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글을 읽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적어봅니다.
저는 이것이 자유지상주의 철학에서 오래 동안 제기된 자발성 논쟁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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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지상주의 사상에서 모든 '자발적 거래' 는 정의롭다고 주장되며 합법적이라고 주장됩니다.(R. Nozick .1974, M. Rothbard, 1973/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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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여기서 그러면 그 '자발적인 것' 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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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히 이야기 되는 코헨(G. A Cohen)의 비판에서와 같이 우파 자유지상주의(Right-Libertarianism)에서 '자유' 는 해당 권리에 근거한 행위는 자발적 이라는 자유에 대한 권리의 정의로 주장됩니다.(G. A Cohen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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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누군가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막는다는 것은 그 점에서 그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 내 행동을 방해할 때, 내가 그 행동을 할 권리가 있든 없든, 그리고 방해자가 나를 방해할 권리가 있든 없든 나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많은 자유지상주의적 글쓰기에 영향을 미치고 간섭이 부자유의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수반하는 자유에 대한 정의가 있습니다. 자유에 대한 권리 정의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정의에 따르면, 내가 할 권리가 있는 일을 누군가가 방해하여 결과적으로 그 사람도 내가 그 일을 하는 것을 방해할 권리가 없는 경우에만 나는 자유롭지 않습니다. (G. A. Cohen 1995,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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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히 이야기 되듯이 이러한 자유지상주의적 개념이 설득력을 지니는 이유는 이것의 보통 사람들의 도덕적 직감에 명료히 잘 들어맞다는 것에 근거하고 있습니다.(J. Wolff,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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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권리의 자유에 대한 정의에 근거한다면 내가 권리가 있는 일을 그 일을 방해할 권리가 없는 사람이 방해할 때만 나는 자유롭지 않으며 같은 설명이 부자유에도 적용됩니다. 어느 사람도 X에 대해 권리를 누리지 않는 한 그 누구도 X에 대해 자유롭지 못한 상태가 된다고 간주 되지 않습니다.(I Wysocki,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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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러한 우파 자유지상주의에서 이야기 되는 자유의 정의(네거티브 자유Negative-liberty)가 왜 문제가 될까요? 어차피 보통 사람들의 도덕적 직감과 가장 잘 들어맞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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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가 특정한 도덕적(규범적)-방식으로 정의된다면 다른 규범과 관련된 방식의 자유(하고 싶은데 못하는 것)은 보지 못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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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로, 정의에 기반한 자유에 대한 어떤 관념도 자유 개념에서 어떤 특정한 정의 원칙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후자는 단순히 전자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로스바디안의 "재산으로서의 자유" 관념의 경우, 재산권이 자유와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소한 사실일 뿐입니다. 단순히 자유가 재산권과 양립가능하도록 정의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ϕ에 대한 자유는 단순히 ϕ에 대한 권리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ϕ에 대한 사전 권리가 없다면 아무것도 ϕ에 대한 자유로 간주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상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불필요하게 만듭니다.(Igor Wysocki, 2021,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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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몇몇 책들에서 나온 사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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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1 강도와 물에 빠진 사람
모든 자발적 거래는 정의로운가? 사용된 형식이 별 도움이 안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음과 같은 것을 고려해보자. 즉 "돈을 내놓든지 목숨을 내놓아라!" "여기 있습니다! 제발 나의 돈을 가져가세요." 달리 말해서 우리는 자유로운 교환과 강요된 교환을 구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내가 물에 빠졌는데 수영을 못한다고 생각해 보자. 당신이 보트를 타고 나에게 다가와 1000파운드에 나를 구해 주겠다고 제안한다고 생각해 보자. 당신은 나에게 1000판운드를 지불하도록 강제하는 것인가? 내가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이 당신 탓이 아니라면 노직의 대답은 내가 이 돈을 지불하도록 강요당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돈을 준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정의롭다는 것이다.
