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본성론에 관하여

제가 이해하기에 기독교 신학에서 두 본성론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간성과 신성이라는 두가지 본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인간은 죽는 존재이고 신은 불사의 존재인데, 어떻게 양립되지 않는 이 두가지 속성이 공존한다고 믿을 수 있나요? 이것은 마치 케이크를 먹을수 없는 속성과 케이크를 무한히 먹을 수 있는 속성이 한 사람에게 공존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같다고 보여집니다. 즉 두 본성론은 양립 불가능한 두 속성이 예수 안에서 공존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지요?

여기에 대한 답변으로 보통 "오직 예수의 인간성만 죽음을 당했다" 라고 하던데, 전 이것 마저도 핑계가 아닌가 합니다. 우리는 보통 한 사람의 부분이 죽으면 그것을 부상이라고 하지, 죽음이라고 하지 않거든요. 즉 예수가 신성이 있었고, 신성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고 한다면, 일종의 영지주의적 결론이 되지 않나 싶네요.

신학적 입장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접근이 가능한 주제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쟁점들을 우선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1) 수난불가능성 공리는 기독교적인가?: "신은 불사의 존재이다."라거나 (혹은 더 일반적으로) "신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라는 논제는 유대-기독교에서 제시되는 주장이라기보다는 그리스 형이상학에서 제시되는 주장입니다. 신학적으로, 이 논제를 '수난불가능성 공리' 혹은 '무감정성 공리(axiom of divine impassibility)'라고 하는데, 현대신학에서는 이 논제 자체가 기독교적이지 않다고 비판하는 흐름들이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유대교 철학자 아브라함 요슈아 헤셸(Abraham Joshua Heschel),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일본의 개신교 신학자 기타모리 가조(北森加藏)이죠. 그분들의 책이 국내에도 상당수 번역되어 있습니다.

(2) 신학적 인식론은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과 기독교 신학이 역사적으로는 서로 결합되었지만, 그 두 신학에서 신에 대한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기준은 꽤나 다릅니다. 단순하게 나누자면, 전자는 '자기자신을 사유하는 지성'이나 '부동의 원동자' 같은 대상들이 왜 논리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신학을 성립시키고자 하지만, 기독교는 (이름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보여주었는지로부터 신학을 성립시키고자 합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해, 그리스 형이상학의 신 개념을 먼저 전제하고서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이야기하려는 것은 일종의 범주 오류입니다. 가령, "신은 불사여야 하는데, 왜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느냐?"라거나 "신은 무소부재해야 하는데, 왜 예수는 2000년 전 유대 땅이라는 한정된 장소에서 살았느냐?" 같은 비판들은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정당하지 않습니다. 그 비판들은 '그리스 형이상학의 신'과 '기독교의 신'을 무비판적으로 뒤섞어버려서, 기독교가 주장하지 않는 신을 기독교의 하나님이라고 허수아비 논증을 펼치고 있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성서라는 텍스트에 대한 학문적 이해가 높아진 오늘날에 올수록, 그 두 가지가 쉽게 뒤섞일 수 없다는 점은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강조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칼 바르트(Karl Barth) 이후의 현대신학은 이 점을 대단히 강조하면서, '그리스 형이상학의 신'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논의가 신학의 출발점에 놓여야 한다고 지적하죠. (바르트의 대표작은 13권으로 된 방대한 『교회교의학』이고, 그 책 전체가 그리스도론을 중심으로 세워진 신학 체계이지만, 너무 방대하고 전문적인 학술서인 만큼 혹시 관심이 있으시다면 아래 책들을 추천드립니다.)

(3) 예수가 '신성'을 가졌다는 교리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오해되는 기독교 교리 중 하나가 예수의 신성 교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기독교인들조차 상당수는 이 교리를 오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 교리는 예수가 그 자체로 하나님과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교리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정통적인 삼위일체 교리에 따르면, 예수와 하나님은 분명히 서로 구분되는 존재입니다. 그 둘 사이의 동일성을 무비판적으로 가정하게 되면 양태론이나 성부 수난설 같은 이단에 빠집니다.

