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학으로서 사변철학: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 제1부에 나타난 사변철학의 방법

SE-ec1126d8-f979-4ba8-a1ba-add0e02fae3c

“이름이 ‘W’로 시작하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는 누구였는가?”
미국의 대다수 학식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
유감이다. 정답은 “화이트헤드”이다.
확실히, 이름이 ‘W’로 시작하는 또 다른 철학자이지만, 엄청나게 더 대담한 철학자이고,
또한, 안타깝게도, 훨씬 덜 연구된 철학자 말이다.
(Latour, 2005: 223)

Ⅰ. 들어가는 말

화이트헤드는 20세기 사상사에서 대단히 독특한 지위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당대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의 탈형이상학적 경향을 정면으로 거슬러 놀라울 만큼 대담한 형이상학을 구성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사변철학이 단순히 형이상학에 대한 기존 철학의 비판을 무시하고서 성립된 독단적 체계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변철학은 형이상학이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의미한 탐구로 남기 위해서는 해석학으로 변모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자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고는 우선 형이상학에 대해 오늘날의 철학이 제기하는 비판을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와 『철학적 탐구』를 중심으로 요약할 것이다(Ⅱ). 다음으로, 화이트헤드가 형이상학을 변호하기 위해 제시하는 논증을 『과정과 실재』 제1부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Ⅲ). 마지막으로, 사변철학이 ‘계보 만들기’와 ‘범주 만들기’라는 작업을 통해 자신이 지닌 의의를 설득력 있게 주장하고 있다고 평가할 것이다(Ⅳ).