(Jonathan Wolff, 1996, < Robert Nozick > )(한글 번역본 2006: 161~16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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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지상주의적 자유개념에 의하면 노상강도가 돈을 요구하는 것은 비자발적이더라도 물에 빠진사람과 협상하는 것은 자발적인 것입니다.
여기서 감정적인 직관 보다는 논증이 사용되는 형식 (A가 B에게 돈과 목숨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한다.)에 좀 더 집중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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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2 강도와 심장 외과 의사
순전히 상대적인 측면에서 A가 B에게 "돈을 주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돈을 주면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B는 A가 단순히 자신을 죽였을 때보다 A의 약속 덕분에 더 나은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상대적인 측면에서 협박은 제안처럼 보입니다:
A가 B에게 돈을 받는 대가로 B의 생명을 연장해 주겠다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이는 A가 아픈 B에게 "돈을 주면 당신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심장 수술을 해 주겠다"고 말하는 경우와 거의 동일합니다. 두 경우 모두 약속된 조건에 동의하는 것이 동의하지 않는 것보다 상대적인 측면에서 B에게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동의하는 것은 B의 생명에서 돈을 뺀 나머지를 의미하고 동의하지 않는 것은 죽음에서 돈을 뺀 나머지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상대적인 측면에서 보면 협박은 제안처럼 보이지만 절대적인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첫 번째 사례에서 A(살인마)가 약속을 전혀 하지 않았다면(즉, B를 전혀 괴롭히지 않았다면) B는 더 나았을 것입니다. 반면에 두 번째 사례에서 A(심장외과 의사)가 약속을 전혀 지키지 않았다면 B는 더 나빴을 것입니다.
(Igor Wysocki, 2021, < An Austro-Libertarian Theory of Voluntariness: A Critique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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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소스키는 강도와 삼장외과 사례를 서로 비교합니다. 여기서 위소스키는 두 사례가 형식적으로는 비슷해보이지만 (A가 B에게 돈과 목숨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 거래를 했을 때 그전보다 A의 처지가 더 나빠지냐 좋아지느냐에 따라 강제와 자발성이 결정될 수 있다고 주장을 살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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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러한 위협에 대한 효용의 정의는 문제점이 있으며 해당 서술에서 위소스키는 이러한 정의가 성립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립니다. (Igor Wysocki, 2021, 부록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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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A가 살기 위해서 X(-행위든 물건이든-)를 필요로 할 때 X를 B가 통제할 수 있다면 A는 B에게 강제 당하고 있는 걸까요?
보통 직관적으로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되지만 위의 사례들에서 살펴 보았듯이 자유지상주의적인 자유에 대한 권리의 정의에 근거한다면 그것은 사전 권리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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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위의 괴상한 사례들이 여기서 구체적으로 왜 중요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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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들이 우리 삶이랑 무슨 상관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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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이론에서 자본주의 경제 구조의 강압성, 강제성을 논쟁할 때 핵심이 되기 때문입니다.(Wolff 1996, Wysocki,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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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3: 노동자와 자본가
다른 사람들이 다른 직업을 모두 차지해버려서 단 한 가지 일을 하거나 굶어 죽거나 선택해야 하는 한 노동자가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 노동자는 일하도록 강제당하고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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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노직(1974)은 말하기를:
유사한 고려 사항들이 노동자들과 자본가들 사이의 시장 교환에 적용된다. Z는 일하거나 또는 굶어 죽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다른 사람들의 선택과 행위는 Z에게 다른 제3의 선택을 남겨두지 않는다. (그에게 다양한 직업의 선택권은 있을 수 없다.) Z는 자발적으로 일하길 선택하는가? A에서 Y까지의 다른 개인들이 각각 자발적으로 그리고 자신들의 권리내에서 행동했다면 Z는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타인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그들의 권리 안에서 행위한 결과로, 한 개인에게 보다 구미에 맞는 대 안이 주어지지 않았다 해서, 구미에 맞지 않는 대안들 가운데서 선택하지 된 그 개인의 선택이 비자발적인 것은 아니다.
