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의 도덕 심리학?: 도덕 심리학에 대한 단상

(1) 석사 시절 함께 공부했던 대학원생분들 중에 푸코를 전공하시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분이 있습니다. 나중에 그분의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미국에서 전공을 도덕 심리학(moral psychology)으로 바꾸셨다고 하더라고요. 솔직히 상당히 놀랐습니다. 제가 알기로, 도덕 심리학은 도덕과 관련된 감정들의 유형에 대한 일종의 경험과학적 연구거든요. "행복은 …이다.", "사랑은 …이다.", "슬픔은 …이다."라는 형식의 규정들을 만들고, 그 감정들이 도덕철학적 문제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는지 해명하는 작업 말입니다. 제가 놀랐던 것은, 이런 식의 작업이 바로 푸코가 극렬하게 비판했던 작업이라는 점입니다. 『말과 사물』의 서문만 보더라도 서구의 백과사전적 분류 체계에 대한 푸코의 비판이 나오죠.

이 책의 탄생 장소는 보르헤스의 텍스트이다. 보르헤스의 텍스트를 읽을 때, 우리에게 존재물의 무질서한 우글거림을 완화해 주는 정돈된 표면과 평면을 모조리 흩어뜨리고 우리의 매우 오래된 관행인 동일자와 타자의 원리에 불안정과 불확실성을 오래도록 불러일으키고 급기야는 사유, 우리의 사유, 즉 우리의 시대와 우리의 지리가 각인되어 있는 사유의 친숙성을 깡그리 뒤흔들어 놓는 웃음이다. 보르헤스의 텍스트에 인용된 "어떤 중국 백과사전"에는 "동물이 a) 황제에게 속하는 것, b) 향기로운 것, c) 길들여진 것, d) 식용 젖먹이 돼지, e) 인어, f) 신화에 나오는 것, g) 풀려나 싸대는 개, h) 지금 분류에 포함된 것, i) 미친 듯이 나부대는 것, j) 수없이 많은 것, k) 아주 가느다란 낙타털 붓으로 그린 것, l) 기타, m) 방금 항아리를 깨뜨린 것, n) 멀리 파리처럼 보이는 것"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경이로운 분류에서 누구에게나 난데없이 다가오는 것, 교훈적인 우화의 형식 덕분으로 우리에게 또 다른 사유의 이국적 매력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의 사유가 갖는 한계, 즉 그것 을 사유할 수 없다는 적나라한 사실이다. (미셸 푸코, 『말과 사물』, 이규현 옮김, 민음사, 2012, 7.)

물론, 푸코의 철학에서 도덕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꾼 것이 결코 비난받을 일도 아니고 비판받을 일도 아니긴 하지만, 저로서는 의아하긴 하였습니다. 푸코 전공자라면 도덕 심리학 같은 분야를 인정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해서요.

(2) 솔직히, 제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도덕 심리학이 과연 철학적으로 의의가 있는 분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분야를 생각할 때마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 떠오릅니다. 이 소설의 등장 인물 중에는 '메리 베넷'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책은 열심히 읽지만 일종의 헛똑똑이로 묘사되는 인물입니다. 아무 쓸모 없는 지식을 교양이랍시고 과시하는 인물이거든요. 소설에는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너라면 뭐라고 말하겠니, 메리? 넌 생각이 깊은 데다 두툼한 책도 많이 읽고 중요한 구절은 따로 베껴두지 않니."
메리는 뭔가 그럴싸한 말을 하고 싶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윤지관, 전승희 옮김, 민음사, 2003, 15쪽.)

저는 이 소설에서 메리가 '오만(pride)'이라는 개념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장면이 재미있었습니다. '오만'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길게 나열하고는 있지만, 사실 그 정의가 별로 유의미하지는 않다는 게 잘 드러나는 장면이거든요. 헛똑똑이가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장면인 것 같아 인상에 깊이 남았습니다.

"내가 보기에 오만은 가장 흔한 결함이야." 메리가 생각이 깊다는 것을 과시라도 하듯이 말했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바로 미루어 볼 때, 오만이란 사실 아주 일반적이고, 인간 본성은 오만에 기울어지기 쉬우며, 실재건 상상이건 자신이 지닌 이런저런 자질에 대해 자만심을 품고 있지 않은 사람은 우리 가운데 거의 없다고 봐야 해. 허영과 오만은 종종 동의어로 쓰이지만 서로 달라. 허영심이 없으면서도 오만할 수 있지. 오만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이고, 허영은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해 주기를 바라느냐의 문제거든."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31쪽.)

