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와 선거제 비판으로서의 추첨: 현대적 함의

아래 글: ( 관료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새 시대의 정치철학에 대해 )과 논쟁을 보고 생각나서 쓴 글입니다. 추첨제의 현실성에는 논쟁이 많지만 논의에 기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올립니다.
.
.
개요
민주주의는 오늘날 어딜 가나 보편적인 정치 체제로 자리 잡았지만, 흔히 근대 서구에서 발전한 대의제라는 방식이 현재의 시스템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을 고려했을 때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민주주의라는 가치 즉, 자유와 참여라는 민주주의의 본래 정신을 온전히 구현하고 있는지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필요할지 모른다. 여기에 대해 지금 대의제의 특징을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

  1. 선거를 통한 대표 선출과

  2. 그것을 뒷받침하는 대의체에 의한 임명방식으로 구성되는 국가기관들의 행정 관료체계

.
내 생각에 특히, 이것은 주로 추첨제를 바탕으로 했던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주의 모델과 현대 개념을 비교할 때, 선거제가 가진 문제점이 더욱 뚜렷해진다.
.
최근에도 대표적으로 버나드 마넹 교수(Manin 1995)와 자크 랑시에르(Rancière 2005)라는 철학자가 각각 『 대표 정부의 원칙』(1995),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2005) 라는 저서에서 이런 관점(-추점제와 선거제-)을 통해 현실 대의제 시스템에 대한 비판을 논하였다.
.
.

1.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와 추첨제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종종 민회 같은 곳에 사람들이 참여하는 직접 민주주의로 설명되지만, 그 핵심은 사실 시민들이 정부 운영에 광범위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했던 '추첨제(lot system)'에 있었다.

고대 아테네인들은 공직자와 행정 관료를 선출하는 방식으로 선거보다는 '추첨'을 더 공정한 방법으로 여겼다. 그들은 선거가 결국 부유층이나 웅변에 능한 엘리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공직자의 상당수를 추첨을 통해 선발함으로써, 모든 시민이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자 했다.

기원전 487-486년경, 클레이스테네스가 아르콘(집정관)직의 선출 방식을 추첨제로 변경한 이후, 이는 아테네 민주주의 실현에 중요한 제도로 자리 잡았다. 당시 추첨제는 부정 선거 및 부패의 위험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방안으로 여겨졌으며, 재산, 가문, 명성, 웅변 능력과 무관하게 모든 시민이 정치적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모든 부족이 동등한 자격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역할을 하면서, 아테네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평등을 실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솔론이 정치 개혁을 단행했을 당시, 집정관을 제외한 대부분의 공직은 미리 구성된 인력 풀에서 추천을 통해 선발되었다. 이후 공직자의 선출 방식도 점차 변화하여, 부족 간 선거를 통해 뽑던 행정관 및 집정관 역시 추첨을 통해 선출되는 방식이 자리 잡았다. 기원전 403년 개혁 이후, 약 700명의 공직자 중 600명 정도가 추첨으로 임명되었을 정도로 이 제도는 아테네 정치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일부 전문적 기술과 경험이 필요한 직책의 경우, 민회에서는 추첨이 아닌 선거를 통해 선발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장군직이나 군사 지도자뿐만 아니라, 군사 재무 담당관, 공공 재정 담당관, 감사관 등이 있었다. 이들은 일반 공직자와 마찬가지로 1년 임기였으나, 재선이 가능하여 임기에 대한 제한이 없었다.
.
.
2. 선거제의 문제점: 엘리트주의와 대의제의 한계
현대 민주주의에서 선거는 가장 중요한 제도로 여겨지지만, 어쩌면 이는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자들의 가치관과 비교했을 때,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며 사실상 민주주의의 이상을 훼손하는 요소가 많다. 핵심이 되는 문제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

  1. 선거는 본질적으로 통치 권력을 선거를 통해 특출난 재능이 있거나 전문가들에게만 부여하는 것을 중심으로 둔다.

