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드립니다! (유튜버 너진똑 기독교 4부 영상 관련)

저는 문학과 철학, 신학을 사랑하는 고등학생입니다. 즉 마음만 앞서고, 지식과 지혜의 폭은 개정 교육과정의 검인정 교과서를 넘어서지 못하는 부족함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제현들께 제가 가지고 있는 의문점을 조금이나마 여쭙고, 포신의 방향을 명확히 하기 위해 글을 남겨봅니다. 혹여 문제가 된다면 즉시 삭제조치 하겠습니다.

https://naver.me/x67rxz6g

위 링크는 유튜버 '너진똑(너 진짜 똑똑하다)'의 영상 및 대본 링크입니다. 이 유튜버는 책의 내용을 각색 및 재편집하여 소개하는 것이 주된 컨탠츠이고, 종교 또한 그 소재 중 하나입니다.
얼마 전에는 기독교를 컨탠츠로 삼아 공부하던 중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하여 큰 화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질문드리고 싶은 것은 기독교 컨탠츠 4부의 내용 및 이단의 범주입니다. (1편은 구약 내용 정리, 2편은 아가페, 3편은 푯대, 성육신입니다.)

기독교 컨탠츠 4부의 주된 내용은
"모세의 영이 타인을 죽이는 "만군(군대)의 주"를 만들었고, 만군의 주의 종들이 문제를 일으켜 왔다. 이 모든 내용과 구절이 성서에서 반면교사로 활용된다. 이렇게 하면 이해가 안 되는 구절도 훨씬 자연스럽게 읽힌다."입니다.

소거된 맥락이 많아 오해가 생길까 두렵지만, '예수님'의 공의가 '살인과 폭력'의 방식으로 행해지지 않음과 요한이 증언한 예수님이 아가페를 으뜸으로 내세웠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모세와 연결되는 "군대의 하나님"과 관련된 내용을 부정적으로, 예수님과 연결되는 "평화의 하나님"과 관련된 내용을 긍정적으로 읽어내는 시도가 영상에 담겨있습니다.

당연히 기존 기독교층에서는 회의적인 반응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심하게 반응하시는 분들은 "이단이다"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질문은
(가) 성서의 해석에서 예수 이외의 인물(모세, 예레미아 등)의 역할이 바뀌더라도 이단인가?(성서 해석에서의 자율성은 어디까지 보장받을 수 있는가?)
(나) 그리스도인의 범주는 어디까지인가? ('예수'를 믿지만, 천국과 지옥의 세계관을 믿지 못하여도 그리스도인인가?)
입니다. 둘 다 지식과 정돈을 요구하는 질문이지, '철학적 질문'은 아니지요. 정말 죄송합니다.

(가)와 (나) 모두 너진똑이 ‘삼위일체’ '성경무오' '이신칭의' '육채적 부활' '오직 그리스도' '재림'과 같은 키워드를 가져가고, 영지주의, 다원주의와 선을 긋고 있음에도 이단이라고 불리기에, 또 저의 부족함으로 그분들의 진의를 잘 이해하지 못하기에 남겼습니다. 공부를 해나감에 있어 참고할 만한 서적이 있으시면 편하게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짧게라도 고견 남겨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항상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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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전히 제도적 관점에서만 보자면, 개신교의 경우 이단의 판정은 각 교단의 정기 총회에서 결정됩니다. 물론, 대표적인 몇몇 집단의 경우 대부분의 국내 교단들이 공통적으로 '이단'으로 분류하기는 하지만, 교단의 신학적 입장에 따라 이 분류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따라서 (a) 교단의 총회를 통해 공적으로 결정되지 않은 사안에 대해 함부로 '이단' 판정을내리거나, (b) 단순히 한 가지 신학적 입장만으로 다른 입장을 '이단'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다지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단에 대한 판정은 특정한 성도나 목사가 개인적으로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교단이 공적으로 내려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2) 더군다나, '신학'이라는 학문으로 들어가면 단순히 정통 교의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이단이라고 손쉽게 규정해 버릴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애초에 신학 자체가 무엇을 '정통'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무엇을 '교의'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의 장이니 말이죠. 그래서 신학적 논쟁에서는 대단히 급진적인 주장들도 얼마든지 제시될 수 있고 변호될 수 있습니다. 가령,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알버트 슈바이처 같은 학자가 예수를 '실패한 종말론자'로 설명한다고 해서 그의 논의 자체를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 제임스 던 같은 학자가 신약성서에 '고기독론'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쉽게 말해, 초대 교회는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지 않았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의 논의 자체를 이단적인 것으로 보는 사람은 없죠. 오히려 슈바이처든지 던이든지, 설령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해도, 그들이 한 시대를 뒤흔든 대단히 위대한 신약학자들이라는 점만큼은 인정되죠.

