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에 대한 상투어 비판하기/변명하기(1)

우연히 페이스북을 통해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이우창 교수님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중세와 근대에 대해 일반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선입견을 비판하시면서 크게 다음 두 가지 표현이 지닌 문제에 대해 지적하셨더라고요.

(a) "신 중심의 중세에서 벗어나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로"
(b) "데카르트 이래 보편화된 이성 중심의 근대적 주체가…"

첫 번째 문구는 1990년대 이전 역사학계의 관점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낡았고, 두 번째 문구는 '데카르트주의'나 '근대적 주체' 따위로 요약될 수 있는 특정한 인간관이 근대를 지배한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허구적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제가 이우창 교수님과 페북 친구가 아닐 뿐더러, 서강올빼미가 페북과 연계된 사이트도 아니다 보니, 글을 직접 공유할 수 없는 것이 아쉽네요.)

저는 두 가지 지적 모두에 동의하고, 이우창 교수님의 글에 대해 비판할 의도도 전혀 없지만, 그래도 (b)의 경우 약간의 '정상참작'을 해줄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데카르트주의'나, '이성 중심'이나, '근대적 주체'라는 표현들은 모두 현대철학의 맥락에서 등장한 표현들이니까요. 저 표현들은 역사학적 연구를 통해 실체를 밝혀낼 수 있는 대상을 가리키고 있다기보다는, 근대에 대한 20세기 이후 철학자들의 '해석'이라고 할 수 있죠. 물론, 그 해석이 과연 얼마나 정당한지는 따져보아야겠지만, 적어도 저는 저 해석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역사학보다도 철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1) 근대적 주체?

'주체'라는 개념에 대한 논의를 현대철학에서 촉발시킨 인물은 하이데거입니다. 하이데거의 후기 사유를 대표하는 논문들 중 「세계상의 시대(Die Zeit des Weltbildes)」라는 논문이 "세계가 상으로 변하고 인간이 주체로 되는 두 과정"을 "근대의 본질"이라고 규정하였죠. 그리고 이 변화의 시발점으로 '데카르트'라는 이름을 언급하고 있고요.


[언제나 그윽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하이데거. 세계사에서 이상한 일이 있을 때 영국을 찍으면 대충 맞듯이, 현대철학에서 이상한 논의가 있을 때 하이데거를 찍으면 대충 맞습니다.]

하이데거의 이런 '해석'은 근대에 이르러 형이상학이 세계를 정초하는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전까지 형이상학은 세계 속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본질'이나 신의 정신 속에 존재하는 '보편자' 등에서 자신의 토대를 발견하고자 한 반면, 근대 형이상학은 인간의 정신 속에 존재하는 '표상'에서 자신의 토대를 발견하고자 한다는 점이죠. 즉, 인간에게 주관적으로 확실하게 여겨지는 '상(Bild)'으로부터 출발하여 세계 전체를 이론화하고자 하는 시도가 근대 형이상학의 특징이었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주장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코기토 명제가 이와 같은 사고 방식을 가장 잘 나타내는 사례라고 할 수 있죠.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주관적 활동을 토대로 삼아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이론을 구축하려고 합니다. '나'라는 주관에 주어져 있는 관념들 중에서 가장 확실한 관념을 찾아내어, 그 관념 위에 세계에 대한 다른 모든 관념을 쌓아올리려 하는 거죠. 세계 전체는 그 관념들의 체계에 따라 '세계상(Weltbild)'의 형태로 파악되는 것이고요.

근대에 이르러 인간이 '주체'가 되었다는 하이데거의 평가도 바로 이러한 형이상학 기획이 지닌 특징을 말하는 것입니다. 원래 '주체(Subjekt)'라는 단어는 라틴어 '수브옉툼(subjectum)'에서 나왔고, '수브옉툼'은 그리스어 '휘포케이메논(hypokeimenon)'의 번역어이죠. 형이상학에 익숙하신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휘포케이메논'이란 우리말 형이상학 용어로는 '기체(基體)'라고 번역됩니다. 다른 것들을 아래에서 떠받치는 근본적인 사물을 가리키는 말이죠.

따라서 인간이 '주체'가 되었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이란, (흔히 대중적으로 오해되는 것과 달리,) 인간이 무슨 자유나 결정권을 지닌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형이상학적으로 다른 모든 것들을 떠받치는 '토대'가 되었다는 의미죠. 쉽게 말해, 철학자들이 외부의 세계보다도 인간의 주관적 관념이 지닌 형이상학적 우선성을 강조하게 된 시대가 근대라는 것입니다. 근대에 이르러 인간의 주관적 관념이 세계를 성립시키는 형이상학적 토대로 여겨지게 되었다는 것이, "인간이 주체가 되었다"라는 말의 의미인 것이죠.