예수의 신성 교리의 핵심적 근거는 예수의 부활 사건에 있습니다. 1세기 유대교에서 부활이란 단순히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당대 유대인들은 세상의 마지막 날이 오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의인이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죠. 현실에서 억울하게 고통받고 죽은 사람까지도 하나님이 심판대에서 다시 살리셔서, (a) 그 사람들이 '의로운' 자들이었다는 것을 입증하실 것이고, (b) 의로운 자들을 위해 정의를 세우는 하나님 자신 역시 '의로운' 분이라는 사실을 입증하실 것이라는 게 유대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은 이런 유대교 종말론의 배경에서 이해될 때 대단히 중요한 함의를 지닙니다. 예수는 유대인들에게는 신성모독자로 여겨졌고, 로마인들에게는 반역자로 여겨져서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하였죠. 하지만 그 예수가 부활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예수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최후의 심판대에서 선언하셨다는 것을 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죄인과 실패자로 규정하였지만, 하나님은 예수가 했던 모든 행동들을 "의롭다"라고 인정하셨다는 것이 드러난 거죠.

문제는, 그 예수가 내세운 핵심적인 가르침 중 하나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전권요구(Vollmachtsanspruch)'였다는 점입니다. 예수는 자기 자신의 말이 모세의 율법보다도 높은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였고, 자기 자신의 말과 행동을 기준으로 해서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사람들이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자신이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아서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강조한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정말로 예수를 부활시켰다고 한다면, 예수의 이 전권요구는 하나님께 실제로 승인을 얻은 셈이 됩니다. 예수의 말과 행동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계시하는 궁극적 기준이 되어버리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는 예수라는 기준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알려질 수 있는 것이 되어버리죠.

그리고 매우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 전권을 가진 예수가 자기 자신을 결코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예수는 자신의 지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엄격하게 제한하면서, 자기는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목표라고 내세웠죠. 그는 명확하게 자신에 대한 신격화를 거부하면서 자기 자신과 아버지를 구분합니다. 자신보다 아버지가 더 크시다(요한복음 14:28)고도 하고,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고도 하였죠(마가복음 10:17). 예수와 하나님을 무비판적으로 동일시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예수의 반대자들이었죠(요한복음 10:33).

그런데 여기서 (신학적 용어로 '페리코레시스'라고 하는) 일종의 순환관계가 발생합니다. 예수는 자신을 철저하게 '아들'로서만 규정하였지만, 바로 그 철저함 때문에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가 됩니다. 그가 정말로 하나님의 전권을 가지고 있는데도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뜻'만 실현하는 존재라면, 그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하나님의 말과 행동이 되기 때문입니다. (a) 하나님은 예수에게 자신의 전권을 맡기고, (b)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삶 전체를 맡김으로써, (c) 그 둘은 서로 완전히 구분되는 존재인 동시에 완전히 일치하는 존재가 되이죠. 예수는 자신을 단지 '아들'일 뿐이라고 강조하였지만, 그 아들은 하나님의 전권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실현시키는 아들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주는 '유일한 아들'이자 '독생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신성과 삼위일체에 대한 이런 해석은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와 미국의 가톨릭 신학자 캐서린 모리 라쿠나(Catherine Mowry LaCugna)에게서 나타납니다. 그들의 책도 국내에 번역되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라쿠나의 책은 절판되어서 구하기 다소 어렵지만 말입니다.)

판넨베르크의 삼위일체론: 아버지와 아들을 중심으로
https://blog.naver.com/1019milk/221438358252

(4) 모순은 정말로 존재하는가?: 그래서 '수난불가능성 공리' 같은 그리스 형이상학의 공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실제 역사적 인물에게서 출발한다면, 여기서는 대단히 놀랍고 역설적인 결론이 도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1세기에 살았던 어느 누구도 예수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고, 심지어 예수의 제자들조차 예수가 '인간'이라고 당연하게 인정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 예수가 정말로 하나님의 전권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철저하게 보여준 존재라면, 그 예수는 하나님 자신과 결코 뗄 수 없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누구이신지가 드러날 수 있고, 예수 바깥에 감추어진 하나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런 역사적 예수에 대한 고백으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고백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 고백을 정리한 것이 바로 '이성일인격(two natures and one person)'이고 '삼위일체(trinity, three persons and one substance)'라는 교리들입니다. 즉, 교리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역사적 발견이 먼저 있습니다. 그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추적하였을 때, 기독교인들이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결론이 이런 교리들인 것이죠.

