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순전히 제도적 관점에서만 보자면, 개신교의 경우 이단의 판정은 각 교단의 정기 총회에서 결정됩니다. 물론, 대표적인 몇몇 집단의 경우 대부분의 국내 교단들이 공통적으로 '이단'으로 분류하기는 하지만, 교단의 신학적 입장에 따라 이 분류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따라서 (a) 교단의 총회를 통해 공적으로 결정되지 않은 사안에 대해 함부로 '이단' 판정을내리거나, (b) 단순히 한 가지 신학적 입장만으로 다른 입장을 '이단'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다지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단에 대한 판정은 특정한 성도나 목사가 개인적으로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교단이 공적으로 내려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2) 더군다나, '신학'이라는 학문으로 들어가면 단순히 정통 교의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이단이라고 손쉽게 규정해 버릴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애초에 신학 자체가 무엇을 '정통'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무엇을 '교의'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의 장이니 말이죠. 그래서 신학적 논쟁에서는 대단히 급진적인 주장들도 얼마든지 제시될 수 있고 변호될 수 있습니다. 가령,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알버트 슈바이처 같은 학자가 예수를 '실패한 종말론자'로 설명한다고 해서 그의 논의 자체를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 제임스 던 같은 학자가 신약성서에 '고기독론'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쉽게 말해, 초대 교회는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지 않았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의 논의 자체를 이단적인 것으로 보는 사람은 없죠. 오히려 슈바이처든지 던이든지, 설령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해도, 그들이 한 시대를 뒤흔든 대단히 위대한 신약학자들이라는 점만큼은 인정되죠.
(3) 저는 <너진똑> 영상이 딱히 '이단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신학적 전문 지식이 부족한 일반 독자의 관점에서 성서를 해석하고자 한 시도이다 보니, 허술한 점은 많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전문적인 학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 이상, 저는 일반 독자나 성도의 지평에서는 어느 정도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해석은 허용될 만하다고 봅니다. 물론, 그런 해석을 바탕으로 성서신학이나 조직신학에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그래서 교회 내에 최소한의 신학적 상식들이 널리 퍼질 수 있게 된다면 더 좋은 일이겠죠.
(4) 제 개인적인 경험을 좀 적어보겠습니다. 저는 대학교 신입생 시절에 <신학개론>을 수강했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그 수업을 담당하셨던 선생님은 독일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하신 개신교 신학자셨는데, 매우 급진적인 신학관을 가지고 계셨죠. 그분은 (i) 만인구원론을 주장하셨고, (ii) 삼위일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셨고, (iii) 예수는 단지 신의 구원계획을 위해 사용된 한 명의 인간이라고 보셨고, (iv) 성령은 신적 지혜를 상징할 뿐이며 독립된 인격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셨죠. 개인적으로, 저는 이 수업을 매우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종강 이후로도 몇 년 간 다른 학생들과 그 선생님이 주도하시는 성서 연구 모임에 참석했을 정도이니 말이에요. 저는 그 선생님과 여러 신앙적인 주제에서 의견이 달랐지만, 그 선생님께서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제기하신 문제의식과 도전들 때문에 성서를 아주 새로운 관점에서 세밀하게 읽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또 ‘만인구원론’에 대해서도 상당부분 수긍하게 되었는데, 제가 그 선생님처럼 직접적으로 이 주장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아니지만, 위르겐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이 준 영향과 함께 지금 제 입장은 이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습니다.
(5) 그런데 이렇듯 기존 그리스도교의 신앙관과는 매우 상이한 주장들을 펼치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그 선생님은 여전히 ‘개신교 신학자’로서 교회나 학계 내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물론, 주류 신학과 맞지 않기 때문에 그 내부에서 충돌은 굉장히 많은 것 같습니다.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실 때도 지도교수와 엄청나게 갈등이 있었다고 하셨던 데다, 지금도 여전히 다른 신학자들의 구설수에 오르는 논쟁 대상으로 남아 계시죠. 그렇지만 개신교 신학계에서 누구도 그 선생님을 향해 함부로 ‘이단’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 분은 계속해서 논문을 쓰며 자기 주장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의 논쟁에 뛰어들기 때문입니다. 학계에서 여러 검증의 잣대에 자신을 개방해 놓고 싸우는 한, 비록 소수의 의견이 될 지언정 진지하게 자기 분야를 탐구하는 학자로서는 남을 수 있습니다. 학자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가리는 중요한 기준은 그가 다른 학자들과의 게임 속에 들어와 있는지, 그 밖에서 혼자만 따로 놀고 있는지에 있습니다. 일단 게임의 장에서 치고받는 동안은 학자이죠. 그러나 게임에 참여하지도 않은 채 밖에 머물며 자신이 게임을 제일 잘 한다고 우겨보아야 그 누구도 학자라고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6) 감리교 신학대학교의 고 변선환 학장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과거에는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였다고 해서 이단으로 몰려 파문당했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변선환 학장을 이단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당시에 변선환 학장을 이단으로 몰아간 사람들이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죠. 지금 변선환 학장은 거의 감리교 신학대학교의 정신적인 뿌리처럼 남아 있는 듯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여기서도 게임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변선환 학장은, 그가 아무리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주장을 하였어도, 자기가 쓴 글들로 학자들의 게임에서 계속적으로 대화할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죠. 그는 레이몬드 파니카, 존 힉, 한스 큉, 루돌프 불트만 같은 신학자들을 수용하고 그 바탕 위에서 자기 주장을 전개하였으니까요. 반면 변선환 학장을 이단이라 비난한 이들은 이러한 게임을 전혀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다만 게임 밖에서 열심히 분노하였을 뿐이죠.
