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교세포(Glial Cell)로서의 철학

요크대학의 Regina Rini가 며칠 전에 올린 기고문 "신경 아교세포로서의 철학(Philosophy as Glial Cell)"이 최근 본 포럼에 올라오는 여러 논의와 주제가 잘 맞는 것 같아 대충 발췌역해서 나눠보고자 합니다. (Rini는 이전에 다른 글에서도 다른 맥락에서 언급된 적이 있기는 했죠 ...)


외국에서 살아보는 것은 애국심에 대해 고찰해볼 좋은 기회가 되고는 한다. 스스로의 학문적 기반에 대한 자부심도 비슷한 것 같다. 나는 최근 몇몇 간학문적 프로젝트에 참여한 덕분에 우리의 학문적 삶 가운데 철학이 갖는 위상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다. 그 결과, 그럴싸한 은유 하나가 생각났다. 철학은 인류의 중추신경계에 신경 아교세포(glial cell)를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자, 설명해줄테니 걱정 마시라.

닐 디그래스 타이슨이나 리처드 도킨스 같은 TV에 최적화된 과학자들을 보면 여러분은 과학자들이 으레 철학을 폄하하길 좋아한다고 여기게 될 공산이 크다. 그렇지만 (실제 내가 실험과학자들과 이야기하며 경험한 바에 따르면) 그건 사실과 거리가 멀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최소한 기본적으로는) 철학에 대해 생각하는 바 자체가 아예 없다. 그렇지만 보통들 2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눠보면 과학자들은 철학적 탐구에 대해 큰 흥미를 느끼고는 하는 것 같다. 왜냐면 철학자들은 대개 연구실 현장에서 벌어지는 과학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일종의 멀찍히 떨어진데서 보는, 큰 그림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 개념적 한계, 혹은 익숙한 방법들의 근본적인 인식적 자격을 묻는 식의 활동은 악착같이 연구비를 따기 위해 매진하는데 있어 그리 유용하지 않다. 그렇지만 철학자와 협업하는 것은 한발짝 뒤로 물러서 국지적인 톱니바퀴들이 어떻게 큰 인식적 장치로 맞춰지는지를 파악할만한 기회가 된다.

이는 결코 철학이 "모든 학문의 여왕"이 된다는게 아니며 [...] 그렇다고 철학을 시녀로 치부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은유들이 놓치는 것은 그 상호작용이 수평적이며 꼭 위계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래서 신경 아교세포가 등장한다. 심리학 개론 수업에서 들었을 법한, 여러 신경세포를 마치 "풀"처럼 이어주는 볼품없는 친구라고 어렴풋이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 지난 20여년간 신경과학자들은 아교세포가 두뇌 형성에 매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밝혀내기 시작했다. [...]

만약 신경계를 딱 몇 초만 관찰한다고 치면, 모든 일은 죄다 전기신호를 주고 받는 신경세포에서만 벌어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수년, 수십년에 걸쳐서 관찰한다면, 그 볼품없는 아교세포의 역할을 고려치 않고서는 두뇌의 기능적 조직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거냐고? 내가 보기에, 각종 과학 분야들 (및 역사나 문학 같은 인문학 분야들)은 인류의 공유적 지식을 담는 은유적 두뇌의 신경세포 역할을 한다. [...] 각자 매우 효율적이고 매일매일 새로운 통찰을 던져주는 것이다. [...] 철학이란, 인류의 두뇌의 아교세포인 것이다. [...] 우리가 신경세포 동료들의 헤드라인에 뜨는 경우는 드물지만 (연구비 수주는 더더욱 드물테고), 철학을 아예 간과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


제 개인적인 견해와는 독립적으로, 많은 현대 철학자들의 자기인식을 잘 보여주는 글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이 글에 달린 윌리엄 패터슨 대학 Eric Steinhart의 댓글도 인상에 깊었습니다.

This is great! A really wonderful analogy. Is there any way this could be translated into actions to stop admins from closing philosophy depart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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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동의하는 내용이긴 한데, 위의 문장에서는 약간 양면적인 생각이 들어요. 철학이 분명히 '큰 그림'을 그리려는 목표를 지닌 학문이긴 한데, 아이러니하게도 요즘은 철학 자체가 너무 세분화되어서 철학 내부에서조차 '큰 그림'을 그리기가 힘드니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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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 동의합니다. 재밌게도 저는

는 저자의 판단이 그 스스로가 취하는 "큰 그림(big picture)"라는 은유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는게 눈에 띕니다. @YOUN 님께서 짚으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말이죠.

저자가 제시하는 "아교"라는 은유는 바로 그 점에서 더 적절하다고 봅니다. 왜냐면 아교는 꼭 광범위한 영역을 통째로 아우를 필요 없이, 매우 "세분화"된 영역에서도 조그마한 부분부분을 이어줄 수 있는 것이니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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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교세포 비유가 굉장히 재미있으면서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됩니다. 어떤 전체 세계에 대한 통일된 상을 제시하는 거대이론 같은 것은 오늘날 제시되지 않고 제시되기도 힘들지만, 개별 요소들을 파편 상태로 남겨두지 않고 구속력 있게 연결해야 한다는 요구는 여전히 계속해서 살아남고 있는 것 같습니다. 수십 년의 격차가 있지만, 어쩌면 아도르노가 『부정변증법』에서 "체계 없는 결속력"을 마련하는 일을 철학의 역할로 제시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었던 것과 비슷한 생각을 Rini 역시 한 것이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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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강단 분석철학'의 연구 성과에 대해 희망적인 견해를 밝힌 Richard Pettigrew의 글에 대하여 물리학의 철학자 David Wallace가 단 흥미로운 댓글이 본 주제와 좀 연관이 있는 것 같아 끌올 한번 해봅니다:

1990년대에도 그러했듯이 측정 문제는 여전히 양자역학의 철학에서 핵심주제로 남아있습니다. 사실 각 [양자역학의] 해석 간의 의견차는 10년쯤 전에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 같았습니다만, 최근엔 다시 진전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나 각 접근법의 방법론적, 그리고 과학철학적 전제에 초점을 기울이게 됨으로써요. 요즘 점점 분명해지는 것은, 측정 문제에 대한 각 접근법마다 사실은 '과학 이론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대체 과학적 실재론'이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에 대하여 애초부터 은연 중에 상이한 관점을 취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특수과학의 철학과 일반 과학철학 간에 있었던 간극은 현시대 양자역학의 철학에서 점점 좁혀지는 것 같습니다. [...]

제가 처음 이 분야에 들어왔던 20여년 전만 해도 [물리학의 철학]은 대개 (a) 수학적 엄밀성의 중심성에 초점을 아주 많이 기울였고 (b) 많은 부분에서 '반체제적인(dissident)' 물리학에 대한 철학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좋은 방향이 되었건 나쁜 방향이 되었건, 저희 분야는 (a)건 (b)건 둘다 옛날보다 그 정도가 약해졌고, 물리학 자체와 보다 적극적인 교류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볼 때는, 좋은 방향 같습니다.)

이런 신생 분야로서는 참 좋은 시절입니다. 물리학의 철학은 매우 많은 발전을 이루고 있고, 형이상학자, 인식론자, 물리학자 등과의 생산적인 대화를 펼쳐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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