  2. 시민들의 참여 범위가 특정 ‘의제’ 나 ‘정책’에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대의할 ‘사람’ 에 대해 몇 년에 한번 투표하는 것으로 제한된다.(Manin 1997)

.
첫째, 선거제는 엘리트 중심적이다. 정치인들은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과 인맥을 필요로 하며, 이는 정치가 소수의 기득권층에 의해 장악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현대 사회에서 정치는 점점 더 '전문가'와 '선거귀족'들의 영역이 되어가며, 일반 시민의 참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둘째, 선거제는 본질적으로 대의 민주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는 시민들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를 가로막는다. 유권자는 정책이 아니라 오직 사람에 대해서만 몇 년에 한 번 투표할 기회가 있을 뿐이다. 선출된 대표가 선거 이전 동안 어떤 정책을 펼칠지는 시민들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다. 이는 대중과 정치권 간의 괴리를 낳으며, 결과적으로 정치적 무관심과 불신을 증폭시킨다.

셋째, 선거제는 포퓰리즘과 선동 정치에 취약하다. 이에 따라 정책의 질보다 대중적 인기와 선거 전략이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
.
3. 추첨과 민주주의의 가치
추첨제는 시민들이 직접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든다.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핵심은 특정 엘리트가 아니라 누구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추첨을 통해 집정관을 지명하는 것은 민주적인 것이고 선거에 의한 것은 과두적이라는 것이다. 재산 자격에 기초하지 않은 것이 민주적인 것이고, 그에 대한 제한이 있는 것은 과두적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렇듯 ‘추첨은 민주적이고 선거는 과두적이다’ 라고 주장하면서 지금의 우리의 상식을 벗어나는 사고를 보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선거는 통치 권력을 선거를 통해 그만큼 필요한 부가 있고 특출난 재능이 있거나 특정 전문가들에게만 부여하게 만들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추첨은 민주적인 성향을 지니고 선거는 본래적으로 과두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비판자로 알려진 플라톤(Platon)이 비판했던 고대 민주주의 핵심 원칙 또한 현자와 참주 둘다 당선될 가능성이 있던 선거제가 아닌 이 추첨제에 있었다.(Rancière 2005)

‘철인통치’ 개념을 주장한 플라톤에게 추첨제는 ‘오직 특정한 사람들만 통치할 자격이 있다’ 는 자신의 관점에 근본적으로 배반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크 랑시에르(2005)는 이것을 우연에 근거한 일곱 번째 자격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일곱 번째 자격은 바로 자격이 결여된 자격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만들어내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 그것은 신이 즐기는 우연성의 놀이이며, 정당성의 원리처럼 스스로를 쇄신하는 자연의 놀이인 것이다. (...) 민주주의의 스캔들은 통치자격의 문제로서, 이 자격은 사회관계를 이끌어 나가는 자들과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즉 인간사회의 협약이나 자연법칙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그런 자격인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우월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기초하는 통치원리라고 할 수 있다.
-자크 랑시에르,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p95-96-

.
.
추첨제와 선거제의 비교와 결론
물론 현대 국가에서 모든 공직을 추첨제로 운영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선거제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부분적인 추첨제 도입을 고려할 수 있을 지는 모른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의 일부를 무작위로 선발하거나, 정책 결정을 위한 시민 패널을 정기적으로 운영하는 방안이 가능할 수 있다.

오늘날 일부 국가에서 시행되는 시민배심원제(jury system)나 시민의회(citizens' assembly)와 같은 제도는 이를 현대적으로 적용한 예다.

아테네의 정치 기구가 추첨제를 기반으로 운영되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아테네 민주정치는 단순한 구호로서 '인민의 통치'가 아닌, 모든 시민이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지위를 번갈아 가며 경험할 수 있는 동등한 기회의 평등을 전제로 삼고 있었다. 특히 공직의 주기적인 교체는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요소였다. 즉, 통치할 권리는 피통치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된다는 원칙이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개념이었다.

