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왜 마음의 상태가 아닌가?

아래 글에서 댓글로 논의된 내용을 읽다가 몇 가지 흥미로운 철학적 요점들이 있는 것 같아서 정리를 해보려고 합니다. 사실, 저는 믿음을 '마음의 상태(state of mind)'라고 하거나, '대상(object)'이라고 하거나, '지향적 작용(intentional act)'라고 하거나, '성향(disposition)'이라고 하는 것이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특정한 맥락에만 맞게 용어가 사용된다면, 다양한 용어들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순전히 '언어적(verbal)' 문제라고 보아서요.

다만, 인식론에서 믿음을 '마음의 상태' 혹은 '심적 상태'라고 보는 입장을 견지하려고 하였을 때 몇 가지 중요한 철학적 난제가 발생하는 것 같기는 합니다. (a) 이미 댓글에서 논의되었던 것처럼, 나의 '심적 상태' 혹은 '의식 상태'가 사라질 경우 과연 '믿음'도 사라진다고 해야 하는지가 문제일 뿐더러, (b) 다른 댓글들을 읽다가 떠오른 것이지만, 내가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내가 '실제로' 믿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경우도 매우 빈번해서요. 그리고 이런 문제는 (c) '현행적' 심적 상태와 '성향적' 심적 상태라는 구분을 도입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덧붙여, (d) 오늘날 종교 인식론에서는 과연 '종교적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논의에서 이런 요소들을 실제로도 진지하게 고려하기도 합니다.

(1) 믿음과 마음의 상태

믿음이 '마음의 상태' 혹은 '심적 상태'로 환원될 수 없다는 주장을 제시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비트겐슈타인이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믿음과 마음의 상태를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을 가장 먼저 제시한 인물이 아마도 비트겐슈타인일 거예요. 비트겐슈타인의 『종교적 믿음에 관한 강의』에는 이와 관련한 다음의 논의가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들을 서로 어떻게 비교해야 하는가? 믿음들을 비교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마음의 상태들을 비교한다"고.
마음의 상태들을 우리는 어떻게 비교하는가? 명백히 이것은 모든 경우에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선, 여러분이 하는 말은 믿음의 확고성에 대한 척도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여러분은 어떤 위협들을 무릅쓰겠는가?
믿음의 강도는 고통의 세기와 비교될 수 없다.
믿음들을 비교하는 전혀 다른 하나의 방식은, 그가 어떤 종류의 근거들을 제시할 것인가를 보는 것이다.
믿음은 마음의 순간적인 상태와 같지 않다. "5시에 그는 매우 심한 치통을 겪었다."[와 같은 상태 말이다—옮긴이]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미학 종교적 믿음 의지의 자유에 관한 강의와 프로이트에 관한 대화』, 이영철 옮김, 필로소픽, 2016, 138-139쪽.

비트겐슈타인의 이 강의는 스마이시스의 노트 필기를 통해 책으로 편집되었기 때문에 내용이 대단히 압축적입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이 펼친 논의를 따라가기란 쉽지 않지만, 그 중심 요지만큼은 분명합니다. 믿음과 마음의 순간적인 상태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차이들이 있다는 것이죠. 이와 관련해서 연구자들이 종종 덧붙이는 예시로는 두 가지 정도가 있습니다.

(a) 고통의 예시: 흔히 '마음의 상태'라고 할 때 우리가 떠올리는 것은 고통, 기쁨, 슬픔, 분노 같은 감각적이거나 감정적인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태들은 특정 시점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상태이지만, 믿음은 (특별히, 비트겐슈타인이 강의에서 다루는 '종교적' 믿음은) 우리의 개별 경험들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해당합니다. (실제로, "I believe that …"라는 형식의 문장은 명제 태도를 표현하고 있다고 언어철학에서 흔히 일컬어지죠.) 가령,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개별 상태들은 인생에서 찾아왔다가 사라지는 변칙적인 것이지만, "인생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선물이고 시험이야."라는 믿음은 그 개별 상태들을 내가 어떤 시선에서 해석하고, 수용하고, 평가하는지를 반영하죠. 말하자면, 감각적이고 감정적인 '마음의 상태'들과 그 상태들을 대하는 우리의 '인생관' 혹은 '세계관'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지적입니다.