저는 정말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이성일인격 교리나 삼위일체 교리를 믿는 데 애초에 어떠한 모순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예수의 이야기를 통해 이성일인격 교리나 삼위일체 교리를 도출해내는 과정에서 그 자체로 어떤 모순이 발견되지는 않습니다. 설령, 그 교리에 제가 찾지 못한 논리적 모순이 있다고 한들, 그 모순이 기독교 신앙에 크게 문제가 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예수의 이야기는 2000년동안 전세계 모든 문화권 사람들에게 아무 문제 없이 잘 이해가 된 만큼, 교리의 모순이 있다는 사실이 그 교리보다 더 근본적인 예수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방해를 주지는 않는 것으로 보이니까요.

오늘날 물리학에서조차 EPR 실험이나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을 통해 양자 세계에서는 모순적 현상들이 발견되고는 합니다. 하지만 양자세계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모순적 현상들이 발생한다고 하여서, 그 현상들을 과학자들이 인정할 수 없어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현상들에 적용되는 양자논리를 개발하거나, 모순을 허용하는 논리체계인 초일관논리를 더욱 발전시키기도 하죠. (실제로, 그레이엄 프리스트 같은 논리학자들은 초일관논리를 통해 종교의 교리들을 해명하는 작업들을 수행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a) 그리스 형이상학의 전제에서 벗어나서, (b)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발견으로부터 신학을 전개할 경우, (c) 그 인물에 대한 이야기에서 이성일인격이나 삼위일체는 아무런 모순 없이 도출된다고 봅니다. (d) 설령, 그 교리 자체가 논리적 모순의 형식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인물에게서 나타난 현상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e) 만약 복음서가 말하는 대로 부활이 사실이라면, 형식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가 이성일인격을 지닌 존재이자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라고 고백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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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등장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매우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 전권을 가진 예수가 자기 자신을 결코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예수는 자신의 지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엄격하게 제한하면서, 자기는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목표라고 내세웠죠. 그는 명확하게 자신에 대한 신격화를 거부하면서 자기 자신과 아버지를 구분합니다. 자신보다 아버지가 더 크시다(요한복음 14:28)고도 하고,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고도 하였죠(마가복음 10:17). 예수와 하나님을 무비판적으로 동일시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예수의 반대자들이었죠(요한복음 10:33).

이 부분에서 약간 의문이 드는 점이 있는데요.
복음서에서 예수가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명시적으로 주장한 발언 사례는 없습니다만, 보통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임을 부정했다기 보다는 선언한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나요? 예를 들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요한복음 10장 30절)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33절)

라는 대화나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한복음 20장 29절)

에 대해 예수가 마가복음에서처럼 지적하지 않으신 것을 보면 (공교롭게도 다 요한복음 인용이군요) "예수는 스스로 하나님이라 칭한 적이 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오해한 거다"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또 이전에 아마 선생님께서 다른 글에서 쓰신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특히 요한복음에서 "ego eimi"와 같은 신적 자기 지칭 표현을 쓴 것도 하나의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분명한 건 예수가 성부 하나님과 자신을 구별되게 말했다는 점이지, 그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했다고 보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당시 전통적 유대교인들이 이성일인격을 받아들이지 않았거나 이해하지 못했고 당연히 저런 발언을 신성모독으로 이해했을 수는 있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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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요한복음 10:34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과 하나 됨"은 어떤 형이상학적인 주장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하나됨을 말한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이 "신" 이라고 말씀하신 것이겠죠. 예수님을 신이라고 말하는 몇몇 구절들은 이러한 맥락안에서 파악되어야 합니다.