(3) 저는 <너진똑> 영상이 딱히 '이단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신학적 전문 지식이 부족한 일반 독자의 관점에서 성서를 해석하고자 한 시도이다 보니, 허술한 점은 많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전문적인 학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 이상, 저는 일반 독자나 성도의 지평에서는 어느 정도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해석은 허용될 만하다고 봅니다. 물론, 그런 해석을 바탕으로 성서신학이나 조직신학에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그래서 교회 내에 최소한의 신학적 상식들이 널리 퍼질 수 있게 된다면 더 좋은 일이겠죠.

(4) 제 개인적인 경험을 좀 적어보겠습니다. 저는 대학교 신입생 시절에 <신학개론>을 수강했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그 수업을 담당하셨던 선생님은 독일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하신 개신교 신학자셨는데, 매우 급진적인 신학관을 가지고 계셨죠. 그분은 (i) 만인구원론을 주장하셨고, (ii) 삼위일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셨고, (iii) 예수는 단지 신의 구원계획을 위해 사용된 한 명의 인간이라고 보셨고, (iv) 성령은 신적 지혜를 상징할 뿐이며 독립된 인격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셨죠. 개인적으로, 저는 이 수업을 매우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종강 이후로도 몇 년 간 다른 학생들과 그 선생님이 주도하시는 성서 연구 모임에 참석했을 정도이니 말이에요. 저는 그 선생님과 여러 신앙적인 주제에서 의견이 달랐지만, 그 선생님께서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제기하신 문제의식과 도전들 때문에 성서를 아주 새로운 관점에서 세밀하게 읽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또 ‘만인구원론’에 대해서도 상당부분 수긍하게 되었는데, 제가 그 선생님처럼 직접적으로 이 주장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아니지만, 위르겐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이 준 영향과 함께 지금 제 입장은 이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습니다.

(5) 그런데 이렇듯 기존 그리스도교의 신앙관과는 매우 상이한 주장들을 펼치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그 선생님은 여전히 ‘개신교 신학자’로서 교회나 학계 내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물론, 주류 신학과 맞지 않기 때문에 그 내부에서 충돌은 굉장히 많은 것 같습니다.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실 때도 지도교수와 엄청나게 갈등이 있었다고 하셨던 데다, 지금도 여전히 다른 신학자들의 구설수에 오르는 논쟁 대상으로 남아 계시죠. 그렇지만 개신교 신학계에서 누구도 그 선생님을 향해 함부로 ‘이단’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 분은 계속해서 논문을 쓰며 자기 주장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의 논쟁에 뛰어들기 때문입니다. 학계에서 여러 검증의 잣대에 자신을 개방해 놓고 싸우는 한, 비록 소수의 의견이 될 지언정 진지하게 자기 분야를 탐구하는 학자로서는 남을 수 있습니다. 학자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가리는 중요한 기준은 그가 다른 학자들과의 게임 속에 들어와 있는지, 그 밖에서 혼자만 따로 놀고 있는지에 있습니다. 일단 게임의 장에서 치고받는 동안은 학자이죠. 그러나 게임에 참여하지도 않은 채 밖에 머물며 자신이 게임을 제일 잘 한다고 우겨보아야 그 누구도 학자라고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6) 감리교 신학대학교의 고 변선환 학장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과거에는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였다고 해서 이단으로 몰려 파문당했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변선환 학장을 이단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당시에 변선환 학장을 이단으로 몰아간 사람들이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죠. 지금 변선환 학장은 거의 감리교 신학대학교의 정신적인 뿌리처럼 남아 있는 듯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여기서도 게임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변선환 학장은, 그가 아무리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주장을 하였어도, 자기가 쓴 글들로 학자들의 게임에서 계속적으로 대화할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죠. 그는 레이몬드 파니카, 존 힉, 한스 큉, 루돌프 불트만 같은 신학자들을 수용하고 그 바탕 위에서 자기 주장을 전개하였으니까요. 반면 변선환 학장을 이단이라 비난한 이들은 이러한 게임을 전혀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다만 게임 밖에서 열심히 분노하였을 뿐이죠.