(b) 잠의 예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사실이 그 대상에 대한 심적 활동을 반드시 수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믿음이 마음의 상태라면, 우리는 잠을 잘 때처럼 심적 상태가 사라진 상황에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믿고 있지 않다고 말해야 합니다. 혹은 유튜브를 보거나, 운전을 하거나, 밥을 먹는 등 다른 잡다한 일들에 우리의 심적 상태를 집중하고 있는 동안에도 무엇인가를 믿고 있지 못하다고 말해야 하죠. 이 경우, 기독교인은 잠을 자는 동안이나, 유튜브를 보는 동안이나, 운전을 하는 동안이나, 밥을 먹는 동안에는 더 이상 기독교 신앙을 믿고 있지 않다고 해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믿음이 단순히 '마음의 상태' 혹은 '심적 상태'라면, 우리는 특정한 주제에 의식적으로 정신을 집중하는 동안에만 그 주제에 대한 믿음을 가진다고 해야 한다는 점에서 믿음을 매우 협소화시키게 되는 거죠.

(2) '현행적' 심적 상태와 '성향적' 심적 상태

비트겐슈타인의 지적에 대해 '현행적(occurrent)' 심적 상태와 '성향적(dispositional)' 심적 상태라는 구분을 통해 반론을 제기하려는 입장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특정한 조건이 갖추어질 때 발현되는 심적 상태를 '성향적' 심적 상태라고 한다면, 우리는 자고 있는 동안에도 '성향적'으로 무엇인가를 믿는 심적 상태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거죠. 물론, 이 주장은 다시 두 가지 갈래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a) 믿음 중에서는 지금 내가 떠올리는 '현행적' 심적 상태로서의 믿음과 지금 내가 떠올리지 못하는 '성향적' 심적 상태로서의 믿음이 있다는 약한 주장과 (b) 믿음이란 '성향'으로 정의되어야 한다는 강한 주장이 있습니다. 전자는 yhk9297님이 댓글에서 제시하신 주장이고, 후자는 핸리 해버리 프라이스(Henry Habberley Price)라는 철학자가 실제로 제시하는 주장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현행적'과 '성향적'이라는 구분을 도입하는 것이 믿음을 '마음의 상태' 혹은 '심적 상태'로 정의하려는 시도와 무관하다고 봅니다. 오히려 이 구분을 통해 '현행적 믿음'과 '성향적 믿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선결문제 해결의 오류라고 생각해요.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a) 왜 두 가지가 모두 '심적 상태'인가?: 애초에 쟁점은 우리가 흔히 '마음의 상태' 혹은 '심적 상태'라고 지칭하는 고통, 기쁨, 슬픔, 분노 등의 상태와 '믿음'이라는 상태가 과연 동일한 층위에 놓일 수 있는지입니다. 적어도, 이 두 가지가 동일한 층위에 놓이기 힘들다고 지적하는 꽤나 강력한 비판이 있다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전자는 '일시적'이지만 후자는 '지속적'이고, 전자는 '사실'이지만 후자는 '태도'이고, 전자는 '의식적'이지만 후자는 '비의식적'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이 비판이나 반례가 잘못되었다는 직접적인 반론이 제기되지 않는 이상, (가령, "고통의 사례나 잠의 사례는 반례로 제시될 수 없다."거나, "감각과 감정도 지속적이고, 태도이고, 비의식적이다."거나, "믿음도 일시적이고, 사실이고, 의식적이다."라는 반론이 제기되지 않는 이상,) 마음의 상태와 믿음이 동일하다고 '전제한 채' 그 두 가지가 '현행적'과 '성향적'이라는 구분에 따라서 나누어진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점을 선취하는 셈이 됩니다. 그 두 가지가 과연 동일한 것인지 아닌지가 쟁점인데도, 그 두 가지가 동일한 상태의 두 가지 표현이라고 자명하게 가정해 버린 것이니까요.

(b) '성향적' 믿음이 과연 무엇인가?: 사실, '현행적' 믿음과 대비되는 '성향적'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그다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가령, 갈릴레이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도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인간인 이상, 특정한 교육 조건 하에서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믿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겠죠. 그렇지만 단순히 특정 조건에서 지동설을 믿는 '성향'을 가진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들이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순수하게 '성향적'이기만 한 믿음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에서 '믿음'이라고 불릴 수 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단순히 특정한 것을 믿을 수 있는 성향을 지닌다는 사실만으로 그 믿음을 실제로도 가지고 있다고 해버린다면,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믿는다'고 말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3)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믿는 것

믿음이 심적 상태가 아니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철학적으로 더 중요한 논점은, 우리가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믿는 것 사이에 때로는 커다란 괴리가 있다는 점입니다. 가령, 저는 최근에 카페에서 이런 흥미로운(?) 대화를 엿들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A: 사람들이 한강을 훌륭하게 평가하는데, 한강은 좌파야! 왜 소설에서 광주 이야기가 나오고 그래?!

