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가 인식(truth-bearer; proposition, sentence, judgment etc.)과 대상(truth-maker; fact, state of affairs etc.)의 대응/일치에 있다고 주장하는 진리대응론은 상식적으로 별로 문제가 없어보이지만 철학자들에게는 오랜 의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진리대응론을 비판하는 논변에 있어서 의외로 칸트가 선구자격 위치에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이번 기회에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칸트의 진리대응론 논박은 그 자체로 굉장히 흥미롭고 도발적인 지점들을 여럿 가지고 있고, 이를 통해 프레게, 퍼트남, 데이빗슨, 맥도웰 등의 현대철학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칸트는 이미 순수이성비판 A58/B82 이하에서 진리대응론에 대한 의심을 넌지시 비추었는데요. 이에 대한 완전한 논변은 칸트의 Jäsche 논리학 교재에 등장합니다.
진리는 인식이 대상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러한 한갓 명목적 설명에 따르면, 나의 인식은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대상과 일치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대상과 나의 인식을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대상을 인식함을 통해서이다. 그렇다면 나의 인식은 자기 스스로를 확인하는 것이 되고, 이것은 진리가 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대상은 나의 밖에 있고 인식은 나의 안에 있으므로,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대상에 대한 나의 인식이 대상에 대한 나의 인식과 일치하는지이다. 이러한 순환적 설명을 고대인들은 Diallele라고 불렀다.
Wahrheit, sagt man, besteht in der Übereinstimmung der Erkenntniß mit dem Gegenstande. Dieser bloßen Worterklärung zufolge soll also mein Erkenntniß, um als wahr zu gelten, mit dem Object übereinstimmen. Nun kann ich aber das Object nur mit meinem Erkenntnisse vergleichen, dadurch daß ich es erkenne. Meine Erkenntniß soll sich also selbst bestätigen, welches aber zur Wahrheit noch lange nicht hinreichend ist. Denn da das Object außer mir und die Erkenntniß in mir ist, so kann ich immer doch nur beurtheilen: ob meine Erkenntniß vom Object mit meiner Erkenntniß vom Object übereinstimme. Einen solchen Cirkel im Erklären nannten die Alten Diallele (Ak, 9: 50)
Truth, it is said, consists in the agreement of cognition with its object. In consequence of this mere nominal explanation, my cognition, to count as true, is supposed to agree with its object. Now I can compare the object with my cognition, however, only by cognizing it. Hence my cognition is supposed to confirm itself, which is far short of being sufficient for truth. For since the object is outside me, the cognition in me, all I can ever pass judgment on is whether my cognition of the object agrees with my cognition of the object. The ancients called such a circle in explanation a diallelon.
소위 비교-논변이라고 불리는 이 논변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진리는 인식과 대상의 일치이다. (전제)
어떤 인식 P가 대상 O와 일치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P와 O를 비교해야만 한다. (전제)
P와 O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먼저 O를 인식해야 한다. 즉 P와 O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O에 대한 인식(=P)가 전제되어야 한다. (전제)
P와 O를 비교한다는 것은 따라서 O에 대한 P와 O에 대한 P를 비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비교는 순환적이다. (2, 3)
결론: 인식과 대상이 일치하는지 비교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인식이 참인지 확인할 수 없다.
칸트가 5번의 회의주의적 결론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므로, 우리는 전제 1, 2, 3 중 적어도 하나를 거부해야 합니다. 만약 전제 1을 거부해야 한다고 성급하게 결론짓는다면, 우리는 칸트가 진리대응론 일체를 거부했다는 (성급한) 결론에 도달할 것입니다.
