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는 칸트에 대한 두 측면 해석(two-aspect interpretaion)을 지지한다?!

요즘 하이데거의 1927-1928년 마르부르크 대학교 겨울 학기 강의인 Phenomenological Interpretation of Kant's Critique of Pure Reason과 헨리 E. 앨리슨의 대표작인 Kant's Transcendental Idealism을 번갈아 가면서 읽고 있습니다. 서로 상이한 이유 때문에 두 책을 읽었는데, 읽다 보니 흥미롭게도 두 책에서 겹치는 해석이 상당히 많더라고요.

앨리슨은 칸트에 대한 기존의 '두 대상 해석(two-object interpretation)' 혹은 '두 세계 해석(two-world interpretaion)'을 비판하면서, '두 측면 해석(two-aspect interpretaion)'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한 학자입니다. 고전적인 칸트 해석이 대개 '두 대상 해석'이었던 것에 비추어본다면, (특별히, 스트로슨과 가이어 등 영어권의 주도적 칸트 해석자들이 '두 대상 해석'에 근거하여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에 비판적 태도를 취하였다는 점에 비추어본다면,) 앨리슨의 '두 측면 해석'은 꽤나 새로운 것으로 간주되었고, 또 '사물 자체의 아포리아'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죠.

'두 대상 해석'과 '두 측면 해석'은 '현상'과 '사물 자체'라는 칸트의 유명한 구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따라 의견이 나뉘어집니다. 말 그대로, (a) 두 대상 해석은 현상과 사물 자체가 서로 별개의 두 대상이라고 주장하죠. 현상은 우리에게 주어진 일종의 '허구적인 것'이고, 사물 자체는 실제로 존재하는 '실재'라고 말입니다. 반대로, (b) 두 측면 해석은 현상과 사물 자체가 하나의 대상의 서로 다른 측면이라고 주장하죠. 사물이 '우리에게 드러난 측면'이 현상이고, 사물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측면'이 사물 자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논쟁의 핵심은, 사물 자체가 과연 현상에 비해 '존재론적 우선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는지에 있습니다. 두 대상 해석은 사물 자체가 '실재'라고 강조하기 때문에 현상을 허구적인 것으로 보는 반면, 두 측면 해석은 현상과 사물 자체가 모두 '실재'이지만 단지 서로 다른 맥락이나 관점에서 파악된 것이라고 주장하죠. 전자는 맥락 독립적 의미의 실재가 칸트의 철학에서 상정된다고 생각하고, 후자는 그런 실재가 칸트의 철학에서 상정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앨리슨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As I shall argue at greater length, this epistemologically based understanding of transcendental idealism requires that the transcendental distinction between appearances and things in themselves be understood as holding between two ways of considering things (as they appear and as they are in themselves) rather than as, on the more traditional reading, between two ontologically distinct sets of entities (appearances and things in themselves). In this regard, it may be characterized as a “two-aspect” reading. (Allison, 2004: 16)

It lies rather in the assumption that we must really be one or the other in some ontologically privileged, context-independent sense. Such an assumption is unavoidable for transcendental realism with its theocentric paradigm, but it is precisely what is called into question by Kant’s “Copernican revolution.” (Allison, 2004: 49)

그런데 가만히 보니, 하이데거의 칸트 해석이 일종의 '두 측면 해석'이라고 할 수 있겠더라고요. 하이데거도 앨리슨처럼 현상이 사물 자체 옆에 놓인 또 다른 '사물'이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심지어 현상이 이미 '대상 자체' 혹은 '사물 자체'라고 지적하거든요. "사물 자체는 다른 대상이 아니라 같은 대상에 대한 표상의 다른 관계이다."라는 칸트의 『유작(Opus Postumum)』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말이에요. 앨리슨의 책은 1983년에 처음 출간되었는데, 하이데거는 거의 50년 전에 이미 두 측면 해석에 근거하여 칸트를 읽은 것이죠.