물론, 하이데거의 이런 '해석'에 모두가 동의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애초에 하이데거는 엄격한 문헌 분석을 통해 이런 주장을 도출해낸 것이 아니죠. 하지만 저는 '근대적 주체'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에 무시하기 어려운 통찰이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근대철학은 합리론과 경험론을 막론하고서 대부분 인간의 주관적 '관념'으로부터 출발하여 세계를 설명하려는 경향을 강하게 보이니까요. 흔히 데카르트와 정반대편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로크, 버클리, 흄조차도 감각 경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소위 '인상(impression)'이라는 관념을 가장 확실한 것으로 상정한 채 자신들의 형이상학을 제시하죠. 데카르트를 비판하는 철학자들조차 데카르트와 똑같은 형이상학적 구도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논의를 전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근대철학 전체가 '데카르트주의'나 '주체중심주의'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는 주장이 아주 얼토당토 하지 않은 주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물론, '데카르트주의'나 '주체중심주의'라는 명시적인 표어가 제시된 적은 없었고, 모든 철학자가 데카르트에게 동의하거나 '주체'라는 개념을 명시적으로 사용한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근대철학의 주요 사조들이 데카르트처럼 인간의 주관적 관념을 토대로 삼아 형이상학을 구축하려는 기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만큼은 부정하기 어려우니까요. 즉, '데카르트주의'나 '근대적 주체'에 대한 현대철학의 논의들을 평가할 때는, 그 논의들이 근대에 쓰인 명시적인 텍스트보다도 근대가 전제하였던 암묵적인 사고 방식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만큼은 염두에 두어야 할 거예요. 설령 어느 근대인도 '데카르트주의'나 '주체'를 강조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그 용어들로 집약될 수 있는 사유 구도에 갇혀 있다면, 근대철학에 '데카르트주의'가 횡행했다는 주장이나 근대가 '주체'의 시대였다는 주장이 정당화될 수 있으니까요.

  • '이성중심주의'에 대해서도 호르크하이머의 『도구적 이성 비판』으로 해설해 보고 싶은데, 이건 다음에 시간이 되면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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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네요. 특히 데카르트 이래로 이성 중심의 근대적 주체가 출현했다는 설명은 거의 상투적이라고 느껴질만큼 자주 접해왔던 설명이었거든요. 제 기억으로는 현대 철학을 다루는 거의 모든 수업이나 책에서는 그런 식의 설명이 지배적이었어요. 그리고 현대철학의 많은 작업들이 그러한 이성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에 초점을 둔다고 배웠고요. 그런 점에서 (b)가 허구에 불과한 선입견이라는 이우창 교수님의 지적이 어떻게 가능하고, 또 Youn님이 그 지적에 어느정도 동의하시는 이유가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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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님의 말씀 처럼 B에 관해선 그것이 단언하기엔 과하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경향성이 있다고 말하기엔 부족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Youn님이 말하셨듯 철학 내적으로도 그러한 징조가 보이고 더하여 문화사 전반으로도 데카르트가 가져온 주체와 자연에 대한 관점은 발견 되는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A에 관해선 확연하게 그것이 철학계의 역사학적 무지에서 비롯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소위 말하는 (그리기 지금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중세-암흑기 공식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는 논리가 바로 위 지점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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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창 선생님은 데카르트주의가 한 번도 보편적인 영향력을 가진 적이 없다는 점, 이성에 대한 강조가 근대만의 고유한 특징이 아니라는 점, 근대에 단일한 인간관이 통용되지 않았다는 점을 이야기하시더라고요. 저는 이 주장들 모두에 동의합니다. 저 역시 하이데거의 근대성 규정이 (철학사의 맥락에서는 아주 틀린 것이 아니라고는 해도) 그다지 엄밀하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너무 큰 붓으로 근대를 그려내려 하다 보니, 근대에 일어난 여러 가지 구체적인 사회문화적 현상들을 다루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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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저 역시 ‘중세/근대‘를 ‘신/인간‘이나 ‘무지/계몽‘으로 도식화하려는 입장들에 대해 서강올빼미에 비판적인 글을 쓴 적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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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우창 교수님과 페북 친구가 아닐 뿐더러, 서강올빼미가 페북과 연계된 사이트도 아니다 보니, 글을 직접 공유할 수 없는 것이 아쉽네요.)

