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이 수학철학에서 말하려는 핵심이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튜링 논쟁과 비트겐슈타인-괴델 논쟁을 중심으로

(0) 하하하. 불편하지는 않는데 곤란한 것은 사실이네요. 제가 느끼기로는 저에게 일종의 "심판관" 자리를 주시는 듯한데, 제가 그럴 자격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몇 자 쓰도록 하겠습니다. 두 분에게는 어떠한 개인적 감정도 없으며, 이 글에 나타는 두 분 입장에 대한 요약/평가 혹은 재해석은 온전히 제 관점이라는 점을 미리 서술합니다. 제가 텔레파시가 가능한 궁예는 아니라서요.

(1)

우선 말씀은 이렇게 하시지만, 제가 볼 때는 오히려 제가 "핵심"을 지적한듯합니다. 제가 말했듯, 문제는 여전히 "철학 일반에 대한 견해 차이"로 보입니다. 다만 voiceright님이 지적하신 것은

라는 점이지요. 즉, 이 문제는 "철학 일반에 대한 견해 차이"는 맞지만, voiceright님이 보시기에 윤님의 입장(으로 추정되는 것)은 "철학 내에서" 용인될 수 없는 견해이다, 라는 것이 적절한 요약인 듯 합니다.

(1-1) 이렇게 되면 저는 자연스럽게 몇 가지 의문이 듭니다.
(a) 이 논쟁에서 윤님은 철학 일반에 대해 (직접적으로) 아무런 견해도 표명하진 않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논쟁이 어느순간부터 허수아비 공격으로 흘러간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b) 보이스라이트님이 해석하신 윤님의 입장이 실제 윤님의 입장이라고 가정합시다. (그래서 허수아비 공격이 아니라고 합시다.) 그럼에도 여전히 궁금한 것은 "철학 내에서 용인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보이스라이트님 말을 제가 거칠게 요약하자면) 윤님이 철학자들은 과대망상을 하고 있으며, 아무리 합리적이여도 그게 과대망상이므로 치료 받아야 한다, 라는 견해를 가진다고 합시다.

이 자체는 굉장히 과격하고 과감한 주장인 것은 맞습니다. 철학하는 사람들 기분은 나빠지겠죠. 자신들이 하는 것은 학문이 아닌 망상이며,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셈이니깐요. 그렇다고 이게 "철학 내에서 용인될 수 없는 것"인지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철학의 한 부분, 혹은 철학 일반조차 폐기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왜 용인할 수 없으신 것이죠?

(1-2) 철학계 내에서도 철학의 기존 역할을 굉장히 축소할 것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여럿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리처드 로티도 이러한 포지션이었던 것으로 기억하죠. (제 기억으로는 이로 인해 프린스턴대 철학과 교수 자리를 내려놓고, 버지니아대 "인문학부" 교수로 넘어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상대적으로 굉장히 강한 자연주의를 옹호하시는 분들도, 철학의 프로젝트 일반이 결국 과학으로 환원되어야 한다고 보시죠. (정확하진 않지만, 처칠랜드가 이러한 입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2) 그리고 흄에 관한 논의가 "철학" 일반으로 팽창하는 것은 일종의 "비약"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흄에 관해서 모르고, 상대성 이론에 대해서도 모릅니다. (물론 흄 시대에는 상대성이론이 없었기에 저 모든 것들이 가정이라는 점은 압니다.)

제가 볼 때, 윤님의 견해는 다음과 같아 보입니다.
(i) 과학은 자신이 예견한 현상에 대해, 실제로 그 현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면 정당화된다.
(굉장히 나이브하지만, 어떠어떠할 때 번개가 내린다고 해보자. 그리고 실제로 어떠어떠한 때 번개가 내렸고 특별한 예외가 없었다. 그러하면 "어떠어떠한 때 번개가 내린다."라는 과학 이론은 옳다.)

(ii) 과학은 이 이상의 어떠한 형이상학적 가정물을 "굳이" 추가해서 정당화할 필요가 없다.
("어떠어떠할 때 번개가 내린다."라는 과학 이론에서 원자라던가, 경험적으로 관찰 불가능한 어떠한 요소를 굳이 투입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요약해볼 때, 이는 "철학 일반"에 관한 논의라기보단, 윤님 자신의 과학에 대한 이해, 즉 과학철학적 입장을 내비친 것으로 저는 이해됩니다.

