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로버트 브랜덤의 "A Tune Beyond Us, Yet Ourselves: Reasons and Conceptual Realism" (2026)을 읽고 남기는 인상비평 수준의 서평입니다.
Brandom, Robert (forthcoming). A Tune Beyond Us, Yet Ourselves: Reasons and Conceptual Realism. Topoi:1-12.
A. 내용
고대 그리스 이래 전통적 철학관 따르면, 우리가 지각하는 외관( appearance)은 현실과 닮아(resemblance) 있다. 그러나 17세기 과학 혁명 이후 이러한 관점은 폐기되는데, 단적으로 말해서 지구와 태양계의 우주적 질서는 우리에게 보이는 외관과 완전히 다르게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과학혁명 이후의 인식 패러다임을 설명하기 위해 표상(representation)을 도입한다. 이에 따르면 대수 기하학에서의 방정식(x2+y2=1)은 그것의 대응물인 '원'과 전혀 "닮지" 않았지만, 그 형태를 표상 하고 그에 대해 추론할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을 급진적으로 발전시킨 이는 스피노자인데, 그에 따르면, 마음과 세계의 표상관계는 단순히 개별관념과 개별사물 사이의 일대일 관계가 아니라 관념들의 체계와 사물들의 체계 사이의 전체론적 동형성 (global isomorphism)에 기초한다. 즉 사물들의 연관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만큼 관념들의 체계 역시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holism), 결과적으로 관념체계와 사물체계 사이에는 완전한 기능적 대응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표상관계는 칸트에 이르러 극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칸트는 단순히 관념과 사물 사이의 표상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표상이 주체의 인식활동을 통해 개념적 형태(개념/판단/추론)로 주어져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사물에 대한 지각은 이제 단순히 주어진 사물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사유주체가 주어진 것에 대해 담론적/추론적 능력을 능동적으로 발휘하는 과정이자 곧 이성적 주체의 규범적 태도라는 점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인식주체의 표상(representing) 속에서, 표상된 것(represented)이 "개념적 형태"로 드러난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이 경우, 마음과 세계 사이의 표상 관계가 어떻게 설명되는가? 스피노자에게서는 사물들의 체계와 관념들의 체계 사이의 기능적 동형성을 말할 수 있었다. 반면 칸트는 인식 주체의 규범적 태도를 말할 수 있게 된 대신, 이러한 규범적 태도는 사물들의 체계보다는 관념들의 체계 쪽에 가깝기 때문에, 마음과 세계 사이의 동형성을 말하기가 어려워진다. 즉 이성적 주체들이 주고 받는 개념적 규범들은 주체의 표상(representing) 속에서 드러나는 현상(appearance)에 필연적으로 한정될 수 밖에 없고, 이러한 현상과 독립적인 사물 그 자체는 개념적 질서 바깥으로 밀려난다.
이러한 점에서 브랜덤은 칸트를 "개념적 현상론 (conceptual phenomenalism)"으로 규정한다. 이와 대척점에 있는 브랜덤 본인의 입장은 "개념적 실재론 (conceptual realism)"으로서, 이성적 주체들의 개념적 구조가 표상하는(representing) 측면 뿐만 아니라, 표상되는(represented) 세계 그 자체에도 부여된다고 주장한다.
We can characterize any view that restricts conceptual articulation to the realm of appearance ‘conceptual phenomenalism.’ By contrast, we can use ‘conceptual realism’ to describe accounts of conceptual structure that discern it on both ends of the relations between discursive representings and what they represent. In these terms, Kant is a conceptual phenomenalist.
브랜덤 본인이 지적하듯, 개념적 현상론과 개념적 실재론의 차이는, 칸트 본인이 제시한 선험적 관념론(transcendental idealism)과 선험적 실재론(transcendental realism)의 차이에 직접적으로 대응한다. 브랜덤에 따르면, 칸트는 개념적 구조의 원천이 사유 주체에게 있다는 점 때문에, 경험적 실재론을 지지하면서도 선험적 실재론을 지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것이 칸트의 한계이다. (브랜덤은 개념적 실재론을 거부했을 때 생기는 병리학을 맥도웰의 <마음과 세계>가 훌륭하게 보여준다고 짧게 언급한다. )
본인은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 표상되는 세계 그 자체의 체계 역시 개념적으로 구조화되어있다는 개념적 실재론을 논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브랜덤이 도입하는 것은 2가지인데, 하나는 Greg Restall와 Ellie Ripley가 발전시킨 규범적 화용론이고, 다른 하나는 Kit Fine의 진리제작자(truthmaker) 의미론(의 변용)이다. 거칠게 말해서, 규범적 화용론이 이성적 주체의 측면을 다룬다면, 진리제작자 의미론은 이러한 규범성의 개념적 구조를 세계 자체에도 귀속시킬 수 있게 해준다.
그 결과 얻어지는 것은 스피노자와 칸트의 결합이다. 이성적 주체들의 규범적 실천(칸트)과 동형적인 구조를 세계 그 자체에서도 찾을 수 있다(스피노자).
