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태원, 『스피노자 윤리학 수업』, 제3강 요약

진태원 (2022). 『스피노자 윤리학 수업』. 그린비. 73-109.

제3강 산출하는 자연과 산출된 자연

제1장 실체는 어떻게 양태들을 생산하는가?

1. 양태의 존재론적 지위

이전의 철학자들은 개별 사물들을 실체로 간주하고, 개물들이 존재하고 활동하는 방식을 양태로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양태들은 스스로 실재성을 지니지 않으며, 양태가 귀속된 실체가 서로 (실재적으로) 구별되는 한에서만 서로 구별될 수 있다. 반면 스피노자는 신(=자연)을 실체로 간주하고, 자연 안의 사물들을 실체의 양태로 간주한다.

양태들은 실체에 의해 생산된다. 앞서 논의했듯 실체는 무한히 많은 속성들을 갖고 있는데, 양태의 생산과 관련해서 볼 때 이는 실체가 양태를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생산할 역량을 지닌다는 뜻이다. 이때 실체는 사람들이 인격신에 대해 상상하듯 양태를 자기의 의지에 따라 생산하지 않고 본성에 따라 생산한다. 즉 실체는 양태를 임의로 생산하지 않고 필연적인 방식으로 생산한다. 물론 이러한 필연성은 신의 본성에 의거하는 것이지, 외적으로 강제되는 필연성이 아니다.

신은 정의상 그 자체로 가장 완전한 존재자일 텐데, 왜 세계를 창조하고 그 안에 있는 인간의 숭배와 인정을 요구하는가? 스콜라 철학은 필요의 목적(finis indigentiae)과 동화의 목적(finis assimilationis)를 구별함으로써 이 물음에 답한다. 필요의 목적에 따르면, 신은 세계가 자신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세계를 창조했다. 그러나 이는 신이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다는 점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스콜라 철학에 의하면 신은 필요의 목적이 아니라 동화의 목적에 따라 세계를 창조했다. 동화의 목적에 따르면, 신은 자신의 역량을 그 피조물들과 나누고 싶었기 때문에 세계를 창조했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보기에는 동화의 목적 역시 신이 어떤 의지를 가지고 임의적으로 행위한다는 점을 함축하는 까닭에 옳지 않다. 그가 보기에 신은 한낱 잠재적, 우연적이 아니라 그 본성상 필연적으로 양태들을 생산한다.

그러므로 신이 양태들을 생산한다는 점은 신의 존재만큼이나 필연적이다.

2. 무한 양태와 유한 양태

1) 무한 양태

양태에 대한 종래 철학사에서의 용어법과는 판이하게, 스피노자는 양태를 무한양태와 유한양태로 나눈다. 그리고 무한양태는 다시 직접적 무한양태와 매개적 무한양태로 나뉜다. 직접적 무한양태는 신이 지니는 속성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양태인 반면, 매개적 무한양태는 “필연적으로 실존하고 무한한 어떤 변양”, 즉 직접적 무한양태로부터 따라나오는 무한양태이다.

직접적 무한양태와 매개적 무한양태에는 어떤 것들이 속하는가? 전자의 사례에는 사유 속성의 경우 무한 지성, 신 관념, 연장 속성의 경우 운동과 정지가 있다. 후자의 사례에는 우주 전체의 모습, 즉 단 하나의 개체로 간주된 한에서의 자연 전체가 있다. 이 우주 전체의 모습이 정확히 사유에 속하는지 연장에 속하는지는 해석상의 논란거리이다.

2) 유한 양태

스피노자에 의하면 유한양태는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모든 실재”인 “독특한 실재”(res singularis)인데(E1p28), 독특한 실재는 다수의 개체들이 연합하여 하나의 결과를 산출하는 원인이다. 첫째, 독특한 실재는 항상 다수 부분들의 연합이다. 스피노자에게 나눌 수 없다(in-dividum)는 의미에서 개체란 존재하지 않으며, 개체는 항상 다수 부분들로 이루어진 복합체이다. 둘째, 독특한 실재는 원인이며, 자기의 구성 부분들을 그 원인으로 갖는다. 나중에 논의하겠지만, 모든 독특한 실재는 각 구성요소들의 코나투스(노력; conatus)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 역시 각 구성요소들이 자기보존을 위한 공동의 노력을 수행함으로써 형성된다.

각각의 독특한 실재는 다른 독특한 실재를 원인으로 가지며, 이는 무한한 인과 연쇄를 형성한다. 그러나 이 연쇄는 단순히 선형적 연쇄가 아니라 비선형적이다.

