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맥도웰, 「지식 능력으로서의 지각」

McDowell, J., Perception as a Capacity for Knowledge, Milwaukee, Wisconsin: Marquette University Press, 2011.

1. 셀라스가 지식이 이유들의 논리적 공간에서 성립하는 것이라고 언명할 때, 그는 인간과 비인간 동물을 가르는 전통적인 구분인 이성적 동물 내지 말하는 동물, 언어를 가진 동물(zoon logon)의 규정을 따르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런 생각에 의하면,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나의 믿음에 대한 적절한 근거를 언표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각에 의한 앎은 이 중에서 특수한 경우에 해당한다. 브랜덤과 같은 해석자는 셀라스가 지각경험에 의한 앎, 즉 관찰적 지식(observational knowledge), ‘보고’라는 발화행위가 신빙성 추론(reliability inference), 즉 나의 지각 경험이 신빙 가능한 결과를 낳는다는 추론의 결론으로 제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해석하지만, 맥도웰이 보기에 그런 해석은 “관찰적 지식은 비추론적이다”라는 셀라스의 주장과 상충한다. 지각경험의 주체는 그런 신빙성 추론을 수행하기보다, 그저 보고 들었기 때문에 안다. 이 테제를 소여의 신화에 빠지지 않고 어떻게 옹호할 수 있는가?

2. 맥도웰은 지각적 앎에 관한 셀라스 식의 주장이 인간적 쇼비니즘으로 귀결되지 않는다고 언급한다. 셀라스의 지식 정의는 동물이나 유아들에게의 적용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하지 않는 것이다.

3. 일단, 맥도웰이 보기에 셀라스는 지각경험에 관해 인식론적으로 내재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지각자 자신이 자기의 믿음을 정당화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믿음을 알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할 근거인 보증은 인식자에게 접근 가능하다.”(McDowell, 2011: 17) 지각자는 자신의 지각적 믿음을 정당화하는 신임조건들(credentials)에 대해 자기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그것을 아는 추론적 바탕을 언급하고 필요하다면 방어할 수 있어야 한다.”(McDowell, 2011: 17) 그러나 지각경험에 대한 신임조건을 보증하는 일은 추론적 연결에 의한 자기의식적 정당화와 다르다. 그리고 우리가 지각적 지식에 내재주의적 입장을 취한다면 이 두 가지 유형의 지식을 구별하는 데 얼핏 실패하는 듯 보인다.

이런 이유에서 버지(T. Burge)는 지각적 지식에 대한 외재주의적 입장을 취한다.1 버지는 지각자의 지식 보증의 외재적 성격에 ‘자격부여’(entitlement)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지각자가 지식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자격부여는 지각자가 자신의 앎에 대해 개념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가와는 관련이 없다. 이런 외재주의에 의하면 우리는 합리적 존재자의 지각적 앎을 비합리적 존재자의 지각적 앎의 보증 방식과 변별할 수 없게 된다.

버지는 이런 외재주의적 설명을 지각적 앎에 대한 일반적 보증으로 격상하려 한다. 그러나 버지의 논지는 지각적 앎의 한 특수한 두드러진 경우, 즉 합리적 주체의 지각적 앎에 관한 내재주의적 설명의 정당성을 공박하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내재주의를 지각적 앎 ‘일반’에까지 확장시킬 필요가 없다.

4. 버지는 셀라스로부터 촉발된 두 가지 접근을 염두에 두고 있다. 첫째는 지각적 상태와 지각적 믿음의 형성 사이에는 (인과적으로는 연관이 있을지라도) ‘인식론적’ 연관이 없다는 생각이다(가령 브랜덤의 입장). 이 입장에 의하면, 지각적 믿음의 참은 지각적 상태가 아니라 다른 믿음들과의 정합성에 의해 보증된다. 버지와 맥도웰 모두 이러한 입장을 거부한다. 나아가 맥도웰은 이런 종류의 생각을 셀라스로부터 읽어내는 것이 셀라스에 대한 오해라고 생각한다. 셀라스는 소여의 신화를 피하면서도, 지각 경험이 지각 믿음을 정당화한다는 점을 보이고자 한다.