공교롭게도 제가 이우창 선생님과 같이 일한 적이 있어서 아는 사이인데 이 글 링크를 전달해드릴까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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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철학과 박사과정생의 잡썰에 불과하지만, 전달해주시면 감사하죠! 제가 이우창 선생님 글을 비판하거나 논평하려 쓴 내용은 아니고, 그냥 그 글을 읽으면서 철학과생으로서 떠오른 내용일 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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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와 지성사의 관점 차가 잘 보여지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이 교수님의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아마 그 분께서는 후대의 관점에서 과거를 재단하는 것보다는 당대의 맥락에서 당대의 담론 지형을 복원하는 지성사의 입장에 충실하다 보니 저런 말을 한 것 같습니다. 20세기 철학자들을 보면 ‘자신의 철학적 괸점’ 속에서 철학사를 재기술하는 작업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지성사가들은 이러한 역사 기술에 아마 불만을 가질 수 있겠지만, 20세기 대가들의 철학사 다시쓰기가 얼마나 역사적 타당성을 가졌느나와 무관하게 그들의 작업이 철학의 발전과 통찰을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역사의 맥락적 복원이 다른 관점보다 우월하진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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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합니다.

사실 이렇기 때문에 사상사에 대한 철학사적 기술과 지성사적 기술을 구분할 필요가 있어 보이기도 해요. 아무래도 말씀하신대로 철학사 기술 과정이 '자신의 철학적 관점' 속에서 이루어지다보니 과거 사상에 대한 과장 내지는 슬로건화가 자주 보이기도 하구요.

이 '슬로건화'를 개인적으로 정말 싫어하는데, 어느정도 어쩔 수 없는 문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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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만, 후기 하이데거에 대해서 무지하여 '근대적 주체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이데거가 처음 하였다는 것은 몰랐네요! 저는 (b)를 보자마자 푸코의 <말과 사물>이 떠올랐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애초에 하이데거는 엄격한 문헌 분석을 통해 이런 주장을 도출해낸 것이 아니죠.

여기에 대한, 엄격하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저런 광오한 주장에 대해서 '충분히' 엄격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분석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는 상상도 안 가네요), 최소한 '어느 정도'의 문헌학적 분석을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수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구체적으로, 세계 속의 존재자들 사이의 유사성에서부터 지식을 쌓아 올렸던 르네상스의 에피스테메에서 탁시노미아와 마테시스로 특징지어지는, '말'을 통한 '사물'의 명증적 표상의 가능성을 믿었던 고전주의 에피스테메로의 이행, 그리고 칸트에 의한,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으로 이행되는 근대 에피스테메로의 이행이라는 거대한 인식론적 운동 속에서 푸코가 꽤 설득력 있게 철학뿐만 아니라 생물학과 경제학 등에서 '근대적 주체'의 출현을 제시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리고, 푸코가 <주체의 해석학>의 마지막 문장에서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서구]철학의 정점에 있다'고 한 이야기도 이러한 논의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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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글 전달드립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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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 님의 의견에 공감하는 입장에서 볼 때, (Raccoon 님이 링크해주신) 이우창 교수님의 답변이 논지를 살짝 벗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이하 존칭 생략).

이우창 교수는 자신의 답변 2번 파트에서 Youn의 의견을 반박하고 있는데, 제가 보기에 그 근거는 크게 2가지로 보입니다.

  1. 로크는 "형이상학"을 전개하지 않았다. 따라서 로크가 근대적 "형이상학"을 제시했다는 Youn의 설명은 틀리다
  2. 로크는 인간의 감각 경험이 "확실한" 지식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로크는 여전히 당대의 도덕신학적 맥락에 서 있고, 로크는 신이 부여한 의무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인간이 가질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적어도 "로크가 관념을 가장 확실한 것으로 상정"했다는 Youn의 설명은 틀리다

1번에 대해: 이우창 교수는 Youn의 서술에서 "형이상학"이라는 단어에 꽂힌 것처럼 보이는데, 적어도 제가 보기에 이 단어는 그리 과대해석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더군다나 형이상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평소 입장을 고려해볼 때, "형이상학"이라는 단어는 그냥 "철학" 따위의 단어로 치환되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즉 핵심은

애초에 "형이상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모호한 개념 중 하나일 뿐더러, 설사 로크가 "형이상학"을 전개하고자 하지 않았다는데 동의하더라도, 일반적인 철학사적 서술로서 하이데거와 Youn이 말하는 요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2번에 대해: 일단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하이데거나 Youn이 의도하는 바는 애초에 도덕형이상학 내지 도덕신학적 맥락과 별로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Youn 역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주장되는 것은 "도덕신학적 지식에서 인간이 중심에 서 있다"라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 지식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인상 내지 관념이 중심에 서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확실성"은 이 경험적 지식의 맥락에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즉 어떤 지식을 참이라고 주장할 때, 그 근거 (확실성의 근거)는 경험에서 주어진 바 (즉 인상 내지 관념)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경험론의 핵심 교리를 말하는 것이죠. 이 교리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로크는 명백히 경험론의 전통에 서 있고, 동시대 근대철학자들의 인식론적 논의에 있어서 로크가 중점적으로 호명되는 배경도 바로 이 경험적 확실성 입니다. 예를 들어 로크는 어떤 명제가 참이기 위해서는 그 관념이 경험에 주어져야만 한다고 보았지만, 칸트는 경험에 주어지지 않고도 확실한 참인 명제(선험적 종합명제)가 있다고 보았던 것처럼요.

