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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부분 써놓았다가, 끝까지 정갈하게 못 쓸 것 같아서, 폐기하려던 글입니다. 그런데 여러모로 올빼미에서 요근래 나눈 이야기들과 연관이 있는 것 같아서 (기억에 의존해 부정확하지만) 완성해서 남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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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고드프리 스미스(Peter Godfrey Smith)는 이제 '거장'이라는 칭호로 불릴 법한 인물입니다. (거대한했던) 과학 철학 일반이 개별 과학의 철학으로 분화되던 시기에 있던 거장 필립 키처(Philip Kitcher) 밑에서 박사를 받았는데, 그러다보니? 본인도 과학 철학 일반과 생물학의 철학 모두에 조예가 깊습니다.
과학 철학 일반에 대한 꽤 좋은 개론서도 집필하였고 (국역본도 있습니다.), Darwinian population and natural selection으로는 영미권 과학 철학에서 유명한 상인 라카토스 상도 수상한 바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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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후생동물> 이전, 이 책의 프리퀄처럼 보이는 <아더 마인즈>는 여러모로 실망스러운 책이었습니다.
문어를 통해 다른 마음(mind)의 가능성을 알아보자, 정도의 책이었는데 솔직히 목표가 무엇인지 도무지 모를 책이었습니다. (a) 문어의 마음을 추측이라도 할 만한 디테일한 정보와 과학적 사실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분야의 책이라면, 최근 읽은 것 중에서는 에드 용의 <이토록 굉장한 세계>가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b) 그렇다고 인간과 전혀 다른 문어가, 인간과 동일한 마음을 가진다고 여길 만한, 그런 경이로움을 느낄게 할 만한 디테일한 묘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c) 그렇다고 이 문어의 마음이, 기존 심리철학 담론에서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학술적인 인사이트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이 책은 문어와 함께 스쿠버다이빙한 생물학의 철학 전공자의 일기장이었을 따름이죠.
하지만 <후생동물>은 이에 비해 훨씬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i) 우선 책의 목표가 명확합니다. 기존 심리철학에 있던 마음(mind)의 문제를, 여러 진화 계통에 있는 다양한 생물이라는 근거를 들어서 새롭게 해명하고자 합니다. (ii)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다양한 생물들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들이 꽤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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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드프리 스미스는 생명(life)와 마음(mind)을 굉장히 밀접하게 엮습니다. 스미스가 보기에, 마음이라는 것은 생명의 "진화"함에 따라서 생성된 무언가, 인 듯 합니다. (따라서 스미스는 AI 등과 같은 인공적인 것이 '마음이 될 수 없다 여깁니다. 적어도 스미스가 보기에 아직 이들은 생명체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렇다면 "생명"이 무엇인지입니다.
이 논의에서도 보았지만, 저는 생명(life)를 정의하는 문제에 회의적입니다. 특히 고드프리 스미스의 주장은 (명료하지도 않지만) 납득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고드프리 스미스는 (기억상으로는) 대사 작용을 생명을 정의하는 요소로 보았습니다. (동시에 이 대사 작용이 '외부의 영향이 어느정도 제한된 닫힌 내부'에서 일어난다는 점에서, 외부와 경계지어진 무언가, 라는 조건 역시 있다고 볼 수 있겠죠.)
다만 이 대사작용, 제가 볼 때는 참 애매합니다.
i) 우리가 외부와 경계지어졌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외부와 "화학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음식을 넣고 - 에너지를 얻고 - 배출하는 소화계/물질대사의 영역을 배제하더라도)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외선을 받으며, 비타민 D를 합성하고 부분적으로 피부 조직의 손상을 입고 있습니다. 이러면 이게 "종유동굴에서 종유석이 생기는 화학 작용"과 뭔 그리 차이가 있는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근데 이건 좀 부적절한 사례 같은데?"라고 생각하면, 제가 볼 때 보다 직관적인 사례는 항정신성 약물의 사용입니다. 마약, 알콜, 니코틴, 카페인 등의 화학 물질은 우리의 신경계에 (있는 그대로) 작용합니다. 그렇다면 이 작용과 일반적인 다른 화학 작용의 선은 어디에 그을 수 있을까요?
ii) 게다가 스케일(scale)의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인간이라는 단위 혹은 동물이라는 단위만 생각하고 있지만, 단위를 좁혀 봅시다. 세균이나 고균처럼 엄청 작은 미생물이요. 이 미생물들은 우리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물리적/화학적 영향을 그대로 받습니다. (예컨대, 자외선 소독 혹은 알콜 소독으로 미생물들이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죠.)
