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양철학으로 논문을 쓰기 전 유의사항들

(0)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서, 혼자 터득한 것을 일종의 기록으로 남겨놓은 것입니다.

1단계 ; 당신이 읽는 원전이 무슨 판본이고 누구의 교정본인지 꼭 확인해라

  • 아쉽게도, 비서양 철학 텍스트들의 경우 합의된 교정본이 없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덤으로 각 언어권 학계마다 사용하는 정본이 다른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꼭 무슨 판본인지 확인해봐야합니다.
  • 게다가 판본이 여러개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노자 같은 경우 고고학 발굴본이 두 개(죽간본, 백서본)에 통용본도 한 개있습니다. (통용본도 주석마다 조금씩 용어가 차이가 납니다.)
  • 이 문제는 특히 불경을 다룰 때 가장 중요하고 심각합니다. 산스크리스트 - 한문 - 티베트, 세 언어로 판본이 다 있는 경우도 있고, 덤으로 교정본이 있는 경우는 굉장히 드뭅니다. 게다가 각 언어권마다 축약본, 확장본 등 여러 판본이 있는 경우도 흔합니다. (대표적으로 화엄경이 한문본만 8개 있습니다.)

2단계 ; 하려는 작업이 무엇인지 명확히 해라

  • 크게 철학적 작업과 철학사적 작업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철학적 작업이라면 책에 나와있는 작업을 보다 세밀한 주장 - 논증 형태로 재구성하고 그걸 평가하는 작업입니다.
    반면 철학사적 작업이라면, 이 책이 당시/후대 다른 학파들과 무슨 연관성과 차이가 있는지를 밝히는 작업입나다.
  • 목적을 정하는게 중요한 이유는, 그래야 적절한 논문을 찾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철학적 작업은 영미권 - 홍콩 - 싱가포르 등에서 이루어집니다. 반대로 철학사적 작업은 중국 - 일본 등에서 많이 이루어집니다.

3단계 ; 번역어부터 확인해라

  • 한국인인 이상 비서양철학 논문은 필연적으로 영어 - 한국어 - 원어(한문) 세 가지 언어를 교차 참조할 수 밖에 없는 형태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한국어의 경우, 한문을 음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예라는 단어는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는 대충 느낌은 오지만, 느낌만으로 논문을 쓸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이 때, 영어 번역본이 중요한 개념어를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허나 이 과정에서 영어 번역어가 반드시 맞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무심결에 영어 컨텍스트에 해석을 끼워맞추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번역어들을 면밀하게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4단계 ; 국뽕을 피하자

  • 넌 왜 이걸 논문으로 썼니?에 대한 질문에 명확히 답할 수 있어야, 가장 좋은 논문이라고 봅니다.
    각 나라에서야 자국 학자를 연구하는걸 당연시 여기지만, 조금만 필드를 넘어가도 연구 자체가 당연시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때로는 이 문헌이 철학이라고 우겨야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건 비서양철학을 하는 모든 연구자들의 천형이지만, 이걸 극복할 수 있다면 필연적으로 좋은 논문이 나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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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알려주지 않아서, 혼자 터득한 것”… 이라는 부분이 참 와 닿네요. 대학에서 이런 기초적인 팁들을 배우기가 참 힘들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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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알려주지 않아서, 혼자터득한 것"이라는 말이 참 공감이 가고 마음이 먹먹합니다.

논문의 작성, 인용방식, 선행연구를 선별하고 활용하는 방식, 저널의 티어 확인 및 선별 기준 등등 전문적인 연구자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기초적 소양이 전문기술의 영역에 속하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훈련시키는 표준화된 교과과정이 대체로 부재한다는 생각을 하고는 합니다.

좋은 자료 공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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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을 보면 우는 올빼미 : “올빼-”

좋은 글 공유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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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애잔한 분위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였지만 ㅠㅠ 위로가 되네요.
대체로 한국의 대학원이 '직업인으로서의 교수’를 양성하는데 무관심하다는게 아쉽습니다. 공부만 잘한다고, 밥 벌어먹고 살 수 있는건 아닌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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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렇게 까다로운 기준이 아니지만(정확히는, 학자에게 있어 까다로운 게 되어서는 안 되지만) 무심코 지나치기가 쉬운 점들을 잘 지적해주신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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