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를 둘러싼 문제Trouble with gender와 젠더 문제gender trouble

  1. 정확히 어디 게시판에 쓰는 게 좋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정치적인 문제니 정치 철학 게시판에 써봅니다. 다음 글의 연장선상에 있는 글입니다.

해외 철학계 소식 하나

  1. 작년 11월 알렉스 번의 주장을 담은 Trouble with gender가 <젠더라는 환상>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 대충 리뷰들을 둘러 보니 저자는 성이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인식에 반대하고, 생물학적 성별(남/녀)을 기반으로 한 이분법적 구분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젠더라는 환상 : 알라딘

여기서 Trouble with gender라는 제목은 번 자신도 인정하듯이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을 비튼 제목이다. 여기서 번은 주디스 버틀러를 성이 사회적으로 구성됐다고 주장하는 사상가에 위치 시키며 비판한다. 또한 버틀러의 최근 저작 who's afraid of gender에 대해 다소 노골적으로 비판적인 리뷰 기사를 작성하기도 했다.

'When the chips are down, the philosophers turn out to have been bluffing' - The Freethinker

The Phantasmagoric World of Judith Butler - Fairer Disputations

  1. 나 역시 궁금해서 서점에서 젠더라는 환상을 약간 들춰봤다. 그런데 책을 다 읽어봐야 정확한 비판이 가능하겠지만, 번이 버틀러를 단순히 '성 사회구성론자'로 위치시키는데는 뭔가 좀 조야하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버틀러에 대한 개론적인 지식밖에 가지고 있지 못해서 글 쓰기가 망설여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는 버틀러에 대해 써보자면, 버틀러의 주장은 '단순히' 젠더가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는 게 아니었던걸로 기억한다.

  2. 다음 기사에서 알렉스 번이 버틀러를 어떻게 비판하는 지 확인할 수 있다.

Is Sex Socially Constructed?. Examining the arguments | by Alex Byrne | Arc Digital | Medium

여기서 번은 버틀러의 수행성을 통해 젠더를 얻는다는 개념을 논증화 해, 그런 접근이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버틀러가 성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할 떄, 번은 '사회적 구성'을 다음과 같이 이해합니다.

But what does it mean to say that a category is socially constructed? The terminology of “social construction” is often thrown around so carelessly that its intended meaning is impossible to divine, but there is one clear answer that corresponds closely with what Butler has in mind. A socially constructed category is a category that meets this condition: If an object belongs to the category, the object must exist (or have existed) within a society or social organization.

즉 범주가 사회적으로 구성됐다는 것은 객체object가 범주에 속하고, 객체가 사회 혹은 사회적 조직에 반드시 존재해야(혹은 존재해왔거나) 한다는 것이다.

번은 약혼반지, 여왕, 행성의 예를 든다. 약혼반지는 결혼제도가 존재하는 사회 내에서 구성된 범주이다. 여왕은 군주제 사회에서 구성된 범주이다. 하지만 행성은? 우리가 존재하기 수십억년전 부터 존재해온 행성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범주라 할 수 없다.

버틀러의 주장대로 성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인가? 번은 버틀러가 참조하는 오스턴의 수행성performative이론을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수행성들이 한 사물이 범주에 속한다는 결과를 내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면, 그 범주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if performatives can be used to bring it about that a thing belongs to a category, that category is socially constructed .

오스틴에 따르면 적절한 사회적 환경이 주어진다면, 수행성은 이루어진다. 적절한 사회적 환경에서 나는 "저 배의 이름은 엘리자베스"라는 말을 통해 배에 이름을 붙일 수 있고, 내가 판사라면 나는 "3년형을 구형합니다"라는 말로 죄인에게 형을 구형할 수 있다.

번은 이러한 수행성 이론으로 부터 '성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결론을 도출해내는, (번 자신이 정식화한) 버틀러의 수행적 논변performative argument이 실패한다고 주장한다.

  1. 그런데 번의 버틀러 비판은 내가 배운 버틀러와는 거리가 상당해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면 번의 '사회적 구성'은 버틀러가 말하는 구성과는 다른 것 같다. 버틀러에게 있어 젠더는 단순히 '문화적 성'만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성에 대한 담론들을 생산해 내는 생산 장치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섹스 자체가 젠더화된 범주라면 젠더를 섹스의 문화적 해석으로만 정의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젠더를 이미 정해진 섹스에 문화적 의미를 각인한 것(사법적 개념)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젠더는 섹스 자체가 설정되는 바로 그 생산장치를 지칭하기도 한다. 따라서 섹스가 자연에 관계되듯 젠더가 문화에 관계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선 안된다. 그리고 젠더는 '성적으로 구분된 자연'이나 '자연적 섹스'가 '담론 이전에' 문화에 앞서서, 그 위에서 문화가 행해지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표면으로 생산되고 설정되게 하는 담론적/문화적 수단이기도 하다. (<젠더 트러블>, 97p)

이런 개념에 입각해 주디스 버틀러는 페미니스트들로 하여금 단순히 섹스를 지탱하는 과학적 사실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그런 과학적 사실들을 생산하는 담론, 그리고 담론들을 생산하는 권력 관계에 주목하기를 주문한다.