  1. 하나님은 죽지 않는다는 주장은 그리스 철학만의 전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1 딤전 6:16

또한, 상식적으로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이 정작 자신은 영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이 부분은 신이 고통을 받을수 있는가 와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1. 복음서가 말 하는대로 부활이 사실이라면, 우린 이성일인격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도 전 필연성을 발견하지 못하겠습니다.

예수가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를 부활시킨 것이 아닌, 하나님이 살리신 것이라면 예수에게 두 가지 본성이 있다고 전제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의인들이 갈 길을 미리 보여주는 큰 형과 같은 존재이지, 우리가 숭배해야 할 삼위일체 하나님은 아니라는 믿음과 예수의 부활은 충돌하지 않습니다.

성경 구절을 맥락 안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점은 맞는 말씀이고 동의합니다만, 해석이라는 게 다루는 구절 수를 늘린다고 구체적이게 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요한복음 10:34-36을 인용해주셨는데요, 저도 여기서 말하는 '신'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고민했고 알아보려 했었습니다. 제가 찾아봤던 틴데일 주석시리즈의 요한복음 주석과 매튜 풀의 요한복음 주석을 참고해서 이 부분에 대한 다른 해석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우선 10:34-36의 바로 앞 맥락에서는 예수가 유대인들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라고 말함으로서 신성모독을 저지른다는 유대인들의 비판(10:33)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34-36절은 그에 대한 예수의 대응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진술에 관해>
제가 갖고 있는 두 가지 주석에서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라고 한 부분에 대해 약간 다른 해석을 내놓습니다.
매튜 풀의 경우 단지 생각과 뜻에 있어서 하나인 것이 아니라 본성과 능력에 있어서도 하나라고 주장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 이유는 앞 절에서 양을 돌보시고 영생을 주시는 것을 하나님의 권능에 속한 것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틴데일 주석(콜린 크루즈)의 경우 복음서 기자가 "하나"라는 말로 남성 형용사 "heis"를 쓴 게 아니라 중성 형용사 "hen"을 썼기 때문에 이는 명시적으로 한 인격임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사역과 목적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이 연합한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씁니다.
그런데 이 두 주석문은 서로 상충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다른 위격(person)이라는 점을 둘 다 부정하지 않고, 다만 이 진술이 본성의 하나됨을 적극적으로 암시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정도의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34-36의 진술에 관해>
제가 이해한 글쓴이 분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예수가 의도한 주장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다 하나님과 하나이고, 자신도 그런 의미에서 하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해석은 34-36의 문맥을 잘못 이해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예수는 유대인들이 자신을 신성모독이라 하는 것에 대해 유대교 랍비 해석에 따라서도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건 문제가 없는데 왜 당신들은 나를 신성모독이라고 하냐는 식으로 반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당신들의 이론과 해석을 가정해도 나를 신성모독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일종의 가정적 주장이지요.

그 근거는 이렇습니다. 본문에서 "율법에 기록된 바"가 가리키는 구절은 시편 82편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6-7절)