독특한 실재들의 인과연쇄는 다음의 세 가지 점을 보여준다. 첫째, 무한자는 무한자만을, 유한자는 유한자만을 산출한다. 둘째, 신과 유한한 실재들은 직접적으로 인과관계를 맺지 않는다. 그러므로 스피노자가 보기에 신은 기독교의 신처럼 인간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없다. 셋째, 독특한 실재들의 인과연쇄는 무한하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우주는 한계 지어진, 닫힌 총체성으로 이해되었으나, 17세기의 과학혁명과 더불어 우주는 열려 있는 무한한 것으로 이해된다. 스피노자의 주장은 17세기의 이러한 배경을 반영한다. 넷째, 무한한 인과 연쇄는 연장뿐만 아니라 사유, 즉 의지나 정서 등의 정신적 작용에도 적용된다.

3. 산출하는 자연과 산출된 자연

자연은 단일하지만, 이 자연은 산출하는 자연(능산적 자연)과 산출된 자연(소산적 자연)이라는 두 가지 측면으로 이해될 수 있다. 산출하는 자연(natura naturans)은 실체의 속성, 곧 원인으로서의 자연이다. 반면 산출된 자연(natura naturata)은 이 속성들이 생산하는 양태인 결과로서의 자연이다.

4. 원인으로서의 양태

헤겔의 스피노자 비판에 따르면,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오직 신만이 실체인 까닭에 유한한 존재자인 인간에게는 능동성이나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자신의 저서에 『형이상학』이 아니라 『윤리학』이라는 제목을 붙였다는 점, 그리고 그가 제2부 서문에서 밝히듯 이 저서의 목표가 인간 정신이 어떻게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밝히는 데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비판은 이상하다. 더구나 목표로 설정된 인간의 지복이란 다름이 아니라 능동성, 자유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피노자 철학이 인간에게 자유와 능동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의심해봐야 한다.

『윤리학』의 목표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1부의 말미에 양태가 원인으로서 등장한다는 점을 잘 파악해야 한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산출하는 자연뿐만이 아니라 산출된 자연을 포함하여 실존하는 모든 것은 신의 본성을 표현한다. 신은 생산적 역량을 갖고 있으므로, 인간 등의 유한양태를 포함하여 모든 양태는 신의 생산적 역량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모든 유한한 실재는 원인으로서 생산하는 힘을 갖는다.

무한자는 무한자와만, 유한자는 유한자와만 관계 맺기 때문에, 신은 인간의 자유를 직접 제약할 수 없다. 더구나 인간은 양태로서 신의 생산적 역량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헤겔의 비판은 옳지 않다.

제2장 무한 양태와 유한 양태의 관계에 대하여

스피노자에 의하면, 신은 그 본성상 무한하게 많은 것들을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생산하며(E1p16), 실존하는 모든 것은 신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들이 신에 의해 직접 생산된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유한한 것들은 신의 속성에 의해 직접적으로 생산될 수 없다. 만일 유한자들이 신에 의해 직접적으로 생산된다면, 이는 신이 유한한 것들에 직접 개입하여 규정하는 인격적 창조주로 생각하는 일일 터이다.

반대로 스피노자에 따르면 유한양태가 아닌 무한양태만이 직접 신의 속성에 의해 생산될 수 있다. 그리고 속성에 의해 생산된 것은 직접적 무한양태이다. 반면 유한양태는 “어떤 양태에 의해 변용된 것으로 고려되는 한에서의 신 또는 그의 어떤 속성”(E1p28), 즉 양태에 의해 변용된 측면에서의 속성에서 도출된다. 그런데 이때 변용된 속성으로서 유한양태를 산출하는 이 양태는 무한한 것일 수 없다. 다르게 말하면, 유한양태는 매개적 무한양태로부터도 도출될 수 없다. 요컨대 유한양태는 (직접적 및 매개적) 무한양태로부터 생산될 수 없다.

만일 무한양태가 유한양태를 직접 산출한다면, 이는 생물학적·화학적 물질들이 아니라 우주 전체가 직접적으로 인간을 생산한다는 뜻인데, 이는 인간의 탄생에 대한 신비화이거나 부조리한 설명이다. 그러므로 유한양태가 유한양태와만 관계 맺으며 이것이 무한한 인과적 연쇄를 이룬다고 했을 때 스피노자의 논점은, 자연 사물들이 임의적으로 혹은 신비하게 규정되지 않고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자연법칙에 의해 필연적으로 규정된다는 점이다.

신은 무한양태들에 대해 그 유에서 가까운 원인(causa proxima in suo genere)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가까운 원인(causa absolute proxima)이다. 그 유에서 가까운 원인은, 가깝기는 하지만 결과와는 다른 사물에 속해 있다. 반면 절대적으로 가까운 원인은 그 결과와 분리될 수 없이 가깝다. 예컨대 불은 자기가 지니는 열에 대해 절대적으로 가까운 원인인 반면, 불에 의해 데워진 음식의 열기에 대해서는 그 유에서 가까운 원인이다.

