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에 대해 분석한 책이 있을까요

제 짧은 식견을 써보자면 인간만의 특별함 중 하나가 무의미를 견딜 수 없다는 특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현상이 일어났을 때, 단지 그 현상 자체를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 어떻게 해서든 의미를 부여해서 일종의 통제감을 얻어낸다는 강박이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리는 현상은 과학적으로 설명될 뿐 의미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농경시대에는 신에게 의존하며 기우제를 통해 비가 내리는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며 ’기우제를 지낸다->비가 내린다‘ 라는 통제감을 얻음으로써 그 무의미를 견딜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인간에게 무의미가 어떤 존재인지 탐구한 서적이 있을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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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 최성호 가 우선 생각나네요
네이글과 카뮈의 부조리분석에 대해서 논한 논문을 발전시킨, 최성호선생님의 반대신론적 관점을 간명하게 드러낸 재밌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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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미, 특히 삶의 의미라고 할 때의 의미는 영미권 학계에서는 이제야 탐구되는 분야입니다. (따라서 무의미 역시 이제야 탐구되는 분야이죠.)

삶의 의미 일반에 대해서는 이전에 물어보신 분에 달린 답들이 유용할듯 싶습니다.

(우연치 않게도, @Angulimala 님이 말하신 최성호님의 저작도 있군요)

(2)

삶의 의미와 운(luck), 통제/자기 통제(control/self-control)은 더 논쟁적인 영역입니다. 운과 자기 통제 역시 최근에야 영미권에서 학술적인 관심을 받는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운 전반에 대해선 routledge handbook of luck이 지금으로선 가장 괜찮은 시작점처럼 보입니다. (물론 삶의 의미와 직접적으로 엮어서 쓴 글은 없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마 차라리 삶의 의미에 대한 옥스퍼드 컴패니언이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장 이 모든 주제와 연결되어서 글을 쓴 사람으로는 Derk Pereboom이 떠오르네요. 페레붐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없지만 그래도 삶의 의미는 존재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간결한 본인이 쓴 글은 앞에 링크 단 옥스퍼드 컴패니언에 존재합니다. 단행본 단위의 책은 다음 두권이 있습니다.

(3)

또 당장 기억나는 건 마사 누스바움의 <연약한 선>이 삶의 의미와 운에 대해서 다루고 있던 걸러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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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로 유명한 데이비드 베너타의 <인간의 곤경 The human predicament>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저도 부분적으로만 읽었지만 나중에 차분히 정독하고 싶은 책이에요. 여기서 그는 우주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삶이라곤 완전히 무의미하지만 지구적 관점에서 제한적인 의미가 가능하며 의미의 부재를 다루는 최선은 삶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라고 주장합니다. 그 밖에도 몇몇 측면에서 도발적일 수 있는 주장들을 꼼꼼하게 논증하는데 참 재밌습니다.

이 분야를 포괄적으로 다룬 입문서로 루틀리지에서 나온 <What is this thing called the meaning of life?>가 개인적으로 유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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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맞아요! 저도 이 책이 가장 깔끔하고 좋았습니다. 특히 SEP의 "삶의 의미" 항목도 살짝 아쉬운 부분이 많았는데 (특히 의미가 어떠한 뜻을 지닐 수 있는지 설명이 좀 미진하더라고요) 이 책은 그 부분까지 고려해서 잘 서술되어 있어서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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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도덕의 계보> 2논문과 3논문의 기본 구도가 '인간 삶의 무의미와 의미 부여'에서 시작합니다.
니체 본인이 <도덕의 계보> 3논문 마지막 장에서 자신 논의를 요약한 것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장 용감하고 고통에 익숙한 동물인 인간은 고통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고통의 의미나 고통의 목적이 밝혀져 있기만 하다면, 인간은 고통을 바라고 고통 자체를 찾기까지 한다.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가 바로 이제까지 인류에게 내려진 저주였다. 그런데 금욕적 이상은 인간에게 하나의 의미를 준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주어진 유일한 의미였다.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보다는 낫다. 금욕적 이상은 어떤 점에서 보더라도 최상의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금욕적 이상에 의해 고통이 해석되었으며, 무서운 공허가 채워진 것으로 보였다. 자살을 부르는 모든 허무주의로 통하는 문이 폐쇄되었다. 이러한 해석은 의심할 여지 없이 새로운 고통을 가져왔다. 그것은 더 깊은, 더 내면적인, 더 유독한, 더욱 삶을 갉아먹는 고통이었다. 이 금욕적 이상은 죄라는 관점에서 모든 고통을 해석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것에 의해서 구원받았고, 의미를 갖게 됐으며, 이제 더는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잎이나 무의미한 장난감이 아니었다. 이제 인간은 무엇인가를 의욕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디를 향해서, 무엇을 위해, 무엇에 의해서 의욕 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의지 자체는 구원된 것이다. (…) 인간은 아무것도 의욕 하지 않기보다는 오히려 무를 의욕 하기를 원한다.

