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 대한 본질론

나는 전 글에서 "신과의 사랑 바깥에서 파악된 개념들을 가지고 신을 판단하고자 하는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라는 구절을 적었다. 이에 대해 조금 설명을 더 하고자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문제는 기초적 개념이 무엇인지에 닿아있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론에서 말하는 세 위격이 공유하는 "본질"은 엄밀히 철학적 개념이며, 더 이상 해명하기 어려운 기초적 개념이다.
교부들은 삼위일체론을 방어하기 위해 본질이란 개념을 "신앙체계" 안으로 가져왔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야 말로 "신과의 사랑 바깥에서 파악된 개념들을 가지고 신을 판단하고자 하는 시도" 라고 생각한다.

성서에 나타난 신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신이 우리를 사랑한다면 왜 논리적 명제를 가지고 논증을 펼치지 않고, 조직신학을 주시지 않는 것인가. 철학과 성서에 나타난 신은 무엇이 기초적인지 전혀 공유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이지 않는다.

왜 인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아퀴나스는 신과의 조우후에 자기가 이제까지 쓴 것이 지푸라기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철학은 신앙과 애초에 시작점이 다르니 지식을 쌓으면 쌓을수록 신으로부터 멀어질 수 밖에 없다. 신이 눈을 열어주지 않으면 기초적 개념부터 알 수 없으니 어린 아이들보다도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지금도 철학을 따라가다 보면 "본질" 이라는 단어 뿐만 아니라, 생명, 죽음, 의, 죄, 등 중요한 개념들은 전부 철학 혹은 인본주의의 렌즈로 보게 되어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다보면 해석이 반드시 엉키게 되어있다. 아래는 그것에 대한 한 예시이다.

성경에서는 사람이 죄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는 표현이 나온다. 다시 말하면 죄가 주인이고 사람은 노예이다. 즉 사람이 주체적으로 죄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바로 기존의 문법체계를 방어하려는 반발이 나온다. 그럼 죄가 무슨 인격적 존재라는 말인가. 죄가 의지를 가지고 사람을 부려먹는다는 것이 상식적으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죄가 문장의 주어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실제로 활동하는 영적 존재를 말한다. 이럴 때 사탄과 죄는 같은 말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핏값으로 죄라는 주인의 노예신분으로 있던 자들을 사서 소유자를 변경시켰다. 죄의 종에서 의의 종이 된 것이다. 여기서도 하느님과 의는 같은 말이다. 세상 언어문법에서는 죄나 의나 인격적 존재가 아닌 추상개념이거나 성질 혹은 행위를 나타낼 뿐이다. 이러한 문법 속에서 성경을 읽으면 엉터리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들릴 수 밖에 없다. 하느님 말씀을 읽고 그 뜻을 알아듣는 것조차 선택된 자들에게만 허가된 것이다. 이러한 이해에서는 당연히 세상의 언어문법에 통달하고 숙달된 것이 오히려 장애가 된다. 하느님이 자기 뜻을 도리어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시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렇게 가다보면 물론 다시 철학은 여기에 대해 "기독교 신비주의"라는 정의를 가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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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철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려는 이들의 학술 커뮤니티입니다. 어떤 주장을 하더라도, 해당 학문영역에 대한 논의를 벗어난 채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의 생각에만 의존하여 주장을 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연구나 학술적 논의들을 근거로 삼아 주장을 개진해주시기를 권합니다. 예를 들어,

여기서 '본질' 개념을 정확히 어떤 의미로 쓰고 계신지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본질 개념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헤겔 등을 거쳐 킷 파인 같은 현대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다양하게 정의되고 논의되어온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전혀 "더 이상 해명하기 어려운 기초적 개념"이 아닙니다.) 철학사에서 제시되어 온 수많은 버전의 본질개념들 중 정확히 어떤 개념을 염두에 두고 계신지 설명하시기를 권합니다.