Rather appearances are objects themselves, or things. Furthermore, appearances are also not other things next to or prior to the things themselves. Rather appearances are just those things themselves that we encounter and discover as extant within the world. (Heidegger, 1927-1928 [1997]: 68)

The difference between the thing itself and appearance always refers to things themselves. However, [this difference refers to] things themselves—under the title of "appearance" insofar as they are encountered by finite intuition, under the title "thing in itself" insofar as they stem from an infinite intuition which first of all produces these things. […] But this "in itself" remains hidden from every finite intuition insofar as this intuition does not first produce [things] and put [them] in place, but lets something already existing [dastehend] be encountered. "The thing in itself (ens per se) is not another ob-ject but another relation (respectus) of representation to the same ob-ject." Various titles express that the same thing can be the correlate of totally different modes of intuition (of intuitus onginarius as well as of intuitus derivativus). (Heidegger, 1927-1928 [1997]: 68)

실제로, 인터넷을 뒤져 보니,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교 철학과의 람베스가 쓴 Heidegger's Interpretation of Kant라는 책이 정확히 이 점을 지적하더라고요. 하이데거의 칸트 해석은 오늘날 연구자들이 말하는 '두 측면'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이에요.

In particular, human knowers cognize appearances and not things in themselves. Heidegger’s interpretation of this distinction is aligned with what contemporary interpreters of Kant call a “two-aspect view.” That is, the appearance and the thing in itself do not refer to two different beings, in two different worlds (the so-called two-world view), but rather refer to two different perspectives on one and the same being. (Lambeth, 2023: 76)

물론, 하이데거의 칸트 해석에서 핵심은 '두 대상 해석'과 '두 측면 해석' 중에서 무엇이 더 올바른지에 달려 있지는 않아요. 하이데거는 자신이 제시한 '현존재 분석론'의 관점에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독해하려고 하고, 그래서 칸트가 현상학의 선구자이면서도 여전히 철학적 한계를 지닌 인물이라고 말하고 싶어하거든요. 상상력의 도식 작용을 중심으로 '시간성'에 대한 논의를 풀어가려는 하이데거의 유명한 논의도 바로 그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죠.

다만, 하이데거의 칸트 강의록을 읽다보면, 왜 이 사람이 당대 학생들에게 '사유의 왕국의 숨은 왕'이라고까지 불렸는지 확실히 알 수 있겠더라고요. 복잡한 외계어로 가득 차 있는 하이데거 본인의 주요 저작들과는 달리, 강의록에서 하이데거는 굉장히 명쾌한 어조로 칸트의 텍스트를 분석할 뿐만 아니라, 그 분석을 대단히 참신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거든요. 단순히 "칸트는 …라고 말했다."라고 설명하는 수준을 넘어서, 칸트의 논의를 현상학적 맥락과 연관짓고, 그 맥락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해설을 제시하고, 그 해설을 바탕으로 신칸트주의의 기존 칸트 해석을 비판하니, 당대 학생들에게는 하이데거의 칸트 강의가 그야말로 최첨단의 학술적 논의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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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글에서 주장하듯이 하이데거가 두측면 해석을 했을거라는데 한표를 던집니다. 철학사적으로 보면 두측면 해석으로 이미 기운 상태로 보이는데
칸트이후 독일 철학은 물자체를 모른다는 칸트를 겁쟁이로 여기고 이 물자체를 규명하기 위해 노력했지요. 변증법도 이 물자체를 규명하는 방법이었고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물자체의 모습이라고 보았지요. 저는 이런 주장은 상당히 효과적인 방법이고 진리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칸트도 말년에는 물자체가 규명되는 실적을 보게됩니다. 저는 칸트의 초기 과학현상에 대한 설명을 보면 칸트가 뛰어난 과학자였다고 봅니다. 그런 칸트가 물자체를 모는다는 초기 고백을 후회하고 있었다는 저는 봅니다.
하이데거는 한참 이후의 철학자이니 규명된 물자체를 모를 수가 없습니다. 물자체는 이제 거의 밝혀졌으니 이제는 존재의 본질보다는 존재의 가치로 철학 방향을 틀었다고 보지요.
뭐 저는 철학의 발전사를 이렇게 봅니다. 참고로 물자체는 칸트의 시대보다는 지금이 더 밝혀졌지만 여전히 밝힐 영역은 남아 있습니다. 다만 이제까지의 규명으로도 두측면으로 해석이 위협받을 정도는 아닌 듯 하고요.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칸트의 물자체가 규명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 보고, 칸트와 하이데거가 그에 동의한다는 말도 처음 듣네요. 칸트와 하이데거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있다면 나올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칸트와 하이데거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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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기술의 발전을 과학적 지식의 발전으로 이해해도 무방할까요?