칸트는 이러한 회의주의적 결론이 나오는 이유에 대해 위에서 단 한 문장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대상은 나의 밖에 있고 인식은 나의 안에 있으므로,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대상에 대한 나의 인식이 대상에 대한 나의 인식과 일치하는지이다.” 얼핏 이 문장은 버클리적인 관념론을 함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가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이 오직 인식의 범위 내부의 대상이라면, 모든 대상은 마음 속에 존재한다는 주관적 관념론을 지지해야 한다는 (역시 성급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것들은 칸트가 의도한 바가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위 문장을 통해 칸트가 의도한 바는 다음입니다. 전제2와 전제3은 마치 대상과 독립적인 어떤 인식, 혹은 어떤 인식과 독립적인 대상이 존재한다는 듯이 서술하고는, 그 다음 양자가 일치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칸트는 이것이 매우 오도적인 그림이라는 것입니다. 인식과 대상을 애초에 이질적이고 상호 무관한 개체로서 전제하게 되면, 인식은 마음 안에 있고 대상은 마음 밖에 있기 때문에 양자를 비교할 수 없다는 회의주의적 결론에 필연적으로 노출됩니다.
대상을 인식으로부터, 혹은 인식을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무언가로 전제하는 것은 바로 칸트가 거부하는 물자체의 독단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진리대응론은 마치 우리의 인식 일체로부터 독립적인 대상=물자체를 상정하고 그 이후 이 물자체와 우리의 인식 (무엇에 대한?) 이 일치하는지를 묻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물자체는 그 정의상 인식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인식될 수 없는 것(=대상)과 인식을 비교해야 한다는 회의주의적 결론에 빠집니다. 이 독단주의와 회의주의가 바로 칸트가 거부하는 물자체의 사유, 즉 선험적 실재론(transcendental realism)에 해당합니다.
대상은 인식의 대상이고, 인식은 대상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 기본적인 것을 기억한다면, 대상과 인식을 “비교”해야 한다는 함정에 빠지지 않아도 됩니다. 대상으로부터 촉발되어 범주에 의해 선험적-필연적으로 종합된 인식은 그 본성상 대상과 일치하는 참인 인식입니다. 주목할만한 것은, 인식과 대상의 일치로서의 진리 개념이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transcendental idealism)의 사소한 귀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선험적 관념론을 받아들이면, 비교에 호소하는 실체적 대응 관계를 끌어들이지 않고도, 원리적 일치관계를 구해낼 수 있습니다. (거짓인 인식의 경우 다른 종류의 설명을 요구하지만, 이것이 "인식과 대상의 일치"로서의 진리개념의 가능성을 해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버클리적인 관념론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칸트가 말하는 것은 대상으로부터 촉발되어 선험적-필연적으로 종합된 참인 인식의 경우, 그 직관의 수준에서 이미 대상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This rose is red”라는 참인 인식은 실재하는 대상(=this rose being red)으로부터 촉발된 직관을 포함하므로, “This rose is red”라는 인식이 외부의 대상(=this rose being red)과 일치하는지 "비교"해볼 필요가 없이 이미 내재적으로 일치합니다. 이 주장은 “대상(=This rose being red)이 내 마음 속에 존재한다”는 버클리적 관념론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3줄 요약:
인식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물자체로서의 대상을 상정하는 한(=선험적 실재론), 진리대응론은 불가능하다.
대상과 인식 사이의 선험적-종합적 관계를 주장하는 선험적 관념론은 진리대응론의 난점에 빠지지 않고도 “인식과 대상의 일치”라는 명목적 진리 개념을 지지할 수 있다.
저는 진리대응론을 '명제가 참이라는 것은 실제 대상과 일치하는 것이다'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 노트북은 존재한다> 라는 명제는 실제로 노트북이 존재한다면 참인 것이지요. 그리고 @Herb님도 말씀하셨듯이, 칸트는 외적 물체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는 외적 물체 너머에 있는 물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뿐이지요. 그렇다면 칸트는 <이 노트북은 존재한다>의 진리여부가 외적 물체, 예를 들어 노트북의 존재여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어보입니다.
제가 칸트의 입장을 다르게 이해하는 이유는 진리대응론의 이해의 차이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위 인용에서 봤듯이, @Herb 님은 진리대응론이 물자체와 인식의 일치여부를 묻는 것이라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진리대응론이 외적 물체와 인식의 일치여부를 묻는다고 본다면, 칸트는 진리대응론을 부정할 필요는 없어보입니다 (물론 진리대응론이 큰 의미가 없다고는 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저는 진리대응론을 후자라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Herb 님이 왜 진리대응론을 전자로 이해하고 계시는지 알고 싶네요.