주석에 따르면 후기 랍비주석에서 시편 82편의 '신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받았을 때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즉, 율법에 따라 살면 거룩하게 되어 신들처럼 살게 될 것인데, 율법을 떠나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사람처럼 죽을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 후기 랍비주석의 내용입니다.
본문 10장 34-35절에서 예수의 말은 구약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당신들의 성경 해석을 참이라고 가정해보자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36절에서는 당시 랍비들의 주석 방법론에서 추론 원칙으로 쓰이던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나아가는 원칙을 적용합니다. 당신들의 해석에 따라 율법을 받아 행하는 사람들도 신이라고 하셨는데, 하물며 예수 자신이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여 세상에 보내진 자일진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주장이 그들에게 효과적이었다고 하더라도 예수가 그들의 가정, 즉 자신의 신성을 부인하는 가정을 인정했다고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어디까지나 그들의 신성모독 고발이 근거 없는 것임을 보이기 위해 가정한 것이라고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석에 근거한 이러한 해석이 더 좋은 해석이라면, 10장 34-36절이 "아버지와 하나 됨"이 신성의 부정 및 사랑 안에서 하나됨이라는 해석을 뒷받침 하는 구절로 이해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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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의 질문은 YOUN님께서 답변하시겠지만, 두 번째 반론에 대해 한 가지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아마도 YOUN님도 같은 의도로 말씀하셨겠지만, 제가 보기에 삼위일체는 먼저 가정되고 해석하는 틀이 아닙니다. 성경의 권위에 입각해서 예언과 언약의 성취, 죄 사함, 예수 자신의 말과 행적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결론이라는 게 아마도 기독교 신학이 도달한 지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체계화되지 않은 생각이긴 합니다만) 개인적으로, 모든 인간은 죄에 빠져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어 있었으나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믿는다면 의인의 모델이라든가 대단한 인간으로만 예수를 이해하는 것이 그 믿음과 충돌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한가?"라는 질문에는 '그렇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 이신일인격론보다 성경 전체의 문헌과 해석에 더 부합하는가?"에 대해서는 아주 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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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일단 저는 자유주의 신학을 신봉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반대로 삼위일체가 너무나 철학적이고 헬라적이란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제가 이전에 쓴 글을 올려보겠습니다.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은 신이 하나의 본질과 세개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본질이라 함은, A가 A이게 하는 성질이라 정의할 수 있다. 정통 기독교는 전지전능과 같은 성질이 신의 본질에 포함이 된다고 주장한다.

본질은 누가 신이고 누가 신이 아니냐는 기준 혹은 울타리를 설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삼위일체 교리에서 신의 본질은 '전지전능하지 않으면 신이 아니다' 라는 기준을 만드는 것이다.

전지전능하면서 동시에 그렇지 않은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자신이 신보다 우위에 있다고 믿을때 가능하다. 무엇이 신이라는 범주에 포함되고, 무엇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주체가 "나" 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철학적 개념인 본질보다는 "가족"이라는 개념을 중시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예수가 말하기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들은 예수의 형제, 자매이다.

즉, 성경은 예수와 신자를 운명공동체로 보고 있으며, 이 말은 또한 예수가 신이라면 예수의 형제 자매 또한 신이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누가 신이냐?"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누가 신의 본질적 속성을 가졌냐가 아니라, 누가 하나님을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하고 자신을 비움으로 하나님에게 "너는 신이라" 하는 높임을 받느냐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를 포함한 말씀을 받은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들이며 신이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예수를 "본성"이라는 헬라적 사고방식에 끼워맞춤으로서 생겨난 문제가 삼위일체의 모순의 문제이란 것이고, 삼위일체를 받아들이냐 아니냐는 일종의 가짜 이분법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사랑, 가족, 한 몸 (히브리어의 yada) 의 관계가 형이상학 보다도 오히려 우선적인 개념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저에게 그저 어떤 낭만적인 개념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하나됨 보다도 더 근본적인 하나됨 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정통주의자도 아니고 자유주의자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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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분의 신앙적 견해는 인상 깊습니다.
한편으로는 신학적 입장으로 니편내편 나누고 "바른 신앙" 운운하면서 신학으로 정죄하려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일깨워주고 싶은 생각이기도 하네요.