B: 그래도 저는 『채식주의자』는 재미 있게 읽었어요.

A: 『채식주의자』는 잘 쓴 책이지! 채식이 건강에 얼마나 좋은데!

여기서 A는 "『채식주의자』는 잘 쓴 책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A가 정말로 자신의 주장을 믿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죠. 그 바로 뒤에 근거로 나온 "채식이 건강에 얼마나 좋은데!"라는 주장이 『채식주의자』라는 책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니까요. 물론, 우리는 이 상황을 A의 말에 대한 '정당화'가 과연 제대로 이루어졌는지를 중심으로 고찰해 볼 수도 있지만, A가 과연 자신의 말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고찰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이 대화는 어느 중년 남성분과 어느 중년 여성분 사이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남성분이 자신의 지적 수준을 다소 과시하는 듯한 상황에서 벌어진 것이죠. 그래서 남성분은 매우 확신에 찬 목소리로 "『채식주의자』는 잘 쓴 책이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적어도, '마음의 상태' 혹은 '심적 상태'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남성분은 자신이 저 말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만일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지 않은 상황에서, 어느 저명한 문학 교수가 저 남성에게 "『채식주의자』는 잘 못 쓴 책이다."라고 고압적인 태도로 말을 하였다면, 저 남성분이 동일한 주장을 그 때에도 견지할 수 있었을지 저로서는 의문입니다. 저 남성분은 자신이 무엇인가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겠지만, (그리고 실제로도 저 말을 할 때 그분의 뇌에서는 혈류가 빠르게 돌았고 도파민이 분비되었겠지만,) 그 확신이란 실제로는 근거가 불분명할 뿐더러,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손쉽게 변할 수 있는 아무것도 아닌 상태에 지나지 않았던 거죠. 과연 저 남성분이 가지고 있던 상태를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매우 의문스럽습니다. 적어도, 제3자의 관점에서 볼 때, 저 남성분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믿는다고 '생각'하였을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자신의 말을 믿고 있지는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 점은 인식론적으로 중요한 함의를 지닙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실제로 믿는지 믿지 않는지는, 단순히 우리의 내면을 뜯어본다고 해서 발견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죠. 가령, 뇌과학자가 뇌의 작용을 관찰해서 혈류량과 호르몬 분비를 조사한다고 해서, 피실험자가 '실제로' 믿는 것이 무엇인지가 곧바로 밝혀지지는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감각질' 같은 사적 상태를 들여다 볼 수 있다고 해서, 피실험자가 '실제로' 믿는 것이 무엇인지가 곧바로 밝혀지지도 않죠. 즉, '믿음'이란 어딘가에 기성품처럼 사물화되어 놓여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뇌를 뜯어보든 마음을 뜯어보든, 그 어디서도 '믿음'이라는 말에 대응하는 실체, 속성, 사건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믿고 있는지는 단순히 그 사람이 무엇을 '주관적'으로 생각하고 있는지와는 전혀 다른 문제인 거죠. 오히려 '실제로' 무엇을 믿는지는 훨씬 '객관적'인 차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4) 인식론과 종교 인식론

