또 다른 언어의 형이상학을 낳을 뿐이다. '보여주기'는 자칫 "너는 언어 게임을 잘못 이해하고 있고, 나는 언어 게임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라는 일방적 선언이 될 여지가 있다. 즉, '신의 관점(God's eye-view)'을 상정한 채 문법에 대한 특정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내세우는 태도처럼 여겨질 위험이 있다. 사실 형이상학자는 언어에 대한 자신의 직관이 잘못되었고 비트겐슈타인주의자의 직관은 옳다고 인정해야 하는 아무런 이유도 지니고 있지 않다. '보여주기'만을 강조하는 입장은 형이상학자에게 단순히 또 다른 형이상학적 직관을 내세운 채 독단적으로 기성 형이상학을 비난하는 모습으로 비춰질 뿐이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형이상학자와 비트겐슈타인주의자 중 어느 쪽의 언어에 대한 직관이 더 올바른지를 따지는 진흙탕 싸움만 생겨날 뿐이다.** 오늘날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이 결코 언어에 대한 직관을 바탕으로 형이상학자를 비판하고자 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히려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은 형이상학자가 모순적 시도 속에서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따라서 우리는 '해소하기'를 통해 '보여주기'로 나아가는 과정이야 말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대한 올바른 독해이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가장 강력한 형태로 활용하는 방법이라고 결론내려야 한다. 비트겐슈타인 본인이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철학적 전회에 이르렀고,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 역시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형이상학을 비판하고 있다. 즉, 형이상학의 언어 게임이 지닌 모순에 대한 폭로가 다양한 언어 게임의 문법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는 작업에 앞선다. 단순히 다양한 언어 게임의 문법을 보여주고자 하는 시도만으로는 형이상학의 언어 게임이 왜 문제를 지니는지가 하나도 해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형이상학의 언어 게임이 자신이 상정한 전제 사이의 충돌로 자승자박에 빠지고 만다는 사실이 지적될 때에야 비로소 다른 언어 게임의 가능성에 대한 고찰이 시작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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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박정일은 『논고』 에서 『탐구』 로의 전회가 단순히 언어를 바라보는 패러다임의 변화만으로 해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매우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박정일, 「비트겐슈타인은 왜 『논고』를 포기했는가?」, 논리연구, 한국논리학회, Vol. 7(2), 2004, 71-104 참고.).
**기성 의미론을 더 세련된 형태의 의미론으로 대체하려는 기존 언어철학의 작업이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보여주기'만을 강조하는 입장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일종의 '사용 의미론(use-theory of meaning)'으로 성립시켜 다른 의미론과 경쟁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