Ⅱ. 형이상학을 해체하기

형이상학에 대한 20세기의 상반된 두 입장을 대표하는 인물로 비트겐슈타인과 화이트헤드를 떠올려 보자. 흥미롭게도, 그들은 모두 러셀을 뿌리로 삼고 있으면서도 러셀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극복하고자 하였다. 즉, 러셀의 스승이었던 화이트헤드는 논리학과 수학과 자연과학의 토대 위에 철학을 세우고자 한 러셀의 입장에 반대하여 완전히 다른 토대 위에서 형이상학을 새롭게 구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러셀의 제자였던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특정한 토대 위에 세워야 한다는 생각 자체에 반대하여 형이상학을 철저하게 해체하고자 하였다. 적어도, 러셀 이후 지난 세기 철학의 주된 흐름은 화이트헤드보다는 비트겐슈타인을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형이상학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을 『논리-철학 논고』와 『철학적 탐구』를 중심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전기철학을 대표하는 저서인 『논리-철학 논고』에서 ‘말해질 수 있는 것’과 ‘이야기할 수 없는 것’ 사이의 엄격한 구분을 제시하였다. 그는 우리의 언어를 구성하고 있는 명제를 ‘의미 있는(sinnvol)’ 명제, ‘의미를 결여한(sinnlos)’ 명제, ‘무의미한 명제(unsinn)’ 명제로 분류하였다. 즉, (a) 세계를 묘사하는 요소 명제와 요소 명제의 진리 함수는 의미 있는 명제에 해당한다. 이러한 명제는 주로 자연과학의 경험적 탐구를 통해 참/거짓이 확정될 수 있다. (b) 세계의 한계를 제한하고 있는 동어반복적 명제와 모순적 명제는 의미를 결여한 명제에 해당한다. 이러한 명제는 형식논리학의 선험적 탐구를 통해 항상 참이거나 항상 거짓으로 확정된다. (c) 세계의 한계를 넘어가고자 하는 명제는 무의미한 명제에 해당한다. 이러한 명제는 아무런 진리치도 지니지 않는다. 따라서 자연과학의 경험적 탐구와 형식논리학의 선험적 탐구를 벗어나 있는 언어는 제대로 된 언어가 아니다. 가령, 세계의 한계 바깥에 대한 형이상학의 탐구는 단지 공허하기만 할 뿐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야기할 수 없는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Wittgenstein, 2006: 15) 세계의 실재, 본질, 토대 따위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시도는 단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후기철학을 대표하는 저서인 『철학적 탐구』에서 언어가 우리의 일상에서 사용되는 방식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그는 언어의 기능을 지칭만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생각에 반대하였다. 즉, 언어는 지칭 이외에도 다양한 기능을 통해 의미를 지닌다. 지칭은 언어가 의미를 지니는 한 가지 방식일 뿐이다. 오히려 지칭이 가능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언어가 일상의 맥락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이미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가령, 호두 두 개를 가리키면서 “저것을 ‘둘’이라고 부른다.”라고 말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순수한 지칭만으로는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이 ‘둘’인지가 확정되지 않는다. ‘둘’은 두 개의 호두 전체에 부여된 하나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두 개의 호두가 지닌 공통의 색깔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두 개의 호두가 지닌 공통의 모양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말하자면, 지칭적 정의는 어떤 경우든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Wittgenstein, 2016: §28) 따라서 언어가 무엇을 지칭하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방식으로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특별히, 언어와 세계 사이에 지칭을 무비판적으로 가정한 채 성립한 전통적 형이상학은 허구적 기획으로 폭로되고 만다. “우리가 하는 일은 낱말들을 그 형이상학적 쓰임에서 그 일상적 쓰임으로 되돌리는 것이다.”(Wittgenstein, 2016: §116) 언어의 의미는 세계의 실재, 본질, 토대 따위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와 『철학적 탐구』는 모두 20세기 철학의 탈형이상학 경향을 촉발시킨 저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물론, 두 저작이 지향한 철학적 목표나 두 저작이 남긴 철학사적 흔적은 상당히 다르다. 『논리-철학 논고』는 카르납, 슐리크, 에이어 등으로 대표되는 논리실증주의로 귀결되었고, 『철학적 탐구』는 데이비슨, 퍼트남, 로티 등으로 대표되는 후기 분석철학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리실증주의와 후기 분석철학은 서로 입장은 다르더라도 모두 형이상학에 반대한다는 점에서만큼은 완전히 일치한다. 논리실증주의는 자연과학과 형식논리학 이외의 진리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을 인정하지 않고, 후기 분석철학은 실재에 대한 완벽한 표상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을 인정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 이후의 철학은 논리실증주의와 후기 분석철학 중에서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든지 형이상학을 구성하려는 기획을 더 이상 순진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된 것이다.

Ⅲ. 형이상학을 변호하기

여기서 우리는 화이트헤드의 사변철학이 과연 형이상학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을 견뎌낼 만한지에 대해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사변철학은 우주 전체를 설명하는 이론을 제시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가장 전형적 형태의 형이상학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화이트헤드가 ‘사변철학(speculative philosophy)’이라는 이름으로 구상하는 체계는 대단히 야심적이다. “사변철학이란 우리의 경험의 모든 요소를 해석해낼 수 있는, 일반적 관념들의 정합적이고 논리적이며 필연적인 체계를 축조하려는 시도이다.”(Whitehead, 1991: 49) 즉, 모든 경험에 ‘적용 가능(appliable)’하고, 모든 경험을 다루기에 ‘충분(adequate)’하며, 모든 기초적 관념 사이의 관계가 ‘정합적(coherent)’이고, 모든 기초적 관념 사이의 결합이 ‘논리적(logical)’인, 세계에 대한 해석(interpretation)을 구성하는 것이 바로 사변철학의 목표이다. 합리주의에 근거하여 세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해보고자 하는 이러한 작업이 얼핏 대단히 허황된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은 화이트헤드 역시 자각하고 있다. 애초에 『과정과 실재』 제1부는 사변철학에 흔히 제기되는 비판을 명시한다.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사변철학은 그것이 지나치게 야심적이라 하여 지금까지 비난을 받아왔다. 합리주의가 특수 과학의 한계 안에서 전진을 이루게 하는 방법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제한된 성공이, 사물의 보편적인 본성을 표현하기 위하 야심적인 도식을 구성하려는 시도를 고취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져 왔다. (Whitehead, 1991: 66)