실제로, 이러한 논의는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 논증으로부터 시작해서 오늘날 종교 인식론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특별히, 핸리 해버리 프라이스가 사적 언어 논증을 확장하여 '믿음의 성향 이론(dispositional account of belief)'라는 이론을 제시한 것이 종교 인식론에서는 매우 주목받기도 하죠. 무엇인가를 믿는다고 발화하는 것은 단순히 지금 내가 머릿속에 무엇을 떠올리는지를 표출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 프라이스의 지적입니다. 오히려 무엇인가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하게 행동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공언한 것이죠. 그리고 그 성향이 실제로 발현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그 사람이 정말로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없었는지가 평가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해야 하는 점은, 프라이스가 '성향(disposition)'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믿음이 무엇인지를 해명하려고 하지만, 이 논의는 믿음을 '마음의 상태'와 같은 '사적(private)'이고 '내적(inner)'인 영역으로부터 설명하려는 시도에 명확하게 반대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라는 점이죠. 믿음은 우리가 특정한 상황에서 취하는 '태도' 혹은 '입장'의 문제인 것이지, 단순한 내적 상태 진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프라이스의 논의에 대한 앤서니 티슬턴의 설명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프라이스는 이 두 가지 요점 사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인칭 믿음 문장과 3인칭 믿음 문장의 차이는 상당히 중요한 철학적 의미를 갖고 있다. … '나는 그것을 p로 믿는다'는 발화는('나는 X를 믿는다'는 발화는 … 훨씬 더) …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자서전적인 정보 조각을 제공하지 않는다. … [말하는 자]는 어떤 태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 때때로 말하는 자는 적대적이거나 회의적인 청중 앞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다. 프라이스는 계속해서 발화(utterance)가 오스틴이 "수행적"(performative) 성격이라고 부르는 것을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종종 "우리는 우리의 말을 듣는 자들에게 우리가 믿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권유한다. … 그때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면 정당화될 것이라고 … 그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프라이스 강조) 발화는 "보증을 제공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 보증의 단계는 "나는 믿는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의심한다", "나는 더 생각하겠다 …"와 같은 말의 등급이나 범주 속에 함축시킬 수 있다. 말하는 자는 내면의 심적 상태 자체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므로, 잠을 잘 때 믿는 것을 멈추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앤서니 C. 티슬턴, 『기독교 교리와 해석학』, 김귀탁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6, 65-66쪽.

티슬턴은 이런 프라이스의 논의를 기독교 신앙에 대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데 아주 적극적으로 적용합니다. 믿음은 단순히 내적 상태를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입장과 태도를 표명하는 활동이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실제로 무엇을 믿고 있는지는 '공적인(public)' 검증대 앞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이죠. 티슬턴 본인은 성경에 나오는 요나의 이야기를 예시로 사용하지만, 제 생각에는 기독교인이라면 모두 알고 공감할 만한 베드로의 이야기가 이 문제에 매우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 같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께 물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나중에는 따라올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왜 지금은 내가 따라갈 수 없습니까 ? 나는 주님을 위하는 일이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는 말이냐 ?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요한복음 13:36-38)

시몬 베드로는 서서, 불을 쬐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당신도 그 제자 가운데 하나지요 ?"하고 물었다. 베드로가 부인하여 말하기를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오"하였다. 베드로에게 귀를 잘렸던 사람의 친척으로서 대제사장의 종 가운데 하나가 베드로에게 "당신이 동산에 그와 함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는데 그러시오 ?"하고 말하였다. 베드로가 다시 부인하였다. 그러자 곧 닭이 울었다. (요한복음 18:25-27)

예수께서 세 번째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때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세 번이나 물으시므로, 불안해서 "주님, 주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을 먹여라.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너의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요한복음 21:17-18)

개인적으로, 성경에서 가장 심오하고 감동적인 일화들 중 하나가 위의 베드로의 이야기가 아닌가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제자들 중에서도 대단히 열정적인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었고, 그래서 최후의 만찬 때에 다른 모든 사람들은 예수를 버리더라도 자신만큼은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정작 대제사장의 하인들이 베드로를 고발하려 하자,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하고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를 저주까지 하고) 도망을 쳤죠. 그 이후에 다시 부활한 예수를 만났을 때 베드로는 더 이상 "내가 목숨까지 바치겠습니다." 같은 확신에 찬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단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고백할 뿐이죠.

이 일화는 우리가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우리가 '실제로' 믿는 것 사이의 차이를 대단히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자신이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하였고', 또 그 생각은 전혀 거짓이 아니기도 하였지만, 정작 '공적인' 검증대 위에 섰을 때는 자신이 '실제로는' 예수를 믿고 있지 않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는 자신의 내적 상태에 근거하여 믿음을 진술하려 하는 대신에, 자신이 과연 예수를 실제로 믿고 있는지에 대한 공적인 평가를 예수에게 위탁하게 된 거죠.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말이에요.

