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의 성령론?!: 공동체가 곧 성령(정신)이다

Thus the community itself is the existing Spirit, the Spirit in its existence [Existenz], God existing as community.

The first moment is the idea in its simple universality for itself, self-enclosed, having not yet progressed to the primal division, to otherness—the Father. The second is the particular, the idea in appearance—the Son. It is the idea in its externality, such that the external appearance is converted back to the first [moment] and is known as the divine idea, the identity of the divine and the human. The third element, then, is "this consciousness—God as the Spirit." This Spirit as existing and realizing itself is the community.

그러므로 공동체 자체는 실존하는 정신, 자신의 실존 속에 있는 정신, 공동체로서 실존하는 하나님이다.

그 첫 번째 국면은, 단순한 대자적 보편성 속에 있는, 스스로 닫혀 있는, 아직 근원적 구분인 타자성으로 진행된 적이 없는 관념—아버지이다. 두 번째는 개별자, 현상 속에 있는 관념—아들이다. 이는 자신의 외재성 속에 있는 관념, 곧 외적 현상이 첫 번째의 것[계기]으로 전환되어 신적 관념으로 알려진 그러한 것, 다시 말해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동일성이다. 세 번째 요소는, 그러므로, "이러한 의식—영[정신]으로서의 하나님"이다. 실존하며 실재화하는 자체로서의 이러한 영[정신]이 공동체이다.1

헤겔의 종교철학 강의에 나타나 있는 위의 구절은 여러 모로 참 놀랍다고 생각합니다. 헤겔 특유의 장황하고 불친절한 문체로 쓰여 있긴 하지만, 저는 이 구절이 헤겔 철학의 독창성과 탁월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봐요. 몇 가지 특징적인 점들을 뽑아보면 이렇죠.​

(1) 공동체가 곧 정신이다.

헤겔의 철학에서 '정신(Geist)'이라는 개념만큼 많이 오해된 혼란스러운 개념도 없을 겁니다. 보통 헤겔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알고 계신 분들은 '정신'을 일종의 '유사 신적 지성(quasi-divine intelligence)' 정도로 생각하죠. 저 하늘 어딘가에 '정신'이라고 하는 초월자가 존재하고 있어서, 이 세계와 역사를 조종한다는 식으로요. 하지만 정작 헤겔은 자신이 말하는 '정신'이라는 것이 공동체라고 수많은 텍스트에서 강조합니다. 공동체 속에서 성립하는 문화나 제도 같은, 일종의 규범적 질서들이 바로 '정신'이라고요.

더욱 와닿게 말하자면, 한국어로 '민족의 얼'이라고 할 때 그 '얼'이 헤겔의 '정신'에 거의 정확히 들어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가령, 한국인은 한국의 역사를 통해 형성된 한국인의 얼을 바탕으로 세계를 이해하잖아요.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와 우리가 어떤 얼(정신)을 가지고 있는지가 서로 분리되지 않는 거죠. 그리고 이런 얼이 표출된 형식이 (객관정신의 측면에서 보자면) 법 같은 국가적 제도이고, (절대정신의 측면에서 보자면) 예술, 종교, 철학 같은 인문적 유산이죠. 한국인의 세계 이해를 규정하는 한국인의 얼은, 한국인의 역사를 통해 형성된 이런 제도와 유산 속에 녹아들어 있다는 거예요.

(2) 정신이 곧 성령이다.

독일어 'Geist'나 영어 'Spirit'은 '정신'이라고도 번역되지만 종교적인 맥락에서는 '영'이라고도 번역되죠. 특별히, 그리스도교의 맥락에서는 '성령'으로도 번역되고요. 위의 구절에서도 헤겔은 바로 이런 효과를 노리면서 '아버지(the Father, 성부)'와 '아들(the Son, 성자)'이라는 용어와 함께 '영(the Spirit, 성령)'이라는 용어를 병렬적으로 나열하고 있죠.

