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우, <On the Buck-Stopping Identification of Numbers> 전반부

이 사이트에서 베나세라프 문제 등도 거론된 걸로 보아, 수리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꽤 계신 것 같습니다! 한국인의 수리철학 논문 중 프리스트(!)와 크립키(!!)가 검토한 논문이 있다면 관심이 더 생기시겠죠? ㅎㅎ...

  • 카이스트 김동우 교수님의 [On the Buck-Stopping Identification of Numbers]라는 논문을 대화 형식으로 정리해 봤습니다.

*ZF 공리계와 자연수 체계, 튜링기계에 대한 기본 지식만 있으면 이해할 수 있는 글 같습니다. (Enderton의 집합론 책 챕터 5 정도...?)

*모든 인물의 이름은 성으로 나타냈습니다. ‘Q’는 가상의 질문자입니다. 또 여기서 논의되는 ‘수’는 ‘자연수’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1. 논의 개요

크립키: 십진법 숫자들은 물음중지(buck-stopping)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우리는 어떤 수가 십진법 숫자로 제시되면, 더 이상 ‘그 수가 뭔데?’ 하고 묻지 않거든.

Q: 십진수 표기가 뭐가 특별하길래 그럴까?

크립키: 십진수 숫자들이 수의 구조를 드러내기 때문(structural revelation)인 것 같아!

Q: 아니, 각 문화권마다 같은 수를 다르게 표기하고 성공적으로 지칭하는데, 십진법만 특별한 거야?

크립키: 수학적 이중사고(double-thinking) 개념을 받아들여서 설명해볼게.

김: 이중사고 개념은 좋은데, 수의 간문화적 동일시(intracultural identification)랑 관련해서 문제가 생기는 것 같아. ‘수열에서 수가 차지하는 위치를 표시하는 방식’으로 설명하면 깔끔하게 설명이 되는 것 같아!

2. 물음중지란?

크립키: ‘물음중지’의 예시를 들어볼게. ‘태양계 행성의 수’는 물음중지 성질을 지니지 않아. 태양계 행성의 수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경험적인 조사를 해야 하잖아? 또 ‘2의 제곱 더하기 4’나 ‘네 번째로 작은 소수의 다음 수’도 물음중지 성질을 지니지 않는 것 같아.

‘대물적 믿음’ 개념을 통해서도 설명할 수 있어. ‘d’가 물음중지 성질을 지니면서 n을 지칭하는 지시어라고 해보자. 그러면 [주체 S는 d가 P하다고 믿는다]가 [S는 수 n에 대해 그것이 P하다는 대물적 믿음을 가진다]를 함축하게 되는 것 같아.

예를 들어, ‘2의 제곱 더하기 4’를 ‘d’에다 대입해 볼게. 철수가 산수를 아주 못해서, ‘2의 제곱 더하기 4는 2의 제곱 더하기 4이다’라는 문장과 ‘2의 제곱 더하기 4는 7이다’라는 문장을 동시에 승인한다고 해보자. 이때 [철수는 2의 제곱 더하기 4가 2의 제곱 더하기 4라고 믿는다]는 참이지만 [철수는 8에 대해 그것이 2의 제곱 더하기 4라는 대물적 믿음을 가진다]는 거짓인 것 같아. 그래서 ‘2의 제곱 더하기 4’는 물음중지 성질을 가지지 않는 거지.

스타이너: 제곱 얘기를 해서 말인데. 십진법 숫자들은 이중적인 뜻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첫 번째는 수를 지칭하는 이름(우리에게 익숙한 규칙을 통해 만들어진)으로서의 뜻이고, 두 번째는 10을 밑으로 하는 다항식으로서의 뜻이지. ‘237’은 ‘210^2+310+7’의 축약어이듯이 말야. 두 뜻을 구분해야 하는 건, 제곱이나 다항식 같은 걸 전혀 모르고도 십진법 표기를 사용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야.

크립키: 그렇지. 또 첫 번째 의미로 쓰이면 물음중지 성질을 지니고, 두 번째 의미로 쓰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아.

Q: 물음중지 성질을 지니는지 여부는 그저 주관적인 구분인 건 아냐? 누구는 십진 숫자가 주어져도 계속 물을 수 있잖아?

