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드레이퍼스(H. Dreyfus)와 호그런드(J. Haugeland)가 쓴 "Husserl and Heidegger: Philosophy's Last Stand"라는 논문의 각주들을 살펴보는데, 참 재미있다. 둘 모두 영미권을 대표하는 하이데거 연구자들이고, 특히 드레이퍼스는 『세계-내-존재(Being-in-the-World)』라는 대단히 유명한 『존재와 시간』 해설서까지 쓴 인물인데도 모두 다른 사람이 번역한 '영어 번역본'으로 하이데거를 인용하고 있다! 게다가 지금 깨달았는데, 드레이퍼스의 『세계-내-존재』에 인용된 대부분의 하이데거 텍스트도 영어 번역본이다. 새삼스럽게,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2) '번역'하니까 생각난 건데, 하버마스 같은 사람도 로티의 『철학과 자연의 거울』을 독일어 번역본으로 인용한다. 호네트도 맥도웰의 『마음과 세계』를 독일어 번역본으로 인용한다. 들뢰즈도 프랑스어 번역본으로 흄을 인용한다. 이런 사람들이 영어 독해를 못해서 자기네 나라 말 번역으로 텍스트를 인용하겠나? 번역본이 있는데, 굳이 다른 나라 말로 책을 인용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자연스럽게 번역본을 쓰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철학계에서는 원어 독해 능력을 엄청나게 추앙하면서 번역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으니 솔직히 참 답답한 일이다. 기껏 누군가가 피똥 싸면서 번역을 해도, 그게 마치 학술적으로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것처럼 인정도 못받고 인용도 안 되는데, 누가 번역을 하고 싶어하겠나?
(3) 솔직히 나는 철학 텍스트를 본래의 언어로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사람들 중에 해당 언어를 극상으로 잘 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조차 의문스럽다. 헤겔 관련 학술서를 여러 권 번역하시고 독일에서 10년동안 생활하신 선생님조차도 "저는 아직 독일어가 어려워요. 번역본이 있으면 훨씬 수월하게 읽을 수 있죠!"라고 나에게 직접 말씀하신 적이 있다.
(4) 번역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으면 그 부분이 왜 문제인지만 지적하면 될 뿐이다. 해당 언어와 우리말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언어적 차이가 '느낌적인 느낌'처럼 존재하고, 해당 언어를 배운 자기만은 그 차이를 정확히 안다고 주장하는 건, 내가 보기에는 거의 '사기'다. 즉, (a) 정말 중요한 언어적 차이는 언제나 번역될 수 있다. (참고로, '통약불가능성'에 대한 비판은 도널드 데이비슨 같은 철학자들이 강조하는 중요한 철학적 논제이기도 하다.) (b) 번역을 평가절하하는 사람 중에 정말 해당 언어를 고급 원어민 화자급으로 민감하게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5) 그러니 이제 우리 세대에서는 좀 더 자신 있게 번역본을 생산하고, 인정하고, 인용해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