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을 진지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전합니다. 쓰신 내용에 대해 하나하나 대답해드리기는 어렵지만, 몇 가지 포인트를 짚고 싶네요.
(1) 무엇이 자비로운 해석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부분에서 다소 오해가 있습니다.
첫째로, (i)과 (ii)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이란 단지 "크립켄슈타인은 회의적 역설을 해결하지 못한다."일 뿐, "크립키는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자비로운 해석을 제시하지 않는다."가 아닙니다. 즉, "실제 비트겐슈타인은 회의적 역설을 해결할 수 있지만, 크립켄슈타인은 실제 비트겐슈타인보다 못하다."가 아닙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분명히 해두고 싶은 점은, 저는 논문에서 "크립키의 비트겐슈타인 해석은 최대로 자비로운 해석이 아닙니다."와 같은 주장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둘째로, 예전에 voiceright님과 논쟁할 때에도 강조한 것이지만, 저는 무엇이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정확한 해석인지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저는 제 해석이 주석적으로 가장 올바른 해석이라고 확신하지만, 저에게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철학적 의의'입니다. 크립키가 비트겐슈타인을 '자비롭게' 해석하는지 해석하지 않는지는 저에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의 해석에 어떤 의의가 있는지가 중요할 뿐입니다.
(2) 크립키의 논의는 중립적이지 않다.
저는 이 부분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의미가 성립하기 위해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 그 해석이 성립하기 위해 다시 '해석의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 그 '해석의 해석'이 성립하기 위해 다시 '해석의 해석의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이 크립키가 받아들이고 있는 가정입니다. (이 점은 해커, 베이커, 브랜덤, 맥도웰 등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크립키를 비판할 때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크립키는 이 가정을 명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명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크립키의 논의가 중립적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크립키가 잘못된 가정을 은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은, 크립키의 회의적 역설이 그만큼 교묘하게 잘못된 철학적 문제에 걸려 들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할 뿐입니다.
(3) 카벨의 주장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카벨에 대해서는 텍스트를 다시 하나하나 살펴보아야 하는 번거로운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에 댓글만으로 다 다룰 수가 없지만, 저는 다음의 구절이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카벨의 관점에서 핵심이라고 봅니다.
만일 한 문화가 자기 자신에 대해 생산한 비판이 철학이라면, 그리고 철학이 본질적으로 이러한 비판을 향한 과거의 노력을 비판함으로써 전개된다면, 비트겐슈타인의 독창성은 도덕주의적이지 않은, 즉, 자신의 주변의 잘못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롭다고 상상하는 비판자를 남겨두지 않는, 그리고 주어진 진술이 거짓 또는 잘못이라고 논증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가 아니라, 주장을 만든 사람이 그가 의미한 것을 알지 못한다고, 그가 원한 것을 진정으로 말하지 않았다고 보여줌으로써 전개되는 비판의 양태를 발전시켰다는 데 놓여 있다. (S. Cavell, Excursus on Wittgenstein’s Vision of Language”, The New Wittgenstein, eds. Crary A./Read R., London/New York: Routledge, 2000, 26 인용자 강조.)
이 부분을 voiceright님이 어떻게 이해하고 계신지가 궁금합니다. 특별히, 제가 강조 처리한 부분에서 "주장을 만든 사람이 그가 의미한 것을 알지 못"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voiceright님의 해석을 간략히라도 제시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4) 초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회의적 역설이 옳다는 주장은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
제가 보기에는, 이 지점부터 voiceright님이 무엇인가를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우선,
이렇게 적으신 것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크립키는 '초사실'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올바르게 지적했습니다. 문제는, 크립키가 '초사실의 부재'를 '회의주의의 승리'로 이해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회의주의를 다시 패배시키기 위해 '언명가능성 조건' 따위를 도입해야 한다고 잘못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5) 침묵주의와 독단주의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위의 문제 때문에 voiceright님은 맥도웰의 요지를 놓치고 있습니다. 아래 구절에서 오해가 드러납니다.
초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회의주의의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초사실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서로 다른 각각의 실천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각각 옳다고 받아들여지면 그만입니다. 이것은 문제도 아니고, 역설도 아니고, 단지 자연스러운 상황일 뿐입니다. 아주 단적인 예로, 짜장면과 짬뽕 중에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에 대한 '절대적 법칙'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딱히 ‘중화요리의 역설’ 따위에 빠지지 않는 것과도 동일합니다. 짜장면을 먹든, 짬뽕을 먹든, 아무 상관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나는 단지 이렇게 하고 있다."(PI, §217)라고만 말하면 될 뿐입니다. (즉, "나는 단지 짜장면을 먹고 있다. 내가 짜장면을 먹는데 딱히 '짜장면을 먹어야 하는 절대적 이유'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라고 말하면 될 뿐입니다.)
첨언하자면, voiceright님이 맥도웰을 바라보는 방식에는, 맥도웰에 대한 전형적인 오해의 양상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가령, <맥도웰, 테일러, 퍼트남의 거북했던 하루 >에서 퍼트남이 바로 voiceright님과 같은 방식으로 맥도웰을 읽고 있습니다.) 맥도웰은 "직접적 파악"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단지, 애초에 크립키가 말하는 상황이 '문제'나 '역설'로 받아들여질 필요가 없다고 주장할 뿐입니다. 즉,
(a) "초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크립키의 주장은 전적으로 참입니다. 맥도웰은 이 점을 결코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b) "초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역설에 빠져 있다."
라는 크립키의 주장은 틀렸습니다. 맥도웰은 이 점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저는 조만간 이 문제에 대해서 따로 논문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voiceright님뿐만 아니라, 국내외의 많은 철학자들이 저런 방식으로 맥도웰을 오독해서입니다. 제가 친하게 지내는 대학원 동기 중에서도 맥도웰에 대해 비슷한 문제제기를 한 분이 있어서, 여러 번 논쟁을 하였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예 개별 논문들을 하나하나 겨냥해서 글을 써볼까 계획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