너무 극단적인 단순화일 수는 있지만, 저는 도덕 심리학이 감정에 대해 제시하는 규정들이 결국 메리 베넷의 백과사전적 지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행복', '사랑', '슬픔', '오만' 등의 개념에 대해 여러 가지 정의를 성립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과연 그런 '감정 일람표'를 만드는 것이 철학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분명한 목적과 방향성이 없이 각각의 감정의 특징들만 나열하는 건, 메리 베넷의 과시적 지식처럼 공허할 뿐이니까요.

(3) 그런데 최근에 도덕 심리학이 덕 윤리와 굉장히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윤리학의 종류를 '덕 윤리', '의지 윤리', '의무 윤리', '결과 윤리'라는 네 가지 범주로 크게 나눌 수 있다면, 저는 그 중에서 덕 윤리를 가장 선호하거든요. 그런데 덕 윤리를 현대적으로 재발굴한 것으로 알려진 엘리자베스 앤스콤이 자신의 논문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매우 유명한 논문이라는데, 저는 윤리학에 조예가 깊지 않아서 이런 내용이 있는 줄 최근에서야 처음 알았습니다.

I WILL begin by stating three theses which I present in this paper. The first is that it is not profitable for us at present to do moral philosophy; that should be laid aside at any rate until we have an adequate philosophy of psychology, in which we are conspicuously lacking. (G. E. M. Anscombe, "Modern Moral Philosophy", Philosophy, Vol. 33(124), 1958, p. 1)

나는 내가 이 논문에서 제시하는 세 가지 논제들을 진술하는 것으로 시작할 것이다. 첫째는, 현재의 우리에게 도덕철학을 수행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 우리가 적합한 심리학의 철학을 지니기 전까지는 도덕철학이 어찌되었든지 중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심리학의 철학을 분명히 결여하고 있다.

(4) 얼마 전에 올빼미에 올라온 실존 미학과 덕 윤리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생각해 보면, 푸코를 전공하신 분이 도덕 심리학으로 전향하게 된 것도 아주 이상하지만은 않겠더라고요. 우리가 어떠한 테크닉을 통해 우리 자신의 삶을 예술작품처럼 만들어나갈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탐구가 '실존 미학'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 테크닉 중 하나가 자신만의 다양한 '덕'을 형성하는 활동이라고 한다면, 분명히 실존 미학과 덕 윤리가 만나는 지점이 있겠죠. 게다가, 덕 윤리의 자연스러운 귀결이 오늘날에는 도덕 심리학이라고 한다면, 푸코의 철학에서 도덕 심리학으로 넘어가는 것도 이해가 되기는 하더라고요.

(5) 그렇지만 여전히 저는 도덕 심리학에 대해서는 다소 의심스러워하는 입장입니다. 덕 윤리가 반드시 도덕 심리학처럼 덕을 유형별로 분류하는 작업에 몰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요. 가령, 제가 거의 '혐오'하는 것 중 하나가 다음과 같은 셀리그만의 작업입니다. 저는 감정이나 덕들에 대한 보편적 분류 체계를 아래와 같이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을 믿지 않습니다. 이런 주장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일종의 '본질주의'를 너무 순진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해서요.

DMS(정신장애진단통계편람)에는 강점과 미덕의 분류 체계가 나온다. 그것은 정신병의 분류 체계와 정반대다. 우리가 볼 때 미덕에는 6가지가 있고, 범문화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것들은 24가지 강점으로 나뉜다.

우리가 찾아낸 6가지 미덕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다. 첫째는 지혜와 지식, 둘째는 용기, 셋째는 사랑과 인류애, 넷째는 정의, 다섯째는 절제와 중용, 여섯째 는 영성과 초월성이다.