'교부'라는 이름으로 정확히 어떤 교부철학자를 지칭하시는 것인지도 불분명합니다. 테르툴리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 보에티우스 등 여러 교부들이 다양한 주장을 했습니다. 정확히 어떤 교부가 어떤 맥락에서 삼위일체론을 옹호했으며, 어떤 종류의 본질 개념을 기독교 교리에 들여왔다는 것인지 설명하시기를 권합니다.

또 이미 동일한 주제로 올리신 글들에 진지하게 답변하신 토론자들이 있습니다.

대화상대자분들이 제시해주신 논점들을 잘 숙고하셔서 이 답변들을 논증적으로 비판하거나 옹호하시면서 생각을 개진해주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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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야기하는 바는, 본질 뿐만 아니라 생명, 의 등 모든 개념 자체가 철학적으로 해석하면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다는 것 입니다. 본질에 관한 이야기는 필수가 아닙니다.

이 claim은 여러 claim이 합쳐진 것으로 보이고, 각 claim들 역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1. 본질이란 개념이 철학적으로 해석하면 되죽박죽이 되어버린다.

"뒤죽박죽이 된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말인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본질은 철학적으로 분석이 불가능하다' 라는 주장을 하시는 것이라면 굉장히 ambitious한 주장을 하는 것이고, 그 주장 자체만으로 논문 몇 편은 나올 것입니다. 근데 이 포스팅에서 이 주장에 대한 논증이 하나도 제시되지 않았군요. (그리고 저는 본질이 철학적으로 분석이 불가능하다라고 주장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네요. 본질적 성질이 필연적 성질로 설명이 된다라는 주장은 있지만, 분석이 불가능하다라고 하진 않지요.)

  1. 생명이란 개념은 철학적으로 분석할 수 없다.

저는 생명이란 개념이 철학적으로 분석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를 본 적이 없네요. 그나마 Michael Thompson이 비슷한 주장을 하지만, 톰슨의 주장은 생명이란 개념에 대한 필요충분조건이 제시될 수 없다라는 것이지, 분석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하진 않습니다.

  1. 모든 개념이 철학적으로 분석이 불가능하다.

이건 뭔가 쇼펜하우어나 니체와 같은 생각을 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야 쇼펜하우어나 니체를 잘 몰라서 드릴 말씀이 많이 없지만, 적어도 논증이 필요하다는 것은 볼 수 있겠네요. 그리고 이 포스팅에서 이에 대한 논증은 보이질 않습니다.

논증은 전제-결론 형태로 옵니다. 단순하게 "S는 P다" 라고 하는 것은 논증이 아닙니다. 그리고 @chanchu1352 님의 글에서는 논증을 찾기 힘드네요. 1번, 2번, 3번 모두 논증을 필요로 하는 claim인데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만일 제 댓글에 답글을 달고 싶으시다면, 전제와 결론의 형태로 제시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물론 전제1, 전제2 와 같은 형태를 꼭 따를 필요는 없지만 (하지만 그렇다면 굉장히 이해가 쉽겠지요), 적어도 전제-결론 형태로 재구성할 수 있게 글을 써주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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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 나온 이야기를 철학의 렌즈로 보면, 본래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게 되고 뒤죽 박죽이 된다는 말이죠. 어려운 말이 아닌데 왜 자꾸 빗겨나가는지 모르겠네요.

@yhk9297

그래서 논증이 어디있나요?

또,

이 두 개는 엄연히 다른 말 아닌가요? '모든 개념 자체가 철학적으로 해석하면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와 '성서에 나온 이야기를 철학의 렌즈로 보면 뒤죽박죽이 된다' 가 같다면 마치 성서에 나온 얘기가 모든 개념이라는 말과 같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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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본질이란 개념이 "신앙"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혼란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말씀하신적이 없기 때문에요. 그렇기 때문에 삼위일체론이 오히려 몰이해를 일으켰다구요. 생명 또한 예수가 말한 생명은 생물학이 말하는 생명이 아니구요. 의나 죄 또한 세상이 말하는 그것들이 아니라는 거죠. 더 이상 쉽게 쓸수 없기 때문에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chanchu1352 님의 단상과는 별개로 후술되어있는 비판들 보며 글 남깁니다.

1. 표준화라는 말 뒤에 숨지 마세요.

