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끄러운 말이지만, 5년전만 하더라도 미국 탑급 대학의 정교수가 되어서 이 놈의 미제 헤게모니의 정점에 서는 꿈을 간절히 꾸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성공, 명성, 돈 뭐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당시 제가 생각했던 이유는 딱 하나 였습니다.
전 세계에 있는 아카이브를 열고 싶다.
잘 사는 나라의 공공 아카이브는 접근이 쉽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폐쇄적인 나라의 아카이브나 개인 혹은 기업의 아카이브는 접근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것이 사실이죠. 난 뉴욕대, 하버드대, 컬럼비아대 교수가 되어서 돈과 파워로 그 망할 놈의 아카이브를 열고 싶다. 그게 제 꿈이었습니다.
(2)
타인의 내적 영역을 알고 싶을 때 묻는 질문이 두 가지 있습니다. (a) 죽기 전에 딱 하나를 완성할 수 있다면,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b) 무제한의 돈과 파워가 있다면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오늘은 회원 여러분에게 (b)에 대해서 묻고 싶어지네요 ㅋㅋㅋㅋ.
왜냐하면, 제 꿈은...제가 물었던 모든 친구들 중에서 가장 이상(!)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철학과의 특성인가? 아니면 나의 특이성인가...? 그걸 판단할 만한 빅데이터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3)
자. 저부터 밝히자면 돈과 파워가 무제한이 있다면 제가 하고 싶은 건 한 묶음입니다. 아카이브를 만들고, 복원판을 만들고 편집-교정본을 만드는 것.
특히 (i) 망할 놈의 대-불교 전서를 만들고 싶습니다.
통상 한문 불경은 <대정신수대장경>+알파를 씁니다. 팔리어는 스리랑카인가 팔리협회에서 낸 팔리 오부 교정본을 씁니다. 티베트 불경은 보통 <북경판 티베트 대장경>을 쓰죠. 문제는 산스크리트어입니다. 산스크리트어 불경은 한번도 대장경의 형태로 정리된 적이 없습니다. 저희는 전체 카탈로그도 모르고, 사본이 몇 가지 있는지에 대해서도 명확히 모르고, 이본이 어느정도 있는지 이제 겨우 알게 된 상황입니다. (게다가 네팔, 인도 어드메, 장물 매매로 악명 높은 노르웨이의 스코옌 컬렉션,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어딘가에서 발굴되어 장물로 팔려나간 것들 등등 온갖 변수들이 존재하죠. 또한 한문본의 운명들도 쉽지 않습니다. 대장경에 수록되지 않은 것들은 악명 높은 중국 아카이브에 처박혀 있거나, 악명 높은 일본 개인 소장자들이 가지고 있거나 그런 상황이지요.)
(일본 개인 소장자의 악명을 말하자면, 이런 것이 있습니다. 원효의 <판비량론>으로 기억하는데, 이 <판비량론>은 어느 일본 개인 소장자가 가지고 있고, 학계로 발표된 것은 이 '실물을 보았다고' 말하는 일본의 어느 권위자가 그 자료를 보고 '적어서 나온' 자료 말고는 없습니다. 네, 실물 사진이 없는 것이죠.)
(개인 소장자................는 의외로 한국 근대 자료들에서도 군데군데 나옵니다. 실물 사진 하나 없이 개인 소장자....라고 적어놓으시면 후대 연구자는 뭘 어찌해야할까요....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나아가, 각 언어권마다 있는 번역본을 총괄한 <교정 교감본>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걸 전체를 카탈로깅하고, 교정 교감본을 만들고,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모두가 동의할만한 넘버링을 해서 논문 검색도 좀 편하게 만들고, 주석들도 다 확인해서 인덱스를 만들고 그러면 얼마나 연구가 편해질까요.
옛날부터 꼭 해결하고 싶은 문제였습니다.
겸사겸사 이 과정에서, 각 불경들의 "국적" 문제도 확인해보고 싶기도 하네요. 사실 동북아 철학에서 모든 문헌들이 '한문'으로 쓰여있는 것처럼 이야기 되어지지만, 여기에는 조금 복잡한 문제가 있습니다.
예전에 어느 분이 <임제록> 등이 중국 백화문으로 쓰여져있어서 오역이 많아서 좋은 판본을 찾으신다는 질문을 올리신 적이 있는데, 이 같은 문제는 한문 문헌에 계속 가지고 있는 문제입니다.
라틴어도 속화되었고, 산스크리트어도 속화되었는데 한문이 속화되지 않았다는 건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한문 역시 속화가 되었고, 미묘하게 일본과 한국, 중국 각 지역에서 쓰인 한문은 어법이나 축약어 등에서 차이가 발견됩니다. 특히 서간문이나 편지, 대화 같은 '비격식적'인 문헌의 경우 이런 문제가 특히 두드러집니다. (문제는 이게 이 사람이 한문을 이상하게 쓴 건지, 아니면 그때 그 지역 특유의 축약어를 쓴건지, 아니면 한문 자체의 오자인지 제대로 교열하는 방법을 제가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걸 공부하려면 중국이나 일본으로 가야하나....)
이를 정말 제대로 알게 된 때는 이황-기대승의 사단칠정 서간문을 읽은 때였습니다. 묘하게 한문으로 현토를 단 부분이 있었는데, 만약 (한국어를 모르고) 한문만 아시는 분이 읽었다면 도대체 이게 뭐야, 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구절이 군데군데 있었습니다. (-을이라는 조사를 乙이라는 한문으로 음차해서 쓰더군요.)
알본 논문들을 보면 의천 서간문은 이상하다, 원효 서간문은 이상하다 등의 내용이 나오는데 아마 이런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ii) 아프리카에 대한 전체 아카이빙을 하고 싶다.
저를 개인적으로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저는 아프리카를 정말 좋아합니다. 특히 서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를 좋아하죠.
이 지역에 대한 연구가 정체된 원인 중 하나로, 저는 이전의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않았다는 점이라 생각합니다. 처음으로 들어온 선교사/탐험가들의 여행일기, 그 후 식민지 시대 관립 인류학자들의 기록, 그 후 인류학자들의 기록들. 이 모든 기록들을 구글 지도의 GPS 표시와 함께 연대순으로 아카이빙 해놓으면 굉장히 많은 '도약'이 있지 않을까요?
(아마 그 아카이브를 만든 사람은 대대손손 그 아카이브 관리만으로도 먹고 살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왜 데이터베이스권이 있지 않습니까?)
(iii) 마지막으로 뉴욕 맨해튼의 저만의 빌딩을 가지고 싶네요.
제가 좋아하는 영화 프로그램만을 상영하고, 관련 명사를 불러서 GV 하고, 제가 좋아하는 미술 작품만 전시하고 인터뷰하고 아카이빙하고, 출간 기념회도 하고, 어느 힌두교 요기나 대만에 계시는 정일교 도사님 불러서 명상 수업 열고, 어디 말리에 계시는 그리오분 모셔다가 순자타 에픽이나 듣는 삶.
아. 돈이 많으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 생에는 비트겐슈타민마냥 재벌가 셋째 아들쯤으로 태어나서, 첫째 형이 돈 줄테니 경영권에 관심 가지지 말아라 하면 냉큼 오케이하고 유유자적 살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