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본으로 철학하기


지역 도서관에 미국 퍼듀대학교 철학과 교수 대니얼 W. 스미스가 쓴 『질 들뢰즈의 철학』이라는 두꺼운 책이 있어서 살펴보다가 흥미로운 점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분이 책에서 인용한 들뢰즈 저작들이 거의 모두 들뢰즈 영어 번역본이더라고요. 『페리클레스와 베르디』라는 저작 한 권만 제외하면, 912쪽짜리 두꺼운 전문 철학 연구서를 스미스가 영어 번역본만 인용하여 썼다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들뢰즈 연구자로 유명하신 김재인 교수님께서 들뢰즈 영어 번역본을 혹독하게 비판하신 것을 본 적이 있어서 의문이 생겼습니다. 김재인 교수님은 아연 클라인헤이런브링크가 쓴 『질 들뢰즈의 사변적 실재론』의 문제점들을 지적하시면서, 이 책이 영어 번역본만을 참조하였다 보니 첫 문장부터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하셔서요.

물론, 저는 들뢰즈도 모르고, 프랑스어도 모르고, 이 책들을 읽어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내용에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평가할 자격은 없지만, 영어권 철학 담론이 번역본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은 꽤 주목할 만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한 철학자가 텍스트 번역부터 내용에 대한 비판적 연구까지 모든 것을 다 맡아서 하였다면, 요즘에는 한 텍스트에 대한 (혹은 한 철학자에 대한) 문헌적 연구, 철학사적 연구, 비판적 연구가 점차 분업화되는 추세인 것 같아서요. 우리나라는 여전히 원어 독해를 많이 강조하고 있지만, 굳이 문헌 연구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영어권에서는 영어 번역본을 읽고서 글을 쓰는 것이 오히려 훨씬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입니다. 몇 년 전에도 영어권 하이데거 연구서들을 읽다가 이 점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어요.

어학에 그다지 자신이 없는 저로서는 번역본만으로 연구를 수행하는 현재의 경향이 환영할 만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항상 마음속에 고민이 남아 있기는 합니다. 제가 이런 경향을 선호하는 것이 결국 어학을 잘 못하는 제 자신에 대한 자기 합리화가 아닌가 해서요. 또 아무리 번역본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연구자들이 많다고는 해도, 여전히 국내에서는 어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입장이 더 일반적인 만큼, “영어권은 이렇더라.“라는 말이 제 자신의 애매한 위치를 항상 정당화시켜줄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요.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철학과 내에서 어학을 강조하는 분위기나 번역본을 폄하하는 분위기가 다소 지나친 게 아닌가 하는 반발심도 항상 있습니다. 여러분은 번역본을 사용해서 연구하는 경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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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대니얼 W. 스미스의 경우는 일반화하기 약간 어려운 경우이긴 하겠네요. 이 사람 자체가 들뢰즈의 몇몇 저작들을 영어로 번역한 인물이니까요. 물론,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번역하지 않은 저작들도 번역본으로 인용하는 것을 보면, 자신의 저작을 포함해서 기존 영어 번역본들이 꽤 신뢰할 만하다고 보는 것 같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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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어쩔 수 없는 거긴 한 거 같아요. 독일철학을 전공하지 않고 독일어를 모른다면 번역서를 읽을 수 밖에 없겠죠.

사실 저는 이 점이 조금 이해가 안 가요. 본인이 독어 원본을 읽더라도 독자를 위해서 번역본을 인용하는 경우도 많거든요. 적어도 제 경험상으로는 누구보다 원서에 집착하시는 분들도 인용은 번역서로 하시더라고요. 심지어 어떤 분은 원서에 집착이 너무 강하셔서 그때 당시 출판본 pdf를 구하셔서 그걸 위주로 보시는 분도 봤습니다. 이탈릭스가 다르게 생겼고, 작가가 그 모양의 이탈릭스를 감안하면서 썼기 때문에 그걸 생각해야한다... 뭐 이런 거였어요. 또, 헤겔의 엔치클로페디 읽을 때, 아무리 원본이라도 Zusatz가 들어간 것은 별로 안 좋아하셨어요 (예: Suhrkamp). 헤겔이 Zusatz를 같이 읽으라고 의도하지 않았고, 실제로 Zusatz를 빼고 보면 글의 흐름이 완전히 다르다고 하시다면서요. 근데 그렇게 원본에 집착하시는 분도 출판하실 때는 그냥 번역본을 인용하셔요. 본인이 연구한 거랑 별개로 독자의 편의를 위해서 번역서를 인용하는 것 같아요. 특히 영미권에서는 분석철학자들의 눈치를 봐야한다는 점에서는 특히나 더 그런 것 같아요.