일단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yhk9297 님과 제 주장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약간의 해명이 필요할 것 같아요.
“인식과 대상의 일치”라는 진리에 대한 명목적 정의를 지지하는 것과 철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되는 “진리대응론”이라는 실체적 이론을 지지하는 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 결론은 칸트는 “인식과 대상의 일치”라는 명목적 정의를 지지하되, “진리대응론”이라는 실체적 이론은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후술하듯이 실체적 진리대응론은 물자체와의 비교를 전제한다고 보니깐요). 따라서 칸트는 약한 의미의 진리대응론자이되, 강한 의미의 진리대응론자는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주장에 완전히 동의합니다. 그래서 본문에 저는 이것이 선험적 관념론의 "사소한 귀결"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주의를 요합니다. 칸트의 요지는 <이 대상은 노트북이다> - 예시를 약간 수정하였습니다- 라는 인식과 "노트북(의 존재여부)"를 비교한다는 서술 자체가 이미 순환적이라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이 노트북은 존재한다>라는 인식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노트북)을 보고 이러한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무언가와 "노트북(의 존재여부)와 비교한다"라는 서술 자체가 이미 해당 대상이 노트북이라는 인식 내용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미 <이 대상은 노트북이다>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죠. 그렇다면 <이 대상은 노트북이다>라는 인식을 <이 대상은 노트북이다>라는 대상인식과 비교한 것이므로, 자기 스스로를 비교한 것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칸트는 이러한 설명이 진리를 설명하지 못하고 순환에 빠진다고 지적합니다. 따라서
말씀하신 "외적 물체와 인식의 일치여부"는 "인식된 외적 물체와 인식의 일치여부"라는 순환적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순환적 설명 혹은 사소한 귀결로 환원되지 않으려면, 진리대응론자들은 "인식과 대상의 일치"를 말할 때 "인식과 인식 이전의 대상의 일치"를 주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인식 이전의 대상" 개념은 바로 칸트가 거부하는 물자체 개념입니다. 따라서 강한 의미의 진리대응론자들은 동시에 물자체로서의 대상을 승인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점에서 칸트는 강한 의미의 진리대응론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구요.
얼마 전에 갑자기 생각나서 댓글을 달아봅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진리대응론 (혹은 진리제조기론) 은 현대 분석 철학에서 미묘한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한 편으로는 진리대응론이란 너무나도 당연해서 진리대응론을 이용하여 일부 이론들을 솎아내기도 합니다. 진리대응론과 맞지 않는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cheater"이라고 부르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진리 대응론에 여러가지 반례가 가해졌습니다. Negative existentials, modal proposition, past/future proposition등이 있겠습니다. 그래서 진리 대응론이란 너무나도 당연하면서 반례들도 많은 이론인 것이지요.