크립키: 흠... 네가 다음 둘 중 하나를 주장하는 거라고 볼게: 1. 임의의 지시어는 ‘그 수가 뭔데?’라는 물음을 끝낼 수 있다. 2. 아무 지시어도 물음을 끝낼 수 없다. 즉 우리는 아무 지시어가 주어져도, 그것이 무슨 수를 나타내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그건 우리에게 알려진 계산가능성 개념이랑 많이 충돌하게 되는 것 같아. ‘함수 f는 계산가능하다=df. 임의의 인풋 n에 대해, 우리는 f(n)의 값을 알 수 있다’ 로 정의해보자.

그러면 1이 참일 경우에, 아무 함수 f와 인풋 m이 주어져도 우리는 f(m)의 값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게 되어 버리는데, 이건 튜링머신의 정지 문제 등 ‘모든 함수가 다 계산 가능한 것은 아니다’라는 원리와 정면으로 충돌하지. 그리고 2가 참일 경우에는 모든 함수가 계산 불가능하게 되어 버리는데,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Q: 그리고 십진법 표기가 수의 구조를 드러낸다고 했던 건 무슨 뜻이야?

크립키: 숫자 ‘237’은 숫자 ‘2’, ‘3’, ‘7’의 열(sequence)이지. 마찬가지로 ‘237’이 지칭하는 수 237도 2와 3과 7의 열, 그러니까 <2,3,7>이라는 거야. 수라는 건 0,1,2,....9의 열 개의 기본 대상들로 만들어진 유한 열인데, 그 열의 구조가 십진법 표기의 숫자에 반영된다는 거야.

Q: 왜 그래야 하는데?? 예를 들어 집합론에서 폰 노이만 식 자연수 정의는 틀린 거야?

크립키: ‘{}’ 기호는 원소 간의 순서를 무시하는 표기라서, 십진법 표기보다는 구조를 좀 덜 드러내는 것 같아.

또 실제 수학 관행을 생각해 보자! 우리가 ZF 공리 하에서 폰 노이만식 자연수 정의를 통해 기본 덧셈을 한다고 해보자. {∅,{∅,{....}}..} 더하기 {∅,...{∅}....}을 해서...이렇게 하면 도저히 덧셈을 할 수가 없을 테니, (편법으로) 십진법 숫자로 바꿔서 덧셈을 한 뒤에 다시 폰노이만식 집합 기호로 변환을 하겠지. 물론 집합 기호로 바꿔버리면 덧셈 결과를 알아보기도 힘들겠지만 말야! 이런 식으로 집합론 정의 하에서 작업을 하게 되면, 십진법 표기를 쓰는 건 그저 편법(shortcut)일 뿐인 게 되는데, 이건 실제 관행과는 완전히 상반된 거야. 기본 산수는 학교에서 배운 규칙만으로도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지 않겠어?

Q: 그래...그러면 ‘열 개의 기본 대상들’은 뭔데?

크립키: 프레게-러셀 식으로 정의를 해보자. 이런 수들을 다음부터 ‘FR수’라고 부르자고.

0=df. 공집합과 동수인 (즉 일대일 대응이 되는) 모든 집합의 클래스
1=df. 단원소 집합과 동수인 모든 집합의 클래스
...

우리가 작은 수들을 생각할 때를 보면, 세 개의 대상들에 대한 샘플 이미지를 떠올린 뒤에 그걸로 세 개의 대상과 동수인지 세는 걸 자주 하는 걸로 봐서, ‘동수(equinumurosity)’를 이용한 정의가 자연스러울 수도 있어.

Q: 그래도 저건 표준 집합론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정의 아냐?

크립키: 그렇지...

베나세라프: 열 개의 대상들이 뭐가 됐든 어때! 특정 구조만 유지한다면야 아무렇게나 정의하면 되지!

크립키: 그렇게 되면 작은 수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설명하기가 힘들고, 수의 유일성(uniqueness)을 설명하기도 힘들 거야...

3절. 다른 표기법들의 문제

김: 크립키가 ‘숫자가 수의 구조를 드러낸다’고 한 건, 수가 어떤 종류의 대상인지에 대한 존재론적인 주장을 한 거야.

