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철학

논제 (1)을 검토합시다.

YOUN님은 『논고』에서 『탐구』로의 이행, 혹은 『논고』의 전기 철학을 포기하게 된 계기로 ‘요소 명제의 상호 독립성’과 ‘진리함수 논리’ 사이의 모순 관계를 제시하셨습니다. 이 모순이 드러나는 사례로 ‘색깔 배제 문제’를 제시하셨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모순적인 두 전제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러한 결함을 발견하고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습니다. YOUN님에 따르면, 이 결함을 해결하려는 일련의 과정이 “모순을 독단적으로 잠재워버리려 하는 시도로 폭로”된 뒤에야 비트겐슈타인은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언어를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문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질문들이 떠오릅니다. (Q1) 비트겐슈타인은 왜 자신의 이론이 모순에 빠진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견해를 붙잡고 그런 결함을 해결하려 했을까요? (Q2) 자신의 견해를 붙잡고 이론의 결함을 해결하려 하던 비트겐슈타인이, 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의 시도가 “모순을 독단적으로 잠재워버리려 하는 시도”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언어를 바라보게 되었을까요? (Q1)은 나중에 다룰 것입니다. 여기서 다룰 것은 (Q2)입니다.

저는 YOUN님이 사용하신 “모순을 독단적으로 잠재워버리려 하는 시도로 폭로”되었다는 표현, 그리고 이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언어를 바라보기 시작한다”는 표현의 근거를 여쭙고 싶습니다. 저는 이 표현이 근거 없이, YOUN님의 상상 속 내러티브에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전회 사건을 끼워 맞추다 보니 등장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저의 (Q2)에 대한 답은, [비트겐슈타인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다]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의 명제론이 모순에 빠진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 이후 비트겐슈타인이 한 작업은, 말씀하신 바대로 색 명제가 요소 명제라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진리함수론을 수정하려 한 것 등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기 철학에서 이른바 ‘중기 철학(1929~1937)’으로의 이행은, 그러한 “모순을 독단적으로 잠재워버리려 하는 시도”의 연장선상에서, 명제들의 진리함수 규칙에서 명제들의 내적 구문(syntax)에서 생기는 규칙으로의 이행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구문 개념은 문법 개념의 선조 격으로, “어떤 결합이 하나의 낱말에 의미를 부여하고 또한 무의미한 구조를 배제하는지를 알려주는 규칙(RLF, 1929년)”입니다. 즉, 비트겐슈타인은 전기의 일원론적 명제론에서, 다원론적 명제론으로 이행한 것으로, 여전히 명제론의 차원에서 철학적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본격적으로 중기 철학에 진입하는 시점에서는, 구문 개념이 문법 개념으로 계승됨을 알 수 있습니다. 『대타자본』에 이르러 막을 내리게 되는 1930년에서 1933년까지의 유고에는 ‘Grammatik’이라는 표현이 무려 217번이나 등장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문법 개념을 고안해내고는 “철학의 먹구름은 사라졌다. 우리는 이제 철학을 하는 방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연금술과 화학 간의 차이를 비교해 보라; 화학은 방법을 갖고 있다(WL)”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철학의 방법이란 “한 표현을 그것과 문법적으로 연관된 표현을 탐구함으로써 탐구하기(BB)”일 것입니다. 『대타자본』의 한 구절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문법이 단어의 의미를 결정한다고 말하며, 또 단어의 의미와 문법적 공간 속에서의 단어의 위치(the location of a word in grammatical space)를 동일시하기까지 합니다. 이 ‘문법적 공간’이라는 표현은 『논고』에서의 ‘논리적 공간’이라는 표현을 연상케 합니다. 단절성이 훨씬 강하겠지만, ‘논리적 통사론’– ‘구문’ – ‘문법’ 개념의 연속성이 보이지 않으시나요?

물론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어떻게 이행했는지 그 과정을 추적하는 일은 짧은 시간에 해내기 힘든 일입니다. 저로써는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겠네요. 그렇지만 제 반박을 정당화하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의 사실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비트겐슈타인의 전회는, YOUN님이 제시한 것처럼 자신의 시도가 ‘모순을 독단적으로 잠재워버리려 하는 시도’로 ‘폭로’되어 언어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보게 되었다는 식으로 진행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 전회가 전기 철학의 모순 발견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리고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언어를 새로운 방식으로 보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전기 철학의 논의가 후기 철학의 주요 표적인 것도 분명합니다. 여기에 오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전회의 과정은, YOUN님이 상상하시는 것처럼, 전기 철학의 모순이 폭로되었다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이론철학자들의 모순을 지적하는 것이 ‘해소하기’에 본질적이게 되었다는 식의, 단속적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전기 철학 및 그것의 결함을 보완하려는 시도가 “모순을 독단적으로 잠재워버리려 하는 시도”라고 서술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또 질문이 떠오릅니다. (Q3) 대체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전기 철학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일까요? 나중에 다루겠습니다.)

논제 (1)과 별개로, 논제 (4)와 관련하여, YOUN님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단일한 논리적 통사론을 해소하여 다양한 언어게임의 문법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고도 주장하십니다. 이 주장은 다양한 언어게임의 문법을 보여주는 것이 해소의 기능을 전혀 수행하지 않는다는 암묵적 전제를 지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을 이상의 논의에 비추어 고치면 이렇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단일한 논리적 통사론 제시를 철학적 문제의 해소 방법으로 채택하다가, 다양한 언어게임의 문법 제시를 철학적 문제의 해소 방법으로 채택하는 방식으로 전개된 것입니다. (혹시나 해서 말인데, 이는 각각 논리적 통사론의 “위반” 지적과 언어 게임의 문법의 “위반” 지적을 철학적 문제의 해소 방법으로 채택했다는 것과 엄연히 다릅니다. 코넌트가 이런 말을 비판하는 까닭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규칙의 위반”을 통해 규정하는 것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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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제 (2)를 검토합시다.

YOUN님에 따르면 “언어게임에서 모순이 발생하는 상황을 해소”하여 언어게임을 새롭게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작업입니다. 그러면서 YOUN님은 §125을 제시하고, “언어게임이 모순을 지닌 상황에서 해당 언어게임을 반성적으로 고찰”함으로써 “비로소 언어게임에 대한 철학적 통찰이 형성된다”고 주장하십니다. “언어게임이 지닌 모순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언어게임을 새롭게 보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러나 이는 말만 그럴듯하게 가져다 쓰신 것일 뿐, (제가 생각하는) YOUN님의 의도와 함께 고려할 때는 §125에 대한 완전한 오독입니다. 일단 §125에 대한 저의 배경 해설을 덧붙인 후에, YOUN님의 말씀을 한 줄 한 줄씩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125에서 말하는 것은 수학적 모순에 대한 자신의 고찰입니다. §125을 앞뒤 맥락과 함께 전체적으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124. (전략) 철학은 또한 수학도 있는 그대로 둔다. 그리고 어떤 수학적 발견도 철학을 발전시킬 수 없다. “수리논리학의 핵심 문제”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하나의 수학 문제이다.

§125. 수학적 또는 논리-수학적 발견을 통해 모순을 해결하는 것은 철학의 일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를 괴롭히는 수학의 상태, 모순이 해결되기 이전의 상태를 우리가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철학의 일이다. (그리고 이는 어려움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근본적인 사실은 우리가 게임을 하기 위한 규칙들과 기술을 정한다는 것이며, 우리가 그 규칙들을 따를 때 일들이 우리가 가정했던 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규칙들에 자승자박 당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규칙들에 자승자박 당하는 현상이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것, 즉 일목요연하게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의미함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런 경우에는 우리가 의미하고 예견했던 것과 사정이 다른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령 모순이 일어날 때 바로 우리가 하는 말이다: “그런 뜻이 아니었어.”

모순의 시민적 지위, 또는 시민 세계에서 모순의 지위 : 이것이 철학의 문제이다.

(이승종 역, 이지만 논쟁의 편의를 위해 몇몇 용어를 수정했습니다)

§125에서 말하는 바는, 모순을 자각하고 벗어나야 한다는 게 아니고, 모순이 해결되기 이전의 상태, 자신의 규칙들에 자승자박 당하는 현상, 즉 모순에 빠져 있는 상태 자체를 철학적으로 올바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모순에 대한 수학자의 미신적인 공포와 숭배(RFM)”를 문제적으로 보았습니다. 또 그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나의 목적은 모순과 무모순성 증명에 대한 태도를 바꾸려는 것이다(이 증명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어떻게 이 증명이 중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RFM)”

수학자들은, YOUN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한 체계에서 모순이 발생하면 어떠한 종류의 허황된 결론이라도 모두 함의하게 된다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렇기에 “수리논리학의 핵심 문제”를 상정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논리주의, 형식주의 등의 메타-수학적 해결책을 강구합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 그러한 메타-수학적 논의는 마치 체스 게임의 규칙들 자체에 대한 게임과 같이, 단지 또 다른 하나의 게임, 또 다른 하나의 수학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수학의 근본 구조에 대한 메타이론을 수립할 수 없습니다(수립할 수 있다면 ‘수학’이라는 낱말은 가족 유사적이지 않고 본질적인 이론적 구조를 갖고 있게 되겠죠). 이것이 §124의 마지막 문장이 뜻하는 바입니다. 수학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는, 대체 왜 수학자들이 그런 문제를 설정하고, 그에 대한 답을 강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탐구입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애초에 그런 이론을 수립하고자 하는 요구가 모순에 대한 수학자의 미신적인 공포와 숭배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모순에 봉착했을 때, 두 가지 가능한 경우가 있을 겁니다. 정말로 어떠한 결론이라도 다 도출되니 제멋대로 돌아가거나,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으니 게임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거나. 수학자들은 오직 첫 번째 가능성만을 강조합니다. 그것이 바로 ‘폭발 원리’의 강조로 이어지는 거겠지요.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두 번째 가능성도 같이 고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경우 게임은 중단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이때 모순을 방지하는 규칙을 새로 도입하여 게임을 재개하든, 아예 그 게임을 포기하든 그건 그저 우리의 실천적 선택입니다. 그리고 많은 게임들의 경우에 우리는 그저 모순을 방지하는 규칙을 새로 도입하는 방안을 선택한다는 것은 경험적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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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YOUN님은 비트겐슈타인이 ‘사용을 지니는 모순’과 ‘사용을 지니지 않는 (참다운) 모순’을 구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YOUN님의 주장이 따라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모순을 맞닥뜨렸을 때 우리가 취하는 태도에 대해서 변경하기를 요청한 것이지, “어떤 모순은 사용을 지니고 어떤 모순은 사용을 지니지 않는다. 그러니까 사용을 지니지 않는 모순을 없애버려야 한다. 이것이 철학적 작업이다”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전자의 모순은 일상적으로 유의미할 것이고(애초에 이건 이 당시의 비트겐슈타인이 ‘모순’이라는 말의 어법을 너무 통사론적으로 사용했고, 사용에서 각 단어에 부여되는 의미를 고려할 때 어떤 측면에서는 모순이 아니라고도 할 수도 있죠), 후자의 모순은 문법적인 명제의 역 같은 역할을 할 것으로 보입니다.