만일 허브님의 말씀대로 칸트에 있어
이라고 한다면, 칸트의 이론을 믿을만한 이유를 제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대응론은 맞아야하는데, 비칸트식 이론 (i.e. 대부분의 분석 형이상학) 을 대입하면 이런 반례가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modus tollens로 칸트식 이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연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달아봅니다. 칸트를 잘 몰라서, 의견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떤 경향을 말씀하시는지 대충 알 것 같고, 저로서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경향이기도 합니다. "theory of truth"로서 유의미한 종류의 진리대응론은 이미 철학사나 현대철학에서 수많은 비판을 받아왔고, 본문에서 설명한 칸트의 논변은 현대의 진리대응론자들도 인지하고 있는 고전적 반론입니다 (Künne, Wolfgang (2003), 126쪽 이하 참조). 그리고 칸트의 비판논변의 정신을 계승한 여러 변형논변들이 진리대응론 논쟁 뿐만 아니라 인접한 논쟁들, 가령 형이상학적 실재론/반실재론 논쟁이나 (퍼트남, 덤밋, 데이빗슨 등) 인식론에서의 소여의 신화 비판 (셀라스, 맥도웰) 등에서 유사한 논지로 (제가 보기에) 이미 devastating한 비판들이 충분히 많이 제기되었습니다 (물론 이들의 궁극적 결론이 일치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아직도 진리대응론의 기세가 이리도 대단한 것일까요? 이에 대해 제가 개인적으로 가진 인상과 결론은 다음입니다: 한편으로 진리대응론이 상식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어 보여서 이러한 논쟁들에 깊은 관심과 주의를 가지지 않는 대다수의 철학 독자들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진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논쟁들을 알고 있는 진리대응론자들 및 그에 기반한 형이상학적 실재론자들은 반대자들의 비판을 그냥 무시하거나 궁색한 답변만을 반복한 채 계속 진리대응론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위의 Künne의 답변을 읽어보세요). (+ 이러한 배경에서 사이더의 존재론적 실재론에 대한 최근 글을 작성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는 말씀하신 전략에 동의하지 못하는 쪽입니다. (theory of truth 로서의) 진리대응론은 그 자체로 무해한 상식적 입장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논쟁적인) 형이상학적 무게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Künne, Wolfgang (2003). Conceptions of truth .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이 부분은 동의를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마 저희가 읽는 철학 서적들이 너무 달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제가 이해하기로 진리대응론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진리대응론에 대한 비판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암스트롱 같은 경우도 negative existentials에 대한 답으로 "minimal truthmaker"과 같은 답을 내놓는다던가, 데이빗 루이스의 modal realism도 modal proposition에 대한 truthmaker을 찾는다고 해석이 될 수 있으며, modal dispositionalism (혹은 더 일반적으로 modal actualism)의 움직임도 루이스의 직관을 받아들이면서 modal proposition에 대한 truthmaker을 찾으려고 하고 있지요. 또, perdurantism의 motivation중 하나도 endurantism은 truthmaker가 없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대응론 (혹은 진리제조기론) 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진리대응론에 대한 비판에 답을 하고 있고, 일부 사람들은 진리대응론을 너무 당연하다고 여겨서 일부 형이상학 이론 (modal non-actualism, endurantism 등)을 거부해야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 부분에서 칸트에게 오히려 득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진리대응론은 무해한 입장이어야하는데 너무 많은 형이상학적 무게를 지니고 있다면, 칸트의 이론을 받아들일 이유가 하나 생기는 것이니깐요. 왜냐면 적어도 칸트의 체계 안에서는 약한 의미의 진리대응론은 순환적이기 때문에 이런 무게를 지니지 않고도 진리대응론을 받아들일 수 있으니깐요. 물론 칸트가 negative existentials, modal proposition, past/future proposition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제 칸트 지식을 아득히 넘어서는 부분이지만 말이에요.
+)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겠네요:
분석 철학자들은 진리대응론이 사소하다고 생각한다 (the theory of correspondence is trivially true).
하지만 분석철학자들은 진리대응론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형이상학적인 무게를 견뎌야하고, 진리대응론은 더 이상 사소하지 않다.
만일 칸트의 체계를 받아들일 경우, (약한 의미의) 진리대응론은 사소하다. (그리고 아마 칸트는 이런 형이상학적 무게를 견디지 않아도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대응론을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분석 철학자들에게 칸트의 체계는 attractive하다.
"왜 이렇게 진리대응론의 기세가 대단한가?"라는 물음은 저도 오랫동안 고민했던 문제였어요. 비트겐슈타인계열의 철학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왜 오늘날 분석철학의 주류가 반비트겐슈타인적 입장으로 회귀하려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거든요.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 칸트철학의 몇 가지 핵심 아이디어들을 계승하고 있기도 하다는 점에서, 왜 이렇게나 분석철학의 주류가 '비판 이전의' 스콜라철학적인 형이상학으로 돌아가려 하는 것인지 이해하기도 어려웠고요.