즉, 헤겔에 따르면, (특별히, 그의 종교철학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교회가 역사를 통해 형성해 온 문화가 바로 그 자체로 성령이라는 거예요. 가령, 교회에서 종종 "성령이 지금 여기서 일하신다."라거나,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거나,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라는 말들을 할 때, 헤겔은 이런 말들이 무슨 신비주의적이고 초자연적인 의미로 이해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지적하고 있는 거죠. 교회 공동체가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 속에서 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일들에 참여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의 일들이 일어나는 사건이니까요.2

더욱 구체적으로, 교회의 선교를 통해 실제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떠올려 보면 이해하기 쉽죠. 140여년 전에 조선 땅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같은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그 이전에는 없었던 근대적 학교가 세워지고, 병원이 세워지고, 복지 사업 이루어지고, 신분제와 차별이 문제시되었다면, 이렇게 새로운 문화가 시작된 사건은 그 자체로 '성령의 역사'라고 부를 수 있다는 거예요.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정신'이 일어나는 사건이 바로 '성령'이 활동하는 사건이라는 거죠.

(3) 성령이 곧 하나님이다.

가장 놀라운 점은, 이렇게 교회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정신' 혹은 '성령'을 경험하는 사건이 바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건이라는 이야기죠. 즉, 헤겔의 종교철학에서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저 멀리 예지계 어딘가에서 흰 수염을 하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아니라는 거예요. 오히려 모든 사람이 지금, 여기, 이 땅의 교회 공동체에서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존재가 하나님이라는 거죠.

바로 이 부분은 칸트의 종교철학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신을 이성의 이념으로 상정하고, 『실천이성비판』과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단순한 희망의 대상으로 요청했다면, 헤겔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가 먼 곳에 있지 않다고 강조하는 거죠. 현실의 교회를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새로운 정신이 바로 성령이고, 성령을 경험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이니까요. 말 그대로,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일하고 계신지는 매일 같이 생생하게 우리의 눈으로 직접 목격할 수 있다는 거죠.​

(4) 헤겔의 종교철학이 일으킨 혁신

저는 헤겔의 종교철학이 대단히 강력한 실천적 함의를 지닌다고 봐요. 헤겔은 종교를 (특별히, 그리스도교를) 결코 이론적이거나, 낭만적이거나, 신비적인 영역에 놓아 두지 않으니까요. 그의 종교철학에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 땅에서 실제로 증명해내는 공동체로서 교회가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죠. "하나님이 존재한다."라는 주장을 형이상학 체계를 통해 논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주장을 교회 공동체의 실천을 통해 실제로 실현시키는 것이 중요하게 되는 거죠. 새로운 정신(성령)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고, 새롭게 세상을 뒤바꾸어서 "지금 여기서 하나님이 일하시고 계신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는 일들 말이에요.

실제로, 헤겔은 이런 실천적인 문제들에 주목하죠. 헤겔이 1807년에 크네벨에게 보낸 편지에는 "너희는 먼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도 너희에게 역시 주어질 것이다."3라는 놀라운 구절이 쓰여 있을 정도로요. 이 구절은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먹을 것과 입을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씀을 패러디한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 나라'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고 본 헤겔에게는, 이 땅에서 가난한 자들이 회복되고, 병든 자들이 치유되고, 소외된 자들이 인정되는 사건들이야말로,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사건들이라고 여겨진 거죠. 흔히 마르크스가 현실을 변혁시키기 위해 헤겔의 관념론을 뒤집어서 유물론을 주장했다고 하지만, 이미 헤겔은 현실 변혁의 문제를 대단히 강조하고 있었던 거죠.

현대신학에서는 헤겔의 이런 통찰들이 대단히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죠. '보편사의 신학'을 제시한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나 '희망의 신학'을 제시한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에게서 (서로 강조점은 조금 다르지만) 헤겔이 말한 하나님 나라 개념이 갱신된 형태로 등장하죠. 특별히, 저는 하나님 나라 개념이 얼마나 강력한 실천적 힘을 지닐 수 있는지를 몰트만의 신학에서 자주 목격합니다. 몰트만의 글들은 실제로 남미 교회가 빈곤과 폭력의 문제에 목소리를 내도록 자극하였죠. 심지어 그가 쓴 『희망의 신학』은 우리나라에서도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감옥에 갇힌 그리스도교 지식인들 사이에서 읽혔고, 그 내용 중 일부는 법정 최후의 진술에서까지 낭독되었을 정도로 한국 민주화 운동에 영향을 주었으니까요.

