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주의적 직관과 객관주의적 직관

(1) 지시체 불가투시성(콰인), 귀납의 새로운 문제(굿맨), 모형 이론적 논증(퍼트남), 규칙 따르기에 대한 회의적 역설(크립켄슈타인), 게리멘더링 논증(브랜덤)은, 물론 서로 다른 맥락에서 등장하였고 세부적인 내용에서도 차이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일치하는 논의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주어진 사태 S에 대해서 무한한 수의 해석 I가 가능하다는 것이죠. 가령,

1, 2, 3, 4, 5 …

위의 수열을 주어진 사태 S라고 해봅시다. 이 수열이 어떤 수열의 일부분인지에 대해서는 무한하게 많은 해석이 가능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수열이

(I1) 1, 2, 3, 4, 5, 6, 7, 8 ... n

같은 자연수 수열의 일부분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이 수열이

(I2) 1, 2, 3, 4, 5, 4, 3, 2, 1, 2, 3, 4, 5, 4, 3, …

처럼 1부터 5까지 1씩 증가했다가 1씩 감소하기를 반복하는 수열의 일부분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죠. 또 다른 사람은

(I3) 1, 2, 3, 4, 5, 5, 4, 3, 2, 1, 1, 2, 3, 4, 5, 5, 4, 3, …

라는 수열의 일부분으로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또 다른 사람은

(I4) 1, 2, 3, 4, 5, 1, 2, 3, 4, 5, 1, 2, 3, 4, 5, …

라는 수열의 일부분으로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이런 식으로, 우리는 S를 수없이 많은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2) 앞서 언급한 콰인, 굿맨, 퍼트남, 크립켄슈타인, 브랜덤은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으로부터 다소 상대주의적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주어진 사태에 대한 해석은 무한하게 다양할 수 있고, 그 모든 해석이 나름대로 옳을 수 있는 것이니, 결국 주어진 사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단 하나의 '정답'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어느 해석을 받아들일 것인지는 각자의 관점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거죠. (여기서 '상대주의'라는 용어는 단순히 '해석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입장' 정도의 느슨한 의미로만 이해되면 좋겠습니다.) 즉,

주어진 사태에 대한 무한한 해석이 가능하다면, 단 하나의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주어진 사태에 대한 무한한 해석이 가능하다.
─────────────────────────────
따라서 단 하나의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3) 그런데 암스트롱이나 루이스 같은 형이상학자는 동일한 첫 번째 전제로부터 완전히 반대의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어느 누구라도 의심할 수 없는 일종의 '무어적 사실(Moorean fact)'이 존재한다는 직관이 이들에게는 대단히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가령, "빨간 공은 파란 공보다는 분홍 공과 더 유사하다."와 같은 것들이 가장 기본적인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을 통해 무엇이 '정답'인지를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이 부정되어야 한다는 거죠. 즉,

주어진 사태에 대한 무한한 해석이 가능하다면, 단 하나의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 하나의 정답은 존재한다.
─────────────────────────────
따라서 주어진 사태에 대한 무한한 해석은 가능하지 않다.

(4) 저는 두 입장이 결국 직관의 차이에서 근거한다고 봅니다. 상대주의적 직관이 강한 철학자들은 단 하나의 '정답'이 존재한다는 우리의 일상적 생각을 부정하는 결론을 내리고, 객관주의적 직관이 강한 철학자들은 '무한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논제를 부정하는 결론을 내리는 거죠. 제 자신은 상대주의적 직관이 강하지만, 저는 (적어도 이 문제에서 두 직관을 병렬적으로 놓고 비교할 경우에는) 어느 쪽 직관이 더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은 어느 쪽 직관이 더 강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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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는 전자와 후자가 혼합된 입장에 가깝다 생각합니다.

(2) 직관이 자명한 이상, 이는 일종의 "부정 불가능한" 강도를 가진 믿음이라 볼 수 있을듯합니다. 이 믿음에 대해 모두가 공통된 답을 가질 수는 없다는 점에서 전자는 옳지만, 적어도 이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 믿음만이 자명하다는 점에서 후자도 옳다 생각합니다. (적어도 모순된 명제를 동시에 강한 강도로 믿는건, 제 입장에서는 말이 안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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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는 입장의 차이가 직관의 차이라기 보다는 선입견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어진 사태 S에 대해서 무한한 수의 해석 I가 가능하다는 사실은 각자의 선입견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1. 따라서 단 하나의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상대주의적인 선입견을 가지는 것이고

  2. 따라서 주어진 사태에 대한 무한한 해석은 가능하지 않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객관주의적인 선입견을 가지는 것이죠.

