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 글에서 "신과의 사랑 바깥에서 파악된 개념들을 가지고 신을 판단하고자 하는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라는 구절을 적었다. 이에 대해 조금 설명을 더 하고자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문제는 기초적 개념이 무엇인지에 닿아있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론에서 말하는 세 위격이 공유하는 "본질"은 엄밀히 철학적 개념이며, 더 이상 해명하기 어려운 기초적 개념이다.
교부들은 삼위일체론을 방어하기 위해 본질이란 개념을 "신앙체계" 안으로 가져왔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야 말로 "신과의 사랑 바깥에서 파악된 개념들을 가지고 신을 판단하고자 하는 시도" 라고 생각한다.
성서에 나타난 신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신이 우리를 사랑한다면 왜 논리적 명제를 가지고 논증을 펼치지 않고, 조직신학을 주시지 않는 것인가. 철학과 성서에 나타난 신은 무엇이 기초적인지 전혀 공유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이지 않는다.
왜 인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아퀴나스는 신과의 조우후에 자기가 이제까지 쓴 것이 지푸라기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철학은 신앙과 애초에 시작점이 다르니 지식을 쌓으면 쌓을수록 신으로부터 멀어질 수 밖에 없다. 신이 눈을 열어주지 않으면 기초적 개념부터 알 수 없으니 어린 아이들보다도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지금도 철학을 따라가다 보면 "본질" 이라는 단어 뿐만 아니라, 생명, 죽음, 의, 죄, 등 중요한 개념들은 전부 철학 혹은 인본주의의 렌즈로 보게 되어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다보면 해석이 반드시 엉키게 되어있다. 아래는 그것에 대한 한 예시이다.
성경에서는 사람이 죄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는 표현이 나온다. 다시 말하면 죄가 주인이고 사람은 노예이다. 즉 사람이 주체적으로 죄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바로 기존의 문법체계를 방어하려는 반발이 나온다. 그럼 죄가 무슨 인격적 존재라는 말인가. 죄가 의지를 가지고 사람을 부려먹는다는 것이 상식적으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죄가 문장의 주어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실제로 활동하는 영적 존재를 말한다. 이럴 때 사탄과 죄는 같은 말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핏값으로 죄라는 주인의 노예신분으로 있던 자들을 사서 소유자를 변경시켰다. 죄의 종에서 의의 종이 된 것이다. 여기서도 하느님과 의는 같은 말이다. 세상 언어문법에서는 죄나 의나 인격적 존재가 아닌 추상개념이거나 성질 혹은 행위를 나타낼 뿐이다. 이러한 문법 속에서 성경을 읽으면 엉터리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들릴 수 밖에 없다. 하느님 말씀을 읽고 그 뜻을 알아듣는 것조차 선택된 자들에게만 허가된 것이다. 이러한 이해에서는 당연히 세상의 언어문법에 통달하고 숙달된 것이 오히려 장애가 된다. 하느님이 자기 뜻을 도리어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시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렇게 가다보면 물론 다시 철학은 여기에 대해 "기독교 신비주의"라는 정의를 가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