추첨제는 이러한 민주주의적 가치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특정 집단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방지하고, 한정된 세력이 정치적 영향력을 지나치게 확장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또한, 아테네인들은 정치에 대한 특정 귀족, 계급 중심의 운영 방식에 대한 불신이 깊었기 때문에, 추첨제를 도입함으로써 공직을 원하는 모든 시민이 동등한 확률로 통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현대 민주주의는 선거제를 중심으로 운영되면서 점점 더 시민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한하고 있다. 선거제는 필연적으로 엘리트 중심으로 작동하며, 이는 유권자의 실질적 참여를 보장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진다.
.
.
참고문헌:
자크 랑시에르,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허경 역, 인간사랑, 2011년,
버나드 마넹, 『선거는 민주적인가』, 곽준혁 옮김, 후마니타스, 2015년(8쇄).
.
.
또한 참고할 글:

612.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일곱 번째 원리" : 네이버 블로그

5개의 좋아요

선거는 민주적인가라는 책에서 이 문제를 다뤘던 게 기억나네요. 현재 국회의원들 대부분이 50대 이상 남성, 그리고 법률가 출신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과연 선거가 국민들을 잘 대표하는 국회를 구성하는 제도인지는 의문이 들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다만, 선출직이기 때문에 지지자들의 이익과 의견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 선거에 장점이라고 여겨질 수 있겠죠. 바라보는 시야가 다르면 행동도 달라지기 때문에, 출신 성분이 같다고 해서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기를 기대하는 것보다, 선거라는 명확한 피드백 시스템이 그들을 더욱 유권자 친화적이게 만들 수 있습니다. 또한, 과거보다 지지율 조사 주기가 짧다보니 유권자의 이익에 더욱 민감해지겠죠. (피드백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빠를 수록 행동의 변환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1개의 좋아요

그렇죠. 그런데 문제는 선거도 선거이지만 글에서 이야기했듯이 선거도 행정부와 입법부에 일부 영역에서 대의 할 사람에 대해서만 좁게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치적 중립을 위해 당연하게 여겨지는 거지만 현대국가에서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 같은 사법부는 선거를 아예 하지 않고 민의로부터도 일정 부분 이상 떨어져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중립을 위해 당연하다고 하지만 어쨌든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라고는 할 수 있을 겁니다)

또 시민들의 일상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침에도 선거로 뽑힌 대의체에 의해 임명된다는 방식으로 선거로 뽑히지 않는 주요 관직들과 국가 행정관료들이 아주 많죠.

물론 현대 사회에 행정관료 일 같이 그런 건 어쩔 수 없이 기술자나 전문가가 해야 하지 않느냐고 당연히 이야기하시겠지만

애초에 또 이야기하듯이 고대 그리스에서 추첨제 방식으로 관직들이 운영되던 것도 그런 '특정 사람들만 자격이 있다.' 라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면이었기도 하고요.

먼저 있었던 밑에 글. 관료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새 시대의 정치철학에 대해 - sophisten 님의 게시물 #2 의 내용에도 이런 것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감이 있었죠.

2개의 좋아요

넵. 다만, 저는 선거제, 추첨제 여부 때문에 민의로부터 떨어져서 활동한다는 비판에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는 거 같아요. 아마 그 추정에는 추첨제로 인해 나와 같은 사회적 속성(성별, 연령대, 직업, 재산 규모 등)을 가진 사람이 나의 대표일 때 나의 이해관계를 더 잘 대변해줄 것이라는 추정이 포함되어 있는 거 같습니다. 하지만 위에 댓글에도 얘기해드렸듯이, 그러한 이해관계를 더 잘 대변하게 만들어주는 건 선거와 여론조사와 같은 피드백 시스템이라고 생각합니다. 출신지가 같다고 해도 권력을 얻고 보게 되는 시선이 달라지게 되면 그 사람이 과연 저의 이해관계를 잘 대변해줄지는 불확실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주요 관직과 국가 행정 관료들도 많은 관직들이 선출직(대통령, 혹은 국회 동의 등)이 임명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대법관이랑 헌법재판소 판사들이 아마 그런 절차를 통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