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할 것인가

오랜만에 들어오네요. 여기서 다뤄질 수 있는 주제인지 조금 의문은 듭니다.
예전에 친구와 다뤘던 떡밥이기도 하고 쇼츠를 보다 문득 생각나서 의견을 묻고 싶습니다.

국가는 세금을 많이 내는 소수를 위해 운영되야 할까요 아니면 세금을 적게 내는 다수를 위해 운영되야 할까요?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합니다만 한정된 자원을 분배해서 집행해야하는 이상 상대적으로 손해를 보는 누군가는 생길거라고 생각합니다.
세금을 많이 내는 소수를 위해 운영된다면 고소득층의 세금을 감세하거나 다수의 복지를 위한 정책을 줄여야 할 것 입니다. 반대로 세금을 적게 내는 다수를 위해 운영된다면 고소득층의 세금을 증세하여 다수의 복지를 위한 정책을 확충해야겠지요. 예전에는 부의 재분배 관점에서 전자가 맞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소득이 많다는 이유로 그들이 납세를 많이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나아가 정당화 되야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후자의 관점을 여전히 견지하고 있습니다.

사실 딜레마적인 질문이라 무엇이 옳다 그르다를 절대적으로 판단하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제 짧은 식견보단 여러분들이 더 설득력 있는 의견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혹은 저의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면 그 부분에 대해 지적해주셔도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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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가 반드시 '세금을 적게 내는 다수'를 위한 정책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a) 기초적인 복지가 갖추어지지 않을 경우 사회의 치안과 안정성이 크게 흔들리게 되고, 그 문제는 결국 '세금을 많이 내는 소수'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니까요. 또한, (b) 그런 복지의 혜택을 통해 성장한 개인이 결국 그 사회에 다시 기여를 할 수도 있죠. 더군다나, (c) 사회 기여도가 반드시 세금의 양으로만 측정될 수 있는 것도 아닐 거예요. 이재용 회장이 한강 작가보다 세금을 훨씬 많이 낸다고 해서, 한국 사회에 대한 한강 작가의 사회적 기여도가 이재용 회장보다 못하다고 하기는 어려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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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스의 관점에서 접근해 볼 수도 있습니다. 자유주의 정치 이론가들 중에서도 롤스처럼 분배적 정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무지의 베일 뒤편에서 정의의 원칙을 선택하는 가상의 상황을 사고실험으로 고려할 경우, 각 사람들은 자신이 의도치 않게 사회적 약자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그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정의의 원칙을 선택할 텐데,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차등의 원칙' 곧 '최소수혜자에 대한 최대 이익의 원칙'을 옹호하게 될 것이라는 거죠. 즉, 정의의 제1원칙인 '평등의 원칙'이 만족되고, 정의의 제2원칙 중 하나인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이 만족된 상태에서는, 사회의 가장 약자들에게 이익이 되는 한에서만 부의 불평등이 허용된다는 '차등의 원칙'이야말로 모든 자유롭고 합리적인 개인들이 선택할 만한 원칙이 된다는 것이 롤스의 이론입니다.

https://blog.naver.com/1019milk/221001384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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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을 다 쓰고 보니 문득 <트로피코 3>라는 게임이 떠오르네요. 독재자가 되어 국가를 경영하는 게임인데, 역설적이게도 성공한 독재자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 기반 시설들을 충분히 건설하고 하층민에 대한 지원을 충분히 수행해야 하는 게임이죠.

자본주의와 자유시장 질서를 받아들이고 있는 세계에서조차 오늘날 복지제도가 어떤 방식으로든 갖추어지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역사적-사상적 배경이 있기는 합니다. 다만, 단순히 특정한 이념(가령,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게 인간의 도리지!“)만으로 복지제도가 현재와 같이 정착된 것은 결코 아니라고 저는 평가해요.