또 YOUN님은 어디선가 이런 말씀도 하셨는데, 박정일 교수님의 논문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해소'란 모순을 지니고 있는 체계에 대해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이냐? 당신들이 하는 작업은 적어도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라고 우리의 의미에서 물음을 던지는 작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상대가 우리의 의미에서 모순을 해명해 준다면 우리는 상대의 체계를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상대의 체계를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없는 거라고도 말씀하십니다. '해소'는 입증 책임을 상대에게 떠넘긴 채 상대에게 상대의 작업이 지닌 의미를 해명하라는 요구에서 시작된다고요. 이 말이 어떤 의도에서 행해졌는지는 명백하지 않은데, 박정일 교수님의 논문과 함께 고려할 때 이 말은 정확하게 저의 의견을 대변합니다. 박정일 교수님은 모순된 체계로 무언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과연 그들이 하는 것이 ‘계산’인지, 또 그들이 지니고 있는 것이 ‘계산 체계’라고 불리어야 하는지가 문제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의미의 ‘계산’을 하고 있지 않고, 우리의 의미의 ‘계산 체계’를 지니고 있지 않다고 말이죠. 물론 여기서도 박정일 교수님의 논의는 오직 수학적 영역에서만 진행되지만, 그냥 YOUN님에 따라서 언어게임 일반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 보죠. 여기서 우리가 하는 작업은, 우리의 언어게임들의 문법을 기술하고, 우리의 언어게임들을 일목요연하게 조망한 뒤, 이것을 타자에게 제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무엇이 계산이냐? 계산의 본질이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은, 계산의 언어게임의 문법을 기술함으로써 드러납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는 계산의 언어게임을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그 사람은 이것에 부합하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거겠죠. 우리가 하는 계산의 언어게임의 문법 중 하나는, 그 체계가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근데 이건 계산의 경우구요.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언어게임 일반에 대해서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타자로 하여금 우리의 언어게임들의 문법을 일목요연하게 조망하도록 한 뒤, 여기서 그 사람이 의미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 참여하려고 했던 언어게임이 무엇인지를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제시하는 모든 언어게임들을 그가 거부한다면, 그는 아무런 의미도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겠죠. (그리고 이건 좀 딴 얘기지만, 바로 이것이 코넌트가 소개하는 카벨의 비트겐슈타인 해석의 요체입니다.)

배경적 논의는 이 정도로 하고, 이제 YOUN님의 말씀을 검토해 봅시다. 태클 걸 것이 별로 없는 말은 넘어가겠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제 언어게임에서 모순이 발생하는 상황을 해소하여 언어게임을 새롭게 바라보고자 한다.” : 앞서 제시한 배경적 논의를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눈치 채셨겠지만, “모순이 발생하는 상황”은 해소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건 그저 일목요연하게 보아야 할 영역이고, 그렇게 일목요연한 조망이 얻어졌을 때 해소되는 것은 “수리논리학의 핵심 문제”입니다. 심지어 비트겐슈타인은 모순을 해결하는 것은 철학의 일이 아니라고까지 말합니다. 물론 저기선 해결이고 YOUN님은 ‘해소’라고 하셨지만, 결국 모순을 없애는 일이라는 점에서는 똑같을 텐데요. 애초에 저는 YOUN님이 비트겐슈타인의 용어를 제멋대로 사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즉, 우리는 때때로 언어게임의 과정에서 일종의 자승자박을 범한다.” : 물론 이것도 배경적 논의가 제시된 이후에는, 언어게임의 과정 일반에 대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다들 눈치 채셨을 겁니다. §125의 “여기서”는 수학의 논의 영역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YOUN님의 말씀대로, 수학의 논의 영역을 벗어나서 언어게임의 과정 일반에 대한 말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이러한 자승자박은 우리가 우리의 언어게임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발생한다.” : 비트겐슈타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나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모순이 꼭 우리의 언어게임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다음의 게임을 생각해 보죠.
(1) 흰 말은 검은 말을 뛰어넘어야 한다. (2) 어떠한 말도 판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이런 규칙에 의해 지배받는 게임이 있다고 해 봅시다. 이 게임에서 모순이 생기는 경우는, 흰 말이 모서리에 위치한 검은 말 앞에 놓이게 되는 경우입니다. 흰 말을 움직이고자 검은 말을 뛰어넘으면 판 밖으로 나가버리게 되고, 판 안에서는 흰 말을 움직일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게임의 각 규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데도 모순이 발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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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게임의 모순은 의미의 환각을 만들어낸다. 논리학에서 ‘폭발 원리’가 보여주듯이, 모순을 인정하는 체계는 어떠한 종류의 허황된 결론이라도 모두 함의하고 만다. 소위 ‘회의적 역설’이란 바로 모순을 지닌 언어게임에서 발생한다. 한 마디로, 모순을 지닌 언어게임은 도대체 유의미한 규칙 따르기를 할 수조차 없다. 이러한 언어게임에서는 마치 규칙처럼 보이는 허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어떠한 해석이든지 허용되는 언어게임은 사실상 언어게임이 아닌 것이다.” : 언어게임에서 모순이 발생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규칙 따르기를 지속할 수 없죠. 이건 동의가 됩니다. 그러나 ‘회의적 역설’이 모순을 지닌 언어게임에서 발생한다거나, 그 이후의 말들은, 비트겐슈타인은 그냥 일절 한 적이 없습니다. ‘회의적 역설’에 관한 내용과, 모순을 지닌 언어게임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게 된다는 내용을 한 데 섞어서 뭉뚱그리니까 비트겐슈타인이 한 적도 없는 말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을 보면, 맞는 말이긴 한데, 맥락상 비트겐슈타인이 모순에 대한 미신적 공포라고 일컬은 사고방식을 정확히 답습하고 계신 듯합니다. 애초에 회의적 역설은 특정 언어게임이 모순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회의적 역설 관련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나중에 보여드리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게임이 모순을 지닌 상황에서 해당 언어게임을 반성적으로 고찰하게 된다. 과연 우리가 그 언어게임으로 무엇을 하고자 하였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비로소 언어게임에 대한 철학적 통찰이 형성된다. 언어게임이 지닌 모순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언어게임을 새롭게 보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 첫 두 문장은 동의가 됩니다. 근데 이것 자체는 철학적 통찰이 아니에요. 앞서 제가 언급한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게임을 생각해 보죠. 우리가 그 게임을 하다가 모순에 빠지면, 우리는 그 게임을 반성적으로 고찰할 것이고, 그 게임으로 무엇을 하고자 하였는지 고민할 겁니다. 그러고는, 우리가 하려던 것이 즐겁게 노는 것이었으니, 그냥 그런 모순을 방지할 수 있는 규칙을 제정해 버리고 게임을 계속할 겁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규칙들에 자승자박 당하는 현상이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것, 즉 일목요연하게 보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모순의 시민적 지위, 또는 시민 세계에서 모순의 지위”가 철학의 문제라고 하는 것은, 모순에 빠졌을 때 어떻게 빠져나올지가 철학의 문제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에 대한 과장적, 망상적 태도에서 벗어나서, 모순을 시민적인, 인간적인 지위에서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철학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시민적 지위'란, 모순이 우리 인간의 언어 실천들, 언어게임들과 관련하여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표현이라고 보입니다. 그 지위가 도대체 정확히 무엇인지는 해석적 작업이 필요하겠지만, 저 문단 전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YOUN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을 제가 이해하기로는, 우리가 어떤 언어게임을 하다가 모순에 봉착했을 때, 사실 우리가 하던 것이 제대로 된 언어게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그 언어게임에서 벗어나게 된다(벗어나야 한다)는 것 같습니다. 그건 비트겐슈타인이 별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한 겁니다. §125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문제의식이 향한 곳은, 모순에 대한 과장적인 태도로부터 상정된 “수리논리학의 핵심 문제”의 해소입니다. YOUN님의 주장은,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자신의 해석적 내러티브에 끼워 맞추려다보니 비트겐슈타인의 말의 요점은 전혀 포착하지 못하고, 심지어 어떤 측면에서는 비트겐슈타인과 정반대의 주장을 하게 되는 총체적 난국에 이르게 됩니다.

인용하신 “그건 내가 뜻했던 것이 아닌데...”라는 말도, 비트겐슈타인은 “모순이 나타나는 경우에 우리가 하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이건 모순이 일어나는 언어게임들에서 일어나는 일, 우리가 하는 말을 기술한 것입니다. 모순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작업은, 여러 언어게임들에서 모순이 일어나는 상황들을 기술함으로써, 모순이 어떤 체계를 포기하게 강제하는 병폐가 아니라 언어게임 속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드러내고, 모순에 대한 일목요연한 조망, 모순에 대한 인간학적인 관점을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그렇게 일목요연한 조망을 얻게 되면, 모순에 대해서 과장된 태도를 취한다거나, 수리논리학의 근본문제를 허황된 방식으로 설정한다거나 하지 않게 되겠죠. 쉽게 말해서, 모순이 그렇게 대단한 문제,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무언가를 하다가 “어라, 그건 내가 뜻하려던 게 아닌데”라고 말하게 되는 상황, 그저 “우리가 의미하고 예견했던 것과 사정이 다른 것으로 드러나는 경우”와 병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125의 본의이자,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철학적 문제의 해소입니다.

글의 중간에서, 잠시 YOUN님의 논제들을 다루는 것에서 벗어나서, 독립적인 논의를 진행해야 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대체 YOUN님은 무슨 실수를 저질렀기에 이토록 비트겐슈타인의 텍스트에서 초점이 어긋난 해석을 하시는 걸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YOUN님의 가장 근본적 오류는,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하는 “해소”의 대상을 잘못 이해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이론철학자의 언어게임”이니, “언어게임 내부의 모순의 폭로”니 하는, 비트겐슈타인의 텍스트와는 거리가 먼 자의적인 용어법이 시작되었다고 저는 추측합니다. YOUN님은 비트겐슈타인이 해소하려는 대상이 “이론철학자의 주장/언어게임/... 또는 철학 이론”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틀렸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해소하려는 것은 “철학적 문제”입니다. 애초에 비트겐슈타인이 하려는 작업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데 실패했으니 그런 해석이 뒤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해소 작업의 표적이 “철학적 문제”라는 것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다음은 『철학적 탐구』의 일부입니다. 오해의 소지 또는 인용 시의 야바위를 방지하기 위해 가급적 생략 없이 인용하겠습니다. 인용이 길더라도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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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우리가 그런 질서와 이상을 우리의 실제 언어에서 발견해야 한다고 믿을 때,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문장”, “낱말”, “기호”라고 불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게 된다.