(2-1) 철학의 여러 분과들에 대해서, 윤님의 견해가 굉장히 미니멀하고, 경험주의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자체로 이게 문제가 된다 여기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때론 학자들은 어떠한 '도입물 자체'를 문제 삼기도 하니깐요.

이 부분은 라이칸의 책을 제가 요약한 파트입니다. 명제에 관한 라이칸의 태도는, (제가 볼 때) 어떠한 일상 경험을 넘어선 '형이상학적 가정물'에 대한 윤님의 태도와 동일한 지점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3) 즉흥적으로 써서 두서가 없으니, 간략한 요약을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i) 제가 볼 때, 윤님은 철학의 여러 분야에 대해서 굉장히 미니멀하고, 경험주의적인 태도를 가지신 듯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철학 내에서 용인받을 수 없는 스텐스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ii) 이제 보이스라이트님이 요약하셨든, 윤님은 "철학은 망상이며 이는 치유되어야 한다."라는 견해를 가진다고 합시다. 설사 이러한 견해를 가졌더라도, 이러한 윤님의 태도가 철학 내에서 용인받을 수 없는 스텐스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지금/역사적으로 존재했던 것들에 대해서 '사이비'라는 호칭을 붙여왔습니다. 관상학도 그렇고, 풍수지리도 그렇고, 무속도 그렇습니다. 한의학도 누군가는 사이비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철학이 "사이비"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불리지 않을 "특권적 위치"에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누군가가 근거도 없이 그렇데 말한다면, 그건 굳이 상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근거를 가지고 말한다고 해도 대답해도 되고 안 해도 되죠. 그렇다고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지 못하게 만들 이유는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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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란하셨을 텐데 답변 주셔서 감사합니다. Mandala님의 답변에 관한 제 의견을 좀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일단 이 논쟁이 어느 순간부터 허수아비 공격으로 흘러갔다는 지적은, 조금 인정하겠습니다. 근데 제가 자꾸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패는 이유는, YOUN님의 주장이 잘못된 원인이, 그 이면에 있는 철학 일반에 관한 컨셉션 자체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갔나요? 뭐 그럴 수도 있습니다. 전 그냥 인신공격으로 커뮤니티에서 쫓겨나기 바로 직전 선까지 비판을 시도했을 뿐입니다. 제 비판이 YOUN님께 도움이 되면 좋고, 안 되면 아쉬운 거고 그렇네요.

흄에 관한 논의가 "철학" 일반으로 일반화되는 것은 비약이 맞습니다. 또 많은 학자들이 형이상학적 도입물에 관해 축소주의적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근데 YOUN님은, 다른 철학자들을 비판할 때, 아마 본인이 그 어떠한 철학적 논제를 도입하지 않고서 단지 그 철학자들의 결함을 비판할 뿐이라고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이런 문장만 보더라도요. 그래서 YOUN님의 주장은, 축소주의적, 경험주의적 긍정적 논제로 이해되면 또 안 될 것 같습니다.
저희의 흄에 관한 논의가 이런 맥락에서 철학 일반으로 일반화되는 이유는, YOUN님의 지적이 "흄의 결함" 자체에 대한 구체적 비판이 아니라, "형이상학의 결함"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저절로 일반화될 수 있는 그런 성격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철학 일반이 폐기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용인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주장할 수도 있죠.
근데 제가 용인할 수 없는 것은,
"철학적 문제"에 도달하기만 해도 그것이 철학자가 오류에 빠졌다는 증거가 된다는 사고방식
입니다. 제가 이런 사고방식을 YOUN님에게 귀속하는 건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일까요? 처음에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갈수록 아닌 것 같습니다.


추가로 남깁니다.
귀류법이랑 무의미함을 보이기는 다릅니다. 모순을 지적하는 것은 대체로 귀류법입니다. 귀류법은 어떤 명제가 참이라고 가정했을 때 모순에 빠지므로 그 명제가 "거짓임"을 증명하는 방법입니다. 귀류법은 무의미함을 지적하는 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모순 문장은 무의미합니다. 근데 무의미하다고 전부 모순인 것은 아닙니다.
모순을 가지고 꼼짝 못하는 것은 모순 문장이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근데 꼼짝 못한다고 해서 다 모순인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모순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수학철학적 고찰들을 아무리 가져와 봐야 YOUN님의 주장은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예컨대 탐구 125절은 이 논의가 명백하게 수학철학적 고찰의 맥락임을 명시적으로 드러냅니다. "해소하기"는 "보여주기"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보여주기"는 "해소하기" 과정의 핵심 부분입니다. 아직도 2년 9개월 전과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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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러한 답과 물음에 대한 대답은, 제가 아닌 윤님이 하시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2) 저는 그저 논의의 맥락이 선명해지는 지금 이 시점에, 제 역할을 다 했다 생각합니다.

