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스토크라시

에피토크라시라는 용어는 유권자의 무지(무능함)가 적절한 결과를 산출하는 데 위협이 된다는 점에 전적으로 초점을 맞춘 이론 집단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된다. 대표적인 예시가 브레넌의 Against Democracy이다. 이 책은 총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1) 시민들의 무능함을 기록한 연구들을 제시 (2) 모든 체제는 그것이 좋은 혹은 최소한 유능한 결과를 낳는지 아닌지에 따라, 즉 도구적인 근거만으로 일관되게 옹호되거나 비판될 수 있다는 철학적 주장.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에 관한 절차주의적 옹호는 모두 비판받는다. (3) 동등한 투표권은 부정하지만 모든 사람은 무능하고 비합리적인 사람에게 통치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자유주의적 권리 주장.

브레넌은 플라톤처럼 의학을 예시로 들며 에피스토크라시를 옹호한다: “대부분의 나의 동료 시민은 정치에 관해 무능하고, 무지하며, 비합리적이며, 도덕적으로 비이성적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나에 대한 정치적 권력을 갖고 있다. 나는 그것을 용납해선 안 된다. 나를 무능한 외과 전문의에게 집도 받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를 무능한 유권자들의 의사 결정에 복종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옳지 않아 보인다. (Brennan 2016: 142)”

브레넌의 주장은 한 마디로 모든 시민은 유능한 의사 결정자에게 통치받을 추정적 권리를 지니는데, 현실적으로 보편 선거권은 대개 이 추정적 권리를 위반하기에, 현재 민주주의는 그만큼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는 에피스토크라시 지지자들은 정치 체계 내에서 발휘되는 무능한 시민들의 권력을 제한하는 방안을 제안한다. 대표적으로, 브레넌은 역량 시험을, 물리건은 복수 투표 제도를, 로페즈구에라는 투표권을 추첨제로 부여하고 부여된 사람들은 역량을 함양할 훈련을 거쳐야 한다는 선거권 부여 추첨제를 제안한다.

에피스토크라시는 굉장히 논쟁적인 주장이라, 많은 비판을 받게 됐다. 비판은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1) 에피스토크라시는 차별과 불의에 반대하며, 인식론적 역량을 평가할 기준을 인종이나 소득에 따른 구별과 같은 정치적 권력과 분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인구학적 연구에 따르면 그와 같은 분리는 불가능하다. 이를 인구학적 반론이라고 부른다.

(2) 에피스토크라시는 유권자들이 개별적으로 그리고 평균적으로 무능할 때, 당연히 유권자 집단은 수준 이하의 정책과 대표자들을 선택할 것이라는 가정에 기반한다. 하지만 많은 연구에 따르면 집단적 역학이 개인의 무능을 완화할 수 있다. 이는 곧 개인적 무능함을 집단적 무능함으로 번역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의미이다.
게다가 에피스토크라시 지지자들은 정보가 부족한 유권자들로부터 곧바로 나쁜 정책의 존재를 추론하는데, 개인적 의견이 어떻게 정책으로 전환되는지 정확히 설명하지 않으며, 그러한 사례를 지적하지 않는다.

※ Condorcet Jury Theorem이나 Diversity Trumps Ability Theorem에 기반한 연구가 에피스토크라시의 반례가 될 수 있다.

(3) 역량 시험을 제안하는 에피스토크라시들은 역량이 시험을 통해 쉽게 평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지적 역량을 평가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게다가 그러한 시험이 어떤 형태일지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평가할지는 전혀 명확하지 않다.

※ 수능을 잘 친다고 하여 지적 역량이 뛰어나다고 단언하기 쉽지 않은 것과 같다. 우리는 어떤 방식의 대입이 최선의 것인지도 모른다.

(4) 에피스토크라시가 근거하고 있는 도구주의적 관점 자체를 민주적 절차—특히 1인 1표—의 내재적 가치를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삼는 자들은 비판한다.