저야 모르죠. 근데 유의미한 구분인진 모르겠습니다.

그렇군요. 만약 과학적 지식의 발전으로 봐도 크게 상관이 없다면 과학이 칸트의 물자체를 규명해줄 것이라는 주장을 한 철학자가 있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가령 셀라스는 칸트의 물자체를 알 수 있다는 식으로 주장을 했거든요. 과학적 관점에서요. 그것의 영역을 그는 과학적 이미지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내용이네요. 하이데거의 글들은 (전집이 102권이나 되니)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그러나 빛나는 사유들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칸트가 things in themselves를 어떤 '실재'가 아니라, 같은 대상에 대한 표상의 다른 관계라고 아주 명시적으로 말한 것이 특히 『유작』에서라는 점은 저에게 다소 신기하게 느껴지네요. 칸트의 이 글들에서는 '빈 공간은 지각될 수 없다(경험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지각의 예취들로부터 기원한) 생각으로부터 '에테르'라는 "지각 불가능한" "물리적 실재"를 고안해내거든요. 물론 이것은 그 체계적 위치상 물자체의 실재 같은 것과는 다른 얘기겠지먼, 칸트가 이 두 가지를 거의 동시기에 말했다는 점은 꽤나 흥미로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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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처음에 앨리슨의 책을 읽었을 때, "이것이 왜 새로운 해석이지?"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제가 가지고 있던 감각에 의하면, 앨리슨의 물자체 해석은 오히려 소위 교과서적 해석에 굉장히 가깝다는 인상을 받았거든요. 하이데거의 해석과의 유사성 역시 이 점에서 우연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이데거 당시에는 두 측면 해석이 주류 해석이 아마 아니었을 것입니다만, 하이데거처럼 해석학적 감각이 있는 명석한 철학자는 이미 그 온전한 얼개를 그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하이데거의 해석은 그저 예외일 뿐이고, 또한 그전까지 제가 교과서적으로 보고 들었던 해석들이 앨리슨에 의해 영향받은 결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당시에 (그리고 지금도) 한편으로 "두 세계 해석"은 터무니 없는 해석이라 고려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고, "두 대상 해석"(더 나아가 "두 측면 해석"들 중에서도 형이상학적/과학주의적 버전들)은 영미권에서 스트로슨 등에 의해서 메인스트림으로 논의되었으나, 대륙철학이 영미권에 수용되는 여타의 초기 역사에서도 보여지듯, 그저 1세대들의 잘못 정향된 해석이 후대의 연구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경향의 또 다른 예시는 칸트에 대한 phenomenalism 해석이 있겠네요). 이에 비하면 앨리슨의 해석은 뭐랄까 특별히 "모 난데 없는" 무난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무난한 해석이 영미권 학자들에게 새롭게 느껴졌다는 것이 아이러니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앨리슨의 해석에 완벽히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앨리슨은 대상을 물자체로서 고려하는 관점 (the way of considering things as they are in themselves)가 선험적 관념론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굉장히 큰 역할을 부여하는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이것이 제게는 큰 의문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칸트는 오히려 "그러한 물자체-관점에 (if any)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거라"로 읽히거든요.

