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본성론에 관하여

(1) 불멸 혹은 영생이란 무엇인가?: 유대-기독교의 맥락에서 '죽지 않는다' 혹은 '영생한다'라는 단어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실 필요가 있습니다. 당장 신약성서에서 자주 사용되는 '영생(조에 아이오니오스)'이라는 단어부터가 '올람 하바'라는 히브리어에 대한 번역어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바빌론 이후의 포로 시대를 '올람 하제'라고 불렀고, 그 포로 시대의 끝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시대을 '올람 하바'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바라였던 구원이나 영생이란, 무한한 시간동안 죽음 없이 산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라는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실제로, '조에 아이오니오스'라는 단어도 '시대(아이온)'의 '생명(조에)'라는 의미로, '새로운 시대의 삶'이라는 뉘앙스가 강합니다.

약간 맥락이 다르긴 하지만, 이 점은 신학이 아니라 신화학적으로도 뒷받침될 수 있습니다. 고대 근동의 신화에서는 '죽음과 재생의 신'이라는 모티프가 있습니다. 아카드 신화의 두무지나, 이집트 신화의 오시리스나, 우가릿 신화의 바알은 모두 죽음과 결투를 벌였다가 패배하여 무덤에 묻힌 후에 다시 살아나서 죽음을 무찌릅니다. 고대 근동 신화에서는 이렇듯 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 널리 퍼져 있던 생각이었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신이 죽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신이 죽음을 이겨서 새로운 시대의 왕으로 등극하는 것이 핵심이죠. 적어도 신화학적인 모티프에서 보자면, 고대 근동인들에게는 그리스 형이상학적인 의미에서의 불멸자로서의 신보다도,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는 신의 이미지가 훨씬 더 자연스러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서를 읽을 때 전문 신학자들은 특정한 몇몇 구절에 주목하기보다는, (a) 그 구절이 놓여 있는 텍스트의 맥락과 시대적 맥락을 고려하여 성서신학적 독해를 시도합니다. 그리고 (b) 다양한 성서 구절들을 종합해야 할 때는 조직신학적 원칙을 세워서 무엇을 우선적인 해석의 기준으로 삼을 것인지를 정리하죠. 그리고 그 해석의 기준으로 바르트 이후 조직신학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론'입니다. 즉, 성서신학적으로 보았을 때 성경이 말하는 영생이나 불멸성이 단순히 육체가 죽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하기 어렵고, 조직신학적으로 보았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야말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나타내는 기준이라면, 우리가 미리부터 형이상학적 의미의 불멸성을 전제한 채 유대-기독교의 하나님을 이야기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 왜 삼위일체인가?: 삼위일체론에서 아주 초창기부터 핵심적이었던 주제 중 하나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일종의 동시적 관계였습니다. 아들이 아버지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아버지도 아들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아들을 낳은 사람만 비로소 아버지가 되는 것이니까요. 즉, 예수가 주장한 것처럼, 하나님의 전권이 예수 자신에게 있어서, (a) 예수 바깥에서 단독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도 없고, (b) 예수와 무관하게 단독적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행위도 없다면, 예수와 하나님은 인식론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나 언제나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하나님 없는 예수라든가, 예수 없는 하나님은 없기 때문에, 예수가 단순히 하나님께 종속되는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초창기부터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부활에서 밝혀진 전권요구의 승인을 소급 적용하였습니다. "예수는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되셨다."라는 고백으로부터 출발하여, "예수는 사역의 시작에서 세례를 받을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예수는 수태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예수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라고 나아간 것입니다. 정말로 '아들'인 예수 바깥에 다른 '아버지'가 없다면,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서만 비로소 아버지일 수 있다면, 아들과 아버지는 언제나 함께 존재하여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니까요. 그 결론이 바로, 아들과 아버지가 '위격'에서는 구분되지만 '실체'에서는 구분되지 않는다는 삼위일체 교리인 것입니다.

(3) 삼위일체는 너무 철학적이고 너무 그리스적인 사고인가?: 핵심은, 삼위일체라는 고백이 먼저 전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초기 교회사에서 어느 누구도 "나는 삼위일체라는 가설대로 예수의 이야기를 읽겠다."라고 생각하고서 복음서를 독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이야기를 충실하게 읽으려 했을 때 도달하게 되는 결론을 그 당시 용어들로 정리하였을 때 삼위일체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이 점을 크게 세 가지 면에서 다시 논증할 수도 있습니다.

(a) 우선, 삼위일체 교리 훨씬 이전부터 기독교인들은 예수에게 경배와 찬양을 올렸습니다. 삼위일체교리가 세워지고서 "이제 이 교리에 따라 예수를 경배해야 한다."라고 한 것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경배와 찬양이 먼저 있고서 그 내용들을 정리한 것이 삼위일체입니다. 실제로, 이 점은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를 비판할 때 중요하게 사용했던 논거이기도 합니다. 아주 초창기부터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였고, 그 점은 유대교의 유일신 고백인 쉐마까지도 예수에게 적용되었다는 점에서 (적어도 저에게는) 거의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보입니다. 특별히, 이 점은 초대 교회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주로 영광송이나 기도문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점으로도 입증됩니다. 이미 기독교인들이 오랫동안 부르던 노래들이나 오랫동안 수행하던 기도들이 있고, 그 내용들의 학문의 영역에서는 '삼위일체'라고 정리된 것입니다.

(b) 초기 교부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예수의 시대와 예수의 제자들에게 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신학사에 대해 피상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종종 "교부들은 그리스인들이었으니까, 자기 마음대로 그리스 철학을 끌여들여서 예수를 교리화하였을 거야."라고 손쉽게 단정하지만, 교부학이나 신약학에서 이루어지는 최근 연구들은 교부들이 신약성서의 사고들을 상당히 잘 계승하고 있는 믿을만한 인물들이라는 점을 입증합니다. 오히려, 2000년이 더 지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고대 교부들보다도 신약성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저에게는 다소 순진하게 보입니다. 교부들은 짧게는 예수와 수십 년, 아무리 길게 잡아도 300년밖에 차이나지 않는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이고, 유대인들과 함께 그리스-로마의 문화적 배경을 공유하였고, 그 중 몇몇은 예수의 직계 제자들로부터 승인된 인물들이었던 것이 분명하니까요. 언어적-시대적-지역적으로도 예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저로서는, 제가 그 교부들보다도 예수의 시대를 더 잘 이해한다고 감히 자부하지 못하겠습니다.

(c) 삼위일체가 그리스 철학의 사고에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그리스 철학이 삼위일체를 통해 변혁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릅니다. 동방정교회 신학자인 존 지지울라스(John Zizioulas)라든가 국내의 가톨릭대학교 박승찬 교수님이 잘 지적하는 것처럼, '인격(person)'이라는 개념은 삼위일체 신학을 통해 정립되어 그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철학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이전까지 이 개념은 딱히 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신약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기독교 철학자들이 고민하는 과정에서 이전까지의 그리스 형이상학과는 매우 다른 종류의 존재론이 나타난 것입니다. 특정한 '본질'에 기계적으로 지배받지 않는,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방식으로서, '실존'과 '인격' 같은 개념들이 강조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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