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주장은 신앙 커뮤니티에서 하셔야할 주장 같습니다.
신을 이해하는 데에 철학은 무용하다는 주장의 근거로 성서밖에 안 주시는데 여기에 관해 어떤 철학적 토론이 가능한지 의문이 드네요.
흠, 이 질문에는 @chanchu1352 님도 답변해 주셔야겠네요. 하지만 이분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성서밖에 제시하지 않더라도, 저보다 신학을 훨씬 잘 아는 철학 전공자는 신을 이해하는 데 철학이 어떤 방식으로 이바지하는지를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전공자가 그런 설명을 제시하시고 나면, @chanchu1352 님이 그 설명을 논박하셔야죠. 그때는 더 이상 @chanchu1352 님도 성서만 인용하시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철학의 무용함을 철학으로 논증한다는게 자기 모순이라 봅니다.
저는 제 글에서 성서가 '문법' 수준에서 이미 세상의 말과 다른 말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 주장을 펼쳤습니다.
제 주장은 죄나 의가 주어가 되는 현상이었구요. 죄나 의가 추상적 개념이나 행위를 가리키지 않고 주어가 되는 문법은 신앙과 철학이 이미 문법수준 즉 맨 바닥 수준에서 역전되어 있단 근거로 사용되었습니다.
근데 @chanchu1352 님의 이런 말씀은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가 어렵긴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분에게도 철학 학습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려면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나 표현을 쓰는 것이 좋으니까요.
외람되지만 철학을 배운 사람입니다. 미국 가톨릭 대학교 석사과정 1년을 수료 했었구요,
님 말대로 철학이 진리보단 하나의 언어게임, 룰 따르기란 생각이 들어서 제 것이 아니란 생각에 저는 철학을 버렸습니다.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음, 그럼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줄일 방법은 더 없을까요?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Angels fear란 책을 추천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말한 의사소통은 저와 @chanchu1352 님 사이의 소통 말고, 다른 분들과 @chanchu1352 님 사이의 소통을 가리킵니다.
이 claim은 철학에서도 꽤나 많이 논의되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흥미롭네요. 혹시 @chanchu1352 님은 이에 대한 논증이 있으신가요? @Dvorak 님이 말씀하셨듯이, 성서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논증으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난 논증을 하지 않고 결론만 말하겠다" 혹은 "나는 철학의 특정한 스탠스를 아무런 논증 없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다" 혹은 "나는 해체를 하기 때문에 논증은 하지 않겠다" 와 같은 말씀을 하실 것이면, 저와의 간극은 더 이상 좁혀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전 논증이 없는 철학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논증을 제시하지 않는 경우는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경우에는 논증을 할 수 있지만, 서로의 논증을 얼추 알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논증이 없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논증이 없다면 저는 그것을 철학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만일 "나는 철학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논증을 하지 않겠다" 라고 반문하시겠다면, 이 사이트는 적절한 사이트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사이트는 철학 사이트지, '철학이 아닌, 논증이 없는 무언가를 하는 사이트' 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제가 이 사이트 관리자는 아니지만, 위에서 여러 번 제시됐기 때문에 해도 괜찮은 말 같습니다.
왜 논증할수 없는지는 문법의 예시를 이미 들었습니다.
논증이라는 것은 일종의 언어게임에 참여함을 의미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그런 언어게임과는 다른 문법을 쓰는 전혀 다른 룰을 따르고 있습니다.
신앙은 시 같이 은유의 언어로 표현됩니다.
다음은 베이트슨이 쓴 예시입니다.
은유의 "논리"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피타고라스의 진리가 담고 있는 논리와는 전혀 다른 무엇이다. 알다시피 "잘못"이 아니라 전혀 다르다는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그러나 특수한 은유들은 국소적 제한적인 반면, 은유를 만드는 과정은 그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니까 그것이 크레아투라의 기본 특성일지도 모른다.]
은유에 담긴 진리와 수학자들이 상당히 난폭하고 부적절한 수단을 사용하여 추적한 진리 사이의 대비 관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리고 은유를 삼단논법으로 바꿔 보기로 한다. 고전논리학은 삼단논법의 몇가지 진리를 지적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르바라Barbara의 삼단논법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을 것이다.
이 작은 괴물의 기본 구조, 곧 뼈대는 분류를 바탕으로 한다. 빈사賓辭("죽을 것이다")는 소크라테스가 그 빈사를 공유하는 의미 있는 구성원임을 확인한 뒤 그에게 붙여 주게 된다.
은유의 삼단논법은 전혀 다르다. 일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풀은 죽는다.
사람은 죽는다.
사람은 풀이다.
[이런 종류의 삼단논법을 논의하고 "바르바라의 삼단논법"과 비교하기 위해 후자를 "풀의 삼단논법"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나는 고전 논리학 교사들이 이런 논리에 크게 반발하고, 그것은 "결과를 사전에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물론 그들이 삼단논법의 한 유형과 다른 삼단논법 사이의 혼동을 지적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현학적 지탄은 정당하다. 그러나 풀의 삼단논법의 모든 함축과 싸우려 하는 것은 어리석다. 이 삼단논법들은 바로 자연사의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물계에서 규칙성을 찾을 때면 우리는 언제나 그들과 만나게 된다. 오래 전 폰 도마루스(Von Domarus,,1944)가 정신분열증 환자들은 공통적으로 풀의 삼단논법으로 말하고 행동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지식과 생명을 조직하는 것은 반대했다고 생각되는데,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시, 미술, 꿈, 유머, 종교는 정신분열증 환자와 마찬가지로 풀의 삼단논법을 선호한다는 것을 그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시, 꿈, 정신이상에 대한 찬반과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생물학 자료는 풀의 삼단논법에 따라 의미를 갖게 되고 서로 연결된다. 동물 행태 전반과 반복적인 조직 전반, 그리고 생물 진화 전반 등 이들 방대한 영역 하나하나는 그 내부에서 풀의 삼단논법에 따라 하나가 되고 있다. 그것은 논리학자들이 좋아하든 말든 상관없다.