한편 신과 무한양태들의 관계와 구별하려는 의도에서 신과 유한양태의 관계를 떨어진 원인(causa remota)으로 부를 수는 있으나, 원리상 신은 유한양태에 대해서도 가까운 원인이다. 왜냐하면 유한양태들의 존재는 신에 의존하며 신에 내재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떨어진 원인이란 “결코 결과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quae cum effectu nullo modo conjuncta)을 뜻한다(진태원, 2022, 108). 예컨대 만일 누군가 불에 의해 데워진 음식을 옮기다가 화상을 입었다면, 이 화상은 불의 열기를 떨어진 원인으로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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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흥미로운 챕터네요.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책이라 나중에 꼭 한 번 읽어봐야할 것 같습니다. 헤겔을 좋아하시니, 제가 아는 선에서 헤겔과의 접점을 끄적여보겠습니다.

일단 이 부분은 헤겔이 문제 삼았던 무우주론의 핵심 개념 중 하나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스피노자는 무한한 개념에서 시작해서 모든 걸 유도해야합니다. 그때 스피노자는 현미경에 관심이 있었고, 그 안에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에 매료됐습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우리 역시 현미경 속 세상일 것이라는 세상, 즉 우리가 worm in blood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worm in blood라면 우리는 우리를 현미경으로 보는 세상은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한한 개념에서 시작해 기하학적 방법론으로 앞으로 나아가야만 진정한 진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씀하셨듯이, 무한한 것이 유한한 것을 만들어낼 수 없다면, 스피노자는 유한한 것을 유도해낼 수 없습니다. 적어도 기하학적 방법론으로는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에서 유한한 것들이 유도될 수 없다, 즉 유한한 것들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게 스피노자의 무우주론을 보는 한 가지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좀 더 헤겔에 관련해서 코멘트를 하자면, 헤겔은 위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보면서 무한에서 유한을 유도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대논리학에서 헤겔이 왜 유한에서 무한을 유도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무한에서 유한을 유도할 수 없으니, 유한이란 개념에서 bad infinite - true infinite으로 나아간다고 볼 수 있겠네요. 이 무우주론적 접근이 헤겔이 초월적인 무한을 부정하는 계기라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이 부분은 제가 요즘 공부하고 있는 부분이라 굉장히 흥미롭네요. 전 이 독특한 실재에 관해서 저만의 해석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모든 독특한 실재는 각 구성요소들의 코나투스(노력; conatus)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 역시 각 구성요소들이 자기보존을 위한 공동의 노력을 수행함으로써 형성된다

이 부분은 동의를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 해석보다는 더 메이저한 해석, 그리고 특히 독일철학에 관련돼서 관심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Melamed - Acosmism or Weak Individuals? 라는 논문에서 독특한 실재와 헤겔의 무우주론과 엮어서 논문을 썼네요. 헤겔에 관심이 많으시니 재밌게 보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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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하고 유익한 코멘트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이 챕터를 읽으면서 그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결국 유한자도 신 안에서 존재하고 신 안에서 생산되는 것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는 아니더라도 간접적으로는 무한자와 모종의 생산-피생산 관계를 맺어야 할 것 같은데, 둘의 관계가 정확히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한데 책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나오지 않고, 무한양태와 유한양태가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만 강조되면서 끝난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피노자 철학에서도 헤겔의 비판에 대응해서 이 점을 설명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말입니다. (아마도 무우주론 논쟁과 더불어 링크해주신 Melamed의 논문을 읽으면 이런 궁금증이 좀 해소될 것 같습니다.)

유한자와 무한자에 대한 헤겔의 논의는 굉장히 추상적인 까닭에 이해하기 어려운데, 이렇게 유한-무한에 대한 스피노자의 논의와 연관지어서 헤겔의 현존재논리학을 다시 보니 확실히 헤겔의 논의와 문제의식이 훨씬 더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이래서 철학사를 공부해야 하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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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기로는

의 질문이 칸트의 affection problem,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대논리학의 관계와 같은 난제로 여겨집니다. 스피노자를 거의 공부 안 하신 걸로 아는데 바로 찝어내셨네요.

제가 첨부해둔 멜라메드의 논문은 궁금증을 해소하는데 많은 도움은 못 드릴 것 같습니다. 멜라메드의 논문이 주장하는 것은 스피노자는 무우주론에 committed 되지 않았다는 주장이지 entitled되진 않았다고 주장하진 않거든요. 스피노자의 문헌적 근거에 기반해서 스피노자는 유한한 존재를 믿었다고 주장을 하는 걸로 기억합니다. 스피노자가 무우주론에 entitled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철학적 디펜스는 https://philarchive.org/archive/HBNSON 에서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대로 읽어보진 않았지만 많이 언급되더라고요. 이 논문이 멜라메드의 논문보다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올려봅니다. 물론 제일 좋은 건 1차자료에서 직접 근거를 찾아드리는 것이지만, 1) 이 문제가 워낙 어려운 문제기도 하고 2) 저 자체도 무우주론의 디펜스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해보지 않아 논문밖에 드릴 수 있는 게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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