(7) 그래서 저는 '이단'이란 단순히 내용적으로 규정될 수가 없다고 봅니다. 이단이냐 아니냐는, 상대와 대화하고자 하는 태도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죠. 저는 대학을 다니며 학교 주변에 있는 그리스도교 이단들을 상당히 많이 만났습니다. 서강대의 근처에는 특히 안상홍을 재림 예수로 믿고, 그의 아내 장길자를 어머니 하나님이라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교회' 전도팀이 자주 나타납니다. 지금까지 거의 10번은 넘게 만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만날 때마다 패턴이 비슷합니다. 이야기를 하다가도 자기들이 막히는 부분에서는 짜증을 내며 사람을 쫓아버리거든요. 지나가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고, 동영상을 시청하게 한 다음 소감을 이야기하게 한 것은 그쪽인데, 말을 시작시켜 놓고서 정작 불리하면 도망치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전도를 하고 싶었으면 저를 설득하거나, 최소한 말을 먼저 건 만큼만이라도 제 말을 들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해서요.

(8) 몇 년 전에 주일 예배가 끝나서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이분들이 신촌역 근처에서 전도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길을 가던 저에게 UCC를 한 번 보고 가라고 말씀하셨지만, 귀찮다고 느껴서 그냥 기숙사로 돌아왔죠. 그런데 돌아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소크라테스의 제자'라고 하는 철학과 학생으로서 시장터로 나가 먼저 질문을 던지지는 못할 망정, 말 걸어오는 사람을 내버려두는 것이 별로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신촌도 산책할 겸 다시 가서 그분들을 환대(?)해 드렸죠. 그분들은 역시나 지나가는 저를 다시 한 번 붙잡았고, 저는 잠잠히 그분들의 동영상을 감상한 다음, 그분들의 설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드렸습니다. 그분들이 가만히 앉아 있는 저에게 몇 번이나 반응과 대답을 요청하기에 그제서야 말을 시작하였죠.

(9) 저는 '엘로힘(Elohim)'이라는 단어가 남성복수명사라서 그분들이 생각하는 식의 창세기 해석은 나올 수가 없다는 점을 아주 조곤조곤하게 지적해 드렸어요. 그분들은 '엘로힘'이 남자 하나님인 안상홍과 여자 하나님인 장길자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표현이라고 주장하시거든요. 하지만 어머니 하나님이신 장길자 선생님께서 남성이 아닌 이상, 아버지 안상홍 선생님과 어머니 장길자 선생님을 모두 포괄해서 남성복수명사인 "엘로힘"이라고 부를 수가 없죠. 심지어 '엘로힘'을 그리스어로 번역할 때는 '호 테오스(ho theos)'라는 남성명사가 사용되기도 하죠. 예전에는 이 점을 지적하면서 "혹시 장길자씨는 남자인가요?"라고 짓궂게 질문하기도 했는데, 저도 요즘 길에서 이야기하는 거에 흥미를 잃어서 그 날은 그렇게까지 몰아세우지는 않았습니다.