저는 이런 논의가 반드시 '종교적' 믿음에 국한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 논증이나 프라이스의 믿음의 성향 이론은 (물론, 그 두 사람의 종교적 배경을 무시할 수는 없긴 하지만) 일반적인 인식론의 맥락에서 제시된 논의들이었고, 오늘날 종교 인식론이 이 논의들을 종교적 믿음에 대한 해명에 적용한 것일 뿐이죠. 그래서 이 논의들은 훨씬 더 넓은 주제들에 대해서도 유의미한 함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가령, '자신이 믿는 내용을 자신이 스스로 속이는 '자기 기만'의 상황이란 과연 가능한가?', '"그럴지도 모르죠."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은 그 주제에 대해 믿음이 있는 것인가?' 같은 주제들에 말이에요.

11개의 좋아요

먼저 우리는 'belief'와 'a belief'를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말로는 둘 다 '믿음'이라고 번역해야겠지만, 믿는 상태와 믿어지는 대상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 구분을 염두에 두면 'belief'는 일종의 명제 태도, 즉 지향적 마음 상태를
'a belief' 혹은 'beliefs'는 그 명제 태도의 대상이 되는 것, 즉 어떤 명제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용해주신 비트겐슈타인의 말에는 분명히 어떤 통찰이 있습니다.

믿음들을 비교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이 질문은 '우리 각자가 믿는 바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일 테니
마음 상태를 비교한다는 답변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한편으로 만약에 '우리 각자가 믿는 바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우리 각자가 믿는 그 명제적 내용을 어떻게 명료하게 만들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라 여겨집니다.
이건 마지막에 쓰신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믿는 것을 일치시키는 과정일 수도 있겠습니다.

믿음의 강도는 고통의 세기와 비교될 수 없다.
믿음들을 비교하는 전혀 다른 하나의 방식은, 그가 어떤 종류의 근거들을 제시할 것인가를 보는 것이다.

'믿음의 강도'라는 말은 혼란의 여지가 있는 말입니다.
티모시 윌리엄슨의 책에서 봤던 것 같은데요, strong belief가 언제나 robust belief인 것은 아닙니다.
충분한 근거 없이도 무신론을 열렬히 믿을 수 있고, 무심한듯 고요하지만 충분한 근거를 갖고 무신론을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 인용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이

믿음의 강도는 일종의 열렬함이나 현상적인 느낌이 아니라 얼마나 충분한 근거에 입각해 있느냐에 따르는 것

이라는 점을 지적하고자 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인식론에서는 믿음의 강도를 신뢰도(credence)라는 척도로 개념화하는데, 비트겐슈타인의 의도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여러분이 하는 말은 믿음의 확고성에 대한 척도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여러분은 어떤 위협들을 무릅쓰겠는가?

사실 이건 제가 보기엔 믿음(belief)을 성향으로 보는 관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마음 상태에 대한 성향적 분석 자체가 일종의 행동주의적 접근이고, 고전적 행동주의가 갖는 문제점을 개선한 버전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향 견해에도 여러 가지 버전이 있겠지만, 대체로 믿음은 어떤 행위를 야기하는 성향을 가진 마음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게 어떤 성향인지는 관찰된 행위들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해석을 통해 채워져야 하는 것이구요.

예를 들어, 형편이 좋지 않은데도 꾸준히 기부를 하는 사람을 보면서 우리는 그가 무엇을 믿는지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 사람은 기부가 의무라고 생각하는구나", "저 사람은 자기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구나"처럼 말이죠. 여러 가지 해석의 가능성이 있고, 우리는 추가적인 관찰을 통해 그 해석들을 줄여나갈 수 있을 겁니다. 또는 반대로 어떤 사람이 설령 "나는 기부가 정말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라고 말하더라도 전혀 기부를 하지 않는다면, 혹은 지출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기부를 쉽게 포기해버린다면 우리는 그가 가진 믿음을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

여기에서 특정 성향이 야기하는 건 여러 가지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동작으로 구성된 행위일 수도 있고, 진술이 될 수도 있고, 추론이나 근거제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몇 가지 눈에 보이는 지적들이 있습니다.

(a)

애초에 쟁점은 우리가 흔히 '마음의 상태' 혹은 '심적 상태'라고 지칭하는 고통, 기쁨, 슬픔, 분노 등의 상태와 '믿음'이라는 상태가 과연 동일한 층위에 놓일 수 있는지입니다.

글쎄요, 저는 그게 쟁점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애초에 동일한 범주로로 묶는 철학자도 제가 알기론 없구요.
전자는 현상적 마음 상태(phenomenal mental state), 후자는 지향적 마음 상태(intentional mental state)로 구별합니다. 양자가 한쪽으로 환원되느냐는 종종 쟁점이 되지만, 적어도 논의를 시작하는 데 있어서는 저 두 범주를 구별하지 않는 심리철학자는 거의 없다고 생각됩니다.