맥도웰이 보기에는 둘째 접근이 셀라스의 입장이며, 셀라스와 버지 사이의 쟁점을 제대로 드러내고 있다. 둘째 접근에 의하면, 지각적 지식이 있는 주체는 자신의 지각 상태에 의해 자신의 앎이 보증된다는 점을 반성적으로 인지하고 있다. 이 점을 버지는 반박하고, 셀라스는 옹호한다.

버지에 의하면 지각 상태가 지각적 지식에 대해 갖는 보증은 굳이 지각 주체 자신에 의해 의식될 필요는 없다. 물론 버지는 보증이 지각 주체에 의해 의식되는 경우를 배제하지 않는다. 버지는 ‘정당화’라는 용어를 자격부여와 변별하여 이러한 내재주의적인 경우에 부합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보증되는 개인에게 반성을 통해 개념적으로 접근 가능한, 이유에 의한 보증이다.”(Burge, ??: 505) 그러나 버지는 이성적 주체가 지각 믿음에 대한 자기의식적인 정당화를 항상 잠재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주장이 과도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평범한 합리적 주체들, 평범한 정도 이상으로 지적 및 반성적이지 않은 성인들에게 귀속시키는 일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5. 때때로 버지는, 셀라스가 합리적 주체가 추론적 과정을 통해 지각적 앎에 도달한다는 결론을 내놓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에 의하면 셀라스의 입장은 “지각적 믿음의 형성이 추론의 일부─이유에서 이유가 뒷받침하는 것으로의 이행임을 함축한다”(Burge, ??: 527). 그러나 정당화의 가능한 근거들에 의해 믿음을 형성하지 않으면서도 믿음을 자기의식적으로 정당화하는 일은 가능하다. 이웃의 차가 차고 앞에 있는 걸 보고 이웃이 집에 있다는 믿음을 형성할 때, 이는 추론적인 과정일 필요가 없다. “단순히 그가 집에 있는 걸 곧바로 본다고 말하는 편이 완벽하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이 집에 있다는 나의 믿음을 정당화할 추론을 만들 근거가 충분하기 때문에 나의 믿음은 지식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보증 조건들을 스스로 의식하고 있다.

지각적 믿음에 대한 보증 조건들이 주체 자신에 의해 의식된다고 하더라도, 그로부터 믿음이 그에 상응하는 ‘이행’을 통해 얻어진 것은 아니다. 버지는 그의 비판의 초점을 지각적 믿음의 ‘형성 과정’에 관한 것에 맞추면 안 된다. 즉 지각적 믿음이 이유의 공간으로의 ‘이행’을 통해 얻어진 것으로 셀라스의 주장을 이해하면 안 된다. 오히려 그의 비판의 초점은, 합리적 주체가 지각적 믿음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자기의식적) 정당화의 ‘구조’에 맞춰져야 한다. 버지의 주된 논점은, 합리적 주체가 자신의 지각적 믿음의 보증조건(=정당화)에 대해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과도한 지성주의적 견해라는 것이다.

6. 버지가 보기에 지각적 믿음이 필요로 하는 자기의식적 정당화의 구조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무엇을 보았다”라는 진술에 의해 자신의 지각 믿음을 정당화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나는 무엇무엇을 보았다”라는 진술은 지각 상태를 지시하거나 전제할 것이다. 그러면 이 지각 상태 진술 자체는 어떻게 보증되는가? 지각 상태 진술이 현실과 부합하지 않을 수도, 즉 틀릴 수도 있지 않은가? 버지에 의하면, 지각 믿음의 보증은 이런 물음을 던지고 답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버지는 지각 상태가 오류 가능하더라도, 현실적이지 않은 경우에도 지각 믿음에 대해 어떤 보증의 역할을 한다고 본다. 나의 지각 대상이 현실에 없더라도, 나의 지각 상태는 나의 지각 믿음을 아는 것으로 간주하기에 충분한 보증이 된다는 것이 버지의 주장이다.