논리학이 다루는 문장과 낱말은 순수하고 명확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본래적 기호의 본성에 대해 골치를 앓는다. -- 그것은 가령 기호에 관한 관념인가? 아니면 현재 순간에서의 관념인가?

§106. 여기서 우리는 말하자면 냉정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 즉 우리는 일상적인 생각의 주제를 떠나서는 안 되며, 길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기가 어렵다. 길을 잃으면, 우리는 우리의 수단으로는 전혀 기술할 수 없을 아주 정교한 것을 기술해야 할 것처럼 느낀다. 우리는 마치 찢어진 거미줄을 손가락으로 기워야 할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107. 우리가 실제의 언어를 정밀하게 검토하면 할수록, 그것과 우리의 요구 사이의 갈등은 더욱 심해진다. (결정체와도 같은 논리학의 순수성은 물론 내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요구였다.) 갈등은 허용 범위를 넘게 되어 이제 그 요구가 공허한 것이 되고 말 위기에 처한다. -- 우리는 마찰이 없는 미끄러운 얼음판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리고 마찰이 없는 상태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상적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또한 걸을 수 없게 된다. 우리는 걷고 싶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땅으로 돌아가자!

§108. 우리는 우리가 “명제”, “언어”라고 부르는 것이 내가 상상했던 형식적 통일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소 유사한 구성물들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안다. -- 그러나 이제 논리학은 어떻게 될까? 논리학의 엄밀성은 여기서 무너지는 것처럼 보인다. -- 하지만 그 경우에 논리학 자체가 완전히 사라져버리지는 않는가? -- 왜냐하면, 어떻게 논리학이 그 엄밀성을 잃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우리가 논리학의 엄밀성을 얼마간 깎아 내리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 결정체와도 같은 순수성에 대한 선입견은 오직 우리의 모든 고찰을 180도 돌려놓음으로써만 없앨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의 고찰은 우리의 실제적인 필요성을 회전축으로 해서 방향 전환되어야 한다.)

§109. 우리의 고찰이 과학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맞는 말이었다. ‘우리의 선입견과는 반대로 이러저러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느낌은 — 그것이 무엇을 뜻하든지 — 우리의 관심사 밖이다. (생각함을 정령으로 간주하는 견해.) 그리고 우리는 어떤 종류의 이론도 내놓을 수 없다. 우리의 고찰에는 어떤 가설적인 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설명은 사라져야 하고, 기술만이 그 자리에 들어서야 한다. 그리고 이런 기술은 철학적 문제들로부터 그 빛, 즉 그 목적을 얻는다. 이것은 물론 경험적인 문제들이 아니다. 하지만 그 문제들은 우리 언어의 작동 방식을 들여다봄으로써, 그리고 그런 작동 방식들을 오해하려는 충동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인식함으로써 해결된다. 문제들은 새로운 경험을 제시함으로써가 아니라, 우리가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것을 정돈함으로써 해결된다. 철학은 우리의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 우리의 이해력에 걸린 마법에 대항하는 투쟁이다.

§110. “언어(또는 생각함)는 독특한 것이다” ― 이것은 문법적 착각이 낳은 하나의 미신(오류가 아니다!)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강한 느낌 때문에 자꾸만 이런 착각에, 문제에 빠져드는 것이다.

§111. 우리의 언어 형식들을 오해한 데서 생겨나는 문제들에는 깊이 있음이라는 특징이 있다. 이런 문제들에는 깊은 불안이 있다. 그것들은 우리 언어의 형식들만큼이나 우리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으며, 그것들의 의미는 우리 언어의 중요성만큼이나 크다. ―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보자: 우리는 왜 문법적 농담을 깊이 있다고 느끼는가? (그리고 철학의 깊이 있음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112. 우리의 언어의 형식들 속으로 수용된 비유가 그릇된 겉모습을 낳고, 이 때문에 우리는 불안해한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데!” -- 우리는 말한다. “하지만 그건 이래야 해!”

§113. “하지만 그건 이래 ---.” 나는 거듭해서 혼잣말한다. 시선을 이 사실에 아주 명확하게 고정하고 그것에 초점을 맞출 수만 있다면, 나는 사태의 본질을 파악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114. 『논리-철학 논고』 (4.5): “명제의 일반 형식은 다음과 같다: 사태가 이러이러하다.” ―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무수히 반복해 말하는 그런 종류의 명제다. 우리는 거듭해서 사태의 본성을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사태를 바라보는 형식을 따라가고 있을 뿐이다.

§115. 하나의 그림이 우리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것은 우리의 언어 속에 놓여 있었고, 언어는 우리에게 그것을 다만 냉혹하게 반복하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116. 철학자들이 어떤 낱말 -- “지식”, “존재”, “대상”, “자아”, “명제”, “이름” -- 을 사용해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려 할 때, 우리는 항상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낱말은 그것의 제자리인 일상 언어에서 실제로 이런 식으로 사용되는가? -- 우리가 하는 일은 낱말들을 그 형이상학적 쓰임에서 그 일상적인 쓰임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105의 “질서와 이상”은 엄밀한 논리적 질서, 그런 이상을 말합니다. 『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 자신이 가졌던 것이기도 하죠.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기를, 우리가 그런 이상을 실제 언어에서 발견해야 한다고 믿을 때, 일상생활에서 “문장”, “낱말”, “기호”라고 불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이때 우리는 길을 잃고, 우리의 수단으로는 전혀 기술할 수 없을 아주 정교한 것을 기술해야 할 것처럼 느낍니다. 마치 찢어진 거미줄을 손가락으로 기워야 할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만 보면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YOUN님의 해석과 그럴듯하게 부합하는 것처럼 다가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한 해석이 이 말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YOUN님의 해석이 통찰이 부족함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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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YOUN님은 이 구절들이 말하는 바에 대해서, 이렇게 해석하실 것 같습니다.

이론철학자들의 언어게임이 한 축으로 모든 언어의 본질이 ‘엄밀한 논리적 질서’에 기반을 둔다는 전제를 받아들이고, 그와 동시에 다른 한 축으로 일상 언어는 그런 질서에 입각하지 않았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면, 모순되는 두 전제를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이론철학자들의 언어게임은 엉터리다.

저는 YOUN님의 이러한 해석에 두 가지 이의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첫째, 앞서 제가 비트겐슈타인의 모순에 관한 논의를 설명하면서 나온 결론 중 하나가, 언어 게임에서 모순이 발생했다고 해서 반드시 그 게임을 버려버려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론철학자들이 자신의 언어게임을 완전히 버려버려야 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 전제를 적당히 수정하거나, 어쨌든 모순을 방지하기만 하면 될 텐데요. 단지 모순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그 게임을 왜 아예 갖다 버려야 하는지가 납득되지 않을 겁니다. YOUN님의 글에서 자주 보이는 표현이, 어떤 근본적인 균열을 상정한 뒤, 그것을 다시 연결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표현인데, 정말로 결코 성공할 수 없는지 어떻게 아나요? 형이상학자의 언어게임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어떤 근거로 알 수 있나요? YOUN님은 이 이유를 따로 보여주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뭐 이건 그렇다 칩시다. 저도 YOUN님의 결론에는 동의하니까요. 그 다음이 진정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론철학자들은 대체 왜 그런 모순적인 전제를 받아들이는 것인가요? 자신이 모순적인 전제를 암묵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알지 못해서일까요?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모든 언어의 본질이 ‘엄밀한 논리적 질서’에 기반을 둔다”는 전제와 “일상 언어는 그런 질서에 입각하지 않았다”는 전제는 명시적으로 모르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이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나요? 『논고』의 비트겐슈타인도 당연히 알고 있던 것입니다. 단지 둘을 명시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뿐만 아니라, 둘이 모순된다는 것도 명시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현대의 많은 이론철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YOUN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어떤 근본적인 균열을 상정한 뒤, 그것을 다시 연결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것이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근본적인 균열이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적 문제라고 생각하며, 어떻게 답을 구해야 하는지조차 합의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철학이 언젠가는 그 연결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사유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YOUN님의 해석적 그림에서 이런 물음은 전혀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비트겐슈타인은 “이론철학의 언어게임이 지닌 모순을 폭로하는” 작업을 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적어도, 어떤 모순을 집어내는 것 자체가 비트겐슈타인의 핵심적 작업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문제를 해소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둘째, YOUN님은 “이론철학자의 언어게임”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한다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론철학자의 언어게임”은 일상적인 언어게임들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들 나름의 체계 속의 전문용어를 사용할 때는 그렇다 쳐도, ‘철학적 문제’를 처음 제기할 때는, 그들이 일상적인 언어게임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데카르트나 흄이 철학적 문제로 제시하는 회의주의가, 앎 또는 의심에 관한 일상적인 언어게임에서 출발하지 않았다면, 그 문제에 무슨 중요성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또, 그들 나름의 제멋대로인 해결책을 강구한다고 해서 우리가 어떻게, 무슨 근거로 말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의 게임에 불과할 뿐이겠지요. 그렇다면 이 언어게임과 일상적인 언어게임 간의 연결이 YOUN님에게는 과제로 남을 텐데,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런 걸 상정하지 않고 이론철학자들의 발화가 왜 문제가 되는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105~108에서의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그가 여기서 논의하고 있는 것은 특정 철학 이론이 아니고(따라서 어떤 이론철학의 언어게임이 아니고), 어떤 ‘철학적 요구’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학의 순수성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요구(§107)였다고 고백합니다. 이 요구는 또한 결정체와도 같은 순수성에 대한 선입견(§108)이라고도 표현됩니다. 그 이후 §109절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고찰에는 설명이 아니라 기술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기술은 철학적 문제들로부터 그 빛, 즉 그 목적을 얻는다고 합니다. 즉, 철학적 문제들을 해소하기 위해서 이런 기술의 방법이 도입되는 것입니다. 잠시 §90을 가져와 보죠.

