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백가 번역본에 대한 몇 가지 추천

(1) 맹자

맹자의 경우, 어떤 번역본을 읽더라도 크게 문제는 없습니다. 저 같은 경우, 홍익 출판사에서 나온 박경환 역을 논문 쓸 때도 썼습니다.
한국에서 맹자 번역은 대부분 한학의 강한 영향을 받아서 주희주를 따라가고 부분적으로 조기주를 따르지만, 이게 전체 맥락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부분은 드뭅니다.

번역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부분의 경우, 신광래(퀭로이슌)의 <맨 얼굴의 맹자>를 참고하는 것이 좋습니다. 번역도 훌륭하고 책 자체도 좋습니다.

(2) 순자

순자의 경우, 김학주본은 악명 높은 오역이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따라서 김학주본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통상 지금까지는 한길사에서 나온 이운구본을 참고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철학 전공자가 아니시다보니, <해폐>나 <정명> 같은 파트의 번역이 두루뭉술한 감이 있습니다.

가장 추천하는 판본은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순자집해>입니다. 비록 원문을 (다른 학자들의 재구를 받아드려서) 임의대로 수정한 부분이 조금씩 있지만, 해석이 크게 달라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참고로 전통문화연구회 번역본은 사이트 홈페이지에서 있는 DB로 원문과 번역본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3) 묵자

묵자의 경우, 전반부는 사실 어느 텍스트를 봐도 크게 문제가 될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 같은 경우, 최환 역 을유문화사 본을 논문 쓸 때 썼습니다.

묵자 번역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경/경설/대취/소취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입니다. 텍스트 자체의 훼손이 워낙 심해서, 가끔가다보면 반쯤은 학자들의 집합적인 망상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크게 해석에 두 갈래가 있는데, 하나는 중국 손이양의 <묵자간고>를 따르는 번역과 다른 하나는 그레이엄의 번역을 따르는 방향입니다.

<묵자간고> 같은 경우, 전통문화연구회에서 지속적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아직 경/경설 파트는 번역되지 않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레이엄의 번역본 경우 한역된 것이 없습니다.

최선의 경우는, 홍콩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 Ian Johnstone의 영역본을 참조하는 것입니다. 손이양와 그레이엄은 물론, 후대의 번역까지 두루 참고해서 가장 가능성이 높아보이는 해석을 제시하고 절충적인 편이라서 좋습니다.

(4) 장자

장자의 경우, 악명이 높습니다. 일단 텍스트상의 훼손이 심하진 않습니다. 그래서 해석은 꽤 명확한데, 구절과 구절의 연결이 어떻게 되는지에 관한 논쟁이 극심합니다. (이건 현행 33장본 장자 자체가 원본 장자를 곽상이 편집해고 주석한 텍스트라는 한계에서 촉발된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텍스트 자체가 말장난이나 비유가 넘치는 책이라, 명확히 해석하기 어려운 지점도 분명 있습니다.)

우선 가장 클래시컬하고 원본을 존중하는 형태로 번역한 책으로는 글항아리 김갑수본이 있습니다.

가장 공격적이고 자신의 주장을 부각하기 위해 거침없이 텍스트를 재구성한 본으로는 그레이엄본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레이엄본이 장자 해석에 대한 참신한 인사이트를 많지만, 공식적인 인용을 위해서는 김갑수본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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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하신 순자와 묵자의 텍스트는 각각 왕선겸과 손이양이 편찬한 주해집이군요. 혹시 논어, 맹자, 장자에서도 기본 텍스트로 놓고 보기에 좋은 번역된 집해가 있나요? 예전에 동양철학 관련 논문을 하나 쓸 때 민음사에서 나온 동양고전연구회 역의 『논어』와 『맹자』 번역을 사서 지금도 갖고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집주』를 살걸 그랬나 후회가 돼서요. 같은 번역본이면 여러 가지 코멘터리가 실려 있는 집주를 사는 게 좋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smiling_face_with_tear:

(1) <순자집해>와 <묵자간고>는 모두 청나라 시대 고증학자들이 만든 텍스트입니다. 사실 이 텍스트를 <순자>와 <묵자>의 텍스트로 추천 가능한 것이, 청나라 고증학 풍토에서 나온 주석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고증학의 경우, 텍스트에 대한 저자의 주관이 개입되던 기존의 주석 전통보다는 당대의 어문학/문법학에 기반해 정확한 해석을 하려는, 서양 문헌학에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지금 참고해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19세기-20세기 동안 서양에서 나온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교정본 같은 역활을 하는 셈이죠.)
또한 <순자>와 <묵자>는 기존에 주석이 거의 없는 것도 추천할 만한 이유 중 하나이고요. 순자의 경우 기존 주석이 당나라 시절 양경주 말고는 없고, 묵자는 기존 주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중 하나입니다.

(2) 그에 비해 <논어><맹자>의 경우, 한나라 때부터 중요한 텍스트로 여겨졌고, 그에 따라 주석서 종류도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그 주석들은 각각의 시대와 저자의 목적에 맞게 "자유롭게" 해석되는 경우도 상당히 많습니다. (사실 동북아 철학 주석서에서 자유롭게와 원래의 뜻의 경계가 모호한 경우가 꽤 많기는 합니다.)