그리고 같은 수를 로마식 숫자로도, 구어로도, 마야 숫자로도 나타낼 수 있는데, 왜 십진법 표기법만이 수의 내적 구조를 드러낸다고 봐야 하는 걸까? 로마 숫자도 로마 사회에서는 나름의 물음중지 성질을 가졌을 거잖아?
이 문제를 *‘다른 표기법의 문제’*라고 부를게. 이 문제는 크립키한테 딜레마가 될 거야.

  1. 만약 ‘로마 숫자도 물음중지 성질을 가졌겠지만, 그건 수의 구조를 드러냈기 때문은 아니다’라고 주장하면, 아주 반직관적이지. 또 이렇게 되면 공평하게 ‘십진법 숫자도 수의 구조를 드러내지는 않는다’고 말해야 자연스럽지 않겠어?

  2. 아니면 ‘로마 숫자가 물음 중지 성질을 가진 건, 로마 숫자가 (우리 숫자가 나타내는 수와는) 다른 종류의 대상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각 문화권의 숫자들은 각기 다른 종류의 대상들을 나타낸다.’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는 다른 문화권의 숫자들이 우리 숫자들과 방식만 다를 뿐, 같은 대상을 지시한다는 직관에 반하겠지.

4. 다른 문화의 수를 동일시하기

크립키: 우리와 다른 수 체계를 쓰는 사람들은 우리랑 다른 종류의 대상을 지칭한다고 해도 돼. 우리가 십진법 숫자를 통해 나타내는 수와, 계산과 셈에서 동형적(isomorphic)이기만 하다면, 어떤 의미에서 ‘같다’고 불러도 되지 않겠어?

마셜: 모종의 수학적인 목적 하에서는 그렇게 볼 수 있지.

순서쌍에 대한 Kuratowski식의 정의 ((x,y)=df.{{x},{x,y}})가 있고, 하우스도르프 식의 정의((x,y)=df.{{x,∅},{y,{∅}}})가 있는데, 두 정의는 모두 순서쌍을 규정하는 특징(characteristic feature)인 ‘(x,y)=(z,w) iff (x=z)&(y=w)’를 만족한다는 점에서 동등(equivalent)해. 그럼 같다고 볼 수 있는 거지.

김: 그건 ‘같다’라는 말을 좀 다르게 해석하겠다는 거잖아...그걸 ‘동일성에 대한 이중 사고’ 내지 ‘첫 번째 이중 사고’라고 할게.

그리고, 순서쌍 (1,2)가 (2,3)과 같은지에 대해서는 위의 두 정의 중 어떤 걸 받아들이지 않고도 답할 수 있는 반면에, (x,y)가 {x}를 원소로 가지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떤 정의를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르게 답변할 수 있잖아?

그래서 우리가 순서쌍에 대해 생각할 때에는, [‘(x,y)=(z,w) iff (x=z)&(y=w)’를 만족하는 아무것]으로서 생각할 수 있고, 아니면 [하우스도르프 식으로 정의가 된 구체적인 대상]으로서 생각할 수도 있겠지.

이걸 ‘두 번째 이중사고’라고 할게. 사실 첫 번째 이중사고는 두 번째 이중사고에 포섭되는데, 동일성에 대한 형식적 성질(반사성, 대칭성, 이행성 등...)을 만족하기만 하면, ‘동등함’ 관계가 엄격한 동일성 관계가 아니더라도 ‘같음’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래. 또 순서쌍에 대한 두 정의가 ‘동등’하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두 정의 모두 순서쌍을 규정하는 특징을 만족하거나 수학적인 목적에 부합해야 한다는 점도 생각해 보자.

크립키: 그러면 다른 수 체계를 쓰는 사람들은 엄밀하게 같은 대상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지라도, ‘~~한 셈과 연산과 수열을 정의할 수 있고...’ 등의 [자연수를 규정하는 특징]을 만족하는 대상에 대해 생각한다는 점에서, 이중사고를 통해 같은 수에 대해 (동등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하면 되는 거지!