그리고 실제로, 저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1950년대 무렵의 철학적 경향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대개 비슷한 인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예전에 올린 적이 있지만, 휴 프라이스는 "Metaphysics after Carnap"의 도입부에서 만약 카르납이 살아 있었다면 오늘날 일어난 형이상학의 부활을 목격하고서 깜짝 놀랄 거라고 적었죠.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완전히 무너진 줄 알았던 형이상학이, 오늘날 철학계에서는 너무나 의기양양하게 다시 부활해버렸으니까요.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왜 그렇게 부활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다소 미심쩍게 보이고요. (생각해 보니, 카르납도 잘 알려진 칸트주의자네요. 비트겐슈타인과 다소 결이 다르긴 하지만, 카르납도 기본적으로는 칸트적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형이상학을 거부했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현재까지 제가 분석한 잠정적인 결론은 세 가지에요.
(1) 직접적 지시 이론의 영향
가장 중요한 영향은 1970년대에 도넬란, 크립키, 퍼트남을 통해 일어난 직접적 지시 이론의 득세이지 않은가 해요. 기존 언어철학의 패러다임이었던 프레게와 러셀의 기술주의는 "의미가 지시를 결정한다."라는 테제를 내세웠던 반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등장한 도넬란, 크립키, 퍼트남의 지시주의는 "지시가 의미를 결정한다."라는 테제를 내세웠잖아요. 그리고 이 입장들이 소위 '양상적 논증', '의미론적 논증', '인식적 논증'을 통해 기술주의에 대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적어도, 그런 승리를 거두었다고 인정받으면서) 의미에 앞서는 직접적 지시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언어철학에서는 주류가 되었죠. 어떠한 의미 틀이나, 개념 틀이나, 언어 틀 같은 게 있어서 그 틀이 우리의 지시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적으로 대상과 직면할 수 있고, 심지어 그 대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리킬 수 있고, 그 본질에 대해 '형이상학'을 성립시킬 수 있다는 생각 말이에요. 실제로, 맥도웰도 직접적 지시 이론이 이러한 식의 생각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지적하죠. (물론, 그는 이러한 식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지만요.)
There was a time when the standard view of reference was inspired by Russell’s Theory of Descriptions. The idea was that whenever a thought is directed at a particular object, part of its content is given by a specification of the object in general terms: conceptual terms, the equation I am considering would lead us to say. The trend is to recoil from this. There are kinds of object-directedness in thoughts that cannot easily be made to fit that mould. For instance, a perceptual demonstrative thought surely homes in on its object not by containing a general specification, with the object figuring in the thought as what fits the specification, but by virtue of the way this sort of thinking exploits the perceptible presence of the object itself. If the conceptual is equated with the predicative, this resistance to the general application of the Theory of Descriptions takes the form of saying that in the cases that warrant the resistance, singular reference is, or rests on, an extra-conceptual relation between thinkers and things. So the picture is that the conceptual realm does have an outside, which is populated by particular objects.
J. McDowell, Mind and World,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6, p. 105.
(2) 형식적 의미론의 영향
다음으로는, 역시 1970년대 무렵에 데이비슨을 통해 일어난 형식적 의미론의 부활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해요. 데이비슨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비트겐슈타인과 오스틴의 영향으로 인해 소위 '일상 언어'에 대한 관심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잖아요. 하지만 데이비슨이 타르스키의 '규약 T' 도식에 근거해서 의미론을 성립시킬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일상 언어철학이 주류에서 밀려나게 되죠. 특별히, 우리가 한 번도 사용해 본 적 없는 언어에 대해서조차도 기존 언어의 조합을 통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의미의 '합성성(compositionality)'이 일상 언어철학 및 사용 이론에 대한 아주 결정적인 반론으로 제기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언어의 의미가 일상의 사용 상황에서만 성립한다면, 어떻게 새롭게 합성된 언어가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거죠. 반면, 형식 의미론은 몇 가지 유한한 언어로부터 무한한 언어 사용을 설명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그런 설명의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크게 각광받았고요. 그래서 해커와 베이커 같은 비트겐슈타인주이자들도 합성성에 대해 언어철학에서 널리 퍼진 관점에 도전하는 것을 중요한 논의거리로 삼는 것 같더라고요.