그러나 화이트헤드가 자신의 방법에 대한 아무런 성찰도 없이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미리부터 확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우리의 경험이 이미 그 자체로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즉, 경험이란 결코 순수한 진공 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각각의 관점, 입장, 태도, 맥락 등을 바탕으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파악한다. “[…] 일정한 체계의 한 요소로서 해석되지 않고서도 이해될 수 있는 맹목적이고 자족적인 사태란 존재하지 않는다.”(Whitehead, 1991: 67-68) 여기서 우리가 경험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수많은 관념들은 서로 긴밀하게 얽혀 하나의 거대한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체계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 근본적 층위에서 규제하는 ‘형이상학적 해석’이다. 우리가 명시적으로 수행하는 형이상학적 탐구에 이전에도 우리가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는 형이상학적 해석이 이미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따라서 직접적이고 맹목적인 사실을 이해하자면, 그 사실을 그것과 어떤 체계적인 관계를 갖는 세계에 있어서의 한 항목으로 보는 형이상학적 해석이 필요하다. 사상이 무대에 등장하면 실천상의 문제로서의 해석을 찾게 된다. 철학은 해석을 창시하지 않는다. 합리주의적 도식을 위한 철학의 탐구는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이용하게 되는 해석에 대한 보다 완전한 비판을 위한 탐구이며, 보다 완전한 정당화를 위한 탐구이다. (Whitehead, 1991: 68)

따라서 화이트헤드의 사변철학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담긴 형이상학적 해석을 명료하게 재구성하여 비판적으로 성찰하고자 한다. 사변철학은 사태의 특정한 부분에 대한 선택적 강조(selective emphasis)와 세계의 총체적 면모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metaphysical interpretation)이 경험의 과정에서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철학의 임무는 그러한 선택으로 말미암아 불분명하게 되어 버린 전체를 회복하는 데 있다. 철학은, 높은 차원의 감성적 경험에서 가라앉아 버리는 것, 그리고 의식 그 자체의 최초의 작용에 의해서 더욱 깊숙이 가라앉아 버리게 되는 것을 합리적 경험 속에다 복원시킨다.”(Whitehead, 1991: 68-69) 여기서 사변철학이 왜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가 드러난다. 즉,

(1) 사변철학은 형이상학에 대해 논리실증주의가 제기하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다. 애초에 사변철학이 탐구하고자 하는 대상이란 세계의 한계 너머에 존재하는 초자연적이고 신비적인 질서가 아니다.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형이상학적 해석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어 평가해 보는 작업이 사변철학에서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으로 수행하고자 하는 활동일 뿐이다. 이러한 작업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추론적으로 도출되는 결과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논리실증주의가 상정하는 관점에 비추어보더라도 유의미하다. 오히려 논리실증주의가 ‘의미 있는’ 명제, ‘의미를 결여한’ 명제, ‘무의미한’ 명제를 구분하기 위해 받아들이고 있는 의미론적 기준이야 말로 사변철학에게는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형이상학적 해석과 분리된 직접적이고 맹목적인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사변철학이 제시하는 중요한 통찰이다. 따라서 ‘의미 있는’ 명제, ‘의미를 결여한’ 명제, ‘무의미한’ 명제라는 구분조차도 형이상학적 해석과 무관할 수 없다. 실제로, 포퍼, 콰인, 셀라스, 데이비슨 등 이후의 수많은 철학자들은 논리실중주의가 ‘검증주의’, ‘분석/종합의 이분법’, ‘환원주의’, ‘도식/내용의 이분법’, ‘소여의 신화’ 등 수많은 도그마를 무비판적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였다. 논리실증주의는 형이상학적 해석에 의존한 상태에서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자기모순을 범하였다는 것이다.