이 커뮤니티의 성립 목적인 철학 토론의 표준화를 검토할때, ‘표준화’라는 개념 자체가 지나치게 추상적입니다. 표준화가 단순한 형식적 가이드라인을 의미하는 건지, 특정한 논증 방식과 개념적 틀을 강제하는 건지, 아니면 토론 문화 자체를 정리하려는 시도인지 불분명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님은 이 ‘표준화’를 근거로 삼아 논증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일반적인 용어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떤 기준을 정립하고 싶은지 밝혀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막연한 권고가 아니라, 님이 원하는 논증 방식이 어떤 근거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 논증해 주세요.

2. 권고의 형식을 빌려 규범을 강제하려면, 그 근거를 명확히 하세요.

님의 댓글을 보면, “구체적인 연구나 학술적 논의를 근거로 삼아 주장을 개진해야 한다”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말하는 ‘연구’나 ‘학술적 논의’가 어떤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지 먼저 밝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철학적 논의에서 ‘학술적’이라는 말은 학계에서 출판된 논문이나 철학사적 전통을 의미할 수도 있고, 그보다는 논증의 정합성과 타당성을 강조하는 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님은 단순히 “자기 생각에만 의존하지 말고 학술적 논의를 근거로 삼으라”는 일반적 규범을 제시할 뿐, 그것이 논의의 어떤 측면에서 필수적인지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결국, 상대방이 자신의 논의 방식을 정당화해야 하는 부담을 지우면서도, 정작 자신이 부과하려는 규범의 정당성은 검토하지 않는 방식입니다. 이게 정말 생산적인 태도인가요?

3. ‘논증을 요구한다’는 태도가 면책권이 될 수 없습니다.

님의 비판 방식이 철학적 논의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는지 생각해보셨나요? 님은 상대방이 다루는 개념들(예: 본질, 교부)을 더 구체적으로 명확히 하라고 요구하면서, 정작 본인의 입장은 그 자체로 정당화된 전제처럼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1. “본질 개념은 수없이 다양하게 정의되고 논의되어 왔다.” → 맞는 말이지만, 그것이 곧바로 “본질은 해명하기 어려운 기초적 개념이 아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헤겔, 킷 파인의 본질 개념이 다르다는 사실이, 본질 개념이 기초적이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근거가 되나요? 오히려, 다양한 정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본질 개념이 철학적으로 기본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증거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2. “정확히 어떤 교부를 말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 님의 논점이 정당하려면, 논의의 문맥상 특정 교부를 지정하지 않으면 의미가 달라지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점을 먼저 입증해야 합니다. 하지만 님은 그저 “여러 교부가 있다”는 일반적 사실만을 들어, 특정 교부를 언급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단정짓고 있습니다.

즉, 님이 요구하는 ‘논증’이 실제로 논의를 심화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해석을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결론: 논증을 요구할 거면, 본인도 논증하세요.

개인적으로 철학적 논의에서 논증화와 명제형식을 구체화하고, 의미를 일반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체계화하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 요구 자체가 논거 없이 행사되면 단순한 권위적 태도일 뿐입니다.

님이 진정으로 ‘철학적 토론의 표준화’를 원한다면, 그 표준이 무엇인지, 왜 그런 방식이 필요하며, 그것이 철학적 논의를 어떻게 개선하는지 먼저 논증하세요. 단순히 “논증하라”는 요구만 던지는 것은 철학적 태도가 아니라, 토론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수사적 기법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논증을 요구할 거면 본인도 제대로 논증하세요. 아직 사유를 전개하는 과정이 미숙한 분들에게도 아무런 맥락없이 교정을 요구하는 글을 쓰시기 전에, 본인이 제시하려는 규범이 얼마나 강한 입증부담을 견뎌내야하는지 숙고해보시길 바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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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이 필요 이상으로 과열될 것 같아서 우려스럽습니다. 제가 이 포럼의 직접적인 운영자는 아니지만, 운영자이신 wittgenstein님이 포럼을 만들기 전에 겪으셨던 일을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라 저 <목적과 규칙>에 대한 배경 설명을 간략하게 드립니다.