물론 원서랑 번역본이 다른 의미를 지니는 경우가 있긴 해요. 근데 그 의미의 차이가 맥락상으로 중요한 게 아니라면 굳이 원서를 인용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리고 번역본이 의미상으로 오류가 있다면 그냥 "my translation slightly departs from x's"라고 하면서 수정한 번역본을 쓰기도 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굳이 원서를 인용할 필요는 없어보여요.

물론 제 경험이고 제 생각이긴 하다만... @YOUN 님께서 번역본을 인용하신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실 때, 저는 크게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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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도 있겠네요. 기본적으로 분석철학이 주류이다 보니, 문헌 연구나 철학사를 하는 분들도 분석철학을 염두에 두는 경향 말이에요.

번역본을 인용한다는 점에 관심이 갔던 것은, 순전히 제 개인적인 경험들 때문이에요. 한국어 논문의 참고문헌 목록을 살필 때와는 너무 달라서요. 종종 어떤 분들은 한국어 번역본을 병기하는 것조차 꺼려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아마 국내 철학계에는 공인된 번역본이 그만큼 드물다는 방증일 수도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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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이유가 섞여서 그런 거 아닐까 싶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공인된 번역본이 드문 것도 있고, 한국어와 서양 언어들이 너무나 다른 것도 있을 거 같아요. 영어는 한국어에 비해 다른 서양 언어들이 좀 비슷한 면이 많으니 번역서가 한국어보다는 훨씬 번역이 정확한 것도 있을 것 같아요. 실제로 제가 독일어를 영어로 번역할 때보다 독일어나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 의역이 몇 배는 많이 들어가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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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들은 국내 논문들에서 가져온 참고문헌 목록 이미지에요. 서로 다른 두 분의 저자들이 서로 다른 학술지에 발표한 글들에서 가져 왔어요. 인용된 책들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고, 번역 수준이 꽤 훌륭하다고 평가받는데도, 원어에서 직접 인용하셨더라고요. 저는 이 저자분들이 매우 뛰어난 연구자분들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런 인용 방식을 결코 비판하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이렇게 원어에서 직접 인용하는 것이 여전히 국내 학계에서는 주류 경향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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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인 교수님의 경우 국내 들뢰즈 연구자들이 번역한 몇몇 들뢰즈의 저작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시더군요. 과거에 이진경 교수나 이정우 교수의 번역도 비판한 적이 있는걸로 알고있습니다. 김재인 교수님이 생각하는 좋은 들뢰즈 번역본과 나쁜 들뢰즈 번역본은 알라딘에 쓰신 들뢰즈 로드맵을 참고해도 좋을듯 합니다.

알라딘 로드맵

그나저나 저 역시 <철학이란 무엇인가>의 번역본을 구하기 힘들어서 영어 번역본을 구했는데, 김재인 교수님 말대로라면 이 영어 번역본도 오독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지 않으련지.

번역본 인용에 관해서, 저 같은 경우는 라캉을 전공하신 교수님 밑에서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분이 <에크리>의 국역이 엉터리라 비판하시면서도 그 분의 논문을 보니 그래도 국역본을 인용하시는걸 본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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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k9297 님이 언급해주신 독자들은 번역본을 참고한다는 것도 큰 이유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분석철학자들 눈치라는 부분은 생각도 못했는데 재미있네요 ㅎㅎ

개인적으로 한 언어단위의 철학연구가 성숙하기 위해서는 한 전문가들의 연구,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일반인을 포함한 독자들의 활발한 소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위해서는 공인된 번역서의 정착, 더 거슬러 올라가 번역의 가치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가 번역하면 명백한 오역이 아닌 이상
업적으로서 존중하고 자신의 연구에 활발히 인용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아울러 좋은 번역본은 원서 독해를 막는 게 아니라 오히려 원서로 접근하는 통로가 된다는 점도 간과되고 있는 것 같다고 자주 생개합니다.

그런 점에서 영미권의 번역본 인용 경향은 부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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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yhk9297 님의 지적에 공감이 갑니다. 번역본을 논문에 "인용"하는 것과, 연구에서 번역본만을 "사용"하는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논문에 인용할 때 왜 (영어)번역본을 사용하는가? 이에 대한 가능한 대답을 떠오르는 대로 적어보자면,

  1. 분석적 학풍: 철학적으로 유의미한 분석은 어떤 언어인지가 상관이 없다. 따라서 영어로도 표현되고 독해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어떤 것이 독일어로만 표현될 수 있고 독일어로만 이해될 수 있다면, 그것은 철학적인 진리가 아니다.
  2. 번역의 질: 번역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독일어로 보나 영어로 보나 거기서 거기다.
  3. 실용적 이유: 최대한 많은 수의 독자를 확보하기 위해 유럽철학 역시 영어로 쓰고 발표할 것이 장려된다. 이왕 영어로 쓰는데, 굳이 원문 인용을 해서 독자들의 가독성을 해칠 아무런 이유가 없다.
  4. 영어 제국주의: 모든 것은 영어로 통한다.