B. 평가
브랜덤은 흔히 맥도웰과 함께 피츠버그 학파로 묶이지만, 사실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둘의 철학적 지향은 정반대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다르다. 나의 개인적 취향은 브랜덤보다는 맥도웰 쪽에 기우는데, 그 이유는 다음이다: 브랜덤과 맥도웰이 서로 동의하는 영역은 딱히 브랜덤이 특별한 영역이 아니다; 브랜덤이 특별해지는 영역에서 그 둘의 입장은 갈라지는데, 여기에서 나는 맥도웰이 맞고 브랜덤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내가 브랜덤을 너무 모르는 것일까? 프로그램적 성격의 이 짧은 글에서 드러나는 브랜덤의 "개념적 실재론"은, 내가 파편적으로 알고 있는 브랜덤의 지향과 너무나도 다르게 느껴진다. 특히 브랜덤은 로티의 표상주의 비판을 계승하여 추론주의적 의미론을 발전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뜬금없이 정반대의 성향에 위치한 진리제작자 의미론을 끌고 오는 것부터 당황스럽다. (물론 파인의 진리제작자 의미론을 끌어들여서 직접적인 증명을 한 것은 그의 동료 Hlobil이다. 브랜덤과 흘로빌은 2025년에 <Reasons for Logic, Logic for Reasons>라는 책을 공저했다.) 애초에 맥도웰과 셀라스-로티-브랜덤 사이의 주된 구별점 중 하나가 진리조건적 의미론, 표상주의적-경험주의적 객관성을 둘러싼 논쟁이 아니었는가? 브랜덤의 개념적 실재론 지향이 나에게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에서 전기 비트겐슈타인으로의 전향 만큼이나 갑작스럽다.
다른 한편으로, 브랜덤이 칸트를 다루는 방식이 너무 헤프다. 브랜덤의 구별을 따르자면, 그가 지적한대로 칸트는 선험적 관념론자이고, 개념적 현상론자다. 브랜덤이 여기서 칸트가 틀렸다고 말하는데, 왜 이것이 틀렸다고 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진술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왜 칸트가 선험적 실재론을 거부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고려도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 참조: 진리대응론 논박: 칸트의 경우 )
밑에서 좀 더 부연하겠지만, 나는 브랜덤이 실제로는 칸트의 입장과 별반 다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입장을 칸트로부터 구별짓기 위해 칸트를 의도적으로 곡해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본다. 나는 이미 브랜덤이 <명시적으로 만들기>에서 칸트에게 regulism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는 규칙들이 규칙따르기에 본질적이라는 입장)을 의도적으로 잘못 귀속시킨 전과를 확인한 바 있다.
마지막으로, 실제 브랜덤이 주장하고 논변하는 내용이, 그가 제시하는 개념적 실재론의 대담한 정의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 역시 모호하다. 브랜덤의 개념적 실재론에 따르면, 이성의 개념적 구조가 또한 사물 그 자체의 구조(things exactly/really as they are)를 반영한다. 그는 분명 "exactly/really as they are" 등의 수사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개념적 실재론은 개념적 현상론과 구별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러한 수사적 눈속임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내가 보기에 개념적 실재론의 주장은 2가지 방식으로 읽힐 수 있다.
- 약한 독해: 우리는 이성의 개념적 구조와 독립적인 사물 그 자체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 즉 이성에 의해 파악된 사물이 개념적 구조를 가진다면, ipso facto 사물들의 체계 역시 개념적 구조를 가진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이것과 별도로 객관적 사물 그 자체의 구조에 대해 고려할 필요가 없다.
- 강한 독해: 사물 그 자체는 이성의 개념적 구조와 무관하게 특정한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그런데 마침 이 구조화의 방식이 이성의 개념적 구조와 동형적이다.
개념적 실재론과 개념적 현상론의 구별이 유의미하기 위해서는 2번처럼 강하게 독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약한 독해는,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에 대한 특정한 해석이나 맥도웰의 진리동일론("When one thinks truly, what one thinks is what is the case")에 의해서도 지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번의 강한 독해는 충분히 강한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이고(참조: 존재론적 실재론과 형이상학적 실재론), 이것을 브랜덤이 의도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가 의심된다. 눈에 들어오는 2가지 대목이 있는데, 가령 진리제작자 의미론보다 규범적 화용론을 우선시 하는 대목과, 개념적 실재론을 진리대응론과 구별하는 대목이다.
I have here adopted a pragmatics-first order of explanation, which explains what reason relations are by appeal to their role in articulating norms governing practices of rationally challenging and defending doxastic commitments. It is appropriate to understand reason relations as such first in their relation to what doxastic practitioners do—just as Kant thought. But he was wrong to think that such a dependence at the level of sense of our conception of the conceptual on our understanding of activities of reasoning entails that at the level of reference items cannot be in conceptual form unless that form is imposed by rational activities.
It is important that the isomorphism, and so the correspondence between representings and representeds, is specified to begin with not at the level of sentences and facts, but at the higher level of reason relations. That is, on the linguistic side it is at the level of meaning, not of truth. The common structure we have discerned does not depend on what anyone is actually doxastically committed to, on the pragmatic side of representings, nor on what states are actual or factual, on the semantic side of represented reality. It is not a correspondence theory of truth. Rather, the sort of conceptual realism it underwrites is a transcendental presupposition of the possibility of correspondence theories of truth.
요약하자면, 브랜덤 제시하는 개념적 실재론은 무언가 기이하다. 그가 기존의 견해를 보강하여 새로운 궤도에 진입한 것이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개념적 실재론"은 과대포장의 혐의가 있어 보인다. 물론 여전히 더 그럴듯한 시나리오는 내가 브랜덤의 지적 여정에 무지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