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대응론 논박: 칸트의 경우

진리가 인식(truth-bearer; proposition, sentence, judgment etc.)과 대상(truth-maker; fact, state of affairs etc.)의 대응/일치에 있다고 주장하는 진리대응론은 상식적으로 별로 문제가 없어보이지만 철학자들에게는 오랜 의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진리대응론을 비판하는 논변에 있어서 의외로 칸트가 선구자격 위치에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이번 기회에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칸트의 진리대응론 논박은 그 자체로 굉장히 흥미롭고 도발적인 지점들을 여럿 가지고 있고, 이를 통해 프레게, 퍼트남, 데이빗슨, 맥도웰 등의 현대철학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칸트는 이미 순수이성비판 A58/B82 이하에서 진리대응론에 대한 의심을 넌지시 비추었는데요. 이에 대한 완전한 논변은 칸트의 Jäsche 논리학 교재에 등장합니다.

진리는 인식이 대상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러한 한갓 명목적 설명에 따르면, 나의 인식은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대상과 일치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대상과 나의 인식을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대상을 인식함을 통해서이다. 그렇다면 나의 인식은 자기 스스로를 확인하는 것이 되고, 이것은 진리가 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대상은 나의 밖에 있고 인식은 나의 안에 있으므로,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대상에 대한 나의 인식이 대상에 대한 나의 인식과 일치하는지이다. 이러한 순환적 설명을 고대인들은 Diallele라고 불렀다.

Wahrheit, sagt man, besteht in der Übereinstimmung der Erkenntniß mit dem Gegenstande. Dieser bloßen Worterklärung zufolge soll also mein Erkenntniß, um als wahr zu gelten, mit dem Object übereinstimmen. Nun kann ich aber das Object nur mit meinem Erkenntnisse vergleichen, dadurch daß ich es erkenne. Meine Erkenntniß soll sich also selbst bestätigen, welches aber zur Wahrheit noch lange nicht hinreichend ist. Denn da das Object außer mir und die Erkenntniß in mir ist, so kann ich immer doch nur beurtheilen: ob meine Erkenntniß vom Object mit meiner Erkenntniß vom Object übereinstimme. Einen solchen Cirkel im Erklären nannten die Alten Diallele (Ak, 9: 50)

Truth, it is said, consists in the agreement of cognition with its object. In consequence of this mere nominal explanation, my cognition, to count as true, is supposed to agree with its object. Now I can compare the object with my cognition, however, only by cognizing it. Hence my cognition is supposed to confirm itself, which is far short of being sufficient for truth. For since the object is outside me, the cognition in me, all I can ever pass judgment on is whether my cognition of the object agrees with my cognition of the object. The ancients called such a circle in explanation a diallelon.

소위 비교-논변이라고 불리는 이 논변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진리는 인식과 대상의 일치이다. (전제)
  2. 어떤 인식 P가 대상 O와 일치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P와 O를 비교해야만 한다. (전제)
  3. P와 O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먼저 O를 인식해야 한다. 즉 P와 O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O에 대한 인식(=P)가 전제되어야 한다. (전제)
  4. P와 O를 비교한다는 것은 따라서 O에 대한 PO에 대한 P를 비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비교는 순환적이다. (2, 3)
  5. 결론: 인식과 대상이 일치하는지 비교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인식이 참인지 확인할 수 없다.

칸트가 5번의 회의주의적 결론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므로, 우리는 전제 1, 2, 3 중 적어도 하나를 거부해야 합니다. 만약 전제 1을 거부해야 한다고 성급하게 결론짓는다면, 우리는 칸트가 진리대응론 일체를 거부했다는 (성급한) 결론에 도달할 것입니다.

칸트는 이러한 회의주의적 결론이 나오는 이유에 대해 위에서 단 한 문장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대상은 나의 밖에 있고 인식은 나의 안에 있으므로,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대상에 대한 나의 인식이 대상에 대한 나의 인식과 일치하는지이다.” 얼핏 이 문장은 버클리적인 관념론을 함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가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이 오직 인식의 범위 내부의 대상이라면, 모든 대상은 마음 속에 존재한다는 주관적 관념론을 지지해야 한다는 (역시 성급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것들은 칸트가 의도한 바가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위 문장을 통해 칸트가 의도한 바는 다음입니다. 전제2와 전제3은 마치 대상과 독립적인 어떤 인식, 혹은 어떤 인식과 독립적인 대상이 존재한다는 듯이 서술하고는, 그 다음 양자가 일치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칸트는 이것이 매우 오도적인 그림이라는 것입니다. 인식대상을 애초에 이질적이고 상호 무관한 개체로서 전제하게 되면, 인식은 마음 안에 있고 대상은 마음 밖에 있기 때문에 양자를 비교할 수 없다는 회의주의적 결론에 필연적으로 노출됩니다.

대상인식으로부터, 혹은 인식대상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무언가로 전제하는 것은 바로 칸트가 거부하는 물자체의 독단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진리대응론은 마치 우리의 인식 일체로부터 독립적인 대상=물자체를 상정하고 그 이후 이 물자체와 우리의 인식 (무엇에 대한?) 이 일치하는지를 묻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물자체는 그 정의상 인식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인식될 수 없는 것(=대상)과 인식을 비교해야 한다는 회의주의적 결론에 빠집니다. 이 독단주의와 회의주의가 바로 칸트가 거부하는 물자체의 사유, 즉 선험적 실재론(transcendental realism)에 해당합니다.