(5) 헤겔의 종교철학이 지닌 한계

그러나 헤겔의 종교철학은 '교회'라는 현실의 공동체에게 강력하게 호소하는 만큼, 이 현실의 공동체가 지닌 한계로 인해 많은 부분 위태로울 수밖에 없죠.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이 경험되고 입증될 수 있는 통로가 바로 교회라면, 그 교회가 지닌 문제는 곧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이 지닌 문제가 되어버리니까요. 물론, 저는 대중 매체를 통해 드러나는 피상적인 교회 비판과는 달리, 사회에서 실제로 교회가 수행하고 있는 긍정적 역할들은 대단히 많다고 봅니다. 복지의 영역만 하더라도, 국가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복지의 사각지대를 개신교와 가톨릭이 상당 부분 메워주고 있기도 하죠. 그렇지만 아무리 이런 긍정적인 면모를 강조하더라도, 분명히 현실의 교회가 완전무결한 공동체가 아니라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현실의 교회가 지닌 한계가 너무나 명확한 데도, "하나님이 지금 여기 교회에서 일하고 계신다."라고 말하는 것은 공허할 수밖에 없죠.​

특별히, 이런 문제는 소위 '크리스텐덤(Christendom)'이라고 하는 그리스도교 국가의 영역에서 심각하게 드러나죠. 세계사적으로 크리스텐덤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었는지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죠. 로마의 그리스도교 국교화 이후로 1000년의 세월동안 유럽 사회 전체를 그리스도교가 지배하였지만, 그 기간이 좋은 시대였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중세에 대한 비판도 솔직히 너무 과장이 심하다고 보긴 합니다.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종교재판이나 마녀사냥은 중세 말기의 흑사병 이후부터 르네상스기까지 중세 사회가 정말 물리적으로 '개판'이 된 다음에 벌어진 것들이니까요.)

헤겔이 이런 한계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헤겔은 분명 근대인이었고, 세계사의 우여곡절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고, 청년 시절에는 본인부터가 그리스도교 비판에 앞장 서던 인물이기도 했으니까요. 다만, 제 지식이 부족해서인지, 저는 헤겔의 종교철학에서 현실의 신앙 공동체가 지닌 한계에 대해 어떠한 대답이 제시되고 있는지 찾지는 못하였습니다. 물론, 헤겔에게는 역사가 결국 '자유'를 향해 나아갈 것이라는 일종의 낙관주의적 기대가 있기는 하지만, 이런 기대가 얼마나 철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지 저로서는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헤겔의 종교철학이 지닌 강력한 실천적 힘을 유지하면서도, 그의 종교철학이 자칫 빠질 수 있는 현실적 문제를 극복해내는 길을 찾는 작업은 매우 유의미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언급한 판넨베르크나 몰트만이 20세기 후반부에 이런 작업을 수행한 대표적인 인물들이었고, 오늘날에는 예일학파의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나 급진 정통주의의 존 밀뱅크(John Milbank) 등이 이와 유사한 맥락의 작업들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물론, 이 학자들이 항상 헤겔을 직접 거론하면서 자신들의 논지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라는 공동체의 정치철학적-정치신학적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자신들의 논의를 전개한다는 점에서만큼은 헤겔의 영향권 안에 있다고 보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한 사람으로서, 아무쪼록 헤겔 이후로도 교회 안에서 새로운 '정신'들이 많이 일어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1. G. W. F. Hegel, Lectures on the Philosophy of Religion, R. F. Brown, P. C. Hodgson, and J . M . Stewart with the assistance of H. S. Harris (tran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20, p. 473.

