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수라는 신기루: 수리논리학과 언어철학에 관한 짧은 이야기

어느 날 디멘은 외계인을 만났습니다. 외계인이 디멘에게 물었습니다. "인간들이 사용하는 개념 중에서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게 있어. 도대체 자연수가 뭐야?"

"뭐긴 뭐야. 자연수란 1부터 시작해서 2, 3, 4, … 이렇게 순서대로 나아가는 수 체계야." 디멘의 대답에 외계인이 다시 물었습니다. "음…그러면 이것도 자연수야?"

"엥? 그럴 리가! 자연수는 끝없이 이어져." 그러자 외계인이 다시 물었습니다. "끝없이 이어진다고? 고리를 이룬다는 말인가? 그럼 1, 2, 3, 4, 5, 3, 4, 5, 3, 4, 5, …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데."

디멘은 기겁했습니다. "맙소사, 그 뜻이 아니야. 고리 같은 거 없이 끝없이 이어져." 그러자 외계인이 갸우뚱거렸습니다. "흠...그럼 중간에 가지라도 치나?"

디멘은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아니야! 가지는 없어!" 하지만 외계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습니다. "알겠어. 그렇다면 혹시 c도 자연수니?" "c라니, 무슨 말이야?" "너가 알려준 자연수의 정의대로라면 c가 자연수가 아닐 이유는 없는데? 자연수는 끝없이 이어진다고 했지만 모든 자연수가 그러한 연쇄의 일부라고 말하지는 않았잖아."

"저건 또 뭐야!! 자연수에는 자연수밖에 없어!!" 이 말에 외계인은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자연수에는 자연수밖에 없다니, 순환논법이 따로 없네." 이제 디멘은 정말로 화가 났습니다.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무슨 소리야. 난 진짜 자연수가 뭔지 모르겠어. 너야말로 자연수의 정의를 제대로 알려줘야 내가 이해를 할 거 아니야." 하지만 디멘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자연수란...음...그러니까...하,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그 순간, 데데킨트라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내가 이 문제를 확실히 해결해 주지. 자연수란 다음 네 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집합을 말해. 이 네 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집합이 유일하다는 사실은 내가 증명해 놓았으니 더 이상 오해의 여지라고는 없지!"

데데킨트의 대답에 외계인은 흡족해했지만, 이내 또다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네 번째 조건에 '임의의 명제'라는 표현이 말이 돼? P(x)가 임의의 명제라면 P(x)는 'x가 자연수이다'가 될 수도 있잖아. 하지만 자연수의 정의에 자연수에 대한 명제가 포함되는 건 순환논법일 텐데?" 뜻밖의 지적에 데데킨트가 우물쭈물하자 옆에서 뢰벤하임이라는 사람이 끼어들었습니다. "확실히 '임의의 명제'라는 표현은 문제가 있어 보이네. 아무래도 수학에서 이런 표현은 제한해야겠어. 이렇게 제한된 논리학을 1차 논리라고 부르자."

데데킨트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1차 논리로 자연수를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지 알아봐야겠군." 이 말에 스콜렘이라는 사람이 불쑥 나타났습니다. "맞아. 그리고 내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했어." 스콜렘의 발언에 모두가 주의를 집중했습니다.

"불가능해." 스콜렘이 말했습니다. "1차 논리로는 자연수의 필요충분조건을 기술할 수 없어. 구체적으로, 자연수가 어떤 1차 논리 문장을 만족한다면 자연수가 아니면서 그 문장을 만족하는 대상이 언제나 존재해. 그러니까, 자연수는 순환논법 없이 정의할 수 없어."

순간 정적이 흘렀습니다. 외계인이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어떻게 자연수가 뭔지 아는 거야? 알고 보면 인간들은 저마다 자연수를 다르게 알고 있는 거 아냐?" 외계인의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신기루 같은 자연수의 실체에 대해 할 말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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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위해 왜곡된 역사적 · 수학적 · 철학적 내용이 있습니다. 1차 논리의 탄생은 뢰벤하임을 비롯한 여러 수학자들의 점진적인 연구로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데데킨트의 자연수 정의, 즉 2차 논리가 정말로 순환적인지에 관해서는 더 자세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또한 스콜렘의 역설은 자연수에 관한 것이 아닌 집합론에 관한 것인데, 뢰벤하임-스콜렘 정리의 귀결이라는 점에서 두 현상은 유사하기 때문에 말풍선에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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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렇게 깜찍한 소개라니! 너무 좋네요 ㅋㅋ

덧) 외계인 분께서는 어쩌면 동굴에 갇히셨던 나머지

다른데서는 우리가 "신기루"를 향해 나아가지만, 수학에서는 "신기루"가 우리를 향해 다가옵니다!

