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철학책을 가지고 다니면 생기는 일들

(1) 김영건 선생님의 책에서 재미 있는 내용을 발견했습니다.

노직Robert Nozick은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열다섯 살인가 열여섯 살에 나는 플라톤의 『공화국』을 그것의 표지가 바깥쪽에 보이게 들고서 브루클린의 거리를 돌아다녔다. 나는 단지 일부만 읽었고, 그 모두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책 때문에 흥분했고, 그것이 대단한 것임을 알았다. 나는 어떤 노인이 내가 그 책을 갖고 다니는 것을 알아보고 감동해서 어깨를 두드려주고 무슨 말이든 한마디 건네주길 얼마나 바랐던가."

분명한 것은 이 땅에 이런 '노인'의 존재가 없거나 드물다는 것이다. 노인이 아닌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히려 왜 그런 책을 읽는가? 그것이 취직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 이런 지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김영건, 『변명과 취향』, 최측의농간, 2019, 169쪽.)

매우 다행스럽게도(?), 저는 의도치 않게 이런 '노인'의 존재를 경험한 적이 꽤 많습니다.

(2) 대학교 1학년 시절에 키에르케고어의 『이것이냐/저것이냐』라는 두꺼운 책을 지하철에서 읽었던 적이 있었어요.

사실, 당시에 저는 아직 그 책을 이해할 깜냥이 되지 않았고, 고작 키에르케고어 해설서들을 통해 키에르케고어의 철학을 '맛보기'로 알던 수준이었습니다. 그래도 소위 '고전'이라는 것을 직접 읽어보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 책을 눈으로만 보고 있었죠. 그런데 갑자기 어느 중년 남성 분이 지하철에 서 있는 저에게

"와, 이 책을 읽는 걸 보니, 학생 혹시 철학과인가?"

라고 말을 거시더라고요. 저는 그때 제가 내용도 이해 못하고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들킬까봐 "네…"라고 모기 소리로 대답하고는 얼른 지하철의 다른 칸으로 도망쳤습니다.

(2) 비슷한 다른 사례도 있어요. 지하철에서 신학책을 읽고 있는데, 어느 노인 분께서 아주 적극적으로 말을 거시더라고요. 이 이야기는 예전에 올빼미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

(3) 조금 웃기는 사례도 있습니다. 광화문 교보문고의 신학 코너에서 책을 뒤적이던 중에 벌어진 일입니다.

어떤 분: 신학 공부하세요?

나: 네? 그런 건 아니고…

어떤 분: 엄청 책을 열심히 보셔셔요.

나: 아… 하하…

어떤 분: 제가 좀 도와드릴 수도 있어서요. 전도사거든요.

나: 아… (머쓱)

그런데 이분이 옆에서 계속 제가 보는 책을 기웃거리시더라고요. 아무 말도 않고 서 있는 게 부담스러워서, 제가 뭘 찾고 있었는지 말씀드렸죠.

나: 사실… 판넨베르크가 『조직신학』에서 본회퍼를 비판한 내용을 찾는 중이었거든요…

어떤 분: 아…

나: 하하……

어떤 분: 신학책이 참 많죠…

나: 하하…

(4) 약간 다른 사례인데, 키에르케고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들고 가다가 어느 할머니에게 혼난 적도 있네요. 서강대 도서관에서 한길사판 『죽음에 이르는 병』을 빌려서 손에 쥐고 걸어 가고 있었는데, 이 책의 종이 표지 뒤의 하드 커버가 새빨간 색이거든요. 거기에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음산한 제목이 쓰여 있어서 그런지, 책을 본 어느 할머니가

"학생, 뭐하러 이런 책 읽어!"

라고 하시더라고요. 아무래도 『죽음에 이르는 병』이 우울증과 자살충동을 일으키는 사악한 책이라고 오해하신 것 같았습니다. (덤으로, 저에게 예수 믿으라고 하시더라고요.)

키에르케고어의 『죽음에 이르는 병』에 얽힌 두 가지 개인적인 이야기
https://blog.naver.com/1019milk/memo/220543536554

12개의 좋아요

비슷한 예로, 철학을 공부한다고 하면 크게 세 가지 반응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철학에 관심이 없어 이어갈 말을 찾지 못하는 경우, 본인이 철학을 공부하여 다른 철학도를 본 게 반가운 경우, 그리고 철학책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철학을 안다고 하는 부류가 있는 것 같네요 (예시: 나이 먹으면 다 알게 돼! 철학책 읽을 필요없어~).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를 제일 좋아하지만, 첫번째를 철학에 입덕 시키는 재미도 있는 것 같습니다.

6개의 좋아요

저는 첫 번째 경우를 많이 겪어봤는데 뭐랄까...민초 싫어하는 사람한테 민초 한 입 해보라고 했을 때의 반응이 대부분이라 너무 슬펐습니다 ㅠ

2개의 좋아요

원래 실패할 확률이 낮을 수록 짜릿한 거 아니겠습니까

2개의 좋아요

'학생 집에 돈 많나봐'라는 반응도 많더라고요 ㅠㅠ

1개의 좋아요

수 년 전 집으로 내려가는 KTX를 탔을 때, 에티카를 읽고 있었는데, 옆 자리 아저씨께서 계속 말 걸고 싶은 듯 힐끗하시더니 결국에는 말씀을 거셨어요. 그때 기억이 나네요. ㅎㅎ UCLA에서 분석철학을 공부하셨었다고, 하시면서.. 지금은 목사가 되었다고 웃으시던 분이었지요. 참 반가웠지만, 물어볼 것이 없었던 게 아쉬웠던 그런 기억이 떠오르네요. ㅋㅋ

2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