(7) 그래서 저는 '이단'이란 단순히 내용적으로 규정될 수가 없다고 봅니다. 이단이냐 아니냐는, 상대와 대화하고자 하는 태도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죠. 저는 대학을 다니며 학교 주변에 있는 그리스도교 이단들을 상당히 많이 만났습니다. 서강대의 근처에는 특히 안상홍을 재림 예수로 믿고, 그의 아내 장길자를 어머니 하나님이라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교회' 전도팀이 자주 나타납니다. 지금까지 거의 10번은 넘게 만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만날 때마다 패턴이 비슷합니다. 이야기를 하다가도 자기들이 막히는 부분에서는 짜증을 내며 사람을 쫓아버리거든요. 지나가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고, 동영상을 시청하게 한 다음 소감을 이야기하게 한 것은 그쪽인데, 말을 시작시켜 놓고서 정작 불리하면 도망치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전도를 하고 싶었으면 저를 설득하거나, 최소한 말을 먼저 건 만큼만이라도 제 말을 들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해서요.
(8) 몇 년 전에 주일 예배가 끝나서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이분들이 신촌역 근처에서 전도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길을 가던 저에게 UCC를 한 번 보고 가라고 말씀하셨지만, 귀찮다고 느껴서 그냥 기숙사로 돌아왔죠. 그런데 돌아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소크라테스의 제자'라고 하는 철학과 학생으로서 시장터로 나가 먼저 질문을 던지지는 못할 망정, 말 걸어오는 사람을 내버려두는 것이 별로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신촌도 산책할 겸 다시 가서 그분들을 환대(?)해 드렸죠. 그분들은 역시나 지나가는 저를 다시 한 번 붙잡았고, 저는 잠잠히 그분들의 동영상을 감상한 다음, 그분들의 설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드렸습니다. 그분들이 가만히 앉아 있는 저에게 몇 번이나 반응과 대답을 요청하기에 그제서야 말을 시작하였죠.
(9) 저는 '엘로힘(Elohim)'이라는 단어가 남성복수명사라서 그분들이 생각하는 식의 창세기 해석은 나올 수가 없다는 점을 아주 조곤조곤하게 지적해 드렸어요. 그분들은 '엘로힘'이 남자 하나님인 안상홍과 여자 하나님인 장길자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표현이라고 주장하시거든요. 하지만 어머니 하나님이신 장길자 선생님께서 남성이 아닌 이상, 아버지 안상홍 선생님과 어머니 장길자 선생님을 모두 포괄해서 남성복수명사인 "엘로힘"이라고 부를 수가 없죠. 심지어 '엘로힘'을 그리스어로 번역할 때는 '호 테오스(ho theos)'라는 남성명사가 사용되기도 하죠. 예전에는 이 점을 지적하면서 "혹시 장길자씨는 남자인가요?"라고 짓궂게 질문하기도 했는데, 저도 요즘 길에서 이야기하는 거에 흥미를 잃어서 그 날은 그렇게까지 몰아세우지는 않았습니다.
(10) 또 요한계시록 22:17에 있는 '성령'과 '신부'를 근거로, '성령'은 안상홍 하나님이고 '신부'는 장길자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하시길래 거기에도 대답해 드렸습니다. 그분들은 '신부'가 생명수를 준다고 주장하면서, 생명수를 주는 주체는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고 해석을 하거든요. 하지만 애초에 그 구절의 원문인 "카이 토 프네우마 카이 헤 뉨페 레구신 에르쿠(Kai to Pneuma kai he nymphe legousin Erchou)"는 성령과 신부가 사람들을 향해, 오시는 예수에게 가서 생명수를 받으라고 권면하는 말이지, 자신들이 직접 생명수를 준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고 설명해 드렸죠. 제 말에 대답은 못하시고 어물쩡 '안식일' 문제로 넘어가려 하시길래 논점을 일탈하지 말라고도 못 박아드렸고요.
(11) 거의 네 분에게 둘러 쌓여 있었는데, 설명을 하시던 한 남자분은 흥분하셔서 언성을 높이시며 핏대를 세우셨고, 다른 여자분은 이야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풀리지 않자 대화가 진행될 수록 짜증스럽다는 듯이 저에게 틱틱거렸습니다. 결국 그분들이 자기들은 점심 먹으러 가야 한다면서 저보고도 어서 가던 길 가라고 떠밀어 내시는 바람에 쫓겨났죠. 그런데 서점 잠시 들렀다가 다시 그 자리로 가 보니 여전히 계시더라고요.
(12) 문제는 대화를 하려고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대화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는 '하나님의 교회'나 '신천지' 같은 이단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죠. 오히려 기존 교회에서 신실하다고 하는 성도들 중 태반이 이런 식의 이단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전에 처음 알게 된 어느 대형 교회 청년부 부목사님에게 매우 기분 나쁜 대우를 받은 적이 있어요. 그 목사님은 제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의견을 주장한다고 해서,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는, 제가 그 목사님이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을 던졌다고 해서, 저를 다짜고짜 교회 공동체를 무너뜨리려는 적처럼 규정해버리시더라고요. 제 자신이 분명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임을 밝히고, 제가 한 말들이 남들을 시험하려는 것이 아니라 평소 고민이었다는 것을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에게 돌아온 대답은 "너는 아직 우리 교회 입교식을 치르지 않았으니 우리 교회 공동체가 아니다."라는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교회가 다른 이단들을 비판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교회 내에 있는 이런 '이단적' 면모를 점검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