젠더화된 주체의 이런 극단적 분열은 일련의 다른 문제도 야기한다. 우선 섹스/젠더의 의미가 어떻게 주어졌는지 묻지 않고서 '주어진' 섹스나 '주어진' 젠더를 지칭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어쨌든 '섹스'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연적인 것인가, 해부학적인 것인가, 염색체인가, 호르몬인가? 페미니즘 비평가는 그런 '사실들'을 우리에게 확인시키려는 과학 담론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섹스에는 역사가 있는가? 각각의 성은 하나, 혹은 여러개의 다른 역사를 갖는 것인가? 성의 이원성이 어떻게 확립되었는지에 대한 역사는 있는가? 그 이분법적 항목이 변화무쌍한 구성물임을 폭로할 수 있는 계보학이 있는가? 겉보기에 자연스러운 성적 사실들이 다른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이해관계를 추구하면서 여러 과학 담론으로 생산된 것인가?

따라서 내 생각에 버틀러가 성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할 때, 나아가 섹스 조차 젠더라고 할때, 그 구성은 단순히 '객체가 사회 범주에 속하고, 사회 혹은 조직 내에서 존재하는 것' 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것은 담론의 권력 관계에 의해 성에 관한 지식의 구성을 의미하고 그 관계를 추적하기를 요구하는 계보학, 다분히 푸코Foucault적인 것이다.

물론 이것 역시 사회적 구성이 아니냐고 반박할 수 있다. 하지만 번이 버틀러의 주장들 중 핵심은 빼놓고 기본 틀만 조야하게 축소해 자신의 논증에 가져다 쓰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만일 누가 진정으로 버틀러의 주장을 비판하고자 한다면 성에 대한 사실이 정말 담론의 권력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지 에 대해 비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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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라는 환상"을 다음 책 "Sex Is a Spectrum: The Biological Limits of the Binary"와 비교해 분석해도 좋겠네요. 이 책의 저자는 인류학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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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der나 race가 사회적 구성물인지 아니면 자연종인지에 대해서, 요즘은 조금 더 중도적인 입장이 가장 최신 담론인듯 합니다.

"Biological한 특성을 바탕으로/근거로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 정도의 입장인데

형이상학적으로 엄밀히 정의하는 문제와 생물학적 특성/사회적으로 구성된 특성의 범위를 정하는 문제 정도가 남아있지만,

아이디어 자체는 저는 굉장히 좋고 또한 맞는 방향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종/젠더가 아무런 생물학적 근거/증거 없이 멋대로 구성되는 것은 조금 과격한 주장처럼 보입니다.

오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서 보론하자면, 검은 피부색이라는 "netural"한 생물학적 특성을 근거로, 사회 공동체의 사람들은 여기에 여러 평가나 차별/옹호를 더하고 뭐 그렇다는 뜻입니다. - 그게 옳은 것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 사람들이 젠더/인종을 구분하는 밑바탕에는 최소한의 생물학적 특성이 있다, 는 것이죠.)

이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었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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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번의 논지는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자기가 노턴 개론서(번이 담당한 부분은 전통적인 형이상학이고 주로 색 존재론과 자기지식에 대한 글임)를 쓰면서 다른 파트였던 페미니스트 철학부분에 대해서 제대로된 논증이 하나도 제시되지 않았던 걸 보고 그 필드에 다른 철학 분과에서 요구되는 만큼의 엄밀성을 요구하는겁니다.

예를 들어 자기 지식에 관한 문제를 생각해봅시다. 자기지식이 다른 감각적 지식이나 외부세계에 관한 지식과 구분되는 특수성이 있는 지식이라는 것이 이 문제의 핵심적인 가정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러한 자기지식이 물리주의적으로 어떻게 이해 될 수 있는지, 인식론적으로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게 주된 작업이죠. 철학자라면 당연히 과연 자기 자신의 심적 상태에 관한 지식인 자기지식이 다른 지식들과 구분되는 인식론적 특수성을 가지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가 있죠. 그러면 그 부분에 대해서도 논증을 제시함으로서 논의자체를 정당화해야하는건 자기지식에 대한 이론가들의 책임입니다.

번은 일급의 형이상학자로서 젠더와 섹스에 대한 주제에도 동일한 요구를 한 것에 불과해요. 젠더와 성의 구분이 비록 페미니스트 철학 논의에서 당연시되더라도 거기에 대해서는 논증이나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거죠. 그리고 번은 자신의 눈에는 제대로된 논증이라는게 존재하지 않는다는겁니다. 그게 뭐 버틀러가 가지는 어떤 입장의 어떤 면에서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이런식의 답변은 사실 다른 형이상학적 논의나 철학적 논의라면 받아들여질만한 반박이 아니죠. 애초에 번의 타겟은 버틀러라는 개인이 가진 입장이 아니라 젠더가 사회적 산물이냐는 입장에 대한 논증이니까요.

논의자체와는 별개로 그냥 영국발 정치적인 이슈가 되어버려서 관심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실 번이 가지는 버틀러 개인에 대한 입장을 생각해보면 저정도의 비판이 과연 그렇게까지 공격을 받아야했나 싶을 정도로 차분하고 젠틀하다고 느껴집니다.... 번은 주디스 버틀러가 "철학과 소속도 아니고, 직업 철학자들은 아무도 버틀러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한적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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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제가 쓴 글이 번의 핵심 주장에 대한 반론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번이 버틀러의 주장을 끌고와서 정식화하는게 내가 아는 버틀러가 맞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본 글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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