사실 선생님의 글에서는 몇 가지 주제가 혼재된 것이 보이긴 합니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 교리와 신의 속성에 관한 논의는 동일한 게 아니기 때문에 삼위일체 교리와 전지전능성에 관한 문제는 별개의 논의입니다.
또, "신의 본성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언제나 자신을 신 위에 둘 때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신을 알기 위한 인간적인 노력이긴 하지만, 계시를 통해 드러난 바 및 명백히 신적이라 할 수 없는 것들과 비교하여 정합적으로 이해했을 때 신은 우리에게 이러저러한 것들을 자신으로서 보인다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게 신학에서의 신론이 될 것이구요.
성경에서 가족적 이해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나, 그것이 삼위일체 교리가 답하고자 하는 문제를 없애주진 않습니다. 단지 그 물음과 답변을 절대화하지 않게 할 뿐이지요.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 혹은 비본질적인 문제라는 건 별도로 논증되어야 할 부분입니다(그런 논증이 있다면 저도 정말 궁금하네요).
저 역시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형이상학적 논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다고 믿습니다. 결코 우선순위가 뒤바뀌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절대적 우선순위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 형이상학적 문제를 궁극적으로는 답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로 만들진 않습니다. 가령 글쓴이 분께서 말씀하신 근본적 연합이라는 의미에서의 '사랑'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군가 물어본다면 그건 정당한 물음일 것입니다. 누군가 그게 그냥 두루뭉술한 것일 뿐이라고 비판한다면 맞대응을 하셔야할 필요도 언젠가 있겠지요. 저는 삼위일체 교리도 마찬가지로 누군가 예수는 누구인가, 한 인간이 신에게 저지른 죄를 용서해줄 수 있는가, 부활의 의미는 무엇인가 등등의 무시할 수 없는 질문에 답하려고 노력하면서 형성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이 또한 역사적으로 맞는 얘긴지는 검증이 필요하겠지요). 단지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 그 문제가 사이비 문제가 된다거나 거짓 이분법이 된다는 결론이 따라 나오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저도 더 깊은 얘기를 할 수 있는 깜냥이 안 되기 때문에 논쟁을 더 이어가려고 쓴 글은 아니구요, 다만 글쓴이 분의 입장은 어느정도 이해했고 보완된 형태의 생각이 기대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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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식으로 한가지를 던져보죠. 굳이 신을 형이상학적으로 표현하라면 저는 삼위일체가 아니라 사위일체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가 "나와 하나님은 하나다" 라고 했기에 삼위일체가 맞다면 왜 "그들" 즉 예수를 믿는 신자들도 그 "하나"에 들어간다는 사실은 무시하냐는 것이죠.

하여간 이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생각해둔 것이 있고, 계속 보완해나갈 예정입니다.

맞습니다. 예수가 메시아적 자의식(혹은 더 나아가, 신적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입장을 '고기독론(highst christology)'이라고 하는데, 저는 이 입장에 동의합니다. 신약학자들 중에서는 래리 허타도(Larry Hurtado)와 리처드 보컴(Richard Bauckham)이 이 입장을 옹호하는 여러 뛰어난 저작들을 쓴 것으로 유명하고, 국내에도 이형일 교수님이 『예수와 하나님 아들 기독론』이라는 저작으로 국제적으로도 호평을 받으신 것으로 압니다.

사족이지만, 처음 제가 신학개론 강의를 수강하였을 때의 S 교수님은 예수의 신성도, 신적 자의식도, 신약성서에 고기독론이 나타나 있다는 주장도,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 아주 급진적인 분이셨어요. 하지만 언급하신 요한복음 20:29만큼은 분명히 신약성서 전체에서 명시적으로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구절이라고 인정하시더라고요. 그 구절에서만큼은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그리스어 정관사 '호'와 결합하여서 '호 테오스'라고 등장하거든요. 요한복음은 그 구절에서 예수를 단순히 하위 신 정도로 취급한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와 동일시한 것이죠.