(2) 사변철학은 형이상학에 대해 후기 분석철학이 제기하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다. 경험이 순수한 진공 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후기 분석철학과 사변철학에서 공통적으로 지적된다. 두 입장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지칭하고자 하는 시도만으로는 결코 형이상학이 정당하게 성립할 수 없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그들 사이의 차이는 이러한 통찰을 발전시키는 방향에 있을 뿐이다. 즉, 후기 분석철학은 언어에 대한 해석이 수없이 다양하다는 사실로부터 전통적 형이상학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러한 입장은 어떠한 해석도 언어의 의미를 충분히 해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나 사변철학은 언어에 대한 해석이 수없이 다양하다는 사실로부터 새로운 형이상학을 구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러한 입장은 우리가 얼마든지 새로운 해석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따라서 후기 분석철학과 사변철학은 서로 대립할 필요가 없다. 후기 분석철학이 비판하는 ‘형이상학’과 사변철학이 옹호하는 ‘형이상학’이란 실제로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자 하는 시도가 비판받아야 한다는 사실로부터 세계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려내고자 하는 시도까지 비판받아야 한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사변철학은 형이상학에 대한 후기 분석철학의 비판 이후에도 여전히 자기 자신을 유의미한 형이상학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Ⅳ. 형이상학을 구성하기

화이트헤드가 사변철학을 통해 도달하고자 한 형이상학이란 흔히 ‘유기체의 철학(philosophy of organism)’과 ‘과정철학(process philosophy)’이라고 일컬어진다. 여기서 ‘사변철학’은 형이상학의 형식을 표현하는 용어이고, ‘유기체의 철학’과 ‘과정 철학’은 형이상학의 내용을 표현하는 용어라고 이해될 수 있다. 즉, 우리의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형이상학적 해석을 드러내는 작업이 사변철학이다. 이러한 작업은 그동안 우리가 경험의 과정에서 어떠한 우주론(cosmology)을 상정하고 있었는지를 지적하고, 그 우주론이 어떠한 문제를 지니고 있는지를 비판하며, 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어떠한 대안적 우주론이 새롭게 구성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지를 논증한다. ‘유기체의 철학’과 ‘과정 철학’이란 바로 사변철학을 통해 제시된 새로운 우주론을 표현하는 이름이다. 우리는 이제 화이트헤드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방법에 근거하여 자신의 새로운 우주론을 주장하고 있는지를 ‘계보 만들기’(Ⅳ.1.)와 ‘범주 만들기’(Ⅳ.2.)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것이다.

1. 계보 만들기

화이트헤드는 비트겐슈타인과 달리 철학사의 중요성을 대단히 강조한다. 그는 『과정과 실재』 서문의 첫 문장에서부터 자신이 놓여 있는 철학사의 계보를 명시한다. “이 강의는,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되어 흄에게서 마감되고 있는 철학 사상의 국면으로의 회귀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Whitehead, 1991: 39) 철학사에 대한 이러한 고찰은 과정철학을 성립시키는 중요한 방법이다. 철학자들이 이전까지 제시한 우주론을 비교와 대조의 대상으로 삼아 자신이 새롭게 제시한 우주론이 어떠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지를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것이 과정철학이 사용하는 설명의 전략이다. 따라서 과정철학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철학자들부터 베르그송, 제임스, 듀이 등 화이트헤드 당대의 현대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와 인물을 논평하고자 한다.