§90. 우리는 마치 현상들을 꿰뚫어 보아야 할 것처럼 느끼지만, 우리의 탐구는 현상들이 아니라 현상의 ‘가능성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지향한다. 요컨대 우리는 현상들에 관한 진술의 종류들을 기억해낸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도 사건의 지속 및 사건의 과거, 현재, 미래에 관한 다양한 철학적 진술을 기억해낸다. (이는 물론 시간, 과거, 현재, 미래에 관한 철학적 진술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찰은 문법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고찰은 오해들을 제거함으로써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준다. 여기서 오해들이란 낱말들의 쓰임에 관한 오해들로서, 무엇보다 우리 언어의 서로 다른 영역들에 있는 표현 형식들 사이의 어떤 유사성들로 인해 생겨난 오해들을 말한다. -- 이런 오해들 가운데 일부는 표현의 한 형식을 다른 형식으로 대체함으로써 없앨 수 있다. 우리는 이를 우리의 표현 형식들을 ‘분석하는 일’이라고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과정은 때로 어떤 것을 분해하는 일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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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방법을 사용하는 철학적 고찰은 문법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찰은 ‘오해’들을 제거함으로써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여기서 ‘오해’란 낱말들의 쓰임에 관한 오해입니다. 여기서 서로 다른 영역들에 있는 표현 형식들 사이의 어떤 유사성들로 인해 생겨난 오해란, 이승종 역자께서 각주에 친절하게 예시를 제공해 주셨는데, 시간의 경과에 대한 표현 형식과 강물의 흐름에 대한 표현 형식 사이의 유사성에 현혹되어 시간을 강물처럼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흘러가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오해와 같은 것입니다. 두 언어게임의 겉보기의 유사성 때문에 두 언어게임 사이의 (문법적) 차이를 간과하는 것이죠. 여기서 문법의 기술이 하는 역할은 다음과 같습니다. 시간에 관한 언어게임들의 문법과 강물에 관한 언어게임들의 문법 간의 차이점을 각 언어게임들의 기술이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나중에도 한 번 더 인용하겠지만, 해설은 여기까지만 하고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죠.

§109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문제들이 우리 언어의 작동 방식을 들여다봄으로써, 그리고 그런 작동 방식들을 오해하려는 충동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인식함으로써 해결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것을 ‘정돈’함으로써 해결된다고도 합니다. 그는 “언어(또는 생각함)는 독특한 것이다”와 같은 말을 문법적 착각이 낳은 하나의 미신이라고 말합니다. 네, ‘문법적 착각’이 낳은 미신이요. §111은 철학적 문제를 우리의 언어 형식들을 오해한 데서 생겨나는 문제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문제들에는 깊이 있음이라는 특징이 있는데, 이 깊이는 불안의 깊이입니다. §112는 그 불안의 양태를 보여줍니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데!”라고 말하면서도, “하지만 그건 이래야 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건 이래.”라는 말은 거듭되는 혼잣말입니다. 그리고 §113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시선을 이 사실에 아주 명확하게 고정하고 그것에 초점을 맞출 수만 있다면, 사태의 본질을 파악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합니다. §114에는 “하지만 그건 이래야 해!”의 실례를 부연합니다. 전기 철학의 “명제의 일반 형식은 다음과 같다: 사태가 이러이러하다.”는 명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거듭된 혼잣말은, 거듭해서 사태의 본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사실 사태를 바라보는 형식을 따라가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115는 이상의 논의를 집약합니다. 하나의 그림이 우리를 사로잡았으며, 우리는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언어 속에 놓여 있었고, 언어는 우리에게 그것을 다만 냉혹하게 반복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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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한 훈고학은 그만두고, 이상의 논의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구절들에서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요? 여기에 담긴 내용은 전기 철학 자체가 어떠어떠한 모순적 전제를 갖고 있었다는 비판이 아니라, 전기 철학에서 전제되었던 ‘철학적 문제’의 해소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한 언어게임이 전체 언어의 질서이자 이상이라는 그림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바로 논리학의 언어게임입니다. 사실 엄밀하게 말한다면, ‘논리학의 언어’일 것입니다. 그것이 언어게임이라는 자각이 없었을 테니까요.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을 사로잡은 그림임과 동시에, 그에게 하나의 요구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논리학의 언어가 전체 언어의 질서이자 이상이라는 그림 및 요구에 입각하여 실제의 언어를 살펴보게 되면, 이 논리학의 언어로 어떻게 실제의 다양하고 복잡한 언어들에 대해 말할 수 있는지가 문제가 될뿐더러, 논리학의 언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조차도 왜곡된 그림을 갖게 됩니다(논리학의 언어도 언어게임으로서 실제 언어에 속하니까요. 초-개념들 사이의 초-질서(§97)로서 이해된 논리학은, 더 이상 언어게임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논리학의 순수성에 이상한 특권을 부여하고, 그런 렌즈를 통해 실제의 다양하고 복잡한 언어들을 바라보게 되면 충돌이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이때 우리는 이 충돌을 감지하고 “아무래도 이건 아닌데!”라고 말하면서도, 논리학의 순수성이 전체 언어의 이상이라는 그림 및 요구에 입각해 있는 한 “하지만 그건 이래야 해!”라고 반복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복은, 사태의 본성을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후기 철학의 방법론을 취해 다양한 언어게임들을 그 자체로 기술하여 언어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돈된 관점을 얻은 뒤에는, 실은 사태를 바라보는 형식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그것만을 계속 따라가고 있었던 것일 뿐임이 드러납니다.

여기서 제가 YOUN님에게 앞서 제기한 두 이의가 정당성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비트겐슈타인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어떤 충돌의 발생 자체가 아닙니다. 진짜 철학적 질병은, 어떤 충돌이 발생하여 “아무래도 이건 아닌데!”라고 말함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그건 이래야 해!”만 끝없이 반복하는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서 자신이 어떤 모순을 범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학의 순수성이 자신에게 어떤 요구로 작용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이론철학자들이 모순에 봉착한다고 지적하는 것에 그친다면 이 말은 단지 그 철학자가 철학적 문제 상황에 도달했다고 말하는 것에 불과하며, 모순에 봉착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론철학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별 근거 없이(이게 근거가 없는 이유는 YOUN님이 ‘이론철학의 언어게임’을 따로 상정해서이기도 합니다) 단지 이론철학자들에게 그들이 맞닥뜨린 철학적 문제들을 해결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둘 모두 철학적 문제의 해소가 아닙니다. 철학적 문제가 정말로 해소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이래야 한다는 그 요구 자체가 사라지도록 하여, 그런 충돌이 어떤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철학적 문제는 여전히 문제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둘째, 비트겐슈타인은 그 요구가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하면서, 자신은 하나의 형식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그것만을 계속 따라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따라가고 있었다는 것이 우리 언어 내에 있는 것이고, 철학적 문제는 그것만을 단지 반복했기에 발생했다는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말을 하면서 철학적 문제가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게임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내비쳤다고 생각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이 했다고 말한 것을, 후기 철학의 관점을 이미 전제한 상태에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언어 속에 놓인 한 언어게임에만 머무르면서 다른 언어게임에서까지 말하고자 하는 것, 즉 한 언어게임에 대해서, 자신은 그 언어게임 속에 여전히 있으면서도 다른 언어게임에서까지 말할 수 있도록 하는 특권을 부여하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학에 특별한 깊이(보편적 중요성, §89)가 있는 것으로 보았고, 그렇기에 논리적 순수성에 대한 요구에 사로잡혀 논리학의 언어게임에 특권을 부여하려 했습니다. 바로 이 특정 언어게임에 대한 특권의 부여가 철학적 문제를 발생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문법적 착각이 낳은 미신 혹은 선입견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 언어의 작동 방식을 들여다봄으로써, 언어게임들을 정돈함으로써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논리학의 언어게임뿐만 아니라, 일상의 다양하고 복잡한 언어게임들 역시 ‘있는 그대로 정돈되어 있다(§98)’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사라집니다. 그러한 요구가 사라짐으로써, 명제의 일반 형식과 실제 언어 간의 충돌이라는 철학적 문제는 해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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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을 살펴보죠. 아마도 YOUN님은 이 구절의 ‘형이상학적 쓰임’이라는 표현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이 ‘형이상학의 언어게임, 형이상학자들이 하는 언어게임’과 같은 것을 상정한 뒤, (그 언어게임이 모순이 있으니) 그 언어게임을 그만두고 일상적 언어게임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셨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이상의 논의에서는 ‘형이상학자들이 하는 언어게임’이 나온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의 논의에서 나온 것은, §115에 따르면, 우리의 언어 속에 놓여 있었던 것이고, 언어는 우리에게 그것을 다만 냉혹하게 반복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제가 보기에는, 우리의 언어 속에 놓여 있는 논리학의 언어게임입니다. 바로 그것이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사태를 바라보는 한 형식이겠죠. 즉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오직 논리학의 언어게임 속에만 있으면서 다른 많은 언어게임 속에서도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언어게임 속에서 말하려는 사람은, 비유하자면, 논리학의 언어게임에서 벗어나서 다른 언어게임 속으로 들어가서 말해야 합니다. 한 번에 다수의 언어게임 속에서 말하려고 하는 시도하는 사람은 논리학의 언어게임에서마저도 쫓겨나게 되며, 그런 시도는 결국 아무런 언어게임 속에서도 말하지 못하는 결과만을 불러옵니다. 그 사람은 그렇다면 언어게임 바깥에서 말하도록 내몰리게 되겠죠. 이것이 바로 ‘형이상학적 쓰임’의 의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형이상학적 쓰임은 말하자면 언어게임들 바깥에서의 쓰임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쓰임이라고 할 수 없으며, 우리는 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일상적인 쓰임, 즉 언어게임 속에서의 쓰임으로 되돌아와야 합니다.

