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입장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접근이 가능한 주제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쟁점들을 우선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1) 수난불가능성 공리는 기독교적인가?: "신은 불사의 존재이다."라거나 (혹은 더 일반적으로) "신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라는 논제는 유대-기독교에서 제시되는 주장이라기보다는 그리스 형이상학에서 제시되는 주장입니다. 신학적으로, 이 논제를 '수난불가능성 공리' 혹은 '무감정성 공리(axiom of divine impassibility)'라고 하는데, 현대신학에서는 이 논제 자체가 기독교적이지 않다고 비판하는 흐름들이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유대교 철학자 아브라함 요슈아 헤셸(Abraham Joshua Heschel),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일본의 개신교 신학자 기타모리 가조(北森加藏)이죠. 그분들의 책이 국내에도 상당수 번역되어 있습니다.
(2) 신학적 인식론은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과 기독교 신학이 역사적으로는 서로 결합되었지만, 그 두 신학에서 신에 대한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기준은 꽤나 다릅니다. 단순하게 나누자면, 전자는 '자기자신을 사유하는 지성'이나 '부동의 원동자' 같은 대상들이 왜 논리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신학을 성립시키고자 하지만, 기독교는 (이름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보여주었는지로부터 신학을 성립시키고자 합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해, 그리스 형이상학의 신 개념을 먼저 전제하고서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이야기하려는 것은 일종의 범주 오류입니다. 가령, "신은 불사여야 하는데, 왜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느냐?"라거나 "신은 무소부재해야 하는데, 왜 예수는 2000년 전 유대 땅이라는 한정된 장소에서 살았느냐?" 같은 비판들은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정당하지 않습니다. 그 비판들은 '그리스 형이상학의 신'과 '기독교의 신'을 무비판적으로 뒤섞어버려서, 기독교가 주장하지 않는 신을 기독교의 하나님이라고 허수아비 논증을 펼치고 있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성서라는 텍스트에 대한 학문적 이해가 높아진 오늘날에 올수록, 그 두 가지가 쉽게 뒤섞일 수 없다는 점은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강조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칼 바르트(Karl Barth) 이후의 현대신학은 이 점을 대단히 강조하면서, '그리스 형이상학의 신'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논의가 신학의 출발점에 놓여야 한다고 지적하죠. (바르트의 대표작은 13권으로 된 방대한 『교회교의학』이고, 그 책 전체가 그리스도론을 중심으로 세워진 신학 체계이지만, 너무 방대하고 전문적인 학술서인 만큼 혹시 관심이 있으시다면 아래 책들을 추천드립니다.)
(3) 예수가 '신성'을 가졌다는 교리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오해되는 기독교 교리 중 하나가 예수의 신성 교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기독교인들조차 상당수는 이 교리를 오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 교리는 예수가 그 자체로 하나님과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교리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정통적인 삼위일체 교리에 따르면, 예수와 하나님은 분명히 서로 구분되는 존재입니다. 그 둘 사이의 동일성을 무비판적으로 가정하게 되면 양태론이나 성부 수난설 같은 이단에 빠집니다.
예수의 신성 교리의 핵심적 근거는 예수의 부활 사건에 있습니다. 1세기 유대교에서 부활이란 단순히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당대 유대인들은 세상의 마지막 날이 오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의인이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죠. 현실에서 억울하게 고통받고 죽은 사람까지도 하나님이 심판대에서 다시 살리셔서, (a) 그 사람들이 '의로운' 자들이었다는 것을 입증하실 것이고, (b) 의로운 자들을 위해 정의를 세우는 하나님 자신 역시 '의로운' 분이라는 사실을 입증하실 것이라는 게 유대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은 이런 유대교 종말론의 배경에서 이해될 때 대단히 중요한 함의를 지닙니다. 예수는 유대인들에게는 신성모독자로 여겨졌고, 로마인들에게는 반역자로 여겨져서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하였죠. 하지만 그 예수가 부활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예수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최후의 심판대에서 선언하셨다는 것을 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죄인과 실패자로 규정하였지만, 하나님은 예수가 했던 모든 행동들을 "의롭다"라고 인정하셨다는 것이 드러난 거죠.
문제는, 그 예수가 내세운 핵심적인 가르침 중 하나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전권요구(Vollmachtsanspruch)'였다는 점입니다. 예수는 자기 자신의 말이 모세의 율법보다도 높은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였고, 자기 자신의 말과 행동을 기준으로 해서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사람들이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자신이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아서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강조한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정말로 예수를 부활시켰다고 한다면, 예수의 이 전권요구는 하나님께 실제로 승인을 얻은 셈이 됩니다. 예수의 말과 행동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계시하는 궁극적 기준이 되어버리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는 예수라는 기준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알려질 수 있는 것이 되어버리죠.