(Robert Nozick, 1974, <Anarchy, State, Utopia>)(한글 번역본1997: 327쪽 )
이는 부분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경제 수단(집, 토지, 회사등)을 소유한 자본가들을 위해 일을 하도록 강제 당하고 있느냐는 질문과 관련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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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직의 의견은 자유지상주의적 '자유' 개념과 그 권리의 정의에 근거한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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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자들은 그렇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강압적이고 강제적인 제도라고 주장합니다. 버크만(Alexander Berkman)의 글을 인용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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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에 따르면 고용주는 귀하의 동의를 얻어 판매하기 때문에 귀하에게서 아무것도 판매하지 않습니다. 귀하는 일정한 급여를 받고 상사를 위해 일하고 생산하는 모든 것을 상사가 받기로 동의했습니다.
"근데 정말 동의한 거야?
"고속도로 남자가 당신의 머리에 총을 들이대면 당신은 당신의 귀중품을 그에게 넘겨줍니다. 당신은 '동의'했지만, 당신은 그의 총에 강요당했기 때문에 스스로 어찌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고용주를 위해 일하도록 강요받지 않습니까? 당신의 필요는 노상강도의 총처럼 당신을 강요합니다. 당신은 살아야 합니다 . . . . 당신 스스로 일할 수는 없습니다. . . 공장, 기계, 도구는 고용계급이 소유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일하고 살기 위해 그 노동에 참여해야 합니다. 당신이 어떤 직장에서 일하든, 당신의 고용주가 누구이든, 그것은 항상 똑같습니다. 당신은 그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 강요당하는 겁니다." [Alexander Berkman < What is Communist Anarchism? >, p.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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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시장에서의 경제적 거래 시스템의 정당성(즉, 경제적 힘과 교환 대한) 오랜 논쟁들과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Iain Mckay,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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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4: 사막에 있는 유일한 오아시스 사유화
사람들이 사는 아주 드넓은 사막 한가운데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하나의 오아시스가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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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오아시스를 사유화 시킬 수 있을까요? 이 사례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오아시스 소유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물을 안주면 사람들이 죽을 것이라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Iain Mckay,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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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직(1974)은 이점에서 머뭇거립니다.
이렇게 볼 때 어떤 사람도 사막에 있는 유일한 우물을 사유화하여 그가 원하는 가격을 매길 수 없다. 그가 설사 이미 이를 소유하고 있거나 또는 그의 것을 제외한 사막의 모든 우물이 말라버리는 경우에도, 그는 그가 원하는 바대로 물값을 요구 할 수 없다. 이 불행한 상황은 그의 잘못은 아니나 로크적 단서를 발효케 하여 그의 재산권을 제약한다.(주석n)
해당 글 주석n: 그의 우물이 말라버리지 않은 것이 그가 마련한 특별한 예방조치 때문이라면, 상황이 다르다.
(Robert Nozick, 1974, < Anarchy, Staste, Utopia > p.263~264) (한글 번역본1997: 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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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직은 이 부분에서 로크적 단서(내 소유 때문에 타인의 상황이 악화된다.) 때문에 사유화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같은 줄 주석에서 그는 예컨대 다른 우물들이 다 말랐는데 내가 내 우물을 잘 관리해서 마르지 않은 것이라면 로크적 단서(내 소유가 타인의 상황을 악화시킨게 아니라서) 에 따라 소유가 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현실적으로 이 두 가지가 경우가 상당히 구분하기 힘들 것이라는 비판이 있어 왔습니다.(구영모,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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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로스바드(Murray Rothbard) 같은 다른 자유지상주의자의 경우 예외 없이 이런 경우에도 소유자의 권한를 옹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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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는 생명 유지에 필요한 서비스를 하고 있고 물의 판매를 거부하는 권리를 가져야 하거나 고객들이 지불하고자 하는 가격을 그가 부과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만 한다. 삶에서 맞닥뜨리는 많은 상황처럼 그 상황은 고객들에게는 불행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특히 부족하고 생명 유지어 필요한 서비스의 공급자는 판매를 거부하거나 구매자들이 지출하고자 하는 수준에서 가격을 정하는 것이 전혀 강제적이 아니다. 자유인으로서 그리고 정당한 재산의 소유자로서 두 가지 행동은 우폴 소유자의 권리들 내 있다. 오아시스의 소유자는 자신의 행동들과 자신이 소유한 재산이라는 실제에 대해서만 오직 책임을 진다. 그는 사막이라는 실체에 대해 책임을 지거나 다른 우물들이 말라버렸다는 사실에 대해서 책임이 없다.
