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하하하. 불편하지는 않는데 곤란한 것은 사실이네요. 제가 느끼기로는 저에게 일종의 "심판관" 자리를 주시는 듯한데, 제가 그럴 자격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몇 자 쓰도록 하겠습니다. 두 분에게는 어떠한 개인적 감정도 없으며, 이 글에 나타는 두 분 입장에 대한 요약/평가 혹은 재해석은 온전히 제 관점이라는 점을 미리 서술합니다. 제가 텔레파시가 가능한 궁예는 아니라서요.
(1)
우선 말씀은 이렇게 하시지만, 제가 볼 때는 오히려 제가 "핵심"을 지적한듯합니다. 제가 말했듯, 문제는 여전히 "철학 일반에 대한 견해 차이"로 보입니다. 다만 voiceright님이 지적하신 것은
라는 점이지요. 즉, 이 문제는 "철학 일반에 대한 견해 차이"는 맞지만, voiceright님이 보시기에 윤님의 입장(으로 추정되는 것)은 "철학 내에서" 용인될 수 없는 견해이다, 라는 것이 적절한 요약인 듯 합니다.
(1-1) 이렇게 되면 저는 자연스럽게 몇 가지 의문이 듭니다.
(a) 이 논쟁에서 윤님은 철학 일반에 대해 (직접적으로) 아무런 견해도 표명하진 않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논쟁이 어느순간부터 허수아비 공격으로 흘러간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b) 보이스라이트님이 해석하신 윤님의 입장이 실제 윤님의 입장이라고 가정합시다. (그래서 허수아비 공격이 아니라고 합시다.) 그럼에도 여전히 궁금한 것은 "철학 내에서 용인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보이스라이트님 말을 제가 거칠게 요약하자면) 윤님이 철학자들은 과대망상을 하고 있으며, 아무리 합리적이여도 그게 과대망상이므로 치료 받아야 한다, 라는 견해를 가진다고 합시다.
이 자체는 굉장히 과격하고 과감한 주장인 것은 맞습니다. 철학하는 사람들 기분은 나빠지겠죠. 자신들이 하는 것은 학문이 아닌 망상이며,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셈이니깐요. 그렇다고 이게 "철학 내에서 용인될 수 없는 것"인지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철학의 한 부분, 혹은 철학 일반조차 폐기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왜 용인할 수 없으신 것이죠?
(1-2) 철학계 내에서도 철학의 기존 역할을 굉장히 축소할 것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여럿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리처드 로티도 이러한 포지션이었던 것으로 기억하죠. (제 기억으로는 이로 인해 프린스턴대 철학과 교수 자리를 내려놓고, 버지니아대 "인문학부" 교수로 넘어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상대적으로 굉장히 강한 자연주의를 옹호하시는 분들도, 철학의 프로젝트 일반이 결국 과학으로 환원되어야 한다고 보시죠. (정확하진 않지만, 처칠랜드가 이러한 입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2) 그리고 흄에 관한 논의가 "철학" 일반으로 팽창하는 것은 일종의 "비약"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흄에 관해서 모르고, 상대성 이론에 대해서도 모릅니다. (물론 흄 시대에는 상대성이론이 없었기에 저 모든 것들이 가정이라는 점은 압니다.)
제가 볼 때, 윤님의 견해는 다음과 같아 보입니다.
(i) 과학은 자신이 예견한 현상에 대해, 실제로 그 현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면 정당화된다.
(굉장히 나이브하지만, 어떠어떠할 때 번개가 내린다고 해보자. 그리고 실제로 어떠어떠한 때 번개가 내렸고 특별한 예외가 없었다. 그러하면 "어떠어떠한 때 번개가 내린다."라는 과학 이론은 옳다.)
(ii) 과학은 이 이상의 어떠한 형이상학적 가정물을 "굳이" 추가해서 정당화할 필요가 없다.
("어떠어떠할 때 번개가 내린다."라는 과학 이론에서 원자라던가, 경험적으로 관찰 불가능한 어떠한 요소를 굳이 투입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요약해볼 때, 이는 "철학 일반"에 관한 논의라기보단, 윤님 자신의 과학에 대한 이해, 즉 과학철학적 입장을 내비친 것으로 저는 이해됩니다.
(2-1) 철학의 여러 분과들에 대해서, 윤님의 견해가 굉장히 미니멀하고, 경험주의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자체로 이게 문제가 된다 여기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때론 학자들은 어떠한 '도입물 자체'를 문제 삼기도 하니깐요.
이 부분은 라이칸의 책을 제가 요약한 파트입니다. 명제에 관한 라이칸의 태도는, (제가 볼 때) 어떠한 일상 경험을 넘어선 '형이상학적 가정물'에 대한 윤님의 태도와 동일한 지점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3) 즉흥적으로 써서 두서가 없으니, 간략한 요약을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i) 제가 볼 때, 윤님은 철학의 여러 분야에 대해서 굉장히 미니멀하고, 경험주의적인 태도를 가지신 듯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철학 내에서 용인받을 수 없는 스텐스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ii) 이제 보이스라이트님이 요약하셨든, 윤님은 "철학은 망상이며 이는 치유되어야 한다."라는 견해를 가진다고 합시다. 설사 이러한 견해를 가졌더라도, 이러한 윤님의 태도가 철학 내에서 용인받을 수 없는 스텐스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지금/역사적으로 존재했던 것들에 대해서 '사이비'라는 호칭을 붙여왔습니다. 관상학도 그렇고, 풍수지리도 그렇고, 무속도 그렇습니다. 한의학도 누군가는 사이비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철학이 "사이비"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불리지 않을 "특권적 위치"에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누군가가 근거도 없이 그렇데 말한다면, 그건 굳이 상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근거를 가지고 말한다고 해도 대답해도 되고 안 해도 되죠. 그렇다고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지 못하게 만들 이유는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