(b)
성향적 믿음에 대해서는 대략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바입니다. 다만 믿음을 성향적으로 이해했을 때 직관적으로 행위자에게 너무 많은 것을 귀속시킨다는 점은 어느 정도 동의가 됩니다. 하지만 성향이론가들이 보기엔 그게 정말로 중요한 철학적 문제를 야기하지는 않는다고 할 것 같습니다.

(c)

우리가 무엇인가를 실제로 믿는지 믿지 않는지는, 단순히 우리의 내면을 뜯어본다고 해서 발견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죠.

이건 근본적으로 성향주의자들도 동의하는 내용일 겁니다. 누군가가 무엇을 믿는지는 그 사람의 관찰가능한 행위 등을 종합적인 자료로 하여 해석해내야 하는 것, 즉 3인칭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죠.

(이상의 논의에서 우리가 '성향주의자'에 대해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는지 확신은 없군요)

우리가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우리가 실제로 믿는 것의 차이는 실존적으로도 아주 흥미로운 주제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여기에 실천적인 함의가 있다고 생각하구요.

한 가지 더 재밌는 주제를 던져보자면, 철학자들 중에는 'belief'와 'faith'를 구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각각 '믿음'과 '신념'으로 써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걸 구별하는 가장 큰 동기는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믿음은 증거적 합리성, 혹은 인식적 합리성의 구속을 받기 때문에 반대 증거가 나오면 그에 따라 credence를 조정하는 것이 합리적인 반면, 신념은 반대 증거에 쉽게 꺾이지 않는 특성이 있고 때때로 그것이 virtuous한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믿음은 순전히 인지적 상태(cognitive state)이지만 신념은 인지적 상태와 함께 다른 정서나 정동적 상태(conatve state)가 복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현상에 대해 얼마나 유효한 구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관심 있으신 분들은 Liz Jackson의 논문을 한 번 살펴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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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하신 내용에 상당 부분 동의합니다! '성향' 혹은 '성향주의'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지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가장 첫 문단에도 쓴 것처럼, 믿음을 '마음의 상태'라고 하거나 '성향'이라고 하는 것이 그 자체만으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만, 검증될 수 없는 사적인 마음 상태로서의 믿음이나 순전히 성향이기만 할 뿐 발현되지 않는 상태로서의 믿음을 상정하는 인식론적 입장이라면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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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전히 "마음 상태의 사밀성은 정말 단순히 상정되는 것인가?"하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이 논점에 대해서는 또 다른 글에서 다른 주제로 나눌 기회가 있겠지요.

그런데

다만, 검증될 수 없는 사적인 마음 상태로서의 믿음이나 순전히 성향이기만 할 뿐 발현되지 않는 상태로서의 믿음을 상정하는 인식론적 입장

이건 믿음에 대한 성향이론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다소 미묘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유리컵이 가만히 올려져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유리잔이 깨지는 성향(fragility)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이 아무런 말을 하고 있지 않아도 무언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또 누군가가 "내일 가는 기차표가 몇 시 기차야?"라고 물었을 때 "3시 기차야"라고 답한다면 우리는 그가 자신이 탈 기차 시간에 대한 믿음을 이제야 막 갖게 된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그런 믿음을 갖고 있었고 그것이 어떤 발현조건(질문)이 주어졌을 때 행위로 발현(답변)된 것이라고 보는 게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YOUN님 말씀대로 너무 많은 믿음을 귀속시키게 되거나, 혹은 확인할 수 없는 믿음, 예컨대 조 바이든의 머리카락 갯수 따위에 대한 믿음까지도 귀속하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문제가 생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성향주의자라면 이건 믿음의 본성을 성향으로 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고 단정할 수 없고 우리가 어디까지 믿음을 귀속시킬 수 있는가 하는 해석의 기준 내지는 규범성 문제라고 지적할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로 좀 미묘해 보이는 점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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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향주의에 대해 제가 아주 진지하게 생각해 본 것은 아니지만, 저는 공적인 결과를 통해 성향의 존재를 추론하는 방식이라면 그런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우리가 성향 자체를 발견할 수 있거나 직관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이상, 발현된 결과들을 통해 성향의 존재를 추론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성향주의가 사적 언어 문제에 빠지지 않고서 일관성을 유지하려면, 성향을 발현된 결과들로 정의하려는 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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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 부분이 좀 이해가 안 됐는데요. "A belief that p"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지 않나요? 만일 너구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a belief 가 명제를 가리킨다면 "A belief that p"는 동어 반복인건가요?