(2) 저에게는 주어진 사태 S에 대해서 무한한 수의 해석 I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다소 공허한 정규성 을 함축한다고 봅니다. 통계학에서는 무한 원숭이 정리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무한 원숭이 정리는 수학의 무한성에 기초한 정리로, 타자기 앞에 앉아서 마음대로 쳐대는 원숭이가 프랑스 국립 박물관의 모든 책을 언젠가는 쳐 낼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는 정리입니다. 물론 무한 원숭이 정리가 내포하는 바는 일종의 절대주의지만, 제가 무한히 다양한 해석가능성에서 무한 원숭이 정리를 떠올리는 이유는 제가 어느정도 절대주의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원숭이가 읽을 수 있는 책을 쳐낼 가능성은 확실해 보이지만, 거의 대다수의 책은 사람이 읽을만한게 아닐 것입니다. (여러 수학적 가정을 전제했을때, 원숭이가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칠 확률은 {\displaystyle 3.2607...\times 10^{-37197177}}입니다.)

(3) 저는 그래서 하나의 사실, 그리고 그것을 포함하는 하나의 개념 혹은 범주가 아무리 무한한 해석가능성을 가진다고 해도 그게 나타낼 수 있는 최대치, 혹은 어떤 유용성이 제약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의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양한 관점과 전략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 우리는 (적어도 이 게임에서) 더 나은 관점과 아닌 관점을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운에 따라 결과가 갈리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자원으로 최선의 선택을 해야하는 롤토체스같은 게임들은 삶의 판단이 가지는 의미에 어떤 이해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아직 우리의 지식이 파악하지 못하거나, 최대치까지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은 다른 개념들을 탐구하고 응용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낙관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4) 저의 이러한 생각은 굉장히 직관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검증할 수 없음에도, 저는 직관을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선입견을 통해 활용하는게 우리가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모든 유산들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떤 논거나 추론은 만들어낸 결과들을 사후검증적으로 해석할 뿐이라고 여깁니다. (경영학의 "디커플링"이라는 개념과 사후검증적인 해석은 전략적으로 굉장히 연관되어 있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3)의 맥락에서, 어떤 정규성을 가진 명제적인 개념보다 검증가능성때문에 과소평가된 직관적인 지식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맥도웰의 서술은 제가 주목하는 종류의 지식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테니스 선수는 특정 상대를 상대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한 전반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경기 중 어느 시점에서든 그녀가 의도적으로 무엇을 하는지, 어쩌면 드롭샷을 시도하는 것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어떤 사전 계획에서도 제공할 수 없다. 대신에, 그녀의 행동은 순간적인 열기에, 상황의 세부 사항들, 즉 그녀의 위치, 공의 튀어오름, 상대방의 위치 등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 될 것이다. 한 가지 마음가짐에서 우리는 그러한 활동이 경솔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사고방식에서 우리는 그러한 숙련된 행동들을 볼 수 있다. -실용주의와 행위가 가진 의도-

(5) 선생님께서 다루신 두가지 구분에 따라 저를 판단해보면, 저는 상대주의적 직관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상대주의적 직관이 내놓는 결론은 저에게 거의 사실에 가깝습니다. 그에 비해 객관주의적 직관이 내놓는 결론은 불필요한 문제만 더 만들어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저는 개념주의적인 직관이 가장 강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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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와 해석"이 "문장과 해석"이라는 메타논리적 층위의 얘기랑 약간 섞여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조금 드네요. 퍼트남과 콰인은 아마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싶습니다. 굿맨도 명시적으로 저게 문제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저런 내용을 시사하고 있는 측면이 있죠.

약간 배경적인 얘기 하나를 소개해드리자면, 제가 알기론 콰인이나 퍼트남이 의존하고 있는 메타논리적 정리는 뢰벤하임-스콜렘 정리입니다. 정확히는 아마 스콜렘 패러독스로부터 함축되는 결론인 것으로 아는데, 간단히 얘기하면 1차 술어 논리 문장의 의도된 해석은 논리학 안에서는 결정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건 1차 술어 논리에서 성립하는 것이지 2차 술어 논리 이상의 논리학에서는 체계에 따라 성립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자연 언어에 대해서도 무한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논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해놨을 수도 있겠네요 ㅋㅋ

루이스가 Moorean Fact를 철학적 자원으로 사용한다는 사실로부터 정말 저런 논증에 가담(commit)하고 있다는 게 따라 나오나요? 루이스는 철학에서 하나의 정답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은 없는 걸로 압니다. 오히려 철학적 작업은 상식적인 믿음들과 이론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과정이라고 이야기 하죠. 다양한 해석이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을 당연히 허용합니다. 다만 "이론 간의 우열을 가릴 수 없다" 라든지 "무엇이 참인지는 우리에게 달렸다" 라고 주장하진 않겠죠. 참고하시기에 좋은 인용문을 하나 달아봅니다.