그렇다면 번역본만으로 "연구"하는 것이 해외에서 일반적인가?

하이데거 학계의 상황은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칸트나 헤겔 학계에서 이름 좀 알만한 학자들은 거의 원전 독해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칸트 연구자"나 "헤겔 연구자"라는 타이틀을 인정받는 학자들이 번역본만으로 연구하는 것은 해외에서도 일반적이지 않다고 말씀드릴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맥도웰 같은 학자는 이 범주에서 제외되겠죠. 반면 올빼미에서 언급된 Hanna의 경우 독일어 2차문헌도 참조할 정도의 독일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칸트 연구자", "하이데거 연구자"라는 타이틀이 학계의 인정을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학자들의 알량한 자존심인지는 또 따져봐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더 흥미롭게 느끼는 것은 "번역본만으로 '연구'하는 것이 해외에서 일반적인가?"와 같은 질문 이전에, 이러한 질문 자체가 해외에서는 별로 중요한 질문으로 취급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표면적" 이유는 전술한대로 대부분의 칸트-,헤겔-, x-연구자들은 해당 연구에 필요한 언어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요. 그러나 더 나아가 이러한 표면적 이유가 가능해진 "심층적 원인"을 따져보자면, 서구권에서는 "독일어 그냥 배워 두면 앞으로 수십년간 원전 참조하면서 연구할 수 있는데 왜 학생 때 배워두지 않지?" 와 같은 사고방식이 암묵적으로 깔려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환기되어야 할 것은 영어를 비롯한 유럽어권 화자들이 독일어/프랑스어/라틴어/그리스어에 대해 가지는 거리감과, 한국어 화자들이 저 유럽언어들에 가지는 거리감이 매우 다르다는 것입니다. 영어 모국어 화자가 독일어/프랑스를 배우는 것과 한국어/중국어/일본어를 배우는 것 사이에 어마어마한 난이도 차이가 나는 것처럼요.

글을 쓰다보니, 영미권에서 동양철학에 대한 연구를 할 때 가령 한문, 현대 중국어에 대한 아무런 지식 없이 순전히 영어로만 연구할 수 있는가가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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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제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한 추측이라는 점을 명시하겠습니다.

있습니다. (그것도 꽤 명망 높은 분들 중에서도 두어명 보이는 듯 합니다.) 다만 다들 이게 자신의 약점이라는 것을 알기에 쉬쉬합니다. 통상 지역학을 전공하지 않는, 철학 혹은 사회학 등등에서 시작해 넘어온 학자들이 이런 경향이 더 강한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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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서구권에서 - 특히 영미권에서는 영어 이외의 언어로 쓰인 고전적인 저술들을 매우 뛰어나게 번역하고, 이 번역서들을 일종의 정전(正典)으로 삼아 번역서들을 가지고서 학문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어느 정도 바람직하게 여기는 전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번역에 있어서도 오래 전부터 이런 이상을 추구하려는 노력이 경주되어왔다고 보이고요, 동양철학의 고전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대학에서 외국 서적의 번역을 학위논문으로 인정해 주는 것도 이러한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입니다.

또, 철학은 아니지만, 영어 번역본인 King James Bible을 가장 완전한 성서 텍스트로 인정하려는 경향들도 이와 전혀 관계가 없지는 않은 듯해요. 이처럼 'canonization of translations' 을 추구하는 것이 영미권 학계에서는 낯익은 주제라고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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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분야이긴하지만 최근 연구자들 각주다 독일어 번역본 인용하더라고요. 원래 전통대로면 라틴어 그리스어 인용문구조차 번역없이 인용했었는데, 90년에서 2000년대 초반에 문체도 쉽게 쓰고 번역본도 폭넓게 쓰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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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마다 목표가 다른 것도 있을 거 같네요. 다른 학자에 대해 글을 쓸 때, 그 학자의 사상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고 싶은 목표를 가진 사람이 있을 거 같고, 어떤 사람은 해당 학자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학계에 기여를 하는 목표가 있을 수 있을 거 같네요. 궁극적으로는 전자를 목표로 하지만, 일단은 후자만 시도하는 분도 있으실 거 같고요. 학계에 기여하는 걸 목표로 한다면(피어 리뷰를 통과하여 전문 저널에 논문을 기고하는 게 실질적인 액션이 되겠죠 ), 재미있고 의미있는 논점을 가진다면 번역본만 읽고도 달성하는 게 가능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번역본으로 공부하는 오독의 위험성이 있겠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지적을 받겠지만) 어느 정도 재미있는 논점을 발견할만한 room이 존재할 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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