(이런 설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각 언어게임들이 잘 기술되어, 서로 다른 것으로 잘 정돈되어 있어야 하겠지요. 그런 정돈 작업을 통해 우리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헛소리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헛소리로 이행(§464)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Q1)과 (Q3)에 대해 답할 수 있게 됩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이론이 모순에 빠진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견해를 붙잡고 그런 결함을 해결하려 한 이유는, 비트겐슈타인은 그 당시에 언어게임에 대한 일목요연한 조망이 없었기 때문에 언어를 그렇게밖에 볼 수 없었으며,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그 모순은 모순으로 여겨지지 않고, 자신이 당면한 현실이자 해결해야 할 과제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철학적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었다는 뜻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전기 철학에서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논리적 순수성에 대한 철학적 요구입니다. 그러한 요구는 언어에 대한 왜곡된 관점에서 생겨납니다. 언어를 일목요연하게 조망하게 되면, 그러한 요구는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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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을 돌아왔지만, 다시 원래의 노선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상의 내용을 짧게 정리해보죠. 저는 비트겐슈타인이 해소하려는 대상이 철학적 문제라고 봅니다. 이것은 단지 어떤 모순을 지적하는 활동으로는 해소되지 않습니다. 어떤 이론철학의 언어게임이 모순을 발생시킨다고 지적하는 것은, (일단 저는 이론철학의 언어게임이라는 용어 자체를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 언어게임을 중단하도록 만들 수 없습니다. 그 모순 자체가 철학적 문제이며, 그건 이론철학자에게 있어서는 모순으로 여겨지지 않고 해결해야 하는 충돌 상황으로 여겨집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론철학의 언어게임이 어떤 충돌을 내재하기 때문에 그 언어게임을 중단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철학적 문제가 그대로 남아 있고, 철학자들의 요구와 충동이 해소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한, 그 자체로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강요에 불과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목표했던 것은, 철학적 문제가 떠오르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89~133에서 비트겐슈타인은, YOUN님의 주장과 달리 본인의 방법론이 언어의 쓰임을 일목요연하게 조망하는 것임을 명백히 밝혔고(아직 제가 제시한 문헌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후에 더 제시될 예정입니다.), 전기 철학의 시기에 사로잡혀 있던 철학적 문제들을 해소했습니다.

아직 논제 (2)는 다 정리된 것이 아닙니다.

YOUN님은 논제 (2)를 주장하시며, 비트겐슈타인이 형이상학의 언어 게임이 어째서 모순에 빠지는지를 폭로하여 그 언어 게임이 고민하는 문제를 해소해버리고자 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저의 주장은, 철학적 문제가 해소는 언어 실천들의 일목요연한 조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YOUN님은 논제 (2)를 주장하시면서 ‘언어/세계’, ‘적용/규칙’, ‘낱말/감각’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제시하십니다. 그런데 YOUN님이 각 주제에 대해 정리하신 내용은, 도저히 『탐구』에서 직접 추출해 냈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간명한 도식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세 주제를 모두 다루는 것은 무리인 듯싶고, 저는 여기서 적용과 규칙에 관한 주제에 대해서만, YOUN님이 제시한 내용이 『탐구』의 텍스트 속 내용과 다름을 보이고자 합니다. (제가 글을 쓰다가 지쳐서, 인용 없이, 그리고 §§185~201만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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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비트겐슈타인은 한 학생에게 자연수열을 적게 하는 언어게임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이 학생에게 “+1”이라는 명령을 1000까지 연습시켰고, 그런 뒤 학생에게 1000을 넘어서는 “+2”를 시킵니다. 그런데 이 학생놈이 1000, 1004, 1008, 1012라고 적네요. 우리는 그 학생에게 뭐하는 짓거리냐고, 너는 둘을 더했어야 한다고 호되게 혼을 냅니다. 그런데 이놈이 지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지가 한 게 맞다고 우기네요.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경우가, 손으로 방향을 가리키는 동작에 반응할 때, 자연스럽게 손목에서 손가락 쪽이 아니라 손가락에서 손목 쪽의 방향을 바라보는 경우와 유사하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학생이 우겨댈 때, 우리는 이놈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상황에 처합니다.

§186. 이전의 설명과 예들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이해”에 도달하기에 부족하다는 걸 느끼고, 비트겐슈타인의 대화 상대자는 매 단계마다 직관이 필요한 건가 싶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러나, 직관에 호소하려면 무엇이 올바른지는 이미 독립적으로 결정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대체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되묻습니다. 직관에 호소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올바른지가 이미 독립적으로 결정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마치 “올바른 게 무엇인지 추측하기”가 무엇이 올바른지를 이미 전제하고 있는 것과 유사합니다. 직관으로 들여다보는 일이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지는 않죠. 이에 응답해 대화 상대자는 “올바른 조치란 명령이 의미한 것과 일치하는 조치”라고 말합니다. 학생은 선생이 “의미한 것”을 알아맞혀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무엇이 올바른 조치인지를 명령할 때, 우리는 무수히 많은 사례들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한 지점에서 그 문장으로부터(“+2”로부터) 무엇이 따라 나오는지, 또는 어떤 하나의 지점에서 그 문장과의 “일치”를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는 여전히 문제로 남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 지점에서 직관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매 지점에서 새로운 결정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편이 대체로 보다 정확합니다. 학생이 처한 상황은, 이미 결정된 올바른 조치들의 목록을 들여다보고 행해야 하는 상황보다는, 올바른 조치가 뭔지를 스스로 결정하고 행해야 하는 상황에 더 가까운 것 같거든요.

§187. 근데 이 갑갑한 대화 상대자가 “하지만 나는 명령을 내렸을 때 이미 그가 1000 다음에 1002를 적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혹은 “의미했다!”라고 답하네요. 이런 대화 상대자의 말에 대해서,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서 “안다”와 “의미한다”라는 낱말의 문법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대화 상대자는 자신이 그 시점에 그 이행을 생각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뭐 그 이행만은 생각했다 치더라도, 다른 이행들(1002에서 1004, 1004에서 1006,...)을 생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안다”, “의미한다”의 언어게임이 각각 “생각한다”의 언어게임과 “의미하는 행위(act of meaning)의 수행”에 관한 언어게임과 구분되어야 함을 지적한 것입니다. “안다”, “의미한다”는 수많은 “생각한다”, 수많은 “의미하는 행위의 수행”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안다”, “의미한다”의 언어게임은 과거의 사건이나 과정을 가리키는 언어게임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특정 시점을 강조하려는 대화 상대자의 말은, 그저 “누군가 내게 그가 1000 다음에 어떤 수를 적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1002’라고 대답했을 것이다.”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며, 이 말은 “그때 그가 물에 빠졌다면 나는 그를 따라 뛰어들었을 것이다.”와 같은 종류의 가정에 불과할 뿐입니다.

§188. §§185~187에서의 대화 상대자에게 비트겐슈타인이 한 마디 하는 내용입니다. 대화 상대자는, 말하자면, ‘저 명령을 의미함’이 그 나름의 방식으로 이미 모든 이행을 해 나갔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화 상대자는, “이행들을 해나가기 전에도 그 이행들은 실제로 이미 이루어진 상태였다”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마치 그 이행들이 어떤 독특한 방식으로 미리 결정되고 예측된 것처럼 말이죠.

§189. 대화 상대자는 “그럼 그 이행들은 대수 공식에 의해 결정되어 있는 게 아니란 말이냐?”고 반문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질문에는 잘못이 들어 있다고 하네요. 그러면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탐구를 진행합니다. “그 이행들은 ... 라는 공식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라는 표현이 어떻게 사용되는가? 언어게임을 들여다보는군요. 우리는 가령 사람들이 어떤 공식을 똑같이 사용하도록 교육받았다는, 그런 규범적 행위들에 관한 사실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교육받은 사람들은, 공식을 넘어선 추가적인 지시사항 없이도 이행이 결정되어 있을 테고, 그렇게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예컨대 어린이들)은 이행을 잘 모르겠죠. 다른 한 편으로, 우리는 y=x^2은 x에 대해 y를 결정하는 공식이고, y=/=x^2는 x에 대해 y를 결정하지 않는 공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이건 공식의 형식에 관한 진술이며, 문법적 진술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문장과 “내가 적은 공식은 y를 결정한다”라는 문장은 구별되어야 하겠지요. 전자는 y=x^2이 함수라는 의미고, “여기 적힌 공식은 y를 결정하는 것인가?” 하는 물음은 여기 적힌 공식이 이런 종류의 공식인지 저런 종류의 공식인지를 묻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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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 표현의 여러 사용들을 구분해 놓으니, 이제 대화 상대자의 주장을 “어떤 이행들이 이루어져야 하는지는 공식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로 정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공식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기준은 무엇인가요?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이, 가령 우리가 그것을 늘 사용하는 방식, 우리가 그렇게 사용하도록 배운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x!2가 x^2을 의미한다면, 그가 의미하는 것은 각 이행들을 결정하는 공식입니다. 이제 그러면 “어떻게 x!2로 이것 또는 저것을 의미하는가?”하고 물어봅시다. x!2로 x^2을 의미한다면, 우리가 x^2를 늘 사용하는 방식대로 사용하는 데서 드러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의미함은 이행들을 미리 결정할 수 있습니다.

§191. 그런데 이상의 이야기는 대화 상대자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대화 상대자는 여전히 불만족스러운지 우리가 “마치 낱말의 모든 쓰임을 단숨에 파악할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반문합니다. 예컨대 어떤 식으로? 우리가 낱말의 모든 쓰임을 단숨에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은, 한 사람이 그렇게 될 때 보통의 경우에 각 이행을 올바르게 해 나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대화 상대자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네요. 비트겐슈타인은 대화 상대자가 아무런 모형도 없으면서, 그냥 이런 표현 방식이 서로 교차하는 그림들의 결과로서 우리에게 뭔가를 제공하는 것뿐인데, 이상한 욕망에 혹한 것이라고 뭐라 그럽니다.

§192. 대화 상대자는 이 과도한 사실에 대한 모형을 갖고 있지 않으면서, 초-표현을 사용하는 잘못된 길로 빠진다고 그럽니다. 위에서 제가 한 말대로라면, 초-표현이라는 건 언어게임 안에 머물려고 하지 않고 자꾸 그 바깥에서 말하려고 한다는 거겠죠.