에피스토크라시에 대한 옹호보다 반론이 더 많을 뿐만 아니라, 에피스토크라시에 대한 일종의 집단 공격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에피스토크라시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민주주의의 많은 특징들에 대해 회의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의의가 있다. 한때 정치철학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주장들이 권위 있는 학술지와 대학 출판사에서 출간되고 있다. 에피스토크라시와 에피스토크라시보다 더 급진적인 메리토크라시나 로토크라시의 등장은 민주주의 이론이 새 시대를 맞이했음을 보이는 징표다.


몇몇 선생님이 올빼미에 에피스토크라시와 브레넌에 관한 글을 쓰셨습니다.

4개의 좋아요

오랜만에 읽으니 반가운 주제네요!

(2)에 대해서는 제 추정입니다만: 유권자들이 개별적 및 평균적으로 무능한 상태에서, 이들이 정보마저 부족하게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나쁜 정책을 "나쁜 정책인 줄 모르고" 해당 정책에 찬성할 것이다.

예시: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서 최근 COVID-19 때의 재난지원금 (그들은 이 지원금이 "정부의 호의"이고 "민생안정에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하나, 실상 추경을 통하여 지원금을 주는 방식이다. 그럼에도 개별적 및 평균적으로 무능하고 정보가 부족한 통상의 [현재의] 유권자는 미래에 자신들이 세금으로 충당하여야 하는 것을 고려하지 못함)

  • 다만 상기 예시는 "유권자가 선택한 정책"이라 보기 어려움 (정부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를 선택한 것이 유권자임을 고려하면 완전히 책임 밖이라고 보기 어려운 듯)

예시 2: 어떠한 사회적 이슈가 발생하였을 때, 그 이슈로부터 "그것을 금지/제한/제약/처벌/etc. 하자"는 범국민적 또는 사회적 목소리가 나오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 해당 법령을 통과시킬 것을 다수의 목소리로 압박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앞서 언급된 법령이 실제로 시행된 이후에는 불편함을 포함한 불만을 사후 제기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사후 제기는 대체로 인용되지 않아서, 법령은 거의 또는 전혀 수정되지 않는다).

이들 경우에서, 고등학생 이하 등 비유권자를 제외하고, 유권자들은 이러저러한 "나쁜" 정책, "잘못된" 정책, "기괴한" 정책, "탁상공론인" 정책에 동조하며, 이 다수의 목소리에 막상 법령을 통과시킨 뒤에는, 실제 법령의 개정으로는 거의 또는 전혀 이어지지 않는 불만을 표하거나, 이 불만을 표하는 유권자를 (인격적 등으로) 공격한다.

(쓰고 보니 말씀하신 내용과 거리가 많...이 있어 보이네요. Digress하는 것 같은 댓글 죄송합니다 :sob:)

(3)에 대해서는 저 역시 동의합니다. 이게 제일 큰 문제라고도 생각합니다. 역량을 어떤 시험으로 볼 것이냐? 설령 그게 이론적으로 확립된다고 해도, 민감도와 특이도 면을 어떻게 고려할 것이냐? 학제간 연구(사회학+심리학+정치학+etc)를 진행하더라도, 결국 이론이 현실에 완전히 부합하기란 어려운 면이 있으니, "무슨" 역량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난제로 보여요.

2개의 좋아요

언급하신 사례들을 에피스토크라시에 대한 비판 (2)에 반박 예시로 이해하면 될까요? 에피스토크라시 비판의 핵심은

"번역"에 있는데, 에피스토크라시는 '무능한 개인의 합산은 곧 집단적 무능함이다'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가정을 하고 있다는거죠. 언급하신 사례처럼 등식이 성립했던 경우는 많을 수도 있는데, 또 꼭 그렇지도 않다는거죠.