이것은 다음의 의문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데요. "대상을 물자체로서 고려하는 관점"이라는 것이 도대체 뭘까요? "물자체"라는 것은 이미 그 정의상 인간에게 주어지는 바(현상)에 독립적이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대상을 우리로부터 독립적인 바로서 고려하는 (우리의) 관점"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제게 "대상을 신적인 관점에서 고려하는 (인간의) 관점" 만큼이나 형용모순으로 들립니다. 그러한 관점을 "우리"는 유의미하게 사용할 수 없으니깐요. 물론, 칸트의 실천철학적 맥락에 대한 고려 역시 해야하기에, 제대로 이야기하자면 한정 없이 길어지겠습니다만, 짧게 줄이자면, 인간이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물자체-관점"에 앨리슨은 그것도 이론적 지식의 맥락에서(=순수이성비판의 맥락에서)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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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제가 이 책의 앞부분만 읽었다 보니 단정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대상을 물자체로서 고려하는 관점"에 대해 앨리슨이 아주 뚜렷한 설명을 제시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다만, "인간의 관점이 전부는 아닐 수도 있다. 따라서 여하튼 '논리적으로는' 인간의 관점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대상을 고려하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우리는 대상을 그렇게 고려한다는 것이 어떤 것일지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정도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현재로서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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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적 대상을 '물 자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특별히, 하이데거는 현상에 대한 자연과학적 설명을 '물 자체'에 대한 지식으로 보는 것이 오해라고 직접 쓰고 있습니다.

Kant indicates that, when we come to know objects as such, we could easily be misled into believing that we had known things themselves. This means that we are constantly under the domination of an absolutization of our finitude "and this in spite of the fact that in the world of sense, however deeply we inquire into its objects, we have to do with nothing but appearances. " Insofar as we make this mistake, we are inclined to turn the transcendental ontological distinction between thing itself and appearance into an empirical ontic distinction. Then we consider the rainbow as a mere appearance when it rains while sun is shining, and we consider by contrast the raindrops as things themselves which can appear differently to different observers in manifold infractions of light. But taken ontologically, these supposed things themselves—raindrops, their round shape, indeed the space—are appearances understood as beings that become accessible in finite intuition. Thus in the entire realm of appearances we do not come upon things themselves at all. Hence the distinction between appearance and things themselves cannot be illustrated on the basis of the difference between sense qualities and spatial determinations. (Heidegger, 1927-1928 [1997]: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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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글을 보여주어 고맙고요. 칸트의 말이었으면 더욱 좋겠지만요.
호수위의 달그림자를 쫒는 듯하지만 그래도 하이데거 문장에서는 물자체를 모습과 공간으라는 외형과 구별하고 있군요. 모습과 공간은 우리의 지각으로 인식되므로 칸트시대의 인식의 근원이었지요. 그렇지만 그 당시는 보는 것만으로 대상 자체를 알 수없다가 당연한 귀결이죠. 칸트는 당연한 주장을 한겁니다.

자연과학적 대상이 대상의 외형과 공간으로 이해하시나요? 인조세포는 외형과 공간으로 만들어질까요? 자연과학의 대상은 이보다도 더욱 깊습니다.

가까운 미래에 인조세포를 만들고 진짜 세포와 구별이 되지 않은 시대가 올텐데 인조세포와 자연세포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럼 인조세포의 물자체는 무엇일까요? 과학자들이 달그림자를 만들었을까요?

@YOUN 님, @Herb 님의 날카로운 지적에 대한 답변 잘 읽었습니다. "인간의 관점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대상을 고려하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다"는 말씀이, 마치 차머스가 '논리적으로 가능한' 좀비를 상정하는 방식과 유사하게 들려 흥미롭습니다. 다만, Herb님의 비판의 핵심은, '대안적 관점'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인간인 우리가, 인간의 관점이 아닌 관점을 취하는 것" 자체가 "총각이 아닌 총각"처럼 논리적으로도 불가능한 형용모순이라는 점인 것 같네요.