(10) 또 요한계시록 22:17에 있는 '성령'과 '신부'를 근거로, '성령'은 안상홍 하나님이고 '신부'는 장길자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하시길래 거기에도 대답해 드렸습니다. 그분들은 '신부'가 생명수를 준다고 주장하면서, 생명수를 주는 주체는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고 해석을 하거든요. 하지만 애초에 그 구절의 원문인 "카이 토 프네우마 카이 헤 뉨페 레구신 에르쿠(Kai to Pneuma kai he nymphe legousin Erchou)"는 성령과 신부가 사람들을 향해, 오시는 예수에게 가서 생명수를 받으라고 권면하는 말이지, 자신들이 직접 생명수를 준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고 설명해 드렸죠. 제 말에 대답은 못하시고 어물쩡 '안식일' 문제로 넘어가려 하시길래 논점을 일탈하지 말라고도 못 박아드렸고요.

(11) 거의 네 분에게 둘러 쌓여 있었는데, 설명을 하시던 한 남자분은 흥분하셔서 언성을 높이시며 핏대를 세우셨고, 다른 여자분은 이야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풀리지 않자 대화가 진행될 수록 짜증스럽다는 듯이 저에게 틱틱거렸습니다. 결국 그분들이 자기들은 점심 먹으러 가야 한다면서 저보고도 어서 가던 길 가라고 떠밀어 내시는 바람에 쫓겨났죠. 그런데 서점 잠시 들렀다가 다시 그 자리로 가 보니 여전히 계시더라고요.

(12) 문제는 대화를 하려고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대화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는 '하나님의 교회'나 '신천지' 같은 이단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죠. 오히려 기존 교회에서 신실하다고 하는 성도들 중 태반이 이런 식의 이단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전에 처음 알게 된 어느 대형 교회 청년부 부목사님에게 매우 기분 나쁜 대우를 받은 적이 있어요. 그 목사님은 제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의견을 주장한다고 해서,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는, 제가 그 목사님이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을 던졌다고 해서, 저를 다짜고짜 교회 공동체를 무너뜨리려는 적처럼 규정해버리시더라고요. 제 자신이 분명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임을 밝히고, 제가 한 말들이 남들을 시험하려는 것이 아니라 평소 고민이었다는 것을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에게 돌아온 대답은 "너는 아직 우리 교회 입교식을 치르지 않았으니 우리 교회 공동체가 아니다."라는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교회가 다른 이단들을 비판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교회 내에 있는 이런 '이단적' 면모를 점검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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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윤님 유튜브로 시작해서 답변이 기쁘네요.ㅎㅎ
명료하고 친절하게 답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혹시 (나)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답변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예수를 따르면 기독교인이다' 와 '기독교의 세계관을 따라야 기독교인이다' 중 어떤 정의가 주류의 의견과 가까운지 궁금해서요.

제가 목회자도 아니고 신학 전공자도 아니라서, 직접적인 답변을 드리기보다는 그 주제와 관련해서 인상적으로 읽은 몇 권의 책을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20세기 개신교 신학의 천재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디트리히 본회퍼의 유명한 저서입니다. 예수를 '따른다(nachfolgen)'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산상수훈을 중심으로 해설하는 내용입니다. 동시대의 철학에서 비트겐슈타인이 '규칙 따르기(rule-following)'라는 유명한 철학적 논의를 제시하였는데, 본회퍼는 정확히 거기에 대응하는 신학적 논의를 제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규칙을 이해하는 것과 규칙을 사용하는 것이 분리될 수 없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처럼,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과 예수의 가르침대로 행동하는 것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 본회퍼의 주장입니다.