과정철학이 논쟁의 상대자로 삼고 있는 형이상학은 ‘실체철학(substance philosophy)’이라고 요약될 수 있다. 실체철학은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 요소가 사물(thing)이라고 주장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마지막에 이르러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사물에 이르게 되고, 사물은 각각의 속성을 통해 개별화되며, 사물과 속성의 관계는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통해 언어 속에서 표상될 수 있다는 생각 등이 실체철학을 지탱하고 있는 중요한 전제이다. 세계를 실체에 근거하여 파악하고자 하는 이러한 사유는 크게 아홉 가지 ‘널리 보급된 사고 습성(prevalent habits of thought)’에 근거하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과정철학이 비판하고자 하는 ‘널리 보급된 사고 습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ⅰ) 사변철학에 대한 불신.
(ⅱ) 명제의 충분한 표현으로서의 언어에 대한 신뢰.
(ⅲ) 능력 심리학을 함의하고, 또 그것에 함의되어 있는 철학적 사고의 양식.
(ⅳ) 주어-술어라는 표현 형식.
(ⅴ) 지각에 관한 감각주의적 학설.
(ⅵ) 공허한 현실태의 학설.
(ⅶ) 순수한 주관적 경험으로부터 이론적 구성물로서의 객관적 세계에 대한 칸트적 학설.
(ⅷ) 귀류법에 의한 독단적 연역.
(ⅸ) 논리적 모순이, 선행하는 오류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지적할 수 있다는 신념.

(Whitehead, 1991: 42-43)

화이트헤드는 사물의 질서를 바탕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입장을 극복하기 위해 철학사의 계보를 추적하여 새로운 형이상학을 구성할 잠재력을 지닌 사조를 모색한다. 그는 우선 인식론적으로는 데카르트, 뉴턴, 로크, 흄, 칸트를 자신의 철학을 위한 선구자로 제시한다. “이들은 모두 경험의 토대를 제시하는 데 있어 제각기 어느 한쪽에 편중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 놓고 보면 그 이후의 철학 발전을 지배하는 일반적 토대를 제시해 주고 있다”(Whitehead, 1991: 40) 이들을 통해 성립한 경험주의와 합리주의 인식론은 우리가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여 형이상학적 해석에 도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존재론적으로는 라이프니츠, 헤겔, 제임스, 베르그송, 듀이 등을 중요하게 참고한다. 이들은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에서 등장한 인물들이지만, 모두 실체를 전제하지 않고서 세계를 이해할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들이 구상한 철학은 세계를 개별적, 고정적, 독립적인 ‘사물’이 아니라 총체적, 유동적, 상호적인 ‘관계’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사 속 다양한 사유의 결합을 통해 구성된 과정철학은 실체철학과는 명확히 구별되는 특징을 지닌다. 레셔는 실체철학과 과정철학의 특징을 다음과 같은 용어의 대비를 통해 강조한다.

과정철학은 이러한 방식으로 실체철학과 구별되는 대안적 계보를 구성하여 철학사를 새롭게 해석하고자 한다. 우리는 과정철학이 시도하는 계보 만들기가 바로 오늘날 형이상학이 지향해야 하는 탐구를 잘 보여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즉, 언어를 통해 세계의 실재, 본질, 토대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자 하는 전통적 형이상학은 우리 시대에 더 이상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어떠한 철학자도 자신의 체계가 유일무이한 진리를 담고 있다고 독단적으로 주장할 권한이 없다. 따라서 형이상학이 무시간적이고, 변하지 않고, 고정된 진리를 발견해내야 한다는 전제가 무너진 상황에서는 세계가 무엇인지가 철학사를 통해서만 이야기될 수 있는 주제가 된다. 철학자는 이제 철학사 속에 주어진 설득력 있는 형이상학적 해석을 성찰하는 과정에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새로운 시대와 문화에 적합한 형이상학적 해석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고안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철학자가 추구해야 할 목표란 세계에 대한 영원한 형이상학적 해석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새로운 형이상학적 해석인 것이다.