지각 상태 진술은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버지에 의하면, 지각 상태는 틀릴 수 있더라도, 지각자로 하여금 해당 믿음을 믿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보증적 힘을 갖는다. 즉, 나중에 파기 가능(defeasible)하더라도, 지각 상태가 성립하는 당시에는 파기되지 않은 것이다. 이는 ‘파기 가능한 보증’, ‘파기 조건’, ‘현재 상황에서 나의 지각적 보증이 파기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한 고려’ 등의 고도의 개념들을 가지고 사유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버지는 이런 지각에 관한 복잡한 개념적인 장치들을 가지고 정당화하는 일을 지각 주체에게 부여하기를 거부한다. 버지가 보기에, 지각 상태가 어떤 보증력을 갖는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지각 상태의 보증력이 어떤 조건에서 약화되는지를 지각 주체가 안다고 상정하는 것은 과도한 조건을 부여하는 것이다. 자신의 지각 상태가 제공하는 보증을 지각 주체가 의식하고 있다면, 이 주체는 믿음을 참이라고 간주할 ‘증거’가 있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는 셈이다. 버지가 보기에, 그렇다면 지각 믿음을 지식으로 주장하기 위해 지각 상태를 제시하고 정당화를 수행한다는 것은 고도의 숙련자에게만 이해 가능한 개념을 가지고 자신의 지각 상태를 논증한다는 것이다. 이는 과도한 지성주의적 귀결을 낳게 된다.

7. 버지의 이 논증은 지각 상태가 제공하는 보증이 믿음의 참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가정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성적 주체에게 독특한 즉 이유의 공간들에 위치하는 종류의 지각적 앎이 있다는 셀라스의 생각은 버지의 이 가정을 의문시하게 만든다. 지각 주체의 합리성에 속하는 지각 능력이 잘 작동한다면, 합리적 주체의 지각 상태 속에는 그가 스스로 의식하고 있는 특징들이 지각상에 현재한다. 이 현재함은 주체의 이성적 능력의 발현이다. 지각 상태가 지각적으로 주체에게 현재하는 특징들로 이루어진다면, 버지의 가정과 달리 지각 상태는 지각적 믿음의 참을 보장한다. “지각 상태가 지각자의 이성적 자기의식적 인지에 현전하는 환경의 특징을 갖는다면, 누군가 그러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상태가 지각자에게 믿도록, 환경의 그러한 특징들의 현전을 단순히 기록할 뿐인 믿음을 믿도록 보증하는 대로 사물들이 있지 않을 가능성은 없다. 그 상태가 제공하는 믿음 보증은 파기 불가능하다. 즉 약화될 수 없는 것이다.”(McDowell, 2011: 31, 원저자 강조)

누군가가 무언가를 어떠어떠하게 지각한다는 것은, 지각 대상의 어떠어떠함이 나에게 현현해서 내가 그에 상응하는 믿음의 ‘확실한’ 보증을 갖는다는 뜻이다. 이는 ‘불확실한’ 보증만을 가지고 나의 지각 믿음이 이 경우에 충분한 보증이 됨을 논증할 준비를 갖춘다는 과도한 조건과는 확실히 다르다. 복잡한 개념적 도구를 가지고 나의 지각 믿음이 옳은 이유를 고도의 추론과정을 통해 논증해야 할 필요 없이, 합리적 주체는 주체를 둘러싼 환경 속에 현재하는 특징들을 경험하는 능력을 발현함으로써 충분히 이성적으로 근거 지워진 믿음을 갖게 된다. 지각 능력의 사용은 충분히 근거 지워진 믿음을 산출하며, 이 근거 지워짐은 지각 주체 자신에게도 인지된다. 이 인지는 굳이 복잡한 개념어로 진술될 필요 없이, 가령 “초록 물체를 봤을 때는 그게 초록 물체인지 분별할 수 있다”는 정도의 평범한 진술로 충분하다.