결국 이제부터 이 부분이 논의의 핵심이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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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외자의 입장에서 여러 생각이 드는데요. 최근 한국 논문 출판과 관련된 여러 쟁점이 논의되었기에 조심스럽습니다만, 본 문제제기는 좀더 다듬어 논문 지면상에서 전개될 수 있다면 더 생산적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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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저의 댓글 이후 비트겐슈타인 해석에 관한 상당한 토론이 있었던 걸로 보이네요. 저는 전공자가 아니라 해석에 대해선 특별히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철학과 개별 학문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일반적 문제에 관심이 있습니다. 저의 전공과 관련해 한마디 보태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비트겐슈타인(또는 YOUN님)의 우려는 개별 학문의 독립성 보장과 관련되는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일상의 실천에서 형이상학으로의 논리적 비약을 막고자 하는 것' 말입니다. 이런 경우 크게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데요. 하나는 특정한 형이상학 이론을 거부하거나 수용하지 않고 단지 사실을 기술하는 소박한 차원이겠고('개별 학문의 존립 근거는 해당 학문 내에 있다'), 하나는 개별 학문의 존립이 철학과 전혀 무관하다는 좀 더 강한 주장이 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견해가 전자라면 말씀하신 것처럼 상식적인 얘기이므로 크게 논란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위 글에서는 두 가지 입장이 다 보이는데 논조는 후자에 더 무게를 두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현재 논의에서 빠져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과학 이면에 있다고 하는 형이상학적 대상이라 할 때 정확히 누구의 형이상학을 가리키는가입니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일의적 존재론을 가정하는 것은 개별 학문의 존립 근거를 없애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개별 학문들은 단지 플라톤의 일자에 도달하기 위한 '계기'에 불과하고 따라서 그 자체로는 정당성이 없게 된다는 겁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비트겐슈타인의 문구('존재하는 것을 그대로 둔다')와 비슷하게 자신의 형이상학을 존재하는 것을 존재한다는 관점에서 탐구하는 학문이라 규정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의 형이상학은 개별 학문에 나름의 독립성을 부여하면서도 동시에 개별 학문의 형이상학에 대한 의존을 보여줍니다.

모순율을 예로 든다면, 어떤 속성이 어떤 사물에 속하면서 동시에 속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은 모든 사물에 적용됩니다. 단지 공학자는 다리를 설계할 때 모순율을 의식하지 않고 의식할 필요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모순율을 몰라도 다리를 지을 수 있습니다. 다만 철학자는 모든 사물에 공통적으로 속하는 속성이나 법칙에 관심이 있으므로 개별 학문들이 모순율을 전제로 삼는다고 지적할 수는 있다는 겁니다. 이때 모순율은 과학자나 일상인에게 숨겨진 어떤 대단히 심오한 진리가 아니라, 단지 우리가 일상에서 전제로 하지만 형식화하지 않은 공리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이 다음처럼 말했다면

건설자의 제한된 관점에서는 맞지만 철학의 일반적 관점에서는 틀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리는 특정한 재료로 만들어지고 그 재료는 모순율에 따라 단단하면서 동시에 단단하지 않거나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즉 모순율이 사물의 실재에 대응한다는 겁니다(재료에 속하는 어떤 속성과 그것의 모순항을 수치로 표현한 것이 '모순된 계산체계'일 것입니다). 재료의 상대적 고정성이 성공적인 다리 건설의 전제라는 점은 분명할 것입니다.

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을 취할 경우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개별 학문의 독립성과 개별 학문의 철학에 대한 의존을 이분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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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형이상학'이라는 용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할 것이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아요. 저는 이 용어를 대체로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하지만, 말씀하신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처럼 충분히 긍정적인 뉘앙스를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관련해서 제가 예전에 썼던 몇 가지 글들을 보탭니다. (처음 두 개는 지난 학기 기말 페이퍼였기도 해요.)

(1) 개별 학문과 형이상학의 관계에 대한 생각

(2) 제가 생각하는 긍정적 형이상학의 예시

(3) 모순율은 사물의 실재에 대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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