가령, 덧셈 규칙을 이해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덧셈을 하나도 제대로 못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사실 덧셈 규칙을 전혀 이해하지조차 못하는 것입니다. 사용은 못하지만 이해는 하는 상황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런 허구적 상황을 상정하려는 태도는 '이해'를 사적이고, 내적이고, 신비적인 대상으로 만들어버려서, 결국 무엇이 이해이고 무엇이 이해가 아닌지 말할 수조차 없게 될 뿐입니다. 비트겐슈타인과 본회퍼는 모두 구체적인 '실천' 혹은 '수행'의 맥락과 분리된 의미 이해가 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하는 것이죠. (심지어, 그 둘은 모두 규칙 혹은 율법을 '해석'을 통해 이해하려는 시도가 무한퇴행에 빠진다고 공통적으로 지적하기도 합니다.)

성서 해석학자인 앤서니 티슬턴의 책입니다. 기독교 교리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1-2장에서 아주 탁월하게 해설하고 있습니다. 티슬턴은 비트겐슈타인, 오스틴, 프라이스 같은 철학자들이 제시한 발화 수행 이론과 성향 이론을 바탕으로, '믿는다'는 것이 단순히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공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성향이라고 주장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내일 아침에는 중요한 수업이 있으니까, 일찍 일어나야 해!"라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밤 늦게 딴짓을 하다가 잠이 들어서 수업에 지각을 하였다면, 그 사람은 실제로는 그 수업이 '중요한' 것이라고 믿고 있지 않았다고 평가되어야 한다는 거죠.

바로 이런 철학적 논의를 교의학에도 그대로 적용하여서, 기독교인이 교리를 '믿는다'고 할 때는 반드시 그 믿음을 공적인 장에서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티슬턴은 강조합니다. 단순히 "나는 기독교인이다."라는 자기 발화나 자기 확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고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는지가 그 사람이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가령, "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진리라고 믿어!"라고 말하면서 정작 위험에 빠진 사람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예수의 그 비유를 진리라고 믿지 않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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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짖꿏었는데 ㅎㅎ 친절히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배워보겠습니다!!

  1. 이단은 단순히 어떤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공동체에서 수용 불가능함이 심각한 정도여서 배척해야 하는 부류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사람과 밥도 먹지 말고 같이 놀지도 말고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예를들어, 내가 복지 축소를 외치는 사회단체에 속해서 활동하는데 그 단체에서 복지 확대를 외치는 사람을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아닐 겁니다. 이러한 의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1. 기독교인의 정의는 대충 사회에서 적당히 합의된(기독교계 이단이나 사이비를 포함해서)것으로 받아들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나는 참된 예수를 믿고 너는 거짓 믿음이다 이런 구분 말고 예를들어 아브라함계 종교 하면 믿음에 대한 가치평가 없이 개신교 정교회 카톨릭 이슬람 바하이 드루즈...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사회에서 적당히 합의된 내용으로 만족하면 될 것 같습니다.
  1.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이단'이라는 인식이 전제될 경우, 토의의 길이 막히기에(선생님께서 적시하셨듯 배척하는 경향이 커지기에) 성서해석에 있어 '오직 예수'이외에 그리스도인이 챙겨야 할 인물의 특정한 상像이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2. 이 부분은 조금 더 고민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1) 개인적인 이야기를 드리면, 저는 '주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보혜사'가 증언한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렇기에 불신지옥을 믿지 않고, 동성애자를 죄인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때 제 나름의 근거가 있다고 해도 저의 사상은 '보편적인' 기독교의 사상과 괴리가 있습니다. 이때 사상의 연원이 '예수'라면 그들(불신지옥을 강조하고, 동성애자를 죄인으로 여기는 신을 믿는 사람들로 한정하여서)의 '예수'와 제가 믿는 '예수'를 같은 신으로 모실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물론 '이들을 배척하자', '다르게 생각하자'는 주장은 전혀 아닙니다. 또한 일반적 인식에서의 '불신지옥'이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불신지옥'과는 결이 다르다는 점도 확고히 해야 하겠지요.) 즉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사용하여도 되는가?라는 의문이 드는 것이지요.
    (2) 이런 맥락에 기대어 교회 내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에 있어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와 '기독교 내의 자체적 세계관을 받아들인 자'를 구분하고 있는지가, 그렇다면 주류는 어떻게 보는가가 궁금했습니다. 이 부분도 너진똑이 비판을 받는 부분이라서요 ㅎㅎ
    지금은 위 질문이 딱히 쓸데없다고 믿습니다. 도구적으로 세계관의 역할을 위축시키는 것 같아 조심스럽지만, 결국 세계관을 믿는 것도 '세상에서, 모두에게, 사랑을 행하라'라는 계명을 위함이지 않을까, 적어도 그런 이유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실 배움의 부족함에서 나오는 질문 같아서...부끄럽네요ㅎㅎ 많은 지적이 필요합니다!!