그리고 매우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 전권을 가진 예수가 자기 자신을 결코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예수는 자신의 지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엄격하게 제한하면서, 자기는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목표라고 내세웠죠. 그는 명확하게 자신에 대한 신격화를 거부하면서 자기 자신과 아버지를 구분합니다. 자신보다 아버지가 더 크시다(요한복음 14:28)고도 하고,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고도 하였죠(마가복음 10:17). 예수와 하나님을 무비판적으로 동일시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예수의 반대자들이었죠(요한복음 10:33).
그런데 여기서 (신학적 용어로 '페리코레시스'라고 하는) 일종의 순환관계가 발생합니다. 예수는 자신을 철저하게 '아들'로서만 규정하였지만, 바로 그 철저함 때문에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가 됩니다. 그가 정말로 하나님의 전권을 가지고 있는데도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뜻'만 실현하는 존재라면, 그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하나님의 말과 행동이 되기 때문입니다. (a) 하나님은 예수에게 자신의 전권을 맡기고, (b)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삶 전체를 맡김으로써, (c) 그 둘은 서로 완전히 구분되는 존재인 동시에 완전히 일치하는 존재가 되이죠. 예수는 자신을 단지 '아들'일 뿐이라고 강조하였지만, 그 아들은 하나님의 전권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실현시키는 아들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주는 '유일한 아들'이자 '독생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신성과 삼위일체에 대한 이런 해석은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와 미국의 가톨릭 신학자 캐서린 모리 라쿠나(Catherine Mowry LaCugna)에게서 나타납니다. 그들의 책도 국내에 번역되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라쿠나의 책은 절판되어서 구하기 다소 어렵지만 말입니다.)
판넨베르크의 삼위일체론: 아버지와 아들을 중심으로
https://blog.naver.com/1019milk/221438358252
(4) 모순은 정말로 존재하는가?: 그래서 '수난불가능성 공리' 같은 그리스 형이상학의 공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실제 역사적 인물에게서 출발한다면, 여기서는 대단히 놀랍고 역설적인 결론이 도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1세기에 살았던 어느 누구도 예수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고, 심지어 예수의 제자들조차 예수가 '인간'이라고 당연하게 인정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 예수가 정말로 하나님의 전권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철저하게 보여준 존재라면, 그 예수는 하나님 자신과 결코 뗄 수 없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누구이신지가 드러날 수 있고, 예수 바깥에 감추어진 하나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런 역사적 예수에 대한 고백으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고백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 고백을 정리한 것이 바로 '이성일인격(two natures and one person)'이고 '삼위일체(trinity, three persons and one substance)'라는 교리들입니다. 즉, 교리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역사적 발견이 먼저 있습니다. 그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추적하였을 때, 기독교인들이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결론이 이런 교리들인 것이죠.
저는 정말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이성일인격 교리나 삼위일체 교리를 믿는 데 애초에 어떠한 모순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예수의 이야기를 통해 이성일인격 교리나 삼위일체 교리를 도출해내는 과정에서 그 자체로 어떤 모순이 발견되지는 않습니다. 설령, 그 교리에 제가 찾지 못한 논리적 모순이 있다고 한들, 그 모순이 기독교 신앙에 크게 문제가 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예수의 이야기는 2000년동안 전세계 모든 문화권 사람들에게 아무 문제 없이 잘 이해가 된 만큼, 교리의 모순이 있다는 사실이 그 교리보다 더 근본적인 예수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방해를 주지는 않는 것으로 보이니까요.
오늘날 물리학에서조차 EPR 실험이나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을 통해 양자 세계에서는 모순적 현상들이 발견되고는 합니다. 하지만 양자세계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모순적 현상들이 발생한다고 하여서, 그 현상들을 과학자들이 인정할 수 없어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현상들에 적용되는 양자논리를 개발하거나, 모순을 허용하는 논리체계인 초일관논리를 더욱 발전시키기도 하죠. (실제로, 그레이엄 프리스트 같은 논리학자들은 초일관논리를 통해 종교의 교리들을 해명하는 작업들을 수행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a) 그리스 형이상학의 전제에서 벗어나서, (b)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발견으로부터 신학을 전개할 경우, (c) 그 인물에 대한 이야기에서 이성일인격이나 삼위일체는 아무런 모순 없이 도출된다고 봅니다. (d) 설령, 그 교리 자체가 논리적 모순의 형식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인물에게서 나타난 현상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e) 만약 복음서가 말하는 대로 부활이 사실이라면, 형식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가 이성일인격을 지닌 존재이자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라고 고백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