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웰, 회의주의, 자기의식

맥도웰의 글 중 "A Note on the Significance of the Surface Inquiry"라는 제목으로 2014년에 달랑 3페이지로 출간된 텍스트가 있습니다. 원본의 출처는 J.P. Narboux 라는 프랑스 철학자의 코멘트에 대한 맥도웰의 응답에서 발췌한 부분입니다. 찾아보니 원본은 프랑스어로만 출간된 모양입니다만, 이 부분이 흥미로웠는지 Narboux가 맥도웰로 하여금 이 발췌부분을 따로 영문으로 출간하도록 설득했다는군요.


해당 글은 T. Clarke 라는 철학자의 1965년 글 "Seeing Surfaces and Physical Objects"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은 인식론에서의 회의주의의 한 종류를 다룹니다. 보통 우리는 어떤 대상을 시각적으로 지각한다면, 해당 대상이 여기에 주어졌음(presence of the object)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가령 우리가 눈 앞에 있는 토마토를 지각한다면, 우리는 토마토가 여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특정한 회의주의에 따르면, 우리가 지각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해당 대상의 특정 표면 뿐이기에, 해당 대상 전체(whole object)가 주어졌는지 시각적 경험만으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가령 눈 앞의 토마토를 지각할 때, 우리가 해당 시점에 지각하고 있는 것은 토마토처럼 보이는 특정한 표면이기에, 사실 그 표면 뒤까지 완벽한 토마토인지, 아니면 토마토처럼 보이지만 그 뒤쪽 면까지 본다면 사실 다른 대상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시각적 경험만으로는, 지각된 전체 대상에 대한 앎(knowledge of the presence of the whole object)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종류의 전형적인 회의주의 논변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맥도웰의 대응은 그의 여러 글들에서 이미 제시된 바가 있습니다. 맥도웰에 따르면, 인식 능력의 "오류가능성"으로부터 "알 수 없음"이라는 회의주의적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 오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류가능성이란 우리의 인식능력이 때때로 잘못 수행되는 경우가 가능하다는 인정일 뿐, "모든 것이 잘 작동한다면" 우리는 주어진 대상을 알 수 있다는 점을 반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논변은 다음의 글을 참조: )

오류가능성이 그저 평범한 사실일 뿐 그 자체로 회의주의를 더 설득력 있게 만들어주지 못한다는 점을 Clarke도 동의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Clarke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갑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특정한 주의력을 기울이는 순간, 오류가능성이 그 자체로 회의주의를 산출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주의력이란 다음의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토마토에 대한 나의 지각경험이 "눈 앞에 있는 것이 단지 가짜-토마토-외관일 뿐이지 않고 진짜 토마토이다"라는 앎에 대한 자격부여(entitlement)를 제공하는가?
[one asks oneself whether one’s visual experience entitles one to claim to know that what is before one is not a mere tomato façade]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솔직한 대답은 "아니오"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오류가능성이 도사리고 있고, 따라서 토마토 표면을 지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토마토가 아닐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이 경우 오류가능성으로부터 "알 수 없음"이라는 회의주의적 결론이 곧바로 따라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Clarke의 질문은 분명 굉장히 흥미로운 역할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오류가능성으로부터 곧바로 회의주의적 결론을 이끌어내는 시도에 대해, 철학자들은 통상적으로 거부해 왔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이 잘 작동한다면" 우리는 대상을 알 수 있는 한편, "적어도 일부가 잘못 작동했다"라는 것을 주장해야 할 책무는 회의주의자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맥도웰은 이것을 무죄추정의 원칙에 비유합니다.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해당 범죄에 대해 결백합니다. 마찬가지로 무언가 잘못 작동한 것이 아니라면, (비록 오류가능한 능력이라고 할지라도) 인식능력은 앎을 산출합니다. 유죄를 증명하는 것이 검사의 몫이듯이, 인식능력에서 무언가 잘못 작동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도 회의주의자의 몫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Clarke의 질문은 이러한 증명의 부담을 반대쪽에 지우는 전략을 택하고 있습니다. 즉 이 질문은, 무언가가 잘못 작동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대신, 지각주체가 알고 있는 것이 오직 대상의 표면이라는 것을 환기시킵니다. 맥도웰이 한 비유는 아니고 제가 만든 비유입니다만, 마치 검사가 내가 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증명하는 대신, "너가 결백하다는 것을 자신할 수 있나? 너가 범죄를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너가 했던 행위가 너도 모르게 법을 위반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하고 묻는 것과 유사합니다. 당연히 인간은 전지전능한 시점에서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가능성이 0%라는 대답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털어서 먼지 안나오는 사람 없어!").

맥도웰에 따르면, Clarke의 질문의 핵심은 다음입니다: 무언가 잘못 작동했다는 것이 아직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앎을 산출하는 것으로 여겨질 그 인식능력을 해당 질문을 통해 고의적으로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라면 유죄가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죄인 나의 상태를, 해당 질문을 통해 고의적으로 부인하고 스스로의 유죄가능성을 인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Clarke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앎을 산출하는 인식능력을 스스로에게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스스로의 인식능력을 부정하는 이러한 이에게는 회의주의적 결론이 필연적인 것입니다. 증명된 유죄가 없음에도, "나도 모르게 죄를 저질렀을 수도 있지 않은가?"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사람은 스스로의 무죄추정을 거부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러한 사람에게는 유죄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결론에 필연적으로 빠지게 됩니다.


비록 이 글은 인식론적 맥락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이 글의 결론은 다양한 맥락에 적용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크립키의 규칙 따르기 역설입니다. (다음을 참조:

지금까지 내가 더하기를 겹하기로 잘못 적용했다는 것을 누군가 증명하지 않는다면, 나는 더하기라는 규칙을 따르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내가 "내가 지금까지 따른 규칙이 겹하기가 아니라 더하기라는 주장에 대한 자격부여를 가지고 있는가?"하고 묻는다면 (혹은 크립키처럼 이것을 확정할 수 있는 의미 사실이 있냐고 묻는다면)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그러한 자격부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럴듯하지 않지만, 내가 지금까지 수행한 규칙따르기가 사실 겹하기였을 시나리오가 논리적으로는 가능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맥도웰의 논의가 보여주는 것은, 내가 그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한, 나는 스스로의 더하기-규칙-따르기-능력을 고의적으로 부인하고 있는 셈입니다. 자기가 스스로에게서 더하기-규칙-따르기-능력을 박탈한다면, 남는 결론은 당연히 "내가 어떤 규칙을 의도했는지 알 수 없다"라는 회의주의일 뿐입니다.

이를 통해 또한 우리는 어떤 맥락에서 후기 맥도웰이 경험능력을 최종적으로 자기의식에 정초시키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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