2. 범주 만들기

화이트헤드는 비트겐슈타인처럼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자신의 철학이 새로운 언어를 고안하는 작업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모든 학문은 저마다 자신의 도구를 고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의 필수적 도구는 언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은 물질 과학에서 기존의 장치를 고쳐 설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어를 고쳐 설계한다.”(Whitehead, 1991: 62) 여기서 언어와 형이상학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고 강조된다. 즉, 우리가 받아들이는 형이상학적 해석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언어의 범위를 결정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형이상학적 해석의 범위를 결정한다. 언어의 의미는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 없이는 확정되지 않고, 형이상학적 해석의 의미는 언어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과정철학은 실체철학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형이상학을 도출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구상하고자 한다. 특별히, 과정철학이 언어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범주(category)’에 대한 논의로 채워져 있는 『과정과 실재』 제1부에서 잘 드러난다. 즉, 범주는 우리가 세계를 해석하기 위해 의존하는 가장 기본적인 틀이다. 어떠한 범주를 사용하여 세계를 바라보는지에 따라 우리가 수행하는 형이상학적 해석의 폭과 깊이가 크게 달라진다. 실체철학 역시 ‘실체’라는 범주를 중심으로 삼아 세계를 해석한 결과이다. 실체철학을 극복할 대안적 형이상학을 성립시키는 작업이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실체’라는 범주를 대체할 대안적 범주를 찾는 작업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다. 화이트헤드는 과정철학이 전제하고자 하는 새로운 범주를 크게 네 가지로 묶어서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Ⅰ. 궁극자(the Ultimate)의 범주
Ⅱ. 현존(Existence)의 범주
Ⅲ. 설명(Explanation)의 범주
Ⅳ. 범주적 제약(Categoreal Obligation)

(Whitehead, 1991: 77)

네 가지 범주 아래에는 다시 세분화된 수많은 범주가 포함된다. 우리가 그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현존의 범주에 포함되는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 ‘파악(prehension)’, ‘결합체(nexus)’와 설명의 범주에 포함되는 ‘존재론적 원리(ontological principle)’이다. 이들은 과정철학이 제시하는 우주론의 전체적 그림을 보여준다. 즉,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는 아무런 위계도 지니고 있지 않은 복수의 ‘현실적 존재’ 혹은 ‘현실적 계기’이다. 현실적 존재는 서로 ‘파악’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결합체’를 생성한다. 여기서 현실적 존재가 서로 결합하는 근거란 오직 하나의 현실적 존재와 다른 현실적 존재 사이의 상호적 관계만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사유가 바로 ‘존재론적 원리’이다. 세계는 수많은 현실적 존재가 서로 결합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무한한 생성과 소멸의 흐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 강의의 적극적인 학설은, 생성한다는 것(the becoming), 존재한다는 것(the being), ‘현실적 존재’의 관계성(the relatedness of actual entities)이라는 것을 문제 삼는다. […] 이 강의에서는 ‘성질’보다 ‘관계성’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모든 관계성은 그 기초를 현실태의 관계성에 두고 있다. 이러한 관계성은 산 자가 죽은 자를 전유하는 것, 다시 말하면 ‘객체적 불멸성(objective immortality)’과 전적으로 관계된다. 이 불멸성에 의하여, 자기 자신의 살아 있는 직접성을 잃어버린 존재자는 다른 생성의 살아 있는 직접성에 있어서의 실재적(real) 구성요소가 된다. 이는 세계의 창조적 전진(creative advancement of the world)이란 굽힐 수 없는 엄연한 사실(stubborn fact)을 공동으로 구성하고 있는 사물들의 생성, 소멸, 또한 객체적 불멸성이라는 학설이다. (Whitehead, 1991: 43-44 번역 수정)