본래 서강올빼미 이전에도 wittgenstein님을 중심으로 몇몇 대학원생들이 만들어서 1년 정도 운영하던 철학 포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포럼은 글쓰기에 대한 통제 없이 너무나 자유롭게 운영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온갖 신변잡기적인 글들이 엉망진창으로 올라오다가 결국 포럼 자체가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회원들 내부의 분쟁을 규제할 틀도 전혀 없어서 갈등도 대단히 심하였고요.

그러다 보니 이 포럼을 개설하면서는 최소한 학부/대학원생 철학 전공자들을 중심으로 글에 대한 일정 수준의 통제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운영의 원칙을 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이트 초창기에는 회원 등급을 엄격하게 나누어서,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분들이 마음대로 글을 쓰지 못하도록 하기도 하였습니다.

현재에는 어느 정도 포럼이 자정 작용을 유지할 만큼 전공자분들의 인원이 쌓였다 보니 이전과 같은 강한 통제는 하고 있지 않지만, 포럼에 지나치게 자유로운 글들이 자주 올라오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운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인원들의 입장에서는 걱정이 큽니다. 이미 한 번 호된 일을 당한 적이 있다 보니, 이 사이트만큼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물론, 이 사이트의 회원 대부분은 일개 학부/대학원생들일 뿐이지만, 적어도 '대학'이라는 공공 기관에서 철학을 다년간 전공한 사람들이라면 명시적으로든지 암묵적으로든지 공유하고 있을 글쓰기의 원칙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로서는 이 사이트 내의 많은 전공자들이 글의 기본 형식이나 기본 내용에 대해 문제 삼는다면, 그 지적은 (비록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분명히 전공자들 내부에서 꽤 널리 수긍될 만한 이유에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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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누군가 제게 와서 "칸트는 틀렸어!" 라고 한다면 저는 당연히 논증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게 철학이니깐요. 반대로 제가 "칸트는 틀렸어!" 라고 말하면 제가 그에 대한 논증을 제시해야겠죠. 근데 여기서 "칸트는 틀렸어. 근데 나에게 논증을 요구하지마. 왜냐면 논증을 요구할 거면 당신도 논증을 제시해야하거든." 이라고 한다면, 그건 적절한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하네요. 제가 제대로 된 논증을 제시한 후에서야 상대방에게 논증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Burden of Proof라는 것이 있습니다. 논쟁을 할 때 누가 논증을 해야되는지에 대한 것이지요. 만일 제가 학계의 정설에 대해서 반박을 한다면, 당연하게도 burden of proof는 제게 있습니다. 제가 학계의 정설에 대해서 반박을 하면서 "나에게 논증을 요구하기 전에 당신들이 논증을 먼저 제시해봐" 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때 논증은 제가 짊어져야하는 짐인 것이지요. 이 상황에서도 이야기는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제가 위해서 보였듯이,

라는 말은 일반적인 말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burden of proof 는 글쓴이님에게 가지요. 물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heterodox한 주장을 하려면 그만큼의 수고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또,

글쓴이분이 본인을 미숙하다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무런 맥락없이 교정을 요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 소스들을 주면서 burden of proof가 글쓴이분에게 있다고 말을 한 것이지요.

어디까지가 제 댓글에 대한 답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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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제시하신 세 가지 논지에 답변하겠습니다.

1. 제가 위 답글에서 “구체적인 연구나 학술적 논의들을 근거로 삼아 주장을 개진해”달라고 말씀드렸을 때, 저는 그 예시로서 본문에서 논의하는 ‘본질’과 ‘교부’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전거를 제시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제 권고는 당연히도 해당 주제에 대한 (책, 논문, 강의 등의) 선행 연구 자료들을 뒷받침으로 제시해달라는 권고입니다. 그리고 다른 게 아니라 이처럼 이미 철학이라는 영역 내에서 통용되고 있는 선행 연구들로부터 출발하는 일이 표준화입니다. 해당 부분은 @anon49593252 님께서 이미 인용하신 게시글에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봤을 때 ‘표준화’는 단순히 추상적인 용어가 아니라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는 용어로 보입니다.