We shall probe the seemingly clear notion of the truthconditions of a sentence, which is commonly taken to be the key to any cogent semantic theory. We shall place pressure upon the apparently obvious distinction, within every sentence, between its descriptive content (the state of affairs it describes, its sense) and its force (e.g. whether it asserts or orders something). We shall test the soundness of the supposition that a language is a system, a calculus consisting of a network of hidden rules tacitly employed whenever we speak or understand what is spoken. And we shall examine whether the question of how it is possible to understand sentences never heard before really is as deep as it is commonly taken to be. In general we shall resist by argument the theorists' habit of frog-marching the neophyte straight to a ceremony of initiation into the full mysteries of the modern science of language.
G. P Baker & P. M. S. Hacker, Language, Sense and Nonsense, Oxford: Blackwell Publisher, 1984, pp. 11-12.
또 데이비슨이 형식적 의미론을 성립시키기 위해 '규약 T'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도 진리 대응론이 새로운 방식으로 부활하는 데 영향을 준 것 같아요. 물론, 타르스키나 데이비슨 자신이 고전적인 의미의 진리 대응론을 옹호한 것은 아니지만, "s는 참이다. iff p"라는 도식은 진리 대응론적인 직관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정말 많은 도식이잖아요. 실제로, 타르스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진리 이론에서 이 도식을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형식적 의미론의 부활과 진리 대응론적 아이디어의 부활이 함께 가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물론, 형식적 의미론의 부활을 일으킨 데이비슨 본인은 정작 비트겐슈타인과 상당히 가까운 면이 많은 철학을 전개하였지만, 그 이후의 포도어나 르포어 같은 인물들은 비트겐슈타인적인 언어철학과는 결이 많이 다른 철학을 전개하게 된 것 같고요.
(3) 존재론적 개입 기준의 영향
콰인이 제시한 '존재론적 개입 기준'도 고전적인 형이상학적 실재론의 방식으로 해석되는 것 같아요. "존재하는 것은 변향의 값이다."라는 것이 콰인의 유명한 명제잖아요. 이 명제대로라면, 우리는 특정한 명제를 참으로 받아들일 때, 그 명제를 참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존재자들이 존재한다고 받아들이게 되는 셈이죠. 물론, "페가수스는 존재한다."와 같은 명제를 누군가는 "날개 달린 말은 존재한다."로 해석해서 받아들일 수도 있고, 누군가는 "페가수스화하는 것은 존재한다."로 해석해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든 각각의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존재한다고 상정하는 것들을 가지게 되죠.
물론, 존재론적 개입 기준이 그 자체로 고전적인 형이상학적 실재론을 함의하는 것은 아니죠. 실제로 콰인 본인조차 존재론적 상대주의자였고요. 하지만 직접적 지시 이론과 타르스키의 진리 이론이 득세하는 상황에서는, 존재론적 개입 기준이 상당히 무건운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 같아요. 우리가 '참'으로 받아들이는 문장들과 그 문장들을 '참'으로 만들어주는 개체들이, 단순히 우리의 개념 틀이나 우리의 언어 사용 속에서만 성립하는 사물이 아니라, 그 바깥 실재의 영역에 존재하는 사물이어야 한다고 받아들여지는 것이죠.