여기서 지각 믿음의 특징은, 내가 그렇게 봤기 때문에 믿음이 보증된다는 점에 있다. 지각 믿음의 보증은 믿음의 형태가 아니며, 이 점이 셀라스가 과도한 지성주의로 기운다는 버지의 비판을 약화한다. 지각 믿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식적으로 정당화된 믿음이다. “그 보증이 그저 자격부여가 아니라 정당화라 하더라도, 주체에게 [그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그의 믿음을 보증하는 것은, 버지가 생각하듯 지각적 상태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지각적 상태이다. 물론 정당화를 제시하면서 지각 상태를 언급할 때 그는 자신의 말을 믿지만, 그로부터 그가 주장하는 보증이 지각 상태와 반대되는 믿음에 의해 구성된다고 추론하는 것은 혼동이다.”(McDowell, 2011: 33-34)

8. 이성적 존재의 지각적 지식을 여타의 지각과 구분하는 것은, 지각 상태가 제공하는 불확실한 보증을 고도의 정당화 활동 속에서 자기귀속할 수 있음이 아니라, 주체에게 현전하는 환경에 대한 지각 상태에서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실한 보증을 얻을 수 있음이다.

지각 상태가 제공하는 믿음 보증을 버지는 불확실(inconclusive)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은 지각 능력이 오류 가능하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부터 따라 나온 결론으로 보인다. 버지는 지각적 보증을 얻더라도 여전히 우리가 기만당할 수 있다고, 즉 잘못된 지각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9. 그러나 맥도웰이 보기에 이는 오류가능성에 대한 종래 철학의 그릇된 관념을 반영한다. 기본적으로, 오류가능성은 어떤 ‘능력’이 갖는 성질이다. 어떤 능력이 오류를 범한다는 것은, 이 능력이 하기로 명시되어 있는 바를 그 능력의 소유자가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지각이 오류가능하다는 버지의 주장은 의심할 바가 없지만, 지각 능력이 무엇을 하는 능력이냐를 배제하지 않아도 된다. 지각은 “본인의 자기의식적으로 이성적인 인지에 지각적으로 현전하는 객관적 환경의 특정한 특징을 갖는 데서 존속하는 상태에 들어서는 것”(McDowell, 2011: 37)이다. 그렇다면, 분명히 지각 능력은 그 능력상, 실패하지 않는 경우에는 지각 믿음에 대한 결점 없는 보증을 주어야 한다. 지각 능력이 오작동하지 않는 경우에도 지각 상태가 보증하는 지각 믿음이 실제 사태와 다르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10. 능력이 오류 가능하다는 것은, 능력의 소유자가 능력의 오작동 경우를 정상 작동으로부터 항상 변별해낼 수 있지는 못하다는 뜻이다. 만일 언제 나의 능력이 정상 작동하고 오작동하는지 (그 조건들을) 항상 안다면, 소유자의 부주의가 있을 수 있더라도, 능력 자체는 원리상 오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완벽한 지각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 지각하더라도 종종 성공적으로 지각하는 데 실패한다. 따라서 우리는 불완전한 지각 능력을 갖는데, 지각 능력이 불완전하다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세심히 주의를 기울이더라도 우리 지각의 작동상 결함을 인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존속한다는 것이다.

혹자는, 지각이 주변 환경의 현현하는 특징을 갖는 상태에 들어가는 능력이라고 하더라도, 지각이 그러한 특징에 관한 믿음에 파기 불가능한 보증을 주지는 않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지각 능력이 오류 가능하다는 것은, 지각 능력이 오작동하는 경우에도 이를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정상 작동시에도 우리는 우리에게 올바른 지각이 수용되고 있는지를 모른다는 결론이 도출될 수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지각주체는 자신의 지각을 통해 실제 환경을 안다는 확실한 보증이 없지 않는가? 맥도웰은 바로 이 결론이 비약이라고 생각한다. 합리적 지각 능력은 환경에 대한 특정한 특성들을 아는 능력일 뿐만 아니라, 지각을 통해 연관된 지식을 얻을 경우에 “그것[지각]이 그가 아는 방법임을 아는 능력”(McDowell, 2011: 41)이기도 하다. 즉 ‘합리적’ 지각 능력은 지각 능력이 나의 앎의 방법이라는 자기의식을 수반한다. “당연히, 능력의 결함 있는 작동을 결함 없는 작동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로부터 그 능력이 환경에 대한 것들을 알 수 있는 능력으로 서술될 수 없음이 따라 나오지 않는다.”(McDowell, 2011: 41) 내가 착각할 가능성은 지각 능력의 오작동을 정상 작동으로 착각할 가능성이다. 그러나 이런 가능성은 지각 능력이 정상 작동함에도 이를 알 수 없는 가능성과는 다르다. “내가 속고 있을 때 내가 그렇다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로부터, 내가 속고 있지 않을 때 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모른다는 결론이 따라 나오지 않는다.”(Rödl, 2007: 157-158) 후자는 전자로부터 따라 나오지 않는다. 나의 지각적 믿음은 때때로 틀릴 수 있다. 그렇다고 그로부터 모든 지각적 믿음이 의심스럽다는 주장은 따라나오지 않는다.