2. @anon49593252 님께서 인용하신 게시글로 미루어 보아 알 수 있지만, “학술적 논의”는 “학계 내에서 인정되는 학술 자료”, 즉 선행 연구를 뜻합니다. 그런데 전문적인 독자들을 겨냥하여 집필된 연구 자료를 학계 밖에 있는 비전공자로 하여금 읽고 소화해서 근거로 제시하라고 요구한다면 이는 지나친 요구일 것입니다. 이런 자료들에 접근하기 어려운 분들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연구 자료에 국한되지 않고, 철학을 전공하지 않는 일반 독자들을 대상으로 집필된 해설서, 입문서, 혹은 넓게는 강의 등을 전거로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 선행하는 학술 자료교양 자료가 어떤 의미이며 어떤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지는 굳이 불필요하게 덧붙이지 않아도 명확해 보입니다.

3. @yhk9297 님께서 잘 지적해주셨지만, 입증 책임은 주장을 제시하는 이에게 지워집니다. 누군가 “교부철학자들은 본질 개념을 기독교 내에 들여왔다”라고 주장한다면, 그 근거를 제시하는 일은 그러한 주장을 제시한 이의 부담입니다. 이 책임에는 이 주장에 사용된 ‘교부철학자들’이나 ‘본질’이라는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해주는 일도 이 책임에 당연히 포함이 됩니다. 저는 주장을 제시하는 이에게 그러한 책임이 있다는 점을 두 가지 예시를 들어 지적했을 뿐입니다. @anon49593252 님의 말씀은 저에게 일종의 입증 책임이 있다는 말씀처럼 들리는데, 누군가에게 입증 책임이 있다고 말하기 위해 입증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저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어떤 주장의 근거를 제시해달라거나 거기에 사용된 용어들의 의미를 설명해달라는 요구가 해당 주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은 굳이 상술하지 않아도 명확해 보입니다. 주장을 제시한 이가 그러한 요구들에 따라 근거를 보충하거나 자신이 차용한 용어들의 애매성 혹은 모호성을 해소한다면 그의 주장은 그만큼 추가적인 근거들을 갖게 될 것이며 용어상의 오해들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서 @anon49593252 님께서 제 요구가 “실제로 논의를 심화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해석을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혐의를 제게 제시하시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만일 어떤 학자, 학파가 집필한 문헌에서 그러한 근거를 찾아 제시하기를 요구했다면, 그런 요구는 암시적으로 특정한 입장을 강요하는 요구이겠지만, 제 답글에는 그와 같은 요구가 전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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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 논점에서 거론하신 두 가지 예시들에 대해 사소하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1. “본질 개념은 더 이상 해명하기 어려운 기초적 개념이다.” 이 주장이 참이려면, 다른 개념들을 통해 본질 개념을 설명하는 일이 불가능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본질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고, 그러한 설명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본질은 하나의 대상을 바로 그 대상이게끔 하는 그러한 속성이다”라는 고전적인 정의가 그 예시입니다. 따라서 본질 개념은 더 이상 해명하기 어려운 기초적 개념이 아닙니다.

해서 저는

가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개념에 대해 다양한 정의 및 논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어떻게 그 개념의 자명성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는지 이야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 역사적으로 다양한 교부들이 존재했다는 말은 이들이 각각 제시한 다양한 신학적 주장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교부를 말하고 있는지 특정하지 않고 단순히 모든 교부들을 뭉뚱그려 지칭한다면, 이는 당연히도 교부들이 실제로 주장하지 않은 것을 비판하는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이에 더해 교부들이 활동했던 시기는 기독교의 교리 체계가 확립되기 이전이었다는 점, 교부들의 가르침 중 일부(예컨대 만유구원론)는 종종 후대에 이단으로 간주되고는 한다는 점을 정황적인 증거로 예시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제가 무엇을 단정짓고 있다는 것인지, 이 이상의 어떤 입증이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이 있다면, 추가적으로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반적으로 @anon49593252 님은 제가 아무런 근거 없이 무조건적으로 특정한 방식의 글쓰기를 강제한다고 주장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위에서 제시된 주장의 모호성을 해명할 구체적인 전거를 요구했을 뿐이고, 이를 요구하기 위해 저에게 무언가 특정한 입증 책임이 발생한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anon49593252 님께서 제시하시는

