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업으로 삼는다는 것, 직업으로서의 학문에 대한 질문

(1) 다른 분들이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현실적인 답변을 충실히 적어드린 듯합니다. 저는 다만 누군가가 저에게 직업으로서의 '철학'을 고민한다면, 제가 결정적이라 생각하는 질문을 두 개 적을까 합니다.

(a)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많은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나에게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인가?'
; 철학으로 석사 - 박사 - 학계에 어떠한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사실 인생에 있어서 꽤 큰 결정을 내리는 것이고, 이는 인생의 방향을 어느정도 결정짓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른 여러분들이 말했듯, 이 과정은 불확실함과 (통계상 절반 정도는 되는) 확정된 실패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금은 열정과 호기심 등으로 철학을 전공하고 싶어 하실 수 있지만, 생각 외로 사람의 열정이란 휘발성이 강합니다. (특히 공부를 하다보면, 어느순간부터 정말 재미없고 - 하기 싫은 것들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옵니다. 재미와 열정으로 공부를 시작했던 사람들은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는 경우를 왕왕 보았습니다. 당장 저부터도 어느정도 그랬고요.)

이 긴 시간 철학을 꾸준히 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재능이란, 철학을 한다는 것의 의미를 납득하는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남과 비교해서, 경제적으로 불안정하고 내 논문을 고작 심사위원만이 읽고, 주변 친구들은 가정을 가지고 안정을 이루지만 나는 그러지 못 할 것 같고 등등...철학을 공부함으로서 겪게 될 고통이 있을 겁니다. 철학을 공부하는 것에서 이러한 고통을 '납득할 만한'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철학을 업으로 삼는 일이 인생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을 듯 합니다. 막말로, 철학보다는 삶이 중요하니깐요.

(b) 나는 논문 쓰는 것을 좋아하는가? (적어도 싫어하지 않는가?)
; 철학을 공부하는 것과 철학을 업으로 삼는 것의 결정적인 차이는 '논문'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학계나 외부에서 학자를 평가하는 것은, 학자가 읽은 책의 양도, 대출 목록도 아닌 그가 쓴 논문입니다.
하지만 의외로 논문은 굉장히 형식적인 구석이 있습니다. 단순히 내가 쓰고 싶은대로 쓸 수 있는 글이 아닌 겁니다. 학계에서 논의되는 주제를 찾아야 하고, 그 주제의 쟁점에서 어떻게든 자신만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선행 논문들도 읽어야 하고, 필요하다면 다른 분야의 기초 지식도 가져야 하고. 예상외로 굉장히 고단한 '노동'에 가깝습니다.

이 노동을 좋아하진 않더라도, 적어도 싫어하지는 않아야 철학을 업으로 삼기에 적절하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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