11. 지각 능력이란, 환경의 특징들이 현전하는 지각 상태에 들어설 수 있는 능력이며, 동시에 나의 앎이 지각을 통해 얻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능력이다. 이러한 능력이 어떻게 이성적 지식 능력이 되는가는 다음처럼 설명될 수 있다.

내가 녹색인 물체를 보고 녹색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은, ‘적절한 조건’ (가령 조명) 아래 그러한 지각 판단을 내릴 수 있음을 뜻한다. 어떤 사람이 여러 사물을 보고 색을 말하는 실험에 참여한다고 해보자. 그 실험에서 그는, 시행 중 일정 시간 피험자가 눈치 채지 못하게 조명이 바뀔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실제 실험에서는 한 번도 조명이 바뀐 적이 없다.

이 상황에서 지각자는 적절한 조건 하에서 자신이 수용한 감각 자극에 대한 반응을 했다(색을 말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적으로 말해서 지각자는 자신이 본 모든 사물의 색을 알 수 있는 입장에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신빙성 있는 권한을 가진 실험자로부터 자신의 지각 조건이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고, 이는 자신의 지각을 의심할 만한 합리적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반면 실험장 밖에서 지각자는 적절한 조명 아래에서 사물을 관찰함으로써 얻어진 믿음을 앎이라고 생각한다.

실험장 안과 밖에서 지각자가 모두 ‘적절한’ 지각 상태에 있었음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맥도웰은 실험장 안에서의 지각자의 지각 상태가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특수한 경우의 지각 상태, 즉 이성적 지각 상태와 다르다고 말한다. 실험장 안에서 지각자는 ‘나의 앎이 지각을 통해 얻어졌다’는 의식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의 지각 믿음을 의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실험자들의 설명에 의해) 주어졌기 때문이다. 반면 실험장 밖의 상황, 즉 일반적인 상황에서, 나는 나의 지각 믿음을 의심할 만한 이유가 없다. 내가 잘못 지각했을 수도 있다는 순전한 ‘가능성’은 나의 지각 믿음을 앎으로 승인하지 못할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런 가능성 때문에 지각 믿음이 지식이라는 점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감각이 때때로 우리를 속이므로 감각은 믿을 수 없다는 데카르트적 회의로 빠질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오류 가능성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반영한다.

이러한 지각적 지식 모델에서, 실험자들이 말한 조건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지각 믿음이 지식이 되기 위한 조건은 지각 주체 자신에게 지각 능력을 의심할 이유가 주어졌다는 점 외에 지각자가 통지 받은 조건들의 내용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성적 지각 주체는, 지각 능력의 보증을 의심할 특정한 이유가 주어지는 한 자신의 지각 믿음을 앎으로 승인할 수 없다(이 점에서 비이성적 존재자와 이성적 존재자의 지각적 지식이 변별된다). 반면 그러한 특정한 이유가 주어지지 않는 한 지각 주체는 자신의 지각 믿음을 앎으로 승인하지 못할 어떤 이유도 갖지 않는다. ‘특정한 개연성(possibility)’이 아닌 ‘순전한 오류 가능성’은 그러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12. 지각 경험을 통해 성립하는 앎이 있다면, 그것은 버지가 주장하는 모델처럼 항상 틀릴 가능성을 남겨둔 채 비확정적인 상태로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지각적 지식에 대한 두 가지 선택지만이 주어지게 된다. 그 중 하나인 회의주의는 지각적 지식의 성립 자체를 부정하게 되며, 독단주의는 이 비확정적인 상태의 믿음이 앎으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하게 된다. 이 두 가지는 다르게 보이지만, 지각적 앎이 불확실하다는 회의적 전제의 두 가지 측면이다. 이 전제를 거부할 때에만 우리는 회의주의를 넘어 지각적 지식의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다.