저도 실증 연구하는 사람은 아니라서 어떤 역량을 어떤 시험으로 판단할 수 있을지 잘 떠오르지는 않아요. 그나마 생각나는건 아마티아 센이 역량 접근법을 논할 때 언급한 몇몇 요소를 역량을 판단할 기준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긴해요. 정치철학, 정치학, 그리고 교육학 등 많은 분야에서 많은 학자들의 논의를 거친 것이기도 하니까 가능한 선택지 중의 하나이지 않을까 싶네요.

다만 어찌저찌 중요한 역량을 선정했다고 한들, 역량을 평가할 시험은 아예 적절한 예시도 떠오르지 않네요. 유교주의 전통에 있는 정치철학이나 정치학 논의는 과거 시험의 핵심적인 측면들을 현대적으로 발전시키는 것도 같던데, 저도 그 쪽 분야는 잘 몰라서..

2개의 좋아요

(1) 네, 맞습니다. 브레넌이나 다른 에피스토크라시를 옹호하는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저는 이 "등식 성립 사례"를 최소화하는 방안이 에피스토크라시가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입니다.

막연한 기대이기도 합니다. 만약 에피스토크라시가 아닌 다른 형태로서, 이 성립 사례의 수를 최소화할 방안이 있다면, "어떤 형태인지에 따라" (에피스토크라시 대신) 제가 그것을 더 선호하고, 이론적으로 옹호하려 할 것 같습니다.

예컨대 등식 성립 사례의 수를 낮추기 위해 "추첨"을 도입하자는 이론에 대해, 저는 그것이 가능할지, 즉 추첨으로 유권자를 선정하는 것이 적절히 사례의 수를 낮출지 의문입니다.

반면, 에피스토크라시는 "적절한 능력"을 갖춘 사람만을 유권자로 제한하므로, 사례의 수를 유의미하게 낮출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말씀대로 (2) ... 대체 어떻게 그 "적절한 능력"을 평가할 것인지...는 오리무중입니다 ㅋㅋ 그 기준을 정하더라도, 그 정한 기준이 자의적이지 않은가? 그 기준이 얼마나 "유권자로서의 능력"을 평가하는 데 유의미한가? 기타 등등의 문제가 떠오르네요.

2개의 좋아요

아마 Lottocracy를 염두에 두시는 것 같은데, 제가 아직 로토크라시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입장을 표명하는 것은 부적절한 것 같네요. Lottocracy를 다루는 대표적인 학자인 lafont의 글이 전반적으로 좀 어렵더라구요. :joy:

다만 저는 (1) 문제를 해결하려는 행위자들이 취하는 접근법과 해석이 다양할 경우, 집단적 문제 해결 능력이 탁월해진다 (2) 민주주의는 인식적 다양성을 보장한다 (3) 그래서 민주주의는 인식론적으로 옹호될 수 있는 절차이다라는 Epistemic democracy의 주장이 에피스토크라시보다 더 그럴듯하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1)은 수학적으로 입증된 것이기도 하고요. 이런 이유로 저는, 비록 제가

의 일원일 수도 있긴 하지만, 굳이 Epistemic democracy가 아니라 에피스토크라시를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저는 Epistemic democracy 옹호자라서, 요즘 몇 차례 올빼미에 올린 open-mindedness와 니체를, 나아가Epistemic democracy를 연결하는 논문을 쓰고 있기도 하구요. :sweat_smile:

2개의 좋아요

저는 에피스토크라시에 대해 반대하고 싶군요. 일반 민중은 정치가보다 똑똑하지요. 유권자가 무식다는 가정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특히 선거 기간이나 청문회 기간에 터져 나오는 추문을 보면 정치가가 낫다라는 주장을 하기 어렵지요.
떼묻은 검사가 피해자를 조사사는 것과 같습니다. 죄를 짓기 쉽기 때문에 무식한 검사도 피해자를 조사할 수 있고 자기 이익을 챙기는 정치가가 많기 때문에 좀 미흡한 유권자가 투표해도 됩니다. 투표 상황에서는 유권자가 정치인보다 똑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