그밖에도 말씀하신 '에고 에이미' 구절들을 비롯하여, 예수가 자신의 권위를 모세나 아브라함보다도 높게 이야기한다는 점이나, 예수가 시편이나 이사야나 다니엘 등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신적 권위의 상징들을 자신에게 가져다 쓰는 모습(바다를 꾸짖는다, 명령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낸다, 생명수를 준다, 구름을 타고 온다 등)은 충분히 고기독론을 옹호하는 자료들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또, 복음서 이외의 다른 신약성서에서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8:6에서 유대인들의 유일신 신앙고백 '쉐마'를 예수에게 적용한다는 점이나, 히브리서가 예수를 천사보다 높은 존재로 묘사한다는 점이나, 계시록이 보좌나 구름 같은 상징들을 예수에게 적용한다는 점 등은, 이미 신약성서가 쓰일 시대부터 사람들이 예수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경배하였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저는 생각해요. (물론, 신약학자들 중에서는 S 교수님처럼 명시적인 구절이 아닌 것들에 대해서는 매우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는 분들도 있지만, 저는 예수의 신성을 나타내는 본문들을 이렇게까지 제한하려 하는 것은 너무 부자연스러운 성서 독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말씀하신 대로, 예수가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입장이긴 합니다. 실제로, 제가 인용한 판넨베르크도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구분을 이야기하지,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좀 더 사족을 붙이자면, 저는 이 점이 '메시아의 비밀'이라는 19세기 독일 성서학계의 주제와도 연관된다고 생각합니다. 윌리엄 브레데라는 성서학자는 왜 예수가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숨겼는지를 탐구하면서, 아마도 예수 자신은 메시아적 자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초기 교회가 그 자의식을 만들어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죠. 하지만 저는 애초에 초기 교회가 믿었던 예수의 신성이 성부와 성자를 단순 동일시할 만큼 간단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고기독론의 입장이 더 설득력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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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멸 혹은 영생이란 무엇인가?: 유대-기독교의 맥락에서 '죽지 않는다' 혹은 '영생한다'라는 단어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실 필요가 있습니다. 당장 신약성서에서 자주 사용되는 '영생(조에 아이오니오스)'이라는 단어부터가 '올람 하바'라는 히브리어에 대한 번역어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바빌론 이후의 포로 시대를 '올람 하제'라고 불렀고, 그 포로 시대의 끝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시대을 '올람 하바'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바라였던 구원이나 영생이란, 무한한 시간동안 죽음 없이 산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라는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실제로, '조에 아이오니오스'라는 단어도 '시대(아이온)'의 '생명(조에)'라는 의미로, '새로운 시대의 삶'이라는 뉘앙스가 강합니다.

약간 맥락이 다르긴 하지만, 이 점은 신학이 아니라 신화학적으로도 뒷받침될 수 있습니다. 고대 근동의 신화에서는 '죽음과 재생의 신'이라는 모티프가 있습니다. 아카드 신화의 두무지나, 이집트 신화의 오시리스나, 우가릿 신화의 바알은 모두 죽음과 결투를 벌였다가 패배하여 무덤에 묻힌 후에 다시 살아나서 죽음을 무찌릅니다. 고대 근동 신화에서는 이렇듯 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 널리 퍼져 있던 생각이었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신이 죽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신이 죽음을 이겨서 새로운 시대의 왕으로 등극하는 것이 핵심이죠. 적어도 신화학적인 모티프에서 보자면, 고대 근동인들에게는 그리스 형이상학적인 의미에서의 불멸자로서의 신보다도,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는 신의 이미지가 훨씬 더 자연스러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서를 읽을 때 전문 신학자들은 특정한 몇몇 구절에 주목하기보다는, (a) 그 구절이 놓여 있는 텍스트의 맥락과 시대적 맥락을 고려하여 성서신학적 독해를 시도합니다. 그리고 (b) 다양한 성서 구절들을 종합해야 할 때는 조직신학적 원칙을 세워서 무엇을 우선적인 해석의 기준으로 삼을 것인지를 정리하죠. 그리고 그 해석의 기준으로 바르트 이후 조직신학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론'입니다. 즉, 성서신학적으로 보았을 때 성경이 말하는 영생이나 불멸성이 단순히 육체가 죽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하기 어렵고, 조직신학적으로 보았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야말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나타내는 기준이라면, 우리가 미리부터 형이상학적 의미의 불멸성을 전제한 채 유대-기독교의 하나님을 이야기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 왜 삼위일체인가?: 삼위일체론에서 아주 초창기부터 핵심적이었던 주제 중 하나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일종의 동시적 관계였습니다. 아들이 아버지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아버지도 아들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아들을 낳은 사람만 비로소 아버지가 되는 것이니까요. 즉, 예수가 주장한 것처럼, 하나님의 전권이 예수 자신에게 있어서, (a) 예수 바깥에서 단독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도 없고, (b) 예수와 무관하게 단독적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행위도 없다면, 예수와 하나님은 인식론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나 언제나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하나님 없는 예수라든가, 예수 없는 하나님은 없기 때문에, 예수가 단순히 하나님께 종속되는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초창기부터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부활에서 밝혀진 전권요구의 승인을 소급 적용하였습니다. "예수는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되셨다."라는 고백으로부터 출발하여, "예수는 사역의 시작에서 세례를 받을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예수는 수태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예수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라고 나아간 것입니다. 정말로 '아들'인 예수 바깥에 다른 '아버지'가 없다면,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서만 비로소 아버지일 수 있다면, 아들과 아버지는 언제나 함께 존재하여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니까요. 그 결론이 바로, 아들과 아버지가 '위격'에서는 구분되지만 '실체'에서는 구분되지 않는다는 삼위일체 교리인 것입니다.