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셨던게 아닐까요? :star_str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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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듣고 있던 칸트 센세가 보다못해 끼어들었습니다.

칸트: 답답한 닝겐들... 수학적 개념과 명제는 "개념"이 아닌 시간/공간의 "감성(형식)"을 의미론적 대상으로 다룬단다. 따라서 수학적 명제는 분석명제가 아니라 종합명제란 말야. 감성적 대상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정의할 수 있겠니? 수학과 기하학은 "논리학"의 대상이 아니라 "(선험적) 감성론"의 대상이란다.

프레게 이하 수리철학자들: ...

칸트: [외게인에게] 너도 시간과 공간의 형식을 가지고 있니? 너도 이걸 가지고 있으면 자연수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을텐데 말이지.

외계인: 시간? 공간? 그건 또 뭐야?

칸트: 역시 시간과 공간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감성 형식이군.

프레게 이하 수리철학자들: 뭐래. 이거 완전 미x넘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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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D 하긴, 동굴에 너무 오래 있던 나머지 형식주의가 죽었다는 소문마저 듣지 못했나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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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 실제로 저는 칸트의 선험적 형식이 무슨 말인지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브라우어르의 직관주의나 뢰벤하임-스콜렘 정리 등을 접하며 역으로 칸트를 이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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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이렇게 이어질 수도 있을까요?

"그 때 Hilbert씨라는 사람이 나타나 호텔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연수 모두를 호텔에 초대한다고 했습니다. 점잖게 모두는 호텔에 가서 쉬면서 이야기를 계속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병원에서 나오신지 얼마 안 되는 Cantor씨가 이들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는 갑자기 사다리를 가지고 오더니 평화롭게 있던 이들과 자연수 세상에 한바탕 난리를 치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멋진 그림과 함께하는 자연수 이야기 감사히 보았습니다. 솜씨가 아주 대단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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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주의를 처음에 접했을 때 "전혀 직관적이지 않은데 왜 직관주의지?"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그게 칸트의 직관이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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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 Button같은 철학자도 모델이론의 철학적 함의에 주목했는데요,

https://philpapers.org/rec/BUTMIR

그냥 Categoricity 대신에 Internal Categoricity 개념을 도입해서 수학의 (같은 대상을 지칭하며 같은 개념을 사용한다는 의미의) 객관성이 아닌 수학의 간주관성을 설명하는 전략을 택하는 걸로 보입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한번 보세요!

또 김동우 교수님의 논문 'On the Buck-Stopping Identification of Numbers'도 재밌는 주제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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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통해 수학의 공리체계를 전부 갈아엎었던 것을 생각하면...당시에는 비주류 취급을 받았는데도 대단한 학자들이였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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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감사합니다. @Indigo_Coder 님. 나오는 인물 중에 Cantor의 명성이 당시에는 어땠는지 정확히 제가 알지는 못하지만, 지금은 Cantor를 무한집합론, 초한기수 등의 도입등으로 현대수학의 토대를 놓은 거장으로 누구나 인정하죠. 정신병원에 입원을 자주하셨다고 하지만...그건 별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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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까지 직접 그리신 건가요? 이거 엄청난 대작이군요...

Simon Cowell Wow GIF by America's Got Tal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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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이지만 지금 김동우 교수님 연구모임에 참석 중입니다 ㅎㅎ 저번에 Buck-Stopping 논문 이야기도 나왔는데 상윤님이 예전에 써 주신 글 덕분에 조금 더 수월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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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이 되었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그 연구 모임에서 수리철학을 다루시던가요?

수리철학을 다루진 않았고 가상현실의 존재론 이야기를 했는데 고려해 볼 법한 형이상학적 기준으로 buck-stopping 이야기를 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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