5. 컨셉과 컨셉션

롤스 (존 롤스 맞음): ...정의(justice)가 무엇인지에 대해 사람들 간 의견 불일치가 있는 것은, 정의에 대한 컨셉은 일치할지라도 구체적인 컨셉션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하트(Hart): ...정의에 대한 공통된 컨셉은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대우하라’라는 격률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격률은 그저 공허한 형식(empty form)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체 같은 것이라면 어떤 점에서 같아야 하는지, 다른 것이라 함은 어떤 점에서 달라야 하는지 알아야겠지요. 그걸 상황에 맞게 구체적으로 해석한 것들이 바로 정의에 대한 각각 다른 컨셉션들입니다...

김: 들었지? 바로 저거야! 순서쌍에 대해 다른 컨셉션 (하우스도르프와 Kuratowski 정의 등)들이 있지만, 같은 컨셉(순서쌍의 동일성 조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등하다고도 할 수 있는 거지! (물론 순서쌍에 대한 컨셉이 ‘공허한 형식’은 절대 아니지만.)

실수에 대해서도 데데킨트 절단과 코시 수열이라는 다른 구성과 그에 따른 컨셉션이 있지만, 완비 순서체 공리라는 컨셉을 만족한다는 면에서 동등해! (그리고 완비 순서체 공리의 모든 모델은 서로 동형적이지.) 만약 동형적인 모형들 하에서 유지되는 속성들에만 신경 쓰는 수학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편의를 위해 데데킨트 절단이라는 구성과 그 컨셉션 하에서 실수에 대한 작업을 해도 되는 거지. 이 경우에는 컨셉션 하에서도 컨셉에 대한 작업을 하는 거고, 실수에 대한 여러 구성들을 통해서 유일한(the) 실수 체계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 거야.

우리가 수학적인 생각을 할 때, 컨셉이라는 층위에서 생각할 수도 있고, 특정 컨셉션이라는 층위에서도 생각을 할 수 있어. 바로 ‘두 번째 이중 사고’인 거지.

우리와 다른 숫자 체계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우리와 수에 대한 같은 컨셉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어! 그 사람들이 생각하고 나타내는 대상들 또한 적절한 수열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지. 여기서 ‘적절’하다는 건 다음의 비형식적 페아노 공리계를 만족한다는 말이야 (즉 수에 대한 컨셉은 비형식적 페아노 공리계로 나타낼 수 있어!):

  1. 0은 수이다.
  2. 임의의 수의 다음수(successor) 또한 수이다.
  3. 임의의 두 수는 같은 다음수를 가지지 않는다.
  4. 0은 어느 수의 다음수도 아니다.
  5. 아무 성질 P에 대해, 0이 P를 가지고, 임의의 수 n에 대해 n이 P를 가질 때 n의 다음수도 P를 가진다면, 모든 수가 P를 가진다.

(‘P’에 들어갈 술어는 너무 모호한 것이면 안 되겠지만, 형식적 제한(delta0식이나 sigma1식 등)이 없기 때문에 ‘비형식적’ 페아노 공리계인 것)

Q: 아니, 페아노 공리계가 뭔지 전혀 모를 정도로 수학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은 뭐가 되는 거야?

김: 일반적인 사람은 [자연수는 0 또는 0에서 다음 수 연산을 유한 번 반복해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암묵적으로나마 이해하고는 있을걸...?

어쨌든, 우리는 십진법 숫자 체계에서 숫자 훈련을 받으면서 숫자와 구조가 비슷한 모종의 유한한 열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수에 대한 특정한 컨셉션을 가지게 되는 거야. 그래서 우리가 산수를 할 때는 이 컨셉션으로 생각을 하게 되고, ‘수는 유한한 열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거지. 십진법 숫자들이 그 열의 구조를 드러내며 물음중지 성질을 가지는 것은 이 때문 아닐까?

후반부는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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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이 되는(?) 영상으로:

이 있는데, 어떤 선분과 원이 위상동형이므로 '같다'고 해버리는 이중사고를 잘 보여준다고 봅니다.

는 크립키 본인의 강의인데, 목소리가 너무 갈라져서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역류성 식도염과 후두염이 심히 의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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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논문에 대한 좋은 요약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약해주신 전반부는 대체적으로 크립키의 논의에 대한 정리인데, 중심 내용을 재미있게 잘 포착해주신 것 같습니다. 논문의 후반부이 제가 크립키의 이론을 비판하는 내용이 있는데, 혹시 비판적인 논평을 써주시면 잘 읽어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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