  2. 헤겔의 종교철학은 '공동체(community)'라는 용어로 명백히 현실의 교회를 가리키고 있어요. "우리가 지금까지 본 개념을 지닌 공동체는 또한 자신을 실재화한다. 실제 공동체를 우리는 일반적으로 교회라고 부른다. 이것은 더 이상 나타나는 공동체가 아니라, 자신을 유지하면서 존속하는 공동체이다. 존속하는 공동체 속에서 교회는, 대체로, 그것을 통해 주체들이 진리로 나아오고, 진리를 자신들에게 전유하며, 따라서 성령(Holy Spirit)이 그들 속에서 실재적, 현실적, 현재적으로 되는, 그래서 그들 가운데 거하게 되는 기관이다."(G. W. F. Hegel, Lectures on the Philosophy of Religion, p. 475.)

  3. G. W. F. Hegel, Hegel: The Letters, C. Butler and C. Seiler (trans.),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84, p.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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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헤겔의 종교철학은 물론이고 종교철학 자체도 모릅니다. 심지어 헤겔의 자연철학과 정신철학은 더더욱 모르고요 (<정신현상학> <대논리학> 투툴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보고 일단 든 생각들을 적어볼 테니, 제가 잘못 이해하는 것 같은 부분을 지적해주시면 좋은 토의가 될 것 같네요.

제가 처음 이 단락을 읽었을 때 든 생각은, 헤겔이 삼위일체를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정신이라는 더 상위개념 안에서 삼위일체의 요소들이 찾아진다라고 말한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성경에 대한 설명을 한다기보다는 정신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고 이해를 했네요. 그래서

이 부분이 조금 의아했습니다. 헤겔이 이 단락에서 교회나 종교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 같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정말 맥락 하나도 없이 저 발췌한 단락만 읽고 든 생각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이 단락이 나온 맥락이 정신에 대한 맥락이 아닌 삼위일체에 대한 맥락인 것이 명확한가요?

조금 사소한 부분일 수도 있겠습니다. 위에 부분하고 연결되는 부분인데, 보통 우리가 하나님 (혹은 하느님; 제가 예전에 성당을 다녔어서 하느님이 더 익숙하네요.) 을 얘기할 때 굉장히 초월적인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잖아요? 그래서 이 정신을 통해 경험하는 것이 하나님인지, 아니면 이런 사회를 통해 경험하는 것을 우리가 오해하면서 생긴 것이 하나님인지 헷갈리네요. 적어도 제 지식으로는 후자가 맞는 것 같은데, 전자를 주장하고 계셔서, 조금 더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아무런 맥락도 없이 발췌만 읽고 든 생각이라 제가 틀릴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제가 예전에 헤겔/하이데거 세미나를 들은 적이 있었어요. 이때 헤겔 교수님과 하이데거 교수님이 논쟁을 벌였던 것이 Being (Sein)이었어요. 헤겔의 절대적 관념은 하이데거의 존재 (Sein)의 개념과 같은데, 헤겔은 하이데거와 다르게 이 존재를 완벽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헤겔의 신이란 개념이고 하이데거의 존재의 개념과 상응하지 못한다, 이렇게 배웠었네요. 하지만 이건 <대논리학>의 맥락이죠. 이게 헤겔의 정신철학이랑 어떤 연관이 있을지 궁금하군요 (이건 사실 포스팅에서 얘기하기엔 너무 큰 토픽이라고 생각하지만 뭐... 올려서 나쁠 건 없겠죠.).

이 부분은 제가 한동안 빠져있었던 스피노자와 헤겔의 연결점과 관련있을 것 같습니다 (간단한 논의는 여기서 됐었죠: 진태원, 『스피노자 윤리학 수업』, 제3강 요약). 스피노자의 무우주론에 반하여 헤겔은 유한에서 무한을 이끌어내야했고, 그렇게 되면서 무한은 유한의 자기부정으로 형성이 되고, 그렇기 때문에 사실 초월적인 무한 (Bad infinity)는 유한의 자기부정을 이루는 요소 중에 하나였다, 이런 식으로 결론이 나니깐요.