(4) 주제 넘는 형이상학과 겸손한 형이상학
그래서 오늘날 형이상학을 탐구하는 학자들은 많은 경우 자신들이 실재의 구조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 같아요. 정리하자면, (a) 콰인의 존재론적 개입 기준을 따른다면, 우리가 특정한 문장들을 '참'으로 받아들이는 이상, 우리는 특정한 존재자들이 존재한다고 개입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b) 직접적 지시 이론을 따라, 우리가 후험적 필연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물은 H2O다."와 같은 참인 문장들이 존재하고, (c) 타르스키나 데이비슨적인 진리 이론에 따라, 그 문장들의 의미는 일종의 진리 대응론적 도식에 따라 설명되어야 한다고 상정하면, 우리가 개입하고 있는 존재물들이 우리의 개념 틀이나 언어 틀 바깥의 존재물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 같아요. (적어도, 수많은 형이상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다만, 아주 전형적인 분석 형이상학자들 중에서도 이러한 일련의 생각들을 너무 과장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하는 분류들도 꽤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 중 제가 가장 놀랐던 케이스는 프랭크 잭슨이었어요. 로티는 크립키, 루이스, 잭슨을 싸잡아서 "부끄러운 줄 모르는 물리주의적 형이상학(unabashed physicalist metaphysics)"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아주 맹비난을 한 적이 있는데, 정작 잭슨의 책을 읽어보니 자신이 수행하는 작업의 함의를 그렇게까지 과대평가하지 않더라고요. 잭슨은 분명히 강한 형이상학적 실재론자인데도, 자기가 하는 모든 언어적 분석이 결국 더 근본적인 용어와 덜 근본적인 용어에 대한 분석이라고 담담하게 인정하더라고요. 그러면서 형이상학이 실재에 대해서 '주제 넘는' 주장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도 지적하고요.
We now have an example of conceptual analysis in what I call its immodest role. For it is being given a major role in an argument concerning what the world is like.
[…]
I think that we should be suspicious of conceptual analysis in its immodest role—it gives intuitions about possibilities too big a place in determining what the world is like. However, the role for conceptual analysis that I am defending in these lectures is the modest role: the role is that of addressing the question of what to say about matters described in one set of terms given a story about matters in another set of terms. Conceptual analysis is not being given a role in determining the fundamental nature of our world; it is, rather, being given a central role in determining what to say in less fundamental terms given an account of the world stated in more fundamental terms.
F. Jackson, From Metaphysics to Ethics, Oxford: Clarendon Press 1998, pp. 43-44.
그래서 저는 잭슨의 논의를 읽고서 분석 형이상학자들에 대한 이미지가 좀 바뀌게 되긴 했어요. 그 이전까지 저에게 잭슨은 '보편자'의 존재라든가 '감각질'의 존재 같은 것들을 강하게 주장하는, 전형적인 '비판 이전적' 혹은 '스콜라철학적' 형이상학자였거든요. 그런데 정작 제가 전형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그리고 실제로도 그 분야의 전형인 사람이) 자신의 작업을 담담하게 '겸손한 분석'에 한정짓는 것을 보고서, 어쩌면 분석 형이상학자들도 '실재의 구조'에 대해 아주 나이브한 입장을 전제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매번 '보편자'나, '감각질'이나, '가능세계'나, '4차원주의' 같은 아주 특수한 주제에 대해 한정해서만 글을 써서 그렇지, 어쩌면 그 사람들도 '존재론적 개입 기준'과 '직접적 지시 이론'과 '타르스키적 진리 이론'이 반드시 개념 바깥의 실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나름대로 잘 자각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물론, 잭슨의 사례를 모든 분석 형이상학자에게로 확장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요.
여기서 언급한 논쟁들을 외면하거나 이에 대해 시원찮은 답변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제가 언급한 논변들은 공통적으로 진리대응론에 대한 일종의 global criticism으로 기능합니다. 즉 이들은 단순히 진리대응론이 특정한 종류의 예시들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종류의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대응론이라는 입장 자체가 원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비판하는 논변들입니다. 칸트 역시 이 점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이 점에서 알려주신 truthmaker 전장과 구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YOUN 님의 진단에 동의하면서도 여전히 흥미로운 지점은 (이미 작성글에서 지적하셨지만) 저 세가지 조류의 중심 인물인 퍼트남, 데이빗슨, 콰인 그 누구도 진리대응론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앞의 둘은 진리대응론을 적극적으로 반박했죠. 이렇게 본다면 Youn님의 진단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저 세가지 조류들을 이어받은 대응론자들이 cherry-picking을 하고있다는 의심을 여전히 거둘 수가 없네요.