중간 점검을 해봅시다. 여기까지만 볼 때, 규칙 따르기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논의에서 특정 철학 이론의 모순을 지적한 내용이 있나요? 아니요, 그럴 리가 없죠. 애초에 비트겐슈타인은 그런 작업을 한 적이 없다니까요. 반면 여러 언어게임들을, 그 문법들을 기술하고 나열하고 비교하는 작업은, 정말 많이 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구절이 그런 작업들로 주로 이루어진 것 같네요. §§185~187까지의 작업은, 대화 상대자의 말을 우리의 언어게임 내에 위치시키고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서 “문법적 혼동만 하지 않으면, 뭐 그래 이런 말 정도는 할 수 있지” 정도의 태도를 취합니다. 그리고 §188에서 하는 말은, 대화 상대자가 보이는 어떤 표현에서의 경향성을 지적하고, 비트겐슈타인은 그 경향성이 암시하는 욕망을 포착합니다. “왜 너는 자꾸 뭔가 ”실제로 이미 이루어진 상태다“같은 말을 사용하려 하니? 마치 어떤 독특한 방식으로 이행들이 미리 결정되고 예측된 것처럼 말하네.” 정도의 상황인 거죠. §§189~190은, 대화 상대자가 자꾸 사용하려는 “대수 공식이 이행을 결정한다”는 표현의 의미를, 그 표현이 사용되는 언어게임들을 제시함으로써 이해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 표현이 우리의 언어게임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잘 조망하게 되었죠. 그래서 의미함은 ‘이런 식으로’ 이행들을 미리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191을 보면, 우리의 대화 상대자는 그런 말에는 별로 만족을 못 하고, 아직도 “우리가 낱말의 모든 쓰임을 단숨에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하는 것처럼, 낱말의 모든 쓰임을 단숨에 파악한 사람이 그 낱말을 올바르게 사용한다는 것을 넘어서, “훨씬 직접적인 의미에서 그것을 ‘단숨에 파악할’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모형은 없고, 그런 언어게임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에게 가능한 언어게임들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해 줬는데, 그는 자신이 의미한 것이 이것들이 아니라고 스스로의 욕망에 의해 부정한 것이죠.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한갓된 욕망이, 언어의 표현 방식이 제시하는 서로 교차하는 그림들의 결과로부터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이런 욕망은, 말하자면, 언어게임들이 일목요연하게 파악되지 않아서, 언어게임들의 문법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이런 상태에서 여러 언어게임들(의 문법)은, 말하자면, 뭉뚱그려져 있습니다) 자꾸 복수의 언어게임에서 동시에 말하려고, 결과적으로 언어게임들 바깥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대화 상대자는 초-표현을 사용하는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됩니다. 이하 §§193~195의 내용은, 대화 상대자가 갖고 있는 한갓된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서로 교차하는 그림들”이 무엇인지를, 기계와의 비교를 통해 드러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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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그 자체의 작동 방식에 대한 상징으로서의 기계. 그러니까, 기계는 그 작동 방식을 이미 그 안에 담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기계를 안다면 그 기계가 하게 될 움직임이 이미 완전하게 결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 기계는 구부러지고, 망가지고, 녹을 수 있는 가능성도 있는데, 왜 우리는 기계의 이 부분들은 이런 식으로만 움직일 수 있다는 듯이 말하는 걸까요?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기계에 대해서 말하는 방식을 둘로 구분합니다. 상징으로서의/개념적 원리로서의 기계와, 인과적 질서 속의 실제 기계가 그것들이죠. 여기서 “기계는 그 작동 방식을 이미 그 안에 담고 있는 듯이 보인다.”는 말은, 상징으로서의 기계에 관한 말입니다. 예컨대 기계의 실제 행동을 예측하는 일이 문제일 경우에는 그런 식으로 말하진 않죠. 이처럼 실제 기계가 문제가 될 때는 우리는 기계의 각 부분들이 손상될 가능성 등을 잊지 않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한편으로, 기계는 아주 다르게도 움직일 수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움직임의 어떤 방식에 대한 상징으로서 기계를 사용할 수 있는지 놀라워할 때는, 기계가 그 작동 방식을 이미 그 안에 담고 있는 듯이 보인다고 말합니다. 이런 표현은 마치 미리 정해져 있는 기계의 향후 움직임들을, 서랍 안에 이미 놓여 있었고 이제 우리가 끄집어내는 대상들에 비유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죠.
어쨌든 이러한 두 언어게임들이 교차하는 가운데, 기계가 움직임이는 방식은 실제 기계보다 상징으로서의 기계속에 훨씬 확실하게 담겨 있어야 할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움직임이 경험적으로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것이 원래 이미 나타나 있어야 한다고 말이죠. 그리고 비트겐슈타인도, 상징으로서의 기계의 움직임이 주어진 어떤 실제 기계의 움직임과는 다른 방식으로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한 사실로서 인정합니다.

§194. 그렇다면 언제 우리는 기계가 그 가능한 움직임들을 어떤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이미 그 안에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철학을 할 때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생각하도록 유혹하는 것일까요?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기계에 대해 말하는 방식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기계가 이러이러한 움직임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오직 이러저러하게만 움직일 수 있는, 이상적으로 고정된 기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움직임의 가능성은 무엇인가요? 이는 움직임 그 자체도 아니고, 움직임을 위한 물리적 조건으로만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움직임의 가능성은, 말하자면, 그것의 현실화, 즉 그 움직임과 닮아 있어야 합니다. 이 닮아 있는 정도는, 말하자면, 그림이 그 그림의 대상을 닮은 것보다 훨씬 닮아 있어야 합니다. 움직임의 가능성이 현실화된 것이 그냥 움직임 그 자체니까요.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말도 하네요. “보라, 여기서 언어의 파도가 얼마나 높게 이는지를!”
이런 언어의 파도를, 비트겐슈타인은 다음 물음으로 잠재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기계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움직임의 가능성”이라는 구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여기서도 한 표현의 사용, 즉 한 언어게임을 기술하는 방법이 도입됩니다. 이런 방법만 도입해도 잠잠해지는 거라면, 대체 그 이상한 생각들은 어디에서 온 걸까요? 예를 들어, 우리는 움직임의 그림을 통해 움직임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따라서 가능성이란 현실과 비슷한 어떤 것이다.’ “그것은 아직 움직이지 않지만 움직일 가능성을 이미 지니고 있다.” ‘따라서 가능성은 현실에 매우 근접한 어떤 것이다.’ 와 같은 표현을 쓰곤 하죠. 또, 우리는 이러이러한 물리적 조건이 이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심할지 모르지만, 이것이 이 움직임의 가능성인지 저 움직임의 가능성인지에 대해서는 결코 논의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그림이 이 대상의 그림인지 아니면 저 대상의 그림인지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 있지만, 움직임에 가능성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기에,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따라서 움직임의 가능성은 움직임 자체와 독특한 관계에 놓여 있다. 그 관계는 하나의 그림과 그 그림의 대상 간의 관계보다 훨씬 밀접하다.’와 같은 표현을 씁니다. 또, 우리는 이것으로 인해 마개가 이렇게 움직일 가능성이 생기는 것인지의 여부는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것이 이렇게 움직일 가능성인지의 여부는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따라서 이 가능성이 바로 이렇게 움직일 가능성이라는 것은 경험적 사실이 아니다.’와 같은 표현을 씁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에 관한 우리 자신의 표현 방식에 주의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 해석한다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표현들의 사용의 문법에 대해서는 잘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철학을 할 때 문명인들의 표현 방식을 듣고 그것을 잘못 해석하여 아주 이상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미개인들, 원시인들과 같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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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우리의 정말 답답한 대화 상대자는, 자기가 낱말의 모든 쓰임을 파악할 때 하는 것이 “미래의 쓰임을 인과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쓰임 자체가 이상한 방식으로 나타나 있다는 것”이라고 또 이상한 소리를 해댑니다. 사실 그 말에는, “이상한 방식으로”라는 표현만 제외하면, 다 맞는 말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말을 합니다. 그 문장을 그것을 실제로 사용하는 언어게임과는 다른 언어게임에 속한다고 상상할 때만 그 문장은 이상해 보인다고요. 바로 이것 때문에 여러 언어게임 간의 비교를 통한 문법의 일목요연한 조망이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대화 상대자가 하는 말은, 규칙 따르기의 언어게임에서 볼 때는,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다지 이상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표현을 기계에 관해 말하는 언어게임이나, 그림, 마개에 관해 말하는 언어게임에 대입해 보면, 뭔가 이상함이 느껴집니다. 이는 우리 언어의 서로 다른 영역들에 있는 표현 형식들 사이의 어떤 유사성들로 인해 오해가 생겨난다는 §90에서의 비트겐슈타인의 말과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196. 우리는 낱말의 쓰임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이상한 과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우리가 시간을 이상한 매체로, 마음을 이상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제 지쳐서 상세한 해설은 못 하겠습니다... 제 주장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포인트만 지적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이런 야바위 짓거리를 저질러 버려서 정말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197. “마치 우리가 낱말의 모든 쓰임을 단숨에 파악할 수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 일상적으로 말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하는 일을 이런 말로 기술합니다. 여기에는 놀라울 것도, 이상할 것도 하나도 없습니다. 낱말의 의미는 낱말의 쓰임에 있습니다. 다만 이 말이 쓰이는 언어게임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거나, 그 존재를 깨닫지 못하거나, 그 자체로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어떤 의미에서는’, ‘독특한 방식으로’와 같은 표현을 포기하지 못하는 게 문제죠.

§198. 대화 상대자 놈이 이제는 지가 무엇을 하든 그것은 어떤 해석에서는 규칙에 부합될 수 있다고 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실 이게 크립키가 제기하는 회의적 역설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죠. 비트겐슈타인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고, 차라리 이렇게 말해야 한다고 합니다. “모든 해석은 그것이 해석하는 대상과 함께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 있으며, 그것이 해석하는 대상에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 해석들만으로는 의미를 결정하지 못한다.”라고 말이죠. 해석은 대화 상대자 본인이 제기하는 그런 문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말했더니 대화 상대자는, 그냥 해석이란 말을 빼버리고, 그럼 내가 무엇을 하든 그것은 규칙에 부합하는 것이냐고 말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대화 상대자의 물음에 응수하여, 한 규칙의 표현이 내 행위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물어 보자고 합니다. 한 규칙의 표현은 내 행위들과 어떤 결합을 맺고 있나요? 이는 규칙 따르기 언어게임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그 가능 조건을 직접 보라는 이야기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결합을 물음에 대한 답으로 제시합니다.. 나는 이 기호에 특정한 방식으로 반응하도록 훈련을 받았고, 지금 그렇게 반응하고 있다. 이렇게 말했더니 대화 상대자는 비트겐슈타인이 인과적 연관만을 지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훈련”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자신이 확립된 용법, 관습의 존재를 전제하고서만 규칙 따르기가 있을 수 있다는 점까지 암시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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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우리가 “규칙 따르기”라고 부르는 것은 오직 한 사람이 일생에 오직 한 번만 할 수 있을 어떤 것일까요? 비트겐슈타인은 이 말을 “규칙 따르기”라는 표현의 문법에 대한 하나의 해설이라고 말합니다. 규칙 따르기 논의에서 아직 어떤 모순을 지적했는지 저는 잘 모르겠지만, 표현들의 문법에 대한 해설들은 참 많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관습들이라고 하네요.

§201. 여기서 ‘우리의 역설’은 대화 상대자가 제시한 것입니다. 규칙 따르기에서 발생하는 회의적 역설이겠죠. 비트겐슈타인은 역설을 제시한 뒤, 여기에 하나의 오해가 있다고 합니다. 이 오해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런 사유 과정에서 해석을 연이어 한다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비트겐슈타인이 앞서 “그렇게 말하지 말고 차라리 이렇게 말해라”고 할 때 해석이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해석의 언어게임을 통해서 규칙 따르기 언어게임을 바라보려고 하니까 이상한 오해가 생겨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해석의 언어게임과 규칙 따르기 언어게임은 잘 구분되어야 하며, 그렇다면 규칙을 파악하는 방법은 해석이 아닌 것으로 따로 있겠지요.