사실 전문적인 입장에서 이 해석 부분은 실제로 사실적으로 문제가 있는 해석이긴합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이단으로 평가받는 마르시온이 했던 주장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선 마르시온이 이 주장을 해서 이단이라고 규정하기보다 좀 더 건설적으로 가기 위해선 그렇다면 구약성서가 정경으로서 규범을 없는가 하는 문제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구약성서의 정경성에 대해 의문시하는 신학자들 가운데 마르시온에 대해 굉장히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학자도 있습니다.(아돌프 폰 하르낙) 더구나 현대 주석학적으로 엄밀하게 해석하면 모세의 군대와 전쟁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거 자체가 문제가 있긴 합니다.
이 모든 주제를 제외하고 이단과 정통의 문제는 사실 현대신학에서 큰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일단 법으로서 교리 개념이 사라진 현대상황에서 교리적 이단은 실제로 사이비종교와의 문제 영역이지 교회 내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히 성서 해석에 관해서는 일반적 평신도나 대중이 생각하는 것보다 엄청난 자유가 보장되어 있으며, 몇가지 급진적 표현과 해석이 등장한다고 해도 논쟁과 담론의 형성 가운데 자연스럽게 정리되고 다양한 입장이 그 가운데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으로 해당 유투브도 이 진술이 구약의 정경성과 관련되는 신학적 함의가 담겨있음을 생각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다양한 자유로운 성서묵상 가운데 하나라고 보시면될 거 같습니다.
(여담이지만 몇년전 독일에서는 베를린 신학부 조직신학 교수 노트거 슬렌즈카가 구약의 정경성을 거부하는 논문을 써서 난리가 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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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배움이 부족하지만, 마르시온과는 다릅니다. 너진똑 본인도 직접 부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너진똑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구약의 폐기를 외치지 않습니다. 너진똑의 진의는 '성경의 작가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신의 말을 덧붙이는 작업을 진행한 자가 있다'에 가깝습니다. 즉 '오직 예수'를 기준으로 구약을 읽어내자는 것이지요. 깊은 이해와 소통을 위해 직접 대본을 읽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이단 관련 글은 큰 도움이 됐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람 100명이 있으면 100명의 신이 있고(당연히 신은 물리적으로 존재한다던가 객관적으로 관측가능한 것이 아니므로) 보혜사의 증언을 믿든 예수천국 불신지옥 동성애자 지옥가라를 외치든 다 다양한 기독교 신앙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란것을 객관적이고 실체를 가진 "신"이 있어서 거기서 말씀이 나온다 생각하셔도 됩니다. 저는 약간 다르게 믿는것도 사람이고 설교하는 것도 사람이고 교회도 사람이 운영하고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문화현상 이라고 봅니다.

음악도 대중적인게 있고 소위 힙스터픽이 있는데 종교도 마찬가지라 봅니다. 제가 알기로 기독교계 종교들 중에서 "교리 없음"이 정식 교리인 곳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라스타파리, 이쪽은 마리화나 흡연을 신성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뭐 파고들면 다양한 신앙의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다만 지역에 따라서 주류가 있고 비주류가 있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사회에서 대충 이거 저거는 기독교다(이단일지언정)하는 말을 따라가는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