굉장히 생산적인 논의가 진행된 것 같아서, concluding remark만 몇 개 적어놓겠습니다.
1.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예전에 다룬 적이 있습니다 (링크: 상응이론과 진리제조기). 다만 (1) 저 포스팅에서도 말하듯이 저 둘을 구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고 (만일 구분하지 않는다면 truthmaker에 대한 반례가 대응론에도 적용이 되겠지요), (2) 구분이 된다고 해도 truthmaker에 적용되는 반례는 대응론에도 비슷하게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허브님과 제가 크게 disagree하는 부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재론에 관해서는 제가 많이 생각해보지 않았고 진리대응론과 관련지어서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이 부분은 확실히 들여다봐야할 것 같습니다. 다만 메릭스가 Truth and Ontology에서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한 번 찾아봐야겠습니다.
이 부분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약한 의미의 대응론은 칸트에게 순환적인데, 순환적이면 원리적으로 말이 안 되지 않으니깐요. 오히려 순환적이면 소박하게 말이 되는 게 자연스럽지요. 그렇다면 제 프로포절이 더 말이 되는 것 같습니다. 대응론은 소박하게 말이 돼야하는데, 현대 논의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약한 의미의) 대응론이 순환적인 (그렇기 때문에 소박하게 말이 되는) 칸트의 체계가 attractive한 것이지요 (여담으로 헤겔도 이 부분에서 칸트를 따른다고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 오히려 제 프로포절이 허브님이 sympathetic해야하는 프로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응론에 대한 현대 논의가 unsatisfactory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칸트 체계를 받아들일 이유가 있다고 주장하는거니깐요. 근데 이 부분은 talking past each other하는 거 같아서 더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강조했다시피, 강한/약한 대응론을 구별해야 합니다. 강한 대응론은 진리 개념에 대한 definition을 시도하는 이론이지만, 약한 대응론은 그냥 일상적 클리셰에 가깝고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진리론" 자체가 아닙니다. 진리개념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제시하려는 목적이 아니니깐요. 이 점에서, 순환성을 보이는 진리대응론은, 진리이론으로서 의도되었다면, 입장 자체가 원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순환적 설명은 정의가 될 수 없으니깐요. 반면 진리이론으로서가 아닌 일상적 클리셰라고 받아들인다면, 말씀하신 것처럼 대응론은 "순환적이면서 소박하게 말이 됩"니다.
문제는 이 "순환적으로 소박하게 말이 된다"는 것이 저나 칸트에게는 철학적으로 별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yhk9297 님의 프로포절에 동의하지 못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저는
이 전략에는 동의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전제에는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일상적 클리셰로서의 약한 진리대응론은 (뭐 굳이 부정할 이유는 없지만) 별로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주지 못한다고 칸트는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텍스트적 근거가 딱히 생각난진 않지만, 헤겔이 강한 대응론을 거부하는 것은 거의 자명해 보입니다. 다만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과 같은 흥미로운 암호를 되뇌이는 헤겔에게는 더욱, 약한 의미의 순환적 대응론은 철학적으로 흥미롭지 못할 것이라고 저는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입니다. 그러니깐 분석 형이상학자들이 칸트의 체계를 받아들여야하는 이유를 대응론으로 찾는 것이지요. 만일 분석형이상학자들이 그렇게도 대응론을 가져가고 싶다면 -- 하지만 너무나도 많은 반례에 부딪힌다면 -- 차라리 칸트의 체계를 받아들여서 (약한 의미의) 대응론을 순환적이고 의미가 없게 만들면 되는 것이지요. 다만
'순환적인 자기비교'를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저렇게 쓰신 것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흔히 '인식'과 '대상'을 비교하는 작업이 'P'와 'O'를 비교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작업이란 실제로는 'O에 대한 P'와 'O에 대한 P'라는 같은 것을 비교하는 작업일 뿐이고, 그래서 엄밀히 말해 '비교'라고도 할 수 없는 순환적인 작업이라는 의미로 저렇게 쓰신 것이라고 이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