용두사미가 되었지만(사실 용두 조차 아니긴 합니다만) 어쨌든 텍스트를 이렇게 살펴보았습니다. 텍스트를 살펴본 이상의 논의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규칙 따르기 논의를 하면서 모순을 지적하는 작업은 조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우리의 언어게임을 일목요연하게 조망하려는 시도를 계속했을 뿐이죠. 이렇게 언어게임을 일목요연하게 조망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형이상학적 열망을 지닌 사람에게, 당신이 말하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도 있고, 우리 자신의 형이상학적 열망이 일목요연한 조망 하에서는 한갓된 것으로 파악되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단어와 관련된 언어게임에 대한 일목요연한 조망을 얻게 된다면, 적어도 그 단어와 관련해서는 철학적 문제가 아예 떠오르지를 않게 되는 것이죠. YOUN님이 재구성한 도식은 단지 재구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의 텍스트 속 작업을 전혀 반영하고 있지 않으며, 단지 결론으로 얻게 된 관점을 취한 뒤 그것에 맞추어 특정 철학 이론의 전제를 비판할 뿐입니다. 저는 일전에 비트겐슈타인이 텍스트 속에서 무슨 작업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의 일환으로, 의욕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논의(§§611~629)를 제 나름대로 요약하고 해설한 글을 제시했습니다. 거기서도 비트겐슈타인이 하는 작업은, 이런저런 언어게임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엮고 비교하고 문법의 차이를 드러내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비트겐슈타인의 텍스트를 조금만 읽어보아도, 언어게임을 일목요연하게 조망하는 작업이 해소하기와 무관하다는 주장은 절대로 나올 수가 없는 주장입니다. 뭐 비트겐슈타인의 해소하기 작업이 모순의 지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나올 수는 있는 주장이긴 하겠지만, 제 생각에는 이것도 틀린 주장입니다. 솔직히 저는 이 논쟁이 논쟁의 여지가 있기나 한지 참으로 의문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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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제 (3)은 조금만 더 검토하고 빠르게 넘어갑시다.

논제 (2)를 다루던 중간에, 저는 YOUN님의 근본적인 실수로 비트겐슈타인 철학이 해소하고자 한 대상을 착각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만약 그 착각이 옳다면, 논제 (3)에 대한 저의 그 짧은 비판은 꽤나 큰 힘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계승자들의 글과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글 간의 차이로 저는 두 가지를 꼽았습니다. 오늘날의 계승자들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작업의 귀결들을 잘 알고 있으며 그의 관점을 자신들의 본격적인 철학적 작업 이전에 (비트겐슈타인을 이해함으로써) 이미 획득했다는 점, 그리고 특정한 이론철학자/철학 이론을 표적으로 삼고 논의를 진행한다는 점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계승자들의 표적은 철학적 문제의 해소보다는 특정한 이론철학자/철학 이론의 비판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이들의 주장에 내재된 모순을 지적하는 작업이 주가 되겠지요. 더구나 제가 위에서 논의한 대로라면, 철학적 문제가 해소되기 이전에는, 모순을 아무리 지적해 봐야 그것은 이론철학자에게는 자신의 당면 과제로 간주될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계승자들은 이미 철학적 문제의 해소라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에 모순의 비판이라는 작업을 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또 사소한 지점일 수 있지만, ‘소여의 신화’에 대한 비판은, 철학적 문제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철학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소여’와 같은 것을 도입하는 해결책이 모순을 내재한다는 비판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셀라스가 철학적 문제의 해소를 주장한 학자는 딱히 아닌 것 같다는 점에서 간접적으로 지지되는 것 같습니다. 소여의 신화는 비판했으면서 왜 규칙 따르기 문제는 빠져나오지 못했을까요? 첫째, 셀라스는 철학적 문제의 해소를 주장하지 않았고, 둘째, 셀라스는 언어게임의 일목요연한 조망을 얻지 못했으며 언어게임의 문법을 기술한다는 방법론을 본격적으로 채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저는 망상합니다.

논제 (4)를 검토합시다.

이 검토는 YOUN님의 글의 각 문단에 대한 비판으로 이루어질 겁니다. 솔직히 할 얘기는 충분히 위에서 한 것 같아요. 인용을 하면 안 그래도 난삽한 글이 더 망할 것 같으니, 그냥 문단 번호로 하겠습니다.

(문단 1) 그 ‘강한 확신’이 왜 ‘너무나 당연한 전제처럼 받아들여’지는지는 비트겐슈타인 후기 철학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단지 그렇다고 말하고 넘어가는 것은, 비트겐슈타인 철학에 대한 통찰 부족이라고 생각해요. 나머지 문장들은, 그 자체로는 동의합니다.

(문단 2) 비트겐슈타인의 치유는, 절대로 ‘해소하기’와 ‘보여주기’라는 별도의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보여주기’에 대해서 형이상학의 언어게임 이외의 다른 여러 가지 언어게임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형이상학의 언어게임이라는 표현도 그렇고, 다른 여러 가지 언어게임의 가능성이라는 표현도 그렇고, 그냥 비트겐슈타인이 사용하는 언어게임 개념을 이해했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식의 ‘보여주기’에 해당하는 것은 표상주의를 비판하고 제시되는 브랜덤의 추론주의 의미론 같은 것이겠죠. 저의 해석에 대해서, 그러니까 ‘보여주기’만을 강조하는 입장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일종의 ‘사용 의미론’으로 성립시킨다는 비판으로 미루어 볼 때 그 저의를 파악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건 틀린 말입니다. 권위에 조금 호소해 보자면, 사용 의미론 해석을 그렇게 강경하게 비판한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계열의 제임스 코넌트가 언어에 대한 일목요연한 조망을 회의주의를 다루는 데 사용합니다. 아니 그리고, '보여주기'가 '해소하기'와 별개의 작업이라면, 비트겐슈타인은 '보여주기'를 대체 왜 했답니까? 사용 의미론으로 해석되어서도 안 된다면서요. 의미론도 아니고 철학적 문제 해소에도 이차적이면, 왜 철학적 탐구라는 텍스트 대부분이 이 작업만 계속 하나요?

(문단 3) 이것에 대한 비판은 이상의 내용에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형편없는 글이라 이런 말씀을 드리기 참 뭐하지만, 글을 꼼꼼히 잘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문단 4) 문법에 대한 견해는, 특정 견해가 아닙니다. 예컨대, 올바른 계산을 하려면 그 계산 체계는 모순을 포함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특정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내세우는 태도입니까? 감각은 사적이고, 의심은 알 수 있는 대상에 대해서만 인지적 의미를 갖는 방식으로 할 수 있고, 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의도에 대해 발화적 권한이 있다는 것, 이런 것들이 어떻게 ‘특정 견해’일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저의 비트겐슈타인 해석에 따르면, 형이상학자들은 일상적인 언어게임들로부터 출발하는데, 서로 다른 언어게임들 간의 문법적 차이를 간과하고, 말하자면 여러 언어게임들이 뭉뚱그려진 상태에서 말하다 보니,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발화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언어게임의 다양한 문법을 기술하는 작업은, 누구나 받아들이고 있는 당연한 것들이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것이고, 그리고 그렇게 놓침으로 해서 사고회로가 꼬이게 된 것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작업의 방식에 대해서도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 그러한 작업은 어떤 언어적 직관에 입각해서 의미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주어진 설명이 타당한 언어게임을 상상하거나 고려하기(『탐구』 §2, §48), 중간 고리들을 발견하고 발명하기(『탐구』 §122), 자연사적인 것을 지어내기(2부 §365), 한 표현을 그것과 문법적으로 연관된 표현을 탐구함으로써 탐구하기(『BB』) 등의 방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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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님은 일목요연한 조망에 대한 오해를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게 신의 관점을 상정한다고 자꾸 말씀하시는데, 일단 지난 논의에서 YOUN님이 언어에 대한 메타적인 기술 자체를 반대하시는 건 아니라는 점을 인지했고, 다른 측면에서 그런 주장을 반박해보고자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YOUN님이 언어게임의 일목요연한 조망에 대해 오해하시는 까닭은, 그것이 언어 전체에 대한 어떤 관점을 전제한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런 오해를 없애고자 이야기를 하나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비트겐슈타인 철학에서 ‘전회’라고 지적될 만한 사건은, 세간에 알려진 것은 단 두 번뿐이지만, 그것보다 몇 번 더 있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중기에서 후기로의 이행인 1937년 즈음에 일어났습니다. 위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중기 철학은 “방법의 발견”으로 특징지어진다는 말을 넌지시 했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새로운 철학적 방법, ‘The Method’를 발견하고는, 이제 철학은 단지 Skill의 문제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상황은 모든 질병에 대한 치료약 제조법을 획득한 것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각각의 질병에 대해서, 그리고 각각의 환자에 대해서 치료약을 만드는 일은, 한 번에 하나씩 해야 하는 작업이겠지만, 결국 방법은 동일하죠. 그러나 1938년 2월 23일에, 비트겐슈타인은, 후에 『탐구』 §133절 직후에 들어오게 되는, “단 하나의 철학적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다양한 치료법들이 있는 것처럼 여러 방법들이 있기는 하지만.”이라는 구절을 썼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89~133의 초고를 쓴 것이 1936년 말에서 1937년 초입니다. 그런데 그 초고에 저 구절은 빠져 있습니다. 이것이 어떤 차이를 가져오는 걸까요? 방법의 단일함은 관점의 단일함을 전제합니다. 그러니까 중기 철학의 비트겐슈타인은 이미 언어에 대해서 하나의 이상적인 관점을 상정해 놓았고, 그 관점에 맞게 언어의 질서를 배열하면 철학적 작업은 끝나게 되는 겁니다. 그게 Skill이란 말로 비트겐슈타인이 뜻한 것이겠죠. 그러나 후기 철학은, 우리가 언어에 대해서 그런 단일하고도 이상적인 관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포기합니다. 그럼에도 비트겐슈타인은 “일목요연한 조망”이라는 표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대체 왜일까요? 그 일목요연한 조망이라는 것은 특정 표현이 사용되는 여러 언어게임들에 대해서도, 그러니까 언어의 극히 일부분에 대해서도 가능하고, 또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위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의 거의 대부분의 작업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일거에 진행되는 것이 아니고, 각 표현들이 어떤 쓰임을 갖는지를 살펴보고 기술하고, 그 언어게임의 문법을 검토하고 하는 작업으로 진행되죠. 우리가 특정 표현에 대해, 예컨대 의도에 대해 그런 작업을 하면 우리는 의도에 관련된 언어게임들에 대한 일목요연한 조망을 얻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의도에 관해서는 철학적 문제들이 소멸하겠죠. 그러나 그것이 전부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전체에 대해서 우리가 특정한 관점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딱히 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위에서 제기한 이야기의 흐름대로라면, 후기에 와서는 더더욱 반대하겠죠. 이게 어떻게 신의 관점을 상정하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형이상학자들과의 직관 차이를 말씀하신다면, 저는 언어게임에 대한 직관이 어긋나는 사람은 사람인지의 여부가 논란이 된다고 생각하며, 그럼 그 대상을 저의 철학적 고찰에서 왜 고려해야 하는지 설득이 되지 않습니다. 계산이랑 마찬가지인 겁니다. 모순적인 계산 체계를 사용하는 걸 계산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걸 계산이라고 안 부릅니다. 그게 계산의 언어게임의 문법인 겁니다. 이게 차이가 나 버리면, 그 사람이랑 계산 이야기를 뭐하러 하고 앉아 있을 겁니까? 언어게임은 '우리'가 하는 겁니다.