종교철학의 한계에서도 조금 말할 것이 있습니다. 이 단락을 읽으면서 처음 드는 생각은 종교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 헤겔의 목표라고 생각됍니다 (그래서 쉘링과 헤겔의 마찰이 당연하게 여겨지겠죠. 예전에 여기서 간략하게 논의됐었죠: 셸링의 초월론적 관념론의 체계 - yhk9297 님의 게시물 #3). 결국에 종교에서 다루는 초월적인 신들을 부정하고, 아까 말했듯이 유한의 자기 부정으로 나아가는 것이 헤겔의 목표같습니다.

@YOUN 님께서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 회의적이신 것 같습니다:


혹시 회의적이신 이유가 따로 있으신건가요? 아님 단순 직관인가요 (이 부분이 derogatory하게 들릴 수는 있겠다만, 저도 직관에 의존해서 회의감을 느낄 때가 많아서, derogatory하게 쓰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헤겔의 종교철학에 대한 이해를 너무 <대논리학>에 의존하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쪼록 이 논의를 통해 배울 것이 많아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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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꼼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 위의 인용은 헤겔의 1827년 종교철학 강의에서도 마지막 부분인 '완전한 종교(The Consummate Religion)'라는 장에서 등장합니다. 루터파 개신교도였던 헤겔에게는 당연히 이 '완전한 종교'가 그리스도교이다 보니, 이 장의 내용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신학을 따라 (a) '첫 번째 요소: 즉자대자적인 하나님의 관념', (b) '두 번째 요소: 표상, 현상', (c) '세 번째 요소: 공동체, 정신'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즉, 성부 하나님의 관념이 철학적으로는 칸트의 '사물 자체'에 대응하는 의미를 지니고, 성자 예수의 관념이 철학적으로는 '표상'에 대응하는 의미를 지니고, 마지막으로 성령의 관념이 철학적으로는 '공동체의 정신'에 대응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하는 거죠.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말씀하신 문제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대답이 가능할 것 같아요.

첫째, 헤겔은 정신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가?: 그렇다.

말하자면, 헤겔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신학이 바로 '현상과 사물 자체의 이분법에 대한 극복'이라는 철학적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스도교가 삼위일체라는 종교적 표상을 통해 말하고자 한 성부-성자-성령의 일치는, 철학이 현상/사물 자체의 이분법이라는 형이상학적 문제를 통해 말하고자 한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the identity of identity and non-identity)'이라는 거죠. 그래서 헤겔은 종교와 철학이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헤겔의 종교철학 강의의 말미에는 "이러한 [대립하는 것들 사이의] 화해는 철학이다. 철학은 이러한 한에서 신학이다." (p. 489.)라는 주장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둘째, 헤겔은 교회나 종교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다.

그렇지만 헤겔이 삼위일체라는 종교적 표상을 통해 결국 철학적인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는 사실이, 그가 현실의 실제 종교나 교회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헤겔은 매우 명시적으로, 자신이 말하는 '공동체'나 '정신'이 바로 현실의 실제 공동체 중에서는 '교회'를 의미한다고 지적하고 있거든요. 아래처럼요.

"우리가 지금까지 본 개념을 지닌 공동체는 또한 자신을 실재화한다. 실제 공동체를 우리는 일반적으로 교회라고 부른다. 이것은 더 이상 나타나고 있는 공동체가 아니라, 자신을 유지하면서 존속하고 있는 공동체이다. 존속하는 공동체 속에서 교회는, 대체로, 그것을 통해 주체들이 진리로 나아오고, 진리를 자신들에게 전유하며, 따라서 성령(Holy Spirit)이 그들 속에서 실재적, 현실적, 현재적으로 되는, 그래서 그들 가운데 거하게 되는 기관이다." (p. 475)

게다가, 2-4세기 경에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체계화된 삼위일체 신학이 실제로 헤겔이 지적하는 문제를 고민하였다는 점도 주목할 만 해요. 헤겔이 단순히 삼위일체 신학을 자기 마음대로 현상/사물 자체의 이분법에 적용시킨 것이 아니라, 정말로 삼위일체 신학이 그런 논의를 배경으로 출현한 사유라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가 미처 계시하지 못한 하나님의 숨겨진 '양태(mode)'나 '실체(substance)' 따위가 존재한다는 이단 사상들을 논박하면서 제시된 것이 삼위일체 신학이다 보니, 현상 뒤편에 숨겨진 사물 자체가 존재한다는 칸트식의 사고방식을 비판하기 위해 실제로 삼위일체 신학의 아이디어를 가져오는 게 얼마든지 가능한 거죠.