따라서 과정철학이 자신의 범주를 통해 해석하는 세계의 모습은 실체철학과는 크게 다르다. 세계 속에는 고정된 실체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적 존재조차 다른 현실적 존재와 관계를 맺는 순간마다 얼마든지 생성되고 소멸될 수 있는 ‘계기(occasion)’일 뿐이다. 세계 전체는 이제 일종의 거대한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현실 세계(actual world)는 과정(process)이라는 것. 그리고 과정은 현실적 존재의 생성(becoming)이라는 것.”(Whitehead, 1991: 80)이야 말로 과정철학이 실체철학에 반대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새로운 우주론이다. 우리는 과정철학과 실체철학 사이의 이러한 차이를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그들이 사용하는 주요 범주를 더욱 직접적으로 대비시킬 수도 있다. 가령, 레셔는 두 철학에서 근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범주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과정철학은 이러한 방식으로 실체철학과는 구별되는 대안적 범주를 만들어내어 세계를 새롭게 해석하고자 한다. 우리는 과정철학이 시도하는 범주 만들기 역시 오늘날 형이상학이 지향해야 하는 탐구를 잘 보여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즉, 형이상학이 세계를 완벽한 언어 속에 표상한다는 생각은 거부되어야 한다. 언어의 의미는 세계에 대한 지시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우리 시대에는 널리 받아들여진다. 오히려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는지는 우리가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의존한다. 우리가 실재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는 우리가 범주를 어떻게 고안하는지에 의존한다. 이제 형이상학은 자신의 탐구가 새로운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려내는 활동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철학자가 수행하는 작업이란 바로 범주, 개념, 도식의 구상이다. 철학자는 사물 자체를 발견하는 사람이 아니라 언어를 발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Ⅴ. 나가는 말

따라서 화이트헤드의 사변철학은 두 가지 의미에서 일종의 해석학(hermeneutics)이다. 우리는 ‘존재론적 해석학’과 ‘방법론적 해석학’이라는 용어를 통해 사변철학을 해석학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즉, 사변철학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형이상학적 해석을 전제한 상태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존재론적 해석학이다. 존재하는 어떠한 것도 해석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이 존재론적 해석학으로서 사변철학이 강조하고자 하는 통찰이다. 또한 사변철학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위해 구체적 해석의 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방법론적 해석학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방법론적 해석학으로서 사변철학이 제시하고자 하는 주장이다. 두 해석학 중 어느 쪽도 비트겐슈타인 이후에 제기된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과 상충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해석학으로서 사변철학은 탈형이상학적 경향이 만연한 시대에 어떻게 형이상학이 다시 수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적 대답이다.​

참고문헌

Latour, B. (2005) “What Is Given in Experience?”, Boundary, Vol. 2(32), 223-237.

Rescher, N. (1996) Process Metaphysics: An Introduction to Process Philosophy,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Whitehead, A. N. (1991) 『과정과 실재: 유기체적 세계관의 구상』, 오영환 옮김, 민음사.

Wittgenstein, L. (2006) 『논리-철학 논고』, 이영철 옮김, 책세상.

Wittgenstein, L. (2016) 『철학적 탐구』, 이승종 옮김, 아카넷.

6개의 좋아요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에 대해서 간략하지만 근본적인 의도를 쉽게 설명했네요. 보통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은 유명한 후학들이 없어서 비주류 컬트가 된 느낌인데, 저는 학부시절에 화이트헤드의
생각이 현대 과학의 발전을 반영한다고 하는 후기 분석철학보다 더 소구력이 높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과정과 실재는 플라톤과 존로크, 칸트 등에 정통하지 않으면 이해가 안가는 책이다 싶었습니다. 플라톤이나 로크가 이런 말을 했나 싶은 구절들이 너무 많더군요.

2개의 좋아요

감사합니다! 그래도 요즘은 대륙철학에서 화이트헤드에 대해 조금씩 관심이 늘어나는 듯하네요. 위에 인용된 브뤼노 라투르만 보더라도, 오늘날 대륙철학 진영의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잖아요. 사실 저는 신유물론 같은 오늘날 대륙철학의 형이상학적 경향에 다소 불만이 있기도 하지만, 이 사조들이 화이트헤드나, 베르크손이나, 들뢰즈 등을 사용하여 실천적 문제들에 접근하는 방식은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어요.

2개의 좋아요

서강올빼미에 가입해서 후배님들 글을 읽다 보면, 8~90년대 제가 학부를 다니던 시절과는 비교가 어려울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구나 싶습니다. 올라온 글들을 읽어보면 정말 경탄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2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