드디어 YOUN님의 모든 논제를 반박했습니다. 소감을 짧게 밝히자면, 저는 이 문제가 정말로 진지한 논쟁거리가 되는지조차 잘 납득이 되질 않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텍스트 곳곳에서 제 주장에 대한 정당화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명백한데요. 저는 가능하다면 이 글로 모든 논쟁을 끝내고 싶기에, 주어진 시간 안에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좋은 논의를 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딱히 그렇지는 못한 것 같아 아쉽습니다. 태클, 반박, 비판 언제든지 환영입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저는 웬만하면 이 글이 마지막이기를 바랍니다. 글을 쓰는 게 너무 힘들고 지쳐서 그런 것도 있고요. 이 글이 설득에 실패한다면, 더 설득할 자신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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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에 나오는 내용은 저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비트겐슈타인의 텍스트에서 인용한 것들입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1~693이 저의 주장에 대한 근거이지만, 결정적이고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들만 모아 보았습니다. 이미 글에서 전문을 인용한 것은 숫자만 표기하도록 하겠습니다.

§122

§126. 철학은 모든 것을 우리 앞에 내놓을 뿐, 아무것도 설명하거나 추론하지 않는다. -- 모든 것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으므로 설명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숨겨져 있는 것은 무엇이든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철학”을 모든 새로운 발견과 발명에 앞서 가능한 것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127. 철학자의 일은 특정한 목적을 위해 기억을 모으는 것이다.

§128. 만일 누군가 철학에서 논제들을 제기하려고 한다면, 그 논제들에 대한 논쟁은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 논제들에 동의할 테니까.

§129.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물의 측면들은 그 단순함과 평범함 때문에 숨겨져 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알아차릴 수가 없다 — 그것은 항상 우리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탐구가 기반하고 있는 실제 토대들에 전혀 주목하지 않는다. 이 사실이 언젠가 그들의 주목을 받지 않는다면 말이다. -- 그리고 이것은 다음을 뜻한다: 일단 눈에 띄기만 하면 가장 주목을 받을 만한 가장 강력한 것이 우리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130. 우리의 명료하고 단순한 언어게임들은 미래에 언어를 규제하기 위한 예비 연구들 — 이를테면 마찰과 공기 저항을 무시한 최초의 근사치들 — 이 아니다. 오히려 언어게임은 유사성과 비유사성을 통해 우리 언어의 연관 관계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비교의 대상으로서 존재한다.

§132. 우리는 언어의 쓰임에 대한 우리의 앎에 하나의 질서를 확립하려 한다. 그것은 특정한 목적을 위한 질서이며, 유일한 질서가 아니라 여러 가능한 질서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목적을 위해 우리는 우리 언어의 일상적 형식 때문에 쉽게 간과되는 차이들을 반복해서 강조할 것이다. 이 때문에 마치 언어를 개혁하는 일이 우리의 과제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특정한 실제 목적을 위한 그런 개혁, 실제적 사용에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우리의 용어법을 개선하는 일은 전적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우리가 관여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혼란에 빠지는 경우는 이를테면 언어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헛돌 때 생겨난다.

§133. 우리는 우리의 말을 사용하기 위한 규칙 체계를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방식으로 개선하거나 완전하게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추구하는 명료성은 실로 완전한 명료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다만 철학적 문제들이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발견이란 내가 원할 때 철학하는 일을 그만둘 수 있게 해 주는 발견이다. -- 철학이 더 이상 스스로를 문제 삼는 질문들 때문에 고통받지 않도록 철학에 편안한 휴식을 주는 그런 발견이다. -- 그 대신 이제 예들 속에서 하나의 방법이 제시되고, 그러면 일련의 예들은 중단될 수 있다. --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문제들이 해결된다. (어려운 점들이 제거된다.)

§194

§293. 내가 나 스스로에 대해서, “아픔”이라는 낱말의 의미를 아는 것은 오직 나 자신의 경우를 통해서라고 말한다면 — 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해야 하지 않는가?그리고 나는 대체 어떻게 하나의 경우를 그토록 무책임한 방식으로 일반화할 수 있는가?(후략)

§304. (전략) 우리는 여기서 우리에게 집요하게 강요되는 문법을 거부했을 뿐이다.

역설이 사라지는 경우는, 우리가 언어가 언제나 한 가지 방식으로 기능하고 언제나 똑같은 목적, 즉 생각들 — 가령 집, 아픔, 선악 등 다양한 것에 대한 생각들 —을 전달하는 목적에 이바지한다는 관념과 근본적으로 결별할 때뿐이다.

§308. 마음의 과정과 상태, 그리고 행동주의에 관한 철학적 문제는 대체 어떻게 생겨나는가? -- 그 첫 단계는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는 과정과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것들의 본성을 미결정인 채로 놔둔다! 아마 언젠가 우리는 그 본성에 관해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다. -- 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 때문에 우리는 그 문제를 하나의 특정한 방식으로만 보게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의 특정한 과정을 더 잘 알게 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어떤 개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후략)

§489.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어떤 경우에 어떤 목적으로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가?

어떤 행위방식이 이 말과 함께 일어나는가? (인사를 생각해보라!) 어떤 장면에서 이 말이 사용되는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사용되는가?

§593. 철학적 질병들의 주요 원인은 — 편식이다: 우리는 오직 한 종류의 사례만 가지고 자신의 생각을 키운다.

§599. 철학에서는 어떤 추론도 도출되지 않는다. “어쨌든 그것은 이러함에 틀림없다!”는 철학의 명제가 아니다. 철학은 다만 모두가 인정하는 것을 밝혀낼 뿐이다.

§655. 중요한 것은 우리의 체험을 가지고 언어게임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게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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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마지막으로, 카벨의 비트겐슈타인 해석에 대한 코넌트의 논문에 대한 제 요약을 별도로 첨부합니다. 제가 쓴 글 전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회의주의자의 발화에 아무런 결함이 없다는 말은 보다 심층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저는 여기서 코넌트가 소개하는 카벨이 회의주의자에 대해서 어떤 말을 했는지, 보다 섬세하고 주의깊게 주목하고자 합니다. 카벨이 지적하는 회의주의자의 문제는, 그가 자기모순에 빠진다는 것이 아니라, 딜레마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딜레마의 한 뿔은, 완벽하게 뜻이 통하는 말을 하면서 보편적인 회의를 표명하는데 실패하는 것이고, 다른 한 뿔은, 언어게임 바깥에서 말하도록 이끌리는 것입니다. 회의주의자가 당면한 문제가 딜레마라는 점이 중요한 이유는, 그에게 완벽하게 뜻이 통하는 말을 하면서 보편적인 회의를 표명하지 않는 선택지가 언제든지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회의주의자가 그의 말과 관련해서 "비정합적인 욕망을 갖고 있다"는 카벨의 표현은 단지 수사법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가 완벽하게 뜻이 통하는 말을 할 선택지를 스스로 거부하고 있다는 점을 명쾌하게 지적한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회의주의자는 언어 게임 바깥에서 말하도록 이끌리며, 사실상 “아무 말도 안 하게” 됩니다. 자신이 아무 말도 안 했다는 것을 본인은 모르기 때문에, 심지어 무언가를 뜻있게 말할 선택지를 스스로의 비정합적인 욕망으로 거부했음은 더더욱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카벨은 "의미함의 환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코넌트가 인용한 카벨의 말을 잠시 가져와 보죠.
“Not saying anything” is one way philosophers do not know what they mean. In this case it is not that they mean something other than they say, but that they do not see that they mean nothing (that they mean nothing, not that their statements mean nothing, are nonsense).

이 구절에 대한 윌리엄스와 맥긴의 오해와 그에 대한 비판은 굳이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여기에서 인용된 카벨의 말에 따르면, 문제는 철학자의 진술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철학자 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입니다. 윗 답글에서 제가 서술한 카벨의 해석이 옳다면, 우리는 원리적으로 어떠한 발화에 대해서도 그것이 무의미하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 문법 규칙은 위반될 수 있는 규제적 성격을 갖고 있지 않으며, 어떠한 발화마저도 그것에 적절한 문법을 등록할 수 있다면 의미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심지어 회의주의자의 발화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결함이 있는 것은 발화가 아니라 발화자(의 욕망)입니다.

이때 코넌트가 말하듯이 회의주의자에게 우리 언어의 다양한 언어 게임들을 보여줌으로써, 그에게 유효한 의미의 다양한 가능성들의 조망/통찰Übersicht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그가 이 다양한 언어게임들 중 어느 하나에 참여하기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즉 그가 언어게임들 내에서 말하기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가 그의 말로 무엇을 의미할지는 여전히 불명료하게 남아 있으며, 그런 한 우리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언어게임들에 대한 일목요연한 조망이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언어게임들이 일목요연하게 조망된 상황에서는, 회의주의자의 (보편적으로 의심하고자 하는) 욕망을 한 번에 서로 다른 여러 언어 게임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회의주의자는 언어 게임 바깥에서 말하도록 이끌립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카벨은 여기서도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이 우리 단어의 의미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의미하는 것에 대한 자각 임을 명시하며 일관된 구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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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에 응답하여 긴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읽기에는, (1) 제 비트겐슈타인 독해를 크게 오해하신 부분과 (2)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논지를 좀 더 세밀하게 전개하는 데 도움이 되는 부분이 특별히 눈에 띄네요. 그래서 voiceright님의 비판을 저와의 관점 차이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근본적인 대립으로 받아들여야 할지조차 사실 아직 저에게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추가적인 내용들은 다음에 기회가 될 때 다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