이런 "미시적 단위"로 내려가버리면, 일반적인 화학/물리적 작용과 물질 대사는 더 구분하기 어려워질텐데, 과연 이게 맞는 구분인가 생각이 듭니다.
(이와 관련된 예전 글을 덧붙여놓는다.)
차라리 이 문제를 정교하게 하기 위해서는 형이상학/물리학의 철학/화학의 철학/생물학의 철학을 모두 고려해서, 적절한 가이드라인을 세우는 것이 필요해보이네요.
(특히 물리학의 철학에서 잘 다루지 않는 주제 같지만, 규모[scale]의 문제가 중요해보입니다. 양자 단위에서는 영향을 미치는 것이, 인간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고,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우주론적 규모에서는 영향일 미비해지는 것처럼요.)(나아가 생태학 역시 중요해보입니다. 그 자체로 자족적인 시스템과 그렇지 않은 것의 선을 긋는 것이 생태학에서 중요한 문제처럼 보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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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여하튼 스미스는 생명을 정의하고, 신경세포(neuron)을 마음의 기원으로 잡습니다. (따라서 신경 세포가 있기 시작한 동물류부터 살펴봅니다.)
일단 동물이긴 하지만, 신경 세포가 존재하지 않는 해면을 거친 후, 신경세포가 존재하는 해파리를 지나 문어와 곤충 그리고 척삭 동물(어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 인간)을 향해 나아갑니다.
여기서 스미스는 다양한 마음(mind)을 보여주려 합니다. 그가 보기에 (i) 행위자성 (agencey), 상황에 대한 정보를 받아드려서 그에 따라 '매번 다르게' 행동하는 능력과 (ii) 주체성(subjectivity), 세상에 대한 '무언가'를, 어떤 느낌을 받아드리는 능력이 '마음'의 핵심입니다.
다만 이는 정도가 다르죠. 의식이 (a) 인간처럼 항상 유기적이고 단일할 수 있지만, 문어 (혹은 분할뇌 환자처럼) 부분적으로 비-유기적 상태로 진입할 수도 있습니다. (b) 주체성 역시 박쥐가 느끼는 세상과 인간이 느끼는 세상을 다를 것이고, 그 선명함과 세밀함 역시 다 다를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렇지만 저는 여기서도 스미스가 가진 "신경 중심주의"라 칭할만한 것이 좀 거슬립니다.
(스미스 본인 역시 언급하지만) 단세포 생물과 식물들 역시 적어도 (i) 행위자성이라는 것을 보입니다. 그들은 비록 신경세포가 없지만, 나름의 화학 물질로 의사소통을 하고, 상황에 따라 다른 행동을 하죠. (아메바류에 속하는 점균류와 식물의 의사소통에 대한 연구는 요근래 활발히 되고 있습니다.)
스미스와 학자들은 이걸 최소 인지(minimal cognition)이라 부르는 데, 스미스는 이런 최소 인지는 인정하면서, 왜 이들에게 '주체성'이 있다는 데 부정적인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애당초 스미스 역시 주체성이라는 것을 외부 관찰자가 알기는 어렵다고 인정하면서, 최대한 연구 데이터들을 꼼꼼히 봐야 한다 주장합니다. 근데 무슨 근거로 식물과 다른 원생동물들이 주체성을 가지지 않는다 말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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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다시 위에서 언급한 화학 반응과 연결됩니다.
제가 볼 때 최소인지는 두 가지 능력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i) 기억과 (ii) 정보의 입력이죠. 이 중 식물/점균류 등의 정보 입력은 '화학 반응'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것도 뉴런을 거치지 않는 화학 반응이죠. (사실 다른 동물들의 정보 입력시 화학 반응이긴 하죠.)
다만 동물들 역시 뉴런을 거친 화학 반응 (즉, 감각계)가 있지만, 뉴런에 직접 적용되는 화학 반응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항정신성 물질들이죠. 외부에서 들어가는 마약, 카페인뿐 아니라, 세로토닌 등과 같은 호르몬/신경전달물질 역시 이런 예라 할 수 있겠죠.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비-뉴런적) 화학 반응 역시 어떠한 주체성/주체적 감각/퀄리아를 가지고 있음을 압니다.
그렇다면, 이 화학 반응만을 가진 점균류/식물 역시 어떠한 퀄리아를 가진다고 가정해도 무리가 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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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