(2) 실제로, 지젝은 헤겔의 성령 공동체 개념을 강조하면서 정통 그리스도인과 무신론자가 사실 매우 가까운 관계(?)라고 지적하기도 해요. 정통 그리스도교는 역설적이게도 초월적 신의 존재를 부정해버리는 놀라운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지젝이 보기에는 이게 거의 무신론이나 다름 없다는 거죠. 개인적으로, 저는 이런 식의 해석이 절반은 옳고 절반은 과장이라고 생각해요. '무신론'이라는 딱지조차 결국 초월적 신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고 생각해서요. 초월적 신을 저 예지계 어딘가에서 찾고자 하는 입장이 '유신론'이라면, 초월적 신이 저 예지계 어딘가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실망하는 입장이 '무신론'인데, 애초에 그런 신을 상정하지 않는 그리스도교인의 입장에서는 유신론/무신론이 모두 공허한 입장일 뿐이니까요.

(3) 저는 하이데거가 쓴 논문인 「헤겔의 경험 개념」을 매우 인상적으로 읽었어요. 헤겔의 『정신현상학』 서론에 대해 하이데거 본인의 현상학적 관점에서 해설한 논문인데, 헤겔의 현상학과 하이데거 본인의 현상학이 근본적으로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내용이거든요. 하이데거의 수제자이면서 헤겔 연구자로도 유명한 가다머 역시 『진리와 방법』에서 이 논문을 매우 높이 평가해요. 헤겔의 경험 개념과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 사이에는 실제로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하면서요. 물론, 헤겔과 하이데거가 모든 면에서 일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저로서는 둘 사이에 차이보다는 일치점이 훨씬 많다고 생각해요.

(5) 맞아요. 특히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그리스도교 교단이 삼위일체라는 종교적 표상으로만 진리를 파악하고 있는 나머지, 현상과 사물 자체의 일치를 철저하게 밀고 들어가지는 못했다고 주장하죠. 그래서 '종교' 장 이후에 '절대지'에 대한 논의가 등장하기도 하는 거고요. 물론, 헤겔의 전체 체계 내에서는 종교적 표상이 철학적 해명을 통해 완성되어야 하는 단계 속에 놓이겠지만, 저는 오늘날 철학이나 신학이 종교와 철학 사이의 이런 위계적 구조에 대한 헤겔의 주장까지 굳이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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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답변 감사합니다.
(1)

이 부분이 맞다면, 제가 종교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 항상 종교가 초월적 존재의 믿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로써 칸트식 물자체/모습의 차이를 비판한다는 것이 놀랍네요.

(2)

개인적으로는 유신론/무신론의 카테고리가 문맥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피노자 역시 무신론자로써 말이 많이 되는데, 스피노자가 초월적 신이 없다고 해서 실망하는 입장이라고 생각하진 않거든요. 오히려 초월적 신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실망했으면 했지, 초월적 신이 없다는 것에 딱히 부정적이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젝이 '무신론'이라는 단어를 썼을 때, 그 단어를 지젝의 맥락에서의 무신론으로 한정시키는 게 좋지 않나라는 입장입니다.

(3)
하이데거의 "헤겔의 경험 개념"은 존재한다는 것은 알지만 정작 읽어보지는 않았네요. 그때 들었던 세미나가 <대논리학>과 하이데거의 연결점을 보는 수업이라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하이데거와 헤겔이 비슷한 질문들을 많이 던진다는 면에서 비슷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질문들의 답은 다른 경우가 많다는 입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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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설명 및 토론 감사합니다! 헤겔 철학 자체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될 수 있었던 기회였습니다. 다만 얄팍한 그리스도교 신학 지식에 비추어봤을 때 궁금한 점이 생겨 여쭤보고 싶은데요.