(여담이지만, 로크 및 17/18세기 근대철학자들이 도덕신학적 전통에 서 있다라는 점은 현대 철학사가들에게도 이미 알려진 자명한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로크에 대한 스탠포드 백과 항목에도 이 점이 나와 있습니다. 이우창 교수의 서술은 마치 철학사가들이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핵심은 로크가 도덕신학적 맥락에 서 있다고 하더라도 로크가 동시대 철학자들에게 호명되는 맥락이 항상 도덕신학적 맥락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

따라서 이우창 교수가 제시한 근거들은 "하이데거 및 Youn의 도식이 로크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라는 점을 논변하는 근거로서 부적절 합니다.


마지막으로, 파트 3에서 이우창 교수는 "모든 철학 연구가 지성사 연구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도, "로크가 '실제로 그렇게' 말했다는 식의 서술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철학전공자들, 적어도 과거의 철학텍스트를 다루는 연구자들이 자신들이 자명하게 사용하는 개념/범주의 역사성에 대해 자의식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그런데 철학사를 다루는 철학 전공자들 중 이것에 반대하는 이가 있을까요? 이우창 교수는 하이데거 식의 철학사 도식이 "틀린" 이유가 마치 이들이 (지성사가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는) 개념의 "역사성"을 간과했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진단하고 있는 듯 합니다. 하이데거의 도식이 "틀린" 것인지를 차치하고, 저는 이 진단이 너무 단순하다고 봅니다. 저는 논쟁의 근원이 지성사적 해석과 철학적 해석 사이의 복잡한 관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저 역시 당연하게도 모든 철학 연구가 지성사 연구에 종속되어야 한다거나, 반대로 모든 지성사 연구가 철학 연구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둘 중 어느 하나으로는 상대의 접근이 "틀렸다"라고 쉽게 반박하기가 생각보다 어렵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지성사 연구의 결과를 토대로 어떤 철학적 해석이 "틀렸다"라고 반박하거나, 철학사 연구의 결과를 토대로 어떤 지성사 연구가 "틀렸다"라고 반박하는 것이 생각보다 복잡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반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반박하는 것이 당연히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다만 "당신이 철학에서의 연구성과를 모르니 이러한 주장을 한다"라거나 "당신이 지성사에서의 연구성과를 모르니 이러한 주장을 한다"라고 "쉽게" 반박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지성사 연구 역시 해당 시대의 지성사적 맥락을 복원하기 위해 여러 텍스트들과 그에 대한 해석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것은 지성사 뿐만이 아니라 철학사에서도 연구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18세기 말의 독일 지성사를 분석 및 복원할 때 칸트의 텍스트들을 참조해야 하겠죠. 그러나 지성사가가 이렇게 해석/복원한 결과를 두고, 철학사가들이 "이 사람은 칸트 철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군"하고 말하는 광경을 우리는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칸트 철학 연구자가 제시한 칸트 철학을 두고, 지성사가들 (뿐만 아니라 다른 철학사가들 역시) "이 사람은 칸트 철학의 동시대적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군" 하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도 비일비재한 일입니다.

핵심은, 부분과 전체 사이의 해석학적 순환처럼, 지성사적 맥락과 철학적 텍스트 해석이 복잡한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우창 교수는 하이데거가 지성사연구의 성과를 놓치고 있기 때문에 "틀린" 해석을 한다고 보고 있지만, 사실은 로크의 텍스트에 대한 이우창 교수와 하이데거의 해석이 다르기 때문에 지성사적/철학사적 설명도 달라지는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크의 텍스트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지성사가들이 철학자들보다 "절대적" 우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우창 교수가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겠죠), 마찬가지로 하이데거의 철학사적 설명을 이우창 교수의 지성사적 설명을 토대로 "간단히" 반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보다 생산적인 것은 서로가 "상대적" 우위를 가진 부분을 토대로 서로의 해석을 비교해보면서 논쟁을 하고 서로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점검해보는 것입니다. "나의 작업을 너가 모르고 있다"가 아니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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