오히려 적정 수준의 복지가 사회 전반의 성장 가능성과 이익을 상승시키는 데 필수적이라는 사실에 광범위한 동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나라들이 매우 ‘현실적인 이유에서‘ 약자를 위한 복지정책도 기꺼이 감내하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복지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정할 것이고 얼마만큼의 예산을 사용할 것인지는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일정 수준의 부의 재분배가 국가 전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데에는 많은 사람들이 합의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노직처럼 이조차도 정의롭지 않다고 거부하는 철학자들도 간혹 있기는 하지만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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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글의 주제와는 별 상관이 없을 수는 있는데, '소득이 많다는 이유로 그들이 납세를 많이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라고 하실 때 생각나는 글이 있어서 소개를 하려고 코멘트를 남깁니다.

저는 부의 분배가 개인의 능력/노력/사회적 기여/도덕적 자격 (individual moral desert) 등에 의해 정해진다 내지는 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moral desert와 justice에 대한 다양한 논의는 Desert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https://left2right.typepad.com/main/2005/01/how_not_to_comp_1.html

이 글에서 철학자 엘리자베스 앤더슨(Elizabeth Anderson)이 그 태제를 옹호하고 저는 그것이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앤더슨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 A. Hayek)의 논지를 따라가서 설명합니다.