매우 직관적이고 확 와닿는 비유인 것 같은데요. 다만 '한국인의 얼'과 '한국인들'의 관계를 생각해봤을 때 이를 성령과 교회의 관계에 대입해보면 마찰이 생기지 않나, 하는 염려가 듭니다. 이를테면 (수반 관계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한국인의 얼과 한국인들 간에는 모종의 의존 관계가 성립하는 것 같습니다 - 예를 들어 보수적으로 잡아도 백악기에 이미 한국인의 얼이 존재했다고 보는 것은 좀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런 관점에서 볼 경우, 성령이 곧 교회의 문화라고 보는 것은 최소한 교회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

라는 점에 비춰봤을 때, (기존의 삼위일체에서 촉발되는 문제와는 별도의) 문제를 낳을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최소한 여러 주류 신학에서는요.

더불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

라는 전거를 교회와 그리스도가 최소한 수적으로 구분된다는 주장의 근거로 해석할 경우, 이 또한 마찰을 빚는 요소가 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게 지금 제대로 된 질문인걸까요 ...? :thin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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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어떤 의미에서, 헤겔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간에게 의존시키는 굉장히 급진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이런 헤겔의 입장에 대해 크게 세 가지 정도의 반응이 있는 것 같아요.

(1) 다소 보수적인 성향의 신학자들은 헤겔의 입장이 신학적으로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헤겔이야말로 하나님을 철학의 틀 속으로 환원시키고자 한 시도의 정점에 서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말하자면, 헤겔은 자신 살았던 근대라는 시대와 자신이 살았던 프로이센 국가 체제를 기준으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자 했다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간적 제도에 종속시키는 교리적인 문제에 빠졌을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특정한 인간적 제도를 기준으로 온갖 악과 폭력을 정당화해버리는 윤리적인 문제에까지 빠졌다고 비판하죠.

(2) 소위 그리스도교 무신론에서는 헤겔이 일종의 선구자로 여겨지기도 해요. 위에서 언급했듯이, 지젝은 『죽은 신을 위하여』나 『예수는 괴물이다』 같은 저서들에서 그리스도교가 역설적이게도 무신론을 내세우는 종교라고 주장하거든요. 헤겔의 삼위일체론을 그런 주장의 이론적 근거로 삼아서 말이에요. 지젝의 주장은 일견 굉장히 도발적이고 과격하기는 하지만, 분명히 이런 견해도 꽤나 일리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해요. 가령,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영국 신학자 중 한 명인 존 밀뱅크는 지젝의 그리스도교 해석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지만, 그러면서도 지젝의 해석이 절반의 진리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거든요.

(3) 제일 중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은 ‘하나님의 인간성(humanity of God)'이라는 신학적 논의를 제시해요. 쉽게 말해, 인간이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인간에게 분명히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 정통 교리에 내포된 함의라는 거죠. 가령, 칼 바르트 같은 신학자는 하나님이 세상의 창조 이전부터 인간을 사랑하기로 선택했다는 성경의 구절들(에베소서 1:4)을 강조하면서, 인간성이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본성이라고 이야기해요. 물론, 이런 신학적 논의가 반드시 실체, 본질, 속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의들을 염두에 두고서 제시된 것은 아니에요. 다만, 하나님의 인간성을 강조하는 입장들은 (a) 하나님의 본성이 애초에 ‘인간에 대한 사랑’일 수밖에 없고, (b) 정통 교리가 바로 그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라는 사유를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과 ‘신성’이라는 공식으로 체계화했다면, (c) 영원부터 존재한 하나님의 내재적 삼위일체 속에는 ‘인간성’ 혹은 ‘인간임’이 포함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고 강조해요. 칼 바르트, 에버하르트 융엘, 캐서린 모리 라쿠나, 위르겐 몰트만 등 상당히 많은 현대신학자들이 이런 입장을 지지하죠. (그리고 이런 입장이라면, 백악기 이전은 물론이고, 창조 이전부터도 인간은 이미 하나님 안에서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물론, 이 신학자들이 직접 그런 형이상학적 주장을 제시하지는 않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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