13. 이제 이성적 동물의 지식에 관한 논의로 되돌아가자. 버지는 인식론적 아이디어가 비이성적 동물, 비인간 동물과 아이를 지식 소유로부터 배제하고 이성적 인간만을 지식의 주체로 세운다고 비판한다. 버지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이러한 논의가 경험 심리학의 성취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먼저, 비이성적 동물과 이성적 동물을 통틀어 지각 능력 일반은, 개체가 환경으로부터 받는 감각 자극은 높은 수준의 규정성을 갖지 못한다. 따라서 동물의 지각 장치가 어떻게 이 자극들로부터 정보들을 추출하는지가 문제가 된다. 이러한 문제는 굳이 이성적 동물에 국한되지 않고 동물의 지각 능력 일반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분명히 지각 능력에 대한 경험과학적 탐구를 통해 밝혀지는 바는 우리와 동물의 지각 능력의 많은 부분을 해명할 것이다. 맥도웰이 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각 체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아는 것은, 자기의식적으로 소유되고 동작하는 지식 능력으로서의 지각을 분명히 하는 일의 대체물이 아니다.”(McDowell, 2011: 56)

둘째, 버지는 이성의 활동에 의해 산출된 지식과 추론에 의해 산출된 지식을 등치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동물적 본성과 이성을 분리하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입장은 지각적 지식을 앎으로 수용하기 힘들게 만든다. 버지는 추론에 의해 얻어진 지식을 인식과 등치시키는 발상이 “신과 같은 비판적 추론자”(God-like critical reasoning)를 “인간 인식의 본보기”로 삼는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는 이성의 활동을 추론 활동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우리는 인간 이성의 동물성, 이성의 동물적 성격을 규명해낼 수 없다. “이성이 우리를 신처럼 만든다고 가정하는 것이 아마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보기에 이성이 만들어내는 차이점의 전부라면, 이성을 동물성과 통합하기 힘들어진다. 우리가 이성에 속하는 능력들을 환경의 특징에 대한, 감각에 매개된 우리의 반응성(responsiveness)이라는 형태 속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본다면, 그런 어려움은 없다. 합리성의 작동으로서의 지각은 통칭 동물적인 것 중에서 두드러진 종류의 것이다.”(McDowell, 2011: 57)


  1. 버지는 이런 외재주의적 입장으로부터, 지각적 앎의 주체를 동물에까지 확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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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 강의에서 맥도웰이 오류가능성(fallibility)을 다루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 강의 외에도 인식론 및 지각철학에서의 선언주의(disjunctivism)을 두고 버지와 맥도웰 사이의 논쟁은 계속되었는데요. 관심있으신 분들을 위해 제가 아는 대로 소개하자면,

  1. 맥도웰의 선언주의에 대한 버지의 비판
    Burge, Tyler (2005). Disjunctivism and perceptual psychology. Philosophical Topics 33 (1):1-78.

  2. 맥도웰의 응답
    McDowell, John (2010). Tyler Burge on disjunctivism. Philosophical Explorations 13 (3):243-255.

  3. 버지의 재비판
    Burge, Tyler (2011). Disjunctivism again. Philosophical Explorations 14 (1):43-80.

  4. 맥도웰의 재응답
    McDowell, John (2013). Tyler Burge on disjunctivism (II). Philosophical Explorations 16 (3):259-279.

흥미로운 것은 특히 3번과 4번에서 쟁점은 이제 단순히 선언주의가 무엇을 말하느냐의 문제를 넘어서서 인식론 및 지각철학의 과제에 대한 논의로 확장됩니다. 버지는 맥도웰이 제시하는 기이한 형태의 선언주의가 인지과학을 비롯한 경험과학적 연구결과와 양립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따라서 맥도웰이 인지과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반면, 맥도웰은 한편으로 인지과학에서의 성취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인지과학에서의 경험적 접근과 인식론에서의 철학적 접근이 결국 상이한 층위를 다루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 그런데 버지의 작업도 armchair philosophy인건 마찬가지 아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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