라는 요구, 즉 (1) 표준이 무엇인지, (2) 왜 그런 방식이 필요한지, (3) 그것이 철학적 논의를 어떻게 개선하는지 논증하라는 요구는 앞서의 답글을 통해 상당 부분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철학적 토론의 표준화는 (1) 철학 영역 내에서 앞서 제시된 자료들로부터 출발하는 데에서 이루어지며, 이는 (3) 주장에서 사용된 개념들을 명확히 하고 그에 대한 공신력 있는 근거를 보충한다는 점에서 철학적 논의를 개선합니다. 마지막으로 (2)에 대한 논증만이 남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미 @anon49593252 님께서 인용하신 구절로 갈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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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요구를 할 논거는 다른 분들이 충분히 제시한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제가 다른 논의에서도 여러 번 볼 수 있었던 @TheNewHegel 님의 다음 답변은 '권위에의 호소'로 볼 여지가 여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답변의 내용은 서강올빼미 이용자가 자신보다 권위가 더 많은 학자의 연구를 포함해 주장을 펼쳐야 하는 것으로 이해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 답변에 따르면, 말뜻을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작성했으나, 권위 있는 다른 학자의 연구나 논의를 전혀 언급하지 않은 논증은 서강올빼미라는 철학 커뮤니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이는 조금 지나친 주장입니다.

매우 간단한 보기를 하나 들게요. "'푸른 가재'는 '외골격이 있는 푸른 가재'와 똑같다. 모든 가재는 외골격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논증은 다른 학자의 연구나 논의를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 논증을 제시한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의 생각에만 의존해 그런 논증을 펼칠 수 있어요. 하지만 형식 논리학을 배운 사람은 학술적 권위가 거의 없더라도 얼마든지 위 논증을 형식적으로 재서술해서 검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논증은 서강올빼미에 올릴 만합니다.

일단 첫번째로 말하고 싶은건, 전 지금 철학을 전개하고 있는게 아니란 겁니다. 본질이란 개념이 철학적으로 더 분석 가능한지 아닌지는 제 관심 밖입니다. 그냥 기초적 개념이라고 쓴 부분을 전부 삭제해도 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 본질이 뭔지 철학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도 없고, 오히려 신을 철학적 렌즈로만 보면 신을 아는것에 방해가 된다는 겁니다.

생명 또한 예수가 말한 생명은 '죽어도 살겠고' 라는 구절에서 나오듯, 우리가 일상적으로 혹은 과학/철학적으로 이해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전 지금 무언가를 논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서의 개념은 철학적으로 논증될 수 없음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성서에 쓰여진 단어를 철학적으로 분석하면 뒤죽박죽이 된다는게 이 뜻입니다.

전 논증이 아니라 해체를 하고 있습니다.

@TheNewHegel
@yhk9297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본인이 인정하듯이 본문은 철학이 아닌 것이 분명하니 철학 커뮤니티가 아니라 신앙 커뮤니티에 더 맞는 글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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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chanchu1352 님도 자신의 댓글을 통해 "나는 해체를 하고 있다."라는 '주장'을 펼치고 계시는 점은 동의하시죠?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은 그런 주장을 분석하고 반박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전개하는 주장인 신을 아는데에 있어서 철학의 무용론은 누군가에겐 자신의 철학적 신론을 공격하는 것으로 여겨질수도 있겠죠.

네 물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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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전개하는 주장인 신을 아는데에 있어서 철학의 무용론은 누군가에겐 자신의 철학적 신론을 공격하는 것으로 여겨질수도 있겠죠.

네, 저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저는 "철학적 접근으로는 신을 이해할 수 없다."라는 주장은 철학적으로 반박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토론이 논점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주의하면, 그 주장에 대한 철학적 토론을 여기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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