<도덕의 계보> 2논문과 3논문 전체의 구도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처럼 "자신의 힘을 전적으로 발휘할 수 있고 최대의 힘 감정을 달성할 수 있는 최적의 유리한 상태를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자연의 역설적인 과제로 인해 인간은 본능에 의존하지 못하도록 방해받고, 시민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고통을 자초하여 더 이상 이전처럼 지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신의 힘 감정을 달성할 목표를 최초로 스스로 결정하고 추구해야만 했다. 그러나 한동안 그러한 목표가 제시되지 않아서 인간은 자신의 힘(의지)을 미래에 투사하지 못하게 됐고, 이러한 목표의 부재 상태로 인해 인간은 실존적 위기에 처했고 자기 현존의 의미를 묻게 됐다. 즉, '자살적 허무주의'의 위기가 도래했다. 이러한 삶을 끊어낼 고통에 맞서서 삶 자체가 금욕적 사제를 통해 인간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병든 인간 동물이 실존적 고통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고통 덕분에라도 계속해서 살도록 설득한 금욕적 이상을 고안했다. 인간은 고통을 받을 만하기 때문에 고통받는다. 이 고통이라는 도구를 통해 금욕적 이상은 인간과 인간의 의지를 구했다. 달리 말해, '자살적 허무주의'에 맞서 금욕적 이상은 '생산적 허무주의'라는 반-자연적 힘(not life-affirm & anti-natural)을 통해 인간 생존(life-preserve & enhance)을 유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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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생각해 둔 것은 앞에서 Sophisten님께서 말씀해주신 니체의 도덕의 계보 두 번째 논문입니다. 거기서는 인류는 고통은 참을 수 있었어도 고통에 이유가 없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고 언급되죠.

삶의 의미와 같은 문제에 있어 분석철학자에게 대답하면 "이보게, '의미'의 의미가 뭐요?" 한다는 우스갯소리처럼, 초년생의 주제, 팝 필로소피처럼 취급받는다는 느낌이 역력한데, 정작 이런 지평을 만들게 한 초기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이 삶의 의미는 그의 철학 전체를 관통하던 주제였죠.

논리철학논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바로 질문자가 던진 "일부러 의미 만들기"였어요. 6.43에서 달의 이지러짐과 참을 빗대서 행복과 불행, 선과 악, 철학의 옳은 길과 잘못된 길을 짝지어서 제시하죠. 그렇게 이 마지막의 윤리 부분을 독해하다보면,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존재에 대한 대답될 수 없는 남아 있는 문제(삶의 의미, 왜 사는지, 왜 나는 여기 있고 저기에 있지 않은지...)에 대해 질문하려고 하지 않고 그 경향을 극복하려고 합니다. 반면에 불행한 사람은 이것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며 그 어떤 대답에도 도달하지 못한 채 부딪히는 일을 반복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이 하려는 일은 불행한 자를 막기 위해 언어의 한계를 완전히 구분하는 것이었고, 그를 위해 철학적이라기엔 그렇게 철학적이지 않은 사이비 철학 명제인 논고의 명제를 알리는 것이었죠.

이제, 이것은 전혀 다른 쪽에 대한 말이지만, 니체의 관점주의적 시각을 비춰 본다면 과학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과연 기우제를 지내던 농경시대보다 더 의미에 있어 안전한지, 더 발전된 것인지를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 저는 기우제의 원시인이 그렇게 무의미를 못 받아들였다거나, 우리 과학시대인이 무의미에서 충분히 답을 주었다고 생각하지 못하겠습니다.

프레이저의 황금 가지라는 고대 부족에 대한 책에서는 건기와 우기로 기후가 나뉜 곳인 어떤 땅에 사는 부족의 의식을 살펴봤습니다. 살펴보니 그들은 우기가 되면 비의 왕에게 의식을 진행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프레이저는 이것을 주술 - 비의 왕에게 빌어서 비가 왔다고 생각하는 - 주술의 일부로 보았습니다. 과학시대의 평범한 사람이 누구나 할 것처럼 말입니다.
이를 호되게 비판한 사람이 다름아닌 후기 비트겐슈타인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것을 "주술"로 본 것은 "오류"라고 전제한 것이고, 이것은 "미친 짓"이라고 말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질문합니다. 왜 그 원시인들은 우기에 비의 왕에게 빌었는지, 만일 비가 온다고 믿는다면 왜 건기에 빌지 않았는지.
비트겐슈타인에게 이것은 절대 과학적 기준을 두고 이론화해선 안되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비의 왕에게 하는 의식은 한국의 제삿상 의식이나 키스와 같은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절대 이런 방식으로 설명되어선 안되었다는 분노에 가까운 글을 표출합니다.

제가 보기엔, 님의 이 질문글에서 나온 "비가 오고 눈이 오는 것이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것도 아주 충분히 부적당한 무언가, "일부러 의미 만들기" 부류 안, 에 있어 보이고, 이것이 무의미의 문제에 대한 실마리가 될 수 있어 보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관점주의적 시각을 더 강화한다면 기우제를 지내는 원시인 너머에겐 그들이 본 과학이라는 것이 더 희극적인 통제감 유발장치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학적 주제에서는 굉장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제겠지만, 현재 댓글에서 나왔던 "삶의 의미"에 대한 주제에선 정말 그럴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심슨 가족에서 이런 장면이 나오죠. 바트 심슨에겐 친구 밀하우스가 있고, 밀하우스의 부모님은 각각 이혼한 상태입니다. 밀하우스 아빠는 호머 심슨에게 내가 얼마나 이혼 이후에도 제대로 살고 있는지를 방에 잔뜩 남자들의 로망들로 잔식해서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가 말하길 "나는 스포츠카가 침대야! 넌 어때?"라고 하죠. 호머 심슨은 눈 깜빡도 안 하고 "난 큰 침대에서 아내랑 같이 자는데"하고 대답하죠. 밀하우스의 아빠는 그 말을 듣고 굉장히 서운해 하고요.

여기서 호머 심슨은 "미개인"일지도 모릅니다. 금전의 문제와 취미의 문제를 알려고 하지도 않는, 보통 프로그램의 모습 그대로 여기서는 그렇게 나오니까요. 하지만 "현자"일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행복에 있어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자기도 모른 채 설명했으니까요.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은 없지 않을까요.

<Does Life Have a Meaning?> by Milton Munitz, by James Tartaglia, by Nicholas Waghorn가 무의미를 다루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