사실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바르바라의 삼단논법을 만들기 위해서는 분류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주사主辭와 빈사賓辭를 가려낼 수 있다. 그러나 언어라는 기호 체계를 벗어난다면 분류와 주사-빈사 관계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풀의 삼단논법은 언어 이전의 영역에서 관념을 상호 연관시키는 지배적인 양식이다.
예, 논증을 하시지 않겠다면, 더 이상 대화를 할 수 없을 것 같네요. 그리고, 논증과 "전혀 다른 룰을 따르"는 무언가를 하고 계신다면, 그것이 철학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 사이트가 적절한 사이트는 아니겠지요. 하지만 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으니, 다른 분들에게 넘기겠습니다. 이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고 생각되네요.
@chanchu1352 님은 '논증'을 제시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신을 이해하는 데 철학은 유용하지 않다."라는 주장을 자기가 왜 펼치는지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글을 인용해 설명했습니다. 이분은 이제 성서만을 근거로 들지 않았어요.
제가 보건대, 이분은 논증을 했습니다. 그 논증이 타당한지와는 상관없이요. 그리고 그 논증은 다른 사람이 철학적으로 반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yhk9297 님의 답변은 철학적 토론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수정: 이 말은 취소할게요. 조금 지나친 결론 같군요. 토론을 더 이상 원치 않는 분에게 토론에 참여하라는 듯이 들릴 수 있고요.
아닙니다. 1) 논증은 언어게임이며, 2) 신앙은 언어게임이 아니며, 3) 신앙은 논증이 아닌 시 같이 은유의 언어로 표현된다가 저 분이 말씀하고자 하는 바이고, 베이트슨은 이 점을 더 전개시키기 위해 쓴 예시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성자님은 신앙은 논증이 아닌 시와 같은 것으로 이해돼야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스탠스 자체를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말하는 것은 1) 철학은 논증으로 이뤄지며, 2) 논증이 아닌 것은 철학이 아니며, 3) 시와 같은 것은 논증이 아니며, 4) 작성자분이 하시는 것은 철학이 아니다, 입니다.
작성자분은 논증이 언어 게임이며, 본인은 언어게임이 아닌 것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건 철학이라고 볼 수 없다가 제 스탠스입니다. 저는 논증이 없는 것은 저는 철학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물론 논증이 없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헤겔 같은 경우도 괴테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죠. 제가 말하는 것은 논증이 아닌 것, (만일 논증이 언어게임이라면) 언어게임이 아닌것 등이 철학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네, 신앙은 언어 게임이 아니죠.
작성자님은 신앙은 논증이 아닌 시와 같은 것으로 이해돼야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분의 위 말씀은 언어 게임입니다. @yhk9297 님이 이 둘을 혼동하시는 것 아닌가요?
뭘 혼동한다는 것이죠?
저분의 저 말씀 자체는 언어 게임이라는 데 동의하시나요? 그러면 저 말씀에 대한 동의나 반대는 철학적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저 말씀에서부터 "신을 이해하는 데 철학은 유용하지 않다."라는 결론이 도출되는지도 철학적으로 논할 수 있죠.
P1: 철학은 언어게임이다.
P2: 신앙은 언어게임으로 접근할 수 없다
P3: 신앙은 철학으로 접근할 수 없다 (P1, P2)
P4: 시와 같은 은유법은 언어게임과는 다른 문법을 갖고 있다.
P5: 신앙은 언어게임과 다른 문법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접근할 수 있다.
P6: 신앙은 시와 같은 은유법으로 접근할 수 있다 (P4, P5).
C: 그러니깐 신앙은 철학이 아닌 시와 같은 은유법으로 접근해야한다.
라고 주장을 해본다면, 차불휘님이 제게 요구하는 건 전제 1과 전제 2 같습니다. 아쉽게도, 저는 전제1 이나 전제2가 온라인으로 변호를 할 수 있는 전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너무 ambitious하거든요. 그리고 작성자님도 전제 1과 전제 2를 완전히 변호하실 생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하겠지요.
@yhk9297 님은 방금 @chanchu1352 님의 주장과 근거를 정리해 논증으로 만들어 주셨어요. 따라서 이 토론은 철학적으로 진행할 수 있고, 이를 @yhk9297 님이 직접 증명하신 거예요. 그러므로 @yhk9297 님은 방금 올리신 댓글을 통해 유의미한 철학적 대화를 하셨습니다.
반박이란 건 전제 중 하나가 거짓이라는 것을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P1: 소크라테스는 거북이다.
P2: 거북이는 200년 넘게 산다.
C: 소크라테스는 200 년 념게 산다.
라는 논증이 있고, 이 중 하나의 전제 (P1) 이 거짓이라고 보이는 것 (소크라테스는 거북이가 아닌 인간이다) 이 반박입니다. 그리고 저는 위 논증에서 거짓이라고 보인 전제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 반박을 하지 않았습니다. 논리학 공부를 더 하셔야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