대상은 인식의 대상이고, 인식은 대상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 기본적인 것을 기억한다면, 대상과 인식을 “비교”해야 한다는 함정에 빠지지 않아도 됩니다. 대상으로부터 촉발되어 범주에 의해 선험적-필연적으로 종합된 인식은 그 본성상 대상과 일치하는 참인 인식입니다. 주목할만한 것은, 인식과 대상의 일치로서의 진리 개념이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transcendental idealism)의 사소한 귀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선험적 관념론을 받아들이면, 비교에 호소하는 실체적 대응 관계를 끌어들이지 않고도, 원리적 일치관계를 구해낼 수 있습니다. (거짓인 인식의 경우 다른 종류의 설명을 요구하지만, 이것이 "인식과 대상의 일치"로서의 진리개념의 가능성을 해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버클리적인 관념론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칸트가 말하는 것은 대상으로부터 촉발되어 선험적-필연적으로 종합된 참인 인식의 경우, 그 직관의 수준에서 이미 대상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This rose is red”라는 참인 인식은 실재하는 대상(=this rose being red)으로부터 촉발된 직관을 포함하므로, “This rose is red”라는 인식이 외부의 대상(=this rose being red)과 일치하는지 "비교"해볼 필요가 없이 이미 내재적으로 일치합니다. 이 주장은 “대상(=This rose being red)이 내 마음 속에 존재한다”는 버클리적 관념론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3줄 요약:

  1. 인식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물자체로서의 대상을 상정하는 한(=선험적 실재론), 진리대응론은 불가능하다.
  2. 대상과 인식 사이의 선험적-종합적 관계를 주장하는 선험적 관념론은 진리대응론의 난점에 빠지지 않고도 “인식과 대상의 일치”라는 명목적 진리 개념을 지지할 수 있다.
  3. 이러한 선험적 관념론은 버클리적 관념론과 다르게 외부 대상의 실재를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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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다음 부분이 조금 이해가 되지 않네요.

저는 진리대응론을 '명제가 참이라는 것은 실제 대상과 일치하는 것이다'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 노트북은 존재한다> 라는 명제는 실제로 노트북이 존재한다면 참인 것이지요. 그리고 @Herb님도 말씀하셨듯이, 칸트는 외적 물체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는 외적 물체 너머에 있는 물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뿐이지요. 그렇다면 칸트는 <이 노트북은 존재한다>의 진리여부가 외적 물체, 예를 들어 노트북의 존재여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어보입니다.

제가 칸트의 입장을 다르게 이해하는 이유는 진리대응론의 이해의 차이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위 인용에서 봤듯이, @Herb 님은 진리대응론이 물자체와 인식의 일치여부를 묻는 것이라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진리대응론이 외적 물체와 인식의 일치여부를 묻는다고 본다면, 칸트는 진리대응론을 부정할 필요는 없어보입니다 (물론 진리대응론이 큰 의미가 없다고는 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저는 진리대응론을 후자라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Herb 님이 왜 진리대응론을 전자로 이해하고 계시는지 알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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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yhk9297 님과 제 주장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약간의 해명이 필요할 것 같아요.

“인식과 대상의 일치”라는 진리에 대한 명목적 정의를 지지하는 것과 철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되는 “진리대응론”이라는 실체적 이론을 지지하는 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 결론은 칸트는 “인식과 대상의 일치”라는 명목적 정의를 지지하되, “진리대응론”이라는 실체적 이론은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후술하듯이 실체적 진리대응론은 물자체와의 비교를 전제한다고 보니깐요). 따라서 칸트는 약한 의미의 진리대응론자이되, 강한 의미의 진리대응론자는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주장에 완전히 동의합니다. 그래서 본문에 저는 이것이 선험적 관념론의 "사소한 귀결"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주의를 요합니다. 칸트의 요지는 <이 대상은 노트북이다> - 예시를 약간 수정하였습니다- 라는 인식과 "노트북(의 존재여부)"를 비교한다는 서술 자체가 이미 순환적이라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이 노트북은 존재한다>라는 인식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노트북)을 보고 이러한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무언가와 "노트북(의 존재여부)와 비교한다"라는 서술 자체가 이미 해당 대상이 노트북이라는 인식 내용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미 <이 대상은 노트북이다>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죠. 그렇다면 <이 대상은 노트북이다>라는 인식을 <이 대상은 노트북이다>라는 대상인식과 비교한 것이므로, 자기 스스로를 비교한 것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칸트는 이러한 설명이 진리를 설명하지 못하고 순환에 빠진다고 지적합니다. 따라서

말씀하신 "외적 물체와 인식의 일치여부"는 "인식된 외적 물체와 인식의 일치여부"라는 순환적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순환적 설명 혹은 사소한 귀결로 환원되지 않으려면, 진리대응론자들은 "인식과 대상의 일치"를 말할 때 "인식과 인식 이전의 대상의 일치"를 주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인식 이전의 대상" 개념은 바로 칸트가 거부하는 물자체 개념입니다. 따라서 강한 의미의 진리대응론자들은 동시에 물자체로서의 대상을 승인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점에서 칸트는 강한 의미의 진리대응론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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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면 @Herb 님의 주장은, '칸트에게 강한 의미의 진리대응론은 거짓이며, 약한 의미의 진리대응론은 순환적이므로 의미가 없다' 인 거죠? 흥미롭군요. 도움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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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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