우리의 "직관"(intuition)은 단순히 의견(opinion)일 뿐이다. 우리의 철학적 이론도 의견이다. 어떤 것들은 상식적이고, 어떤 것들은 매우 복잡하다. 어떤 것들은 구체적이고, 어떤 것들은 일반적이다. 어떤 것들은 조금 더 강하게 지지되고 어떤 것들은 덜 강하게 지지된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의견이고 철학자들의 합리적인 목표는 그것들을 균형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 만일 우리가 일상적인 상식을 잃어버린다면 우리의 잘못은 우리 앞에 놓인 증거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매우 부적절한 균형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공식적인 이론이 교실 밖에서는 하지 않을 수 없는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실제로는 전혀 균형에 이르지 않은 것이다.
(...) 이론을 잘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일단 주어지고 나면, 철학은 의견의 문제이다(philosophy is a matter of opinion). 그렇다면 이것이 얻어져야 할 진리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참은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이고 서로 다른 사람이 서로 다른 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만일 당신이 신은 없다고 딱 잘라 말하고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신들이 있지만 우리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우리 둘 중 어느 누구도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각자의 의견들을 가능한 한 가장 조심스럽게, 모든 논증, 구분, 반례들을 검토해 본 후에 그런 의견에 도달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우리 둘 중 하나는 사실에 있어서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누가 틀렸는지는 무엇이 있는지에 달렸다(Which one is wrong depends on what there is).

객관주의적 직관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루이스를 어떤 입장을 취한다고 할지 달라질 수는 있겠으나, 적어도 제가 읽어온 바에 입각하면 루이스가 저런 방식으로 받아들일 것 같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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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수업에서 루이스의 "New Work for a Theory of Universals"를 읽었는데, 이 논문에 있는 'The Content of Language and Thought'이라는 장에서 퍼트남의 모형 이론적 논증에 대한 비판이 나온 걸 참고했어요. 루이스는 퍼트남의 논증이 "지시에 대한 급진적 비규정성"으로 귀결된다고 하면서, 우리의 언어가 규정적 해석을 지닌다고 주장하기 위해 자연적 속성에 호소하더라고요. 무엇이 적격한 해석(eligible interpretation)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는 그 해석이 자연적 속성을 공유하는 대상을 지시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근거해야 한다면서요. 이 부분을 읽고서 루이스가 '무한한 해석'에 반대하는 객관주의적 직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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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루이스 논문을 읽어본 게 이번이 처음이라, 솔직히 그다지 확신은 없지만, '무한한 해석'의 문제에 관한 루이스의 입장을 이렇게 정리하면 어떨까요?

(퍼트남처럼)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입장이 옳다면, '정답'의 존재가 부정된다.
'정답'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정답'이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될 수 없다.
─────────────────────────────
따라서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입장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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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의 쓰임새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판을 깔아두는게 유용할 것 같습니다. 라이헨바흐의 정당화-발견의 맥락 구분을 살짝 베껴서 논해보자면

  1. 철학 논변에서 전제를 입증하는 증거로서의 직관
  2. 철학자의 입장과 세계관을 구성하는 배경으로서의 직관

을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위 사례들에서 말씀해주신 "상대주의적 직관"과 "객관주의적 직관"이 직접적인 증거로서의 역할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Racoon 님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주어진 사태에 대한 무한한 해석이 가능하다.

는 전제는 그 자체로 '직관적이다'는 이유로 옹호되기 보다는 메타논리 정리에 의존하는 것 같습니다.

역으로 (암스트롱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루이스 또한

단 하나의 정답은 존재한다.

를 그 자체로 '직관적이다'는 이유로 받아들이는게 아닌, 여러 철학적 난제들과 여러 이론적 덕목을 고려하여 최선의 설명을 향한 추론의 귀결로서 받아들인다는 방법론을 명시화하고 있는 듯 합니다.

즉 양 측 모두 적어도 논변을 제시하는데 있어서는 "상대주의적 직관"과 "객관주의적 직관"를 대놓고 쓰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런데 그 논변 뒤에 있는 꿍꿍이가 뭐냐?라고 묻는 것 역시 충분히 가능한, 나아가 철학사가라면 마땅히 물어야할 질문 같습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직관'에 대한 물음은 철학자의 저의/입장/세계관을 구성하는 요소에 대한 물음으로 전환되는 것 같습니다.

흔히들 업계에서

타들어가는 오세아니아 햇빛 아래서 자라온 호주 철학자들은 체험적으로 반실재론자가 될 수 없다.

는 농담아닌 농담이 오고가곤 하죠. 전 이게 '철학자의 세계관'이라는 측면에서 충분히 그럴듯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지점에서 "상대주의적 직관"과 "객관주의적 직관"은 충분히 그럴듯한 후보 혹은 분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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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 wildbuny님의 생각이 저랑 거의 비슷한 것 같습니다 ㅎㅎ

저 업계의 농담의 출처는 Michael Levitt이 쓴 책 서문에 나오는 농담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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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는 생각인데, 칸트의 '행위의 준칙이 보편화가능하도록 행하라'가 미래 행위에 대한 지침이 아니라 과거 행위에 대한 도덕적 평가의 기준으로 제시됐다면, 규칙의 미결정성이 반대논증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예를 들어 거짓말을 한 사람이 '거짓말을 해도 된다'라는 보편화불가능한 준칙에 따랐는지, '이러이러한 상황에서는 거짓말을 해도 된다'라는 준칙에 따랐는지 결정할 수가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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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런 식의 논증이 크립키의 '회의적 역설(skeptical paradox)이죠. 크립키는 우리가 어떤 규칙을 따랐는지(더 나아가, 따라야 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아무런 형이상학적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하면서 말씀하신 내용과 정확히 동일한 논증을 제시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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