(3) 삼위일체는 너무 철학적이고 너무 그리스적인 사고인가?: 핵심은, 삼위일체라는 고백이 먼저 전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초기 교회사에서 어느 누구도 "나는 삼위일체라는 가설대로 예수의 이야기를 읽겠다."라고 생각하고서 복음서를 독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이야기를 충실하게 읽으려 했을 때 도달하게 되는 결론을 그 당시 용어들로 정리하였을 때 삼위일체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이 점을 크게 세 가지 면에서 다시 논증할 수도 있습니다.

(a) 우선, 삼위일체 교리 훨씬 이전부터 기독교인들은 예수에게 경배와 찬양을 올렸습니다. 삼위일체교리가 세워지고서 "이제 이 교리에 따라 예수를 경배해야 한다."라고 한 것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경배와 찬양이 먼저 있고서 그 내용들을 정리한 것이 삼위일체입니다. 실제로, 이 점은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를 비판할 때 중요하게 사용했던 논거이기도 합니다. 아주 초창기부터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였고, 그 점은 유대교의 유일신 고백인 쉐마까지도 예수에게 적용되었다는 점에서 (적어도 저에게는) 거의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보입니다. 특별히, 이 점은 초대 교회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주로 영광송이나 기도문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점으로도 입증됩니다. 이미 기독교인들이 오랫동안 부르던 노래들이나 오랫동안 수행하던 기도들이 있고, 그 내용들의 학문의 영역에서는 '삼위일체'라고 정리된 것입니다.

(b) 초기 교부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예수의 시대와 예수의 제자들에게 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신학사에 대해 피상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종종 "교부들은 그리스인들이었으니까, 자기 마음대로 그리스 철학을 끌여들여서 예수를 교리화하였을 거야."라고 손쉽게 단정하지만, 교부학이나 신약학에서 이루어지는 최근 연구들은 교부들이 신약성서의 사고들을 상당히 잘 계승하고 있는 믿을만한 인물들이라는 점을 입증합니다. 오히려, 2000년이 더 지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고대 교부들보다도 신약성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저에게는 다소 순진하게 보입니다. 교부들은 짧게는 예수와 수십 년, 아무리 길게 잡아도 300년밖에 차이나지 않는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이고, 유대인들과 함께 그리스-로마의 문화적 배경을 공유하였고, 그 중 몇몇은 예수의 직계 제자들로부터 승인된 인물들이었던 것이 분명하니까요. 언어적-시대적-지역적으로도 예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저로서는, 제가 그 교부들보다도 예수의 시대를 더 잘 이해한다고 감히 자부하지 못하겠습니다.

(c) 삼위일체가 그리스 철학의 사고에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그리스 철학이 삼위일체를 통해 변혁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릅니다. 동방정교회 신학자인 존 지지울라스(John Zizioulas)라든가 국내의 가톨릭대학교 박승찬 교수님이 잘 지적하는 것처럼, '인격(person)'이라는 개념은 삼위일체 신학을 통해 정립되어 그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철학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이전까지 이 개념은 딱히 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신약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기독교 철학자들이 고민하는 과정에서 이전까지의 그리스 형이상학과는 매우 다른 종류의 존재론이 나타난 것입니다. 특정한 '본질'에 기계적으로 지배받지 않는,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방식으로서, '실존'과 '인격' 같은 개념들이 강조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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