가령 논점을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 물자체에 관한 관점과, 물자체를 보는 관점으로 나눠볼 수 있을듯 합니다. 전자인 '물자체에 관한 관점'은, "신(神)과 같이 인간의 인식 조건(현상)을 벗어난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는 아마도 사물을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파악할 것이다"라는 식의, 대안적이지만 논리적으로 가능한 사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개념적으로 모순은 아닙니다. YOUN님께서 말씀하신 "'논리적으로는' 다른 관점이 가능하다"는 것은 아마도 이런 종류의 사변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 이 관점에서 '물자체'에 관한 관점은 불포화된 개념이라 판정가능성의 측면에서는 단지 타당한 관점입니다.)

그러나 Herb님이 비판하는 것은 후자, 즉 '물자체를 보는 (우리의) 관점'입니다. 이것은 "유한한 인식 조건을 가진 인간인 우리가 , 바로 그 유한한 조건을 벗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물자체로) 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결혼한 총각"처럼, 주어('인간인 우리')와 술어('인간의 조건을 벗어나 본다')가 서로를 부정하는, 따라서 논리적으로도 불가능한 형용모순입니다.

YOUN님께서는 이 둘을 동일시하여, 전자의 논리적 가능성을 후자의 개념적 불가능성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시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만약 하이데거가 정말 '두 측면 해석'을 지지한다면, 이는 하이데거에게 '존재'란, 바로 이 논리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응답해야만 하는, 일종의 모순적 결단에 속하는 영역임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요? 혹은 대안적 현상, 대안적 존재자이거나요.

(재미있게도 저번에 @Astrantia 님이 제시한 논의와 관련이 있는것 같아 내용 인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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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정리가 필요할 것 같은데요. @holahola2 님의 표현을 따라,

  1. "물자체에 관한 관점"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2. "물자체를 보는 관점"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물자체가 직관에 주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두 지점은 칸트가 명시적으로 말하기도 했고, 앨리슨 역시 받아들이는 지점입니다. @YOUN 님의 답변이 1번과 2번을 혼동했다기보다는, 앨리슨이 1번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환기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제가 의문을 표했던 것은, 만약 우리가 2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1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즉 "물자체를 보는 관점"이라는 것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고, 그저 "물자체에 관한 관점"이라는 논리적 표상만이 가능하다면, 이 "물자체에 관한 관점"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효용을 가지며, 왜 우리가 그러한 한갓 논리적 표상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실천철학 연관은 일단 배제하고 말입니다). 이에 대해 칸트는 그러한 논리적 표상이 "현상" 개념을 일관적으로 이해하게 위해 중요하다고 언급한 대목이 있고, 앨리슨은 이것은 인용하고 있으며 (54-5쪽), 저 역시 이에 대해 불만이 없습니다. 다만 제 입장은 이 대목을 과대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쪽이고, 반대로 앨리슨은 제가 보기에 이 대목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과대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전에 지적한 대로, "물자체에 관한 관점"은 그 자체로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없고, 그저 우리가 이미 이해하고 있는 "현상"개념에서 "인식의 주관적 조건"에 해당하는 부분을 "추상"하여 얻어진 논리적 가공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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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b 님, 논점을 명료하게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복잡했던 논의의 지형도가 훨씬 선명해진 것 같습니다. 물자체에 관한 관점'은 결국 '현상' 개념에서 무언가를 '추상'하여 얻어진 논리적 가공물에 불과하다고 보시는군요. 간단히 말해 유추(Analogy)인 것이죠.

말씀하신 내용을 바탕으로 제 생각을 조금 덧붙여보자면, 만약 앨리슨과 같은 학자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리적 가공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면, 그것은 '물자체를 보는 (인간의) 관점'이라는 형용모순의 매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두 구분을 어떤 식으로든 다시 혼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해 봅니다.

그럼에도 제가

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를 통해 과거 철학의 문제들이 정확히 어떤 혼동이나 유추 위에서 성립했는지를 철학사적 맥락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명확히 정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정리된다면, 적어도 과거의 철학적 유추가 다시 되살아나는 일은 일어나기 어렵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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