앤더슨은 '내 소득은 내가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다'는 주장이 사회 보험을 위한 세금에 대한 타당한 반론이 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자유 시장의 가격은 과거의 능력/노력/사회적 기여/도덕적 자격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현재의 수요와 공급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앤더슨에 따르면, 하이에크의 이러한 통찰은 사회 보험의 필요성을 뒷받침합니다. 자본주의 시장의 역동성과 변동성은 예측 불가능한 불운을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성실하게 노력한 사람들도 갑작스러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회 전체가 함께 위험을 분담하고, 시장의 변동성으로 인한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사회 보험이 필수적입니다. 앤더슨은 사회 보험이 보편적이고 강제적인 정부 제공 형태일 필요는 없지만, 시장의 불확실성에 대비하기 위해 보험 제도가 반드시 필요하며, 이를 위한 세금 부과는 정당하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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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사실 노직의 체계에서는 어떤 자연법적 정당화 없이 《Anarchy, State, and Utopia》(이하 ASU)갑자기 등장하는 로크적 단서 문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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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U (1974)에서 노직은 자신이 정리된 어떤 자연법 체계도 갖추고 있지 않다고 1장 마지막 문단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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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서 때문에 ‘상대방의 상황이 악화된다’는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고려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고, 여러 가지 제약이 붙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노직이 정말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게 방임적으로 생각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안캡들은 이런 부분에 불만이 있어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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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노직은 로크의 단서 문제(7장), 보상의 원리 문제(5장)―보상의 원리는 배제되는 사람들에 대한 여러가지 재분배적 측면들이 있습니다.―, 비생산적 교환 문제(4장)―즉, 타인의 상황을 이용한 비생산적 교환은 강압적이라는 주장―등에서, ASU 내용을 만을 읽어본다면 오히려 여러 가지로 신경 쓴 흔적이 꽤 보입니다. 그래서 외부에 알려진 것처럼 그를 단순히 방임주의자로만 봐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로스바드라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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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링크 논의들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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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직을 비판했던 G. A. 코헨도 이런 점에서 노직이 자유와 재산권의 관계 문제에 대해 깊게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보았고, (이에 대해서는 코헨의 《Self-Ownership, Freedom and Equality》 (1995) 내용들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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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한 노직의 논의들을―로크 단서, 보상원리, 비생산적 교환―보면, 스스로는 비정형 원리, 방임적이라고 하지만, 내용만 읽어보면 오히려 상당히 정형화된 측면이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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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직은 외부적으로 잘못 알려진게 좀 크다고 생각합니다. 국내에서는 원래 내용보다 책 번역이 좀 너무 어렵게 돼서 사람들이 안 읽는 탓도 있는 것 같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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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하이에크도 옹호적으로 인용하신걸까요? 좀 애매하게 느껴져서 일단 적겠습니다.) 생각보다 저는 하이에크도 외부에 알려진 거랑 다르게 그렇게까지 극단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급진적인 무정부자본주의자라거나 그래서 그런게 아니라 (그쪽에 관심은 좀 있고 공부는 하지만요.) 오히려 자유라는 측면에서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고 여러 가지로 고민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대표적으로 위 링크에서 있는 ‘사막위에 유일하게 남은 오아시스’ 같은 사례에서 하이에크는 로스바드 같은 사람들이랑 다르게 상황이 강압적이고 억압적이라고 주장했고 (하이에크 저술이 여기저기 상충되고 안맞는 부분들이 많아서 함부로 말씀드리기는 사실 좀 뭐한데...) 인간들에게 자유를 위한 여러조건들이 필요하다고 주장해서 어떻게 보면 롤스보다 더 급진적인 측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이에크주의자들 중에서 좌파진영에서는―좌파 자유지상주의자들은―분산된 방식으로 사회보장제도를 구상하거나 기본소득 같은 제도를 논의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또한 현대 정의론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 중 하나인 ‘운평등주의’ (즉, 국가가 개인 삶에 구체적으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요소(예: 출생)에 따른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논의)와도 연결될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런식으로 논의 하시는 분들도 몇몇 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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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저는 부의 분배가 개인의 능력/노력/사회적 기여/도덕적 자격 (individual moral desert) 등에 의해 정해진다 내지는 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라고 적었을 때, 하이에크에 대한 입장을 나름 명확히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생각도 하이에크는 fundamental한 리버태리언과 거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자유방임적인 정책을 옹호한다면, 그것은 재산권이 필연적으로 지켜져야 할 절대적 자연권이어서가 아니라, 그런 정책이 전반적인 사회질서의 유지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겠죠. Scanlon의 글에서도 지적하듯이 말입니다. 하이에크는 리버테리언 윤리학자로서 자유를 옹호한 것이 아니라, 사회이론가로서 자유의 기능이 사회질서의 유지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한 것이 됩니다. (다만, The Constitution of Liberty 1장이나 9장에서는 윤리학자처럼 자유를 정의하고 이에 대한 윤리적 논의를 하려고 하는 것 같기는 한데, Hamowy의 비판이나 그에 대한 하이에크의 응답을 볼 때, 그런 자유의 가치에 대한 윤리학적 논의가 그의 주요 관심사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 하이에크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를 물어보신것이라면, 저는 하이에크에 대해 약간 ambivalent한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찬탄 및 동의를 불러일으키고, 어떤 점에서는 정말로 맘에 안 드는 그런 것입니다. (저와 비슷한 view를 찾자면, Brad DeLong의 view(1) view (2)를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저는 이보다 좀 positive한 쪽 정도로 봐주시면 되겠습니다. 저는 DeLong보다는 하이에크가 The Constitution of Liberty나 Law, Legislation, and Liberty가 흥미롭고 탐구할 만한 내용이 많다고 생각은 합니다. 다만, 기본적으로는 그가 경제학이나 정치과학적인 내용을 얘기할 때는 통찰력 있는 부분도 많은데, 그가 윤리학이나 정책학 같은 규범적 논의를 할 때에는 의심의 눈길로 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위의 DeLong도 그런 것 같고... 특히 자생적 질서 얘기할 때, 이게 규범적 함의를 가질 수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Bruce Caldwell이 이 문제에 대해 "I know it when I see it. "으로 논의하는 글을 봤는데, 솔직히 저한테는 설득력이 없었고, 그 다음 글에서는 하이에크가 기본적으로 윤리학자라기보다는 사회이론가구나 하는 인상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원래 댓글에 있었던 앤더슨 글을 잘 읽어보시면, '운평등주의' 관련 논의도 있습니다.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앤더슨은 운평등주의에 비판적입니다.

원래 댓글은 제 견해에 대한 얘기보다는 '앤더슨 글이 있는데, 흥미로와서 소개해본다'는 의도로 쓴 거였는데 어쩌다보니 하이에크에 대한 긴 댓글을 달게 됐네요. 예전에 하이에크에 대해 댓글을 쓴 적은 있었지만, (능력주의 리얼리즘? - GOYS 님의 게시물 #24) 그 때는 샌델의 논의가 중심이었기는 했습니다. 사실 그 때도 그 글에 달린 다른 댓글에서 앤더슨 글 링크 달기는 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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