(Murray Rothbard, 1982, < The Ethics of Liberty > p.221) (한글 번역본2017: 2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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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로스바드는 사막의 오아시스 소유자를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필수적인 재화 서비스의 제공자로 간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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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절박성이라는 감정적 문제를 배제하고) 어찌 되었든 아마 소유자가 물을 주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며칠 안에 죽을 것이라고 생각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것을 위의 사례들과 형식적으로 같은 상황(A가 B의 생사여탈 -돈이냐 목숨이냐-을 쥐고 거래한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애초에 소유한 사람이 없었다면 사람들이 오아시스를 그냥 사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결국 위의 (igor Wysocki가 이야기한) 형식적 문제와 동일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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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강제, 협박, 살인일까요? 아니면 자유, 자발적인 것 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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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은 뭘까?
지금까지 권리와 연결된 자유 개념에 대한 사례들을 이야기 해보았습니다. 이렇듯 권리와 연결된 자유 개념이라는 것을 생각해보게 되면 문제가 아주 복잡해 지게됩니다. 여기서 쟁점이 되는 게 실제로 '자유' 인 걸 까요? 보다 규범적인 '정의', '윤리' 같은 문제일까요? 복잡하게 얽혀 있어 이해하기가 어려워 집니다.
짐머만(Zimmerman)은 이렇듯 정의의 이론에서 자유의 개념이 권리와 도덕성에 의존한다면 실질적으로 남는 것은 자유롭냐 부자유롭냐 자체가 아니라 누가 실제로 정당성을 쥐고 있는가의 권력의 문제일 뿐 아무런 논의의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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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 경제 시스템이 도덕적으로 수용 가능하다고 주장할 준비가 되어 있고,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생산 관계의 강제성에 대한 논쟁은 정의나 효용이 아니라 자유에 대한 논쟁이라는 인상을 받아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강압이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개념이라면 이는 단지 겉모습일 뿐이며, 진짜 문제는 그 이전의 옳고 그름에 관한 것일 것입니다. 싸움이 끝나면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가 강압적인지 아닌지를 말할 수 있게 되겠지만, 그 시점에서 누가 신경을 쓸까요? 진짜 문제는 이미 결정된 후일 테니까요.
(Zimmerman, D. 1981. p.12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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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실 저는 일반적으로 자유지상주의 '자유', '정의' 개념을 얼핏 들었을 때 아주 직관적이고 그럴듯하다고 해도 우리가 거기에 정당한 근거로 반대하고 다르게 생각 할 수 있지만, 현실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생각해 보았을 때 실질적으로 생각해볼만한 마땅한 대안이 있는 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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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면서 보통 자유를 정당한 권리와 재산 내의 행위로 생각하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는 듯한데, 그에 대항할 마땅히 괜찮은 다른 자유 개념이 있는지 모르겠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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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Jonathan Wolff, 1996, < Robert Nozick >
G. A. Cohen, 1995. < Self-ownership, Freedom and Equality. >
Igor Wysocki, 2021, < An Austro-Libertarian Theory of Voluntariness: A Critique >
Robert Nozick, 1974, < Anarchy, Staste, Utopia >
Murray Rothbard, 1982, < The Ethics of Liberty >
Iain Mckay, 2012, <Anarchist FAQ: Volume 2>
구영모, 2000 <Nozick의 소유권리론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