우리는 북쪽의 그린란드에서 남쪽의 마사이족이 사는 곳까지 사람들을 보내 어 70개국에 이런 미덕이 널리 퍼져 있는지 살펴보았다. 우리는 이 6가지 미덕이 우리가 두 발로 걷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의 일부라는 견해를 받아 들이기 시작했다.

https://www.edge.org/conversation/martin_seligman-eudaemonia-the-good-life

(6) 도덕 심리학은 이번 학기에 제가 듣는 아리스토텔레스 수업의 중심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지금으로서는 이런 심리학을 납득하기가 힘들지만, 혹시 또 모르죠. 수업을 들으면서 여러 논문들을 읽고 견해들을 접하다 보면, 제가 놓치고 있던 도덕 심리학의 의의를 발견하게 될지도요. 이 분야와 관련해서 새롭게 깨달은 것들이 생긴다면 종종 올려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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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부분은 도덕 심리학을 지나치게 좁게 보신 듯 합니다. 통상 도덕 심리학은 도덕과 관련된 "모든" 심리학적 영역에 대한 (준) 철학적인 접근을 시도하는 학문입니다. 즉, 감정뿐 아니라, 도덕적 판단/행위에 중요한 요소라 볼 수 있는 믿음(belief), 욕망(desire), 성격(characteristic) 등이 모두 연구의 범위 안에 들어갑니다.
도덕 심리학에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제가 예전에 번역한 "생물학의 철학"의 세 가지 목표가 모두 도덕 심리학을 설명하는데 유용할 듯 합니다.

이를 도덕 심리학으로 치환하면, 도덕 심리학은 (i) 도덕에 관한 심리학적 연구에 존재하는 개념적 문제를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일을 하거나 (ii) 전통적인 도덕 철학적 질문에 도덕에 관한 심리학적 연구를 활용하는 일이겠죠.
아마 방향성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듯 합니다. (a) 심리학적 연구 내에 존재하는 (도덕) 철학 용어들을 엄밀하게 분석하는 일. (b) 도덕 철학의 용어들을 (자연주의적 형이상학을 수용한다면) 엄격한 경험 과학적 모델/용어로 수정하는 일. (물론 이 외에도 여러 다양한 작업들을 하고 있습니다.)

(2)

뭐, 사실 이렇게 말했지만 도덕 심리학이 철학인지, 철학이여도 그렇게 강조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지 미심쩍은 지점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 그래도 제가 생각하기에 도덕 심리학이 의의를 가지는 지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a) 도덕뿐 아니라 인간의 지향적 행동, 즉 행위(action) 일반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 행위에 관한 철학적 모델과 심리학의 경험과학적 언어를 조율/통합하는 작업을 일정 부분 도덕 심리학이 담당하고 있다 여겨집니다.

(b) 얄궂게도 "감정"처럼 현상적 특성이 있는 심리학의 영역은 이제 과학만으로 연구하기가 어렵기에, 이 현상적인 특성을 연구한다는 점에서 "철학"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 같기도 합니다. (단 자히비의 연구도 그렇고, 콜린 맥긴의 <혐오의 의미>도 그렇고, Rowman/Littlefield 출판사에서 나오는 도덕 심리학 총서도 이런 방향이죠.)

뭐. 감정에 관한, 특히 감정의 분류에 관한 과학적 연구는 살짝 미심쩍은 지점들이 존재하지만, 그래도 개별 감정에 관한 이런 연구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 여겨집니다.

(c) 통상 철학의 방법으로 여겨지는 인간의 직관이나 언어적 분석을 적용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는 대상도 존재하죠. 예컨대, 암묵적 사회 인지(implicit social cognition)이 그러한 주제입니다. 예컨대 암묵적 편견(implicit bias)처럼 행위자 본인은 자신이 그러한 편견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지만 (철학적으로 말하면 현상적 의식 속에 드러나지 않지만) 실험적으로 그러한 편향이 있다고 검증된 경우, 이러한 주제는 필연적으로 심리학과 연계되어 연구될 수 밖에 없어 보입니다.

(d) 그 외에도 심리학이 연구하는 흥미로운 (그러나 철학에서는 거의 연구가 되지 않은) 주제들은 꽤 많습니다. 영성(spirtuality)라던가 행복(happiness 혹은 well-being)이라던가, 준사회적 상호작용(parasocial interaction, 우리가 직접 만나지 못하고 미디어를 통해서 알게 된 사람과 느끼는 친밀감이라던가 상호 작용을 연구하는 분야). 이런 연구 분야의 통찰들은 (적절한 도덕 심리학 혹은 심리학의 철학 연구자들을 거쳐서) 철학에 기여하는 바가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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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 심리학과 도덕에 대한 실험철학을 같은 것으로 보냐 다른 것으로 보냐는 또 복잡한 문제이겠습니다만, 위 논문 또한 참고하실만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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