제가 보기에 belief 와 a belief의 차이는 a belief가 belief의 한 instance다... 와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전 지금 a laptop에다가 타이핑을 하고 있고, 이 a laptop은 키보드가 있고, 인터넷을 할 수 있고... 등등이 있기 때문에 이 컴퓨터는 laptop인거죠. 아니면 이런 식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보통 철학에서 정의를 다룰 때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많이 하죠: "what makes a chair chair?" 이 질문은 개개인의 의자가 왜 의자인지 설명하라는 것이겠죠. 그럼 아마 앉을 수 있고, 다리가 네 개고, 뭐 이런 답을 할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belief 와 a belief도 이해돼야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제가 모아이석상을 본다는 믿음이 있다면, 누군가 "What makes a belief that you are looking at the Moai statue belief?" 라고 한다면, 전 아마 그것이 명제로 이뤄져있고, 제가 <모아이 석상을 본다>라는 명제에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고 ,등으로 답을 하겠지요. 그리고 이 차이가 명제와 명제에 대한 태도의 차이라고 설명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만일 너구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a belief 가 명제를 가리킨다면 "A belief that p"는 동어 반복인건가요?

'A belief that p'가 full specification이겠지요! 믿음은 언제나 내용을 가져야 하니까요.

듣고보니 말씀하신 게 일리가 있네요.

'belief'는 어떤 명제 태도를 가리킨다.
믿음은 어떤 행위자(S)와 명제(p) 사이의 관계로 기술될 수 있다.

여기까진 일반적으로 동의되는 바이고,
'S believes p'를 'B(S,p)'라고 두면 yhk9297님께서 말씀하신 건

불가산명사로 쓰인 'belief'는 B(S,p) 일반을 가리키는 표현이고
가산명사로 쓰인 'belief'는 S와 p가 특정된 구체적인 사례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라고 이해하면 될까요?

이렇게 보면 제가 생각했던 것에는 약간 화용론적 제한 같은 게 개입된 것 같네요.
말하자면, 'belief'가 가산명사로 쓰이는 맥락에서는 행위자는 당연히 있는 것으로 전제되어 있고
일반적으로 누구의 믿음이냐가 아니라 그 믿음의 내용이 주목을 받으니
'Mary's beliefs about colors'와 같은 문장에서는 'Mary's belief'는 메리가 믿고 있는 명제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겼고, 'Belief is governed by rationality' 같은 문장에서는 명제 태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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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사실 article 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아니라

와 같이 딱 잘라말하기는 어렵네요. 그래도 제가 보기엔 얼추 맞는 것 같습니다.

여러가지 근본적인 철학적 쟁점이 얽힌 중대한 문제 같습니다. 일례로

  1.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느냐"를 여부로 한 (심적) 상태 개념의 존재론적 구분: 이는 지속 문제에 대한 형이상학에서 등장하는 "지속자(continuant)"와 "발생자(occrrent)" 간의 일반적인 구분 문제와도 연관되어 논의될 수 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2. "어디까지가 마음인가?": 물론 꽤 급진적인 입장이지만, 일례로 확장된 마음(extended mind) 논제에 따르면 아예 메모장, 스마트폰 또한 우리의 "마음"의 일부로 보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여겨지죠. 이 또한 심리철학적으로 고려해야할만한 지점이라고 봅니다.
  3. "성향"이란?: 뭐 성향의 형이상학이야 유명하죠 ...
  4. 객관적 vs. 주관적 믿음 귀속?: @Raccoon 님께서 짚어주신 것처럼 믿음의 강도의 척도로 여겨지고는 하는 "신뢰도" 개념은 적어도 고전적인 접근 방식에서는 '판돈을 얼마나 거느냐'라는 기준을 통해 분석되죠! 그리고 이는

라는 @YOUN 님의 문제의식과도 잘 부합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고 보입니다.

  1. 직접적으로 연관될지는 약간 자신이 없습니다만, "우리의 믿음은 수의적이냐, 불수의적이냐?" 라는 질문을 둔 신념적 자발주의 논쟁 역시 특히나 종교적 믿음의 맥락에선 더 엮여서 논의될 건덕지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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