이 문제는 특히 도가 계열 <노자>와 <장자>에서 극심합니다. <노자> 같은 경우, 법가적인 주석부터 시작해서 왕필의 형이상학적 주석, 성현영의 불교-중관론적 주석, 하상공의 양생론적 주석에서 심지어 병법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에 대한 믿을 만한 고증학풍의 교정본이 있냐 물으신다면....음.....어려운 질문이네요.

(3) <논어>는 제가 문외한이니 패스하고, <맹자>는 보통 두 가지 주석서가 중요하게 생각되어집니다. 한나라 시대 조기주와 송나라 시대 주희주입니다. 둘다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번역되었고, 조기주는 <맹자주소>로, 주희주는 <맹자집주>로 번역되었습니다. 조기주의 경우, 한나라 경학의 스타일을 반영해서 일상적인 느낌의 주석서이고, 주희주는 신유학 경향을 반영해 강한 형이상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4) 장자는 이게 좀 애매한데, 가장 중요한 주석은 곽상주이지만, 곽상주는 말 그대로 곽상 본인의 해석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해서....그리고 곽상주는 아직 번역이 안 되었습니다.

(5) 제가 말해드린 그냥 번역서들도, 기본적으로 다 저런 주석서들을 참고해서 번역합니다. 다만 어느 주석을 따랐는지 명백히 안 밝히는 경우도 있고 그래서 학술적 용도로 쓰기 애매한 경우도 있고 그럴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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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주는 <맹자집주>인데 오타가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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엌ㅋㅋ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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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달라님이 잘 소개해주셨지만 참고 하시라고 tmi를 덧붙이자면, 조기주는 <맹자장구>이고 여기에 손석이 추가로 주석을 단 것이 <맹자주소>입니다. 근래에 최채기 선생 등이 <맹자주소> 번역본을 출간했습니다. 고전번역원이 장기적으로 13경주소를 번역할 계획을 갖고 있는데, 그 일환으로 이뤄진 성과인 듯 합니다. 그런데 손석의 소는 개인적으로 위작일 뿐더러 그다지 좋은 주석이 아닌 것 같아요. 주희의 논평과 <사고전서총목제요>의 입장이 꽤 설득력 있는 것 같네요. (물론 이에 대한 반대 의견 역시 많습니다.) 또한 근래에 조기주를 읽는 중인데 손석의 소는 그다지 설명이 충분히 달려 있지 않아서 별 도움이 안 되었어요. 저는 조기의 <맹자장구>에 사실상 제대로 된 해설을 단 건 초순의 <맹자정의>라고 봅니다. 초순의 꼼꼼한 해설 덕분에 이해가 안 되는 조기의 해설을 이해할 단초를 찾았던 적이 많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초순의 <맹자정의>는 한국어 번역이 없고, 앞으로도 번역이 될 가능성은 아주 낮아보이네요 ㅠ

헤겔님은 영어에 익숙할테니 오히려 lau가 영역한 펭귄클래식의 맹자 영역본이나, bloom의 맹자 영역본이 혹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중국어를 할 수 있다면 양백준의 맹자 백화역이 훌륭한 것 같습니다. 해석이 막히는 부분들에는 꼭 각주와 해설을 달아두었더군요. 한국어 중에서는 성백효의 맹자 부안설(<-중요!)이 꽤 유용합니다. 그냥 파란색 책은 번역만 달려 있었는데, 몇 년 전에 나온 새 번역본에는 양백준, 정약용, 김장생, 이황 등등 다양한 학자들의 설이 달려 있어서 요긴했습니다.(제가 갖고 있는 것은 천지인으로 분책된 버전입니다.) 성백효 선생의 번역이야 워낙 호불호가 심해서 참조하실 부분만 참조하면 되겠네요. 참고로 한국어로 된 또 다른 선택지는 차주환 선생의 맹자 역도 있습니다.

장자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책입니다. 김갑수의 번역본은 아직 읽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고, 개인적으로는 안동림 역을 많이 참조했습니다. 근래에 일본의 장자 연구의 대가라 할 수 있는 후쿠나가 미츠지 선생의 장자 내편 번역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레이엄의 장자 영역본 역시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는데요. 두 책 모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논어는 너무 많아서;;; 나중에 좀 생각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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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곽상주는 출판물로 나와 있지 않지만, 기초학문자료(https://www.krm.or.kr) 에 보면 2004년에 최진석 교수님 등이 번역한 곽상주를 출력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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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하고 알찬 tmi 감사드립니다!! 이런 집단지성을 원해서 제가 좀 주저리주저리 썼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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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의 경우 영역본으로 추천할 수 있는 게 좀 있는데요.

  1. 평이한 영역이 좋당

Ivanhoe_The Daodejing of Laozi
Chan(진영첩)_The way of Lao Tzu

  1. 꼼꼼한 코멘터리가 달린 영역이 좋당

Henricks_Lao-Tzu: Te Tao Ching
Michael LaFargue_The tao of the Tao te ching

  1. 저자의 아~주 독특한 관점이 달린 영역이 좋당

Roger T. Ames, David L. Hall_Dao De Jing "Making This Life Significant"

  1. 왕필주 달린 영역은 없냐?

Lynn_The Classic of the Way and Virtue

이 정도를 권해드리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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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맹과 묵자를 언젠가 한 번 꼭 보고 싶었는데 감사합니다. 국역본과 영역본 모두 추천해주시는 좋은 리스트 보고갑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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