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본의 아니게 메타필로소피컬한 글들을 많이 올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요즘 샘플 에세이도 쓰겠다, 이런 메타 필로소피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니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교수님들과 학생들 몇 명과 2차자료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했고, 2차 자료에 대해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됐습니다: 2차 자료는 배우기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닌, 내 위치를 알기 위해 읽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1차 자료를 먼저 충분히 접하고 자신의 스탠스가 나온 후, 자신의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다른지 알기 위해 2차 자료를 읽어야한다는 것이죠. 본인이 어떤 사람들과 어떤 것에 동의를 하고, 어떤 것에 반대를 하고, 이런 것들을 알게 해주는 것이 2차 자료지, 1차자료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해야하는지 알려주는 것이 1차자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영향은 받겠지만요). 즉, 본인의 생각들 중 어떤 것이 흥미롭고 쓸 만한 가치가 있는지 찾아가는 과정이 2차자료다 -- 이것이 제가 현재 갖고 있는 2차자료에 대한 생각입니다.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떤가요? (아, 물론 철학사에 한정돼서 말한 겁니다)
(+입문서는 다른 얘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구서에 한해서 적었습니다.)
이를테면 특정 주제의 주요 저자들과 이미 다 First-name basis인 경력의 학자라면 굳이 그 주제에 관해서 글을 쓸 때 힘들게 문헌 리뷰를 할 이유가 잘 없을 것 같습니다. 기존 학자의 새로운 연구라면 그냥 '그 친구 만나서 물어보면' 될 거고, 신진 학자의 연구라면 아마 그쪽에서 되려 어떻게든 '제 연구 좀 봐주시겠어요 ...?' 하면서 오겠죠.
반면에 제 생각에는 "2차자료 자체를 거의 읽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분께서도 전혀 다른 새로운 분야를 연구하신다면 얘기가 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를 들면 라이프니츠 형이상학의 권위자가 새로 디그나가의 유식 철학을 처음 공부할 때도 2차자료를 전혀 참조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꽤 놀랄 것 같습니다.
아, 네. 제가 혼동의 여지를 남긴 것 같습니다. 전 문헌 리뷰가 필요없다고 말하려고 한 게 아니라, 문헌 리뷰를 통해 자신의 스탠스 중 어떤 부분이 흥미롭고 쓸만한 가치가 있는지 찾아가야한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문헌 리뷰를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요. 물론 결국 배우는 게 있긴 하겠지만, 배우는 자세로 문헌 리뷰를 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이 부분은 제가 연구서 한정이라고 수정하기 전에 쓰신 것 같습니다. 전 연구서 기준만으로 말한 것이기 때문에 입문서는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강의들 자체가 입문서와 같은 역할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입문서들 마저도 처음에 읽으면 안 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네, wildbunny님의 입장과 제 입장이 크게 차이가 나진 않는 것 같습니다. 요즘에 영어 글쓰기를 열심히 공부 중인데, 나중에 한국어 글쓰기도 한 번 시간내서 공부해야될 것 같습니다.
우선,
라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 같습니다. 만일 대학교같은 시설 안에서 체계화된 교육을 받는다면 1차자료부터 헤딩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입문서든 연구서든 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선수 수업을 들음으로써 필요한 지식이 있으며, 해석해나갈 때 오류를 범하지 않게 해줄 수 있는 교수도 있으며, 텍스트 안에서 커넥션을 이어줄 수 있는 과제들까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조금은 회의적입니다. 사실 대학교가 아니라면 어떻게 공부할 수 있는지 감도 안 잡힙니다.
번역서로 공부하는 건 공부가 아냐!라는 주장까진 아니지만, 원서를 읽을 줄 모르지만 번역서만으로 논문을 쓰는 건 제대로 된 "철학사" 연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여기서 철학사라는 건 작성자님이 말하신 기존 철학 문헌에 대한 연구 일반을 지칭하는 표현이 아니라, 제가 링크 걸어둔 글에 있는 구분입니다. 즉 철학 문헌을 오늘날의 입장과 이론으로 가장 말이 되게 정합적인 해석을 제시하는 작업인 재해석과 철학 문헌을 당대의 입장에서 당대가 가진 한계까지 고려해서 나오는 작업인 지성사-철학사 작업. 이 중 후자라는 의미이지요.)
사실 전자인 재해석 작업도 좀 그런거같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3)
문제는 번역어에 있는데, 서양 철학이야 다른 언어로 넘어도 문제가 되는 경우가 드문거같은데 타 문화권은 번역어 선정 자체가 논쟁 대상인 경우도 있어 보입니다.
예를 들어, 굉장히 클래시컬한 분석철학 행동 모델이 belief-desire인데, 이 도식 자체는 동북아 철학에 곧바로 적용하기 굉장히 어렵습니다.
belief와 1대1 대응하는 개념어가 없거든요. desire은 욕(망)을 쓰고 이게 꽤 정합적이지만, cognitive한 심적 상태로서의 belief에 해당하는 단어는 딱 들어맞지 않습니다. 차라리 지(성), 즉 know을 쓰죠. (belief에 해당하는 단어로 신(앙)-신(뢰)가 있는데 이는 차라리 faith-trust에 해당하는 단어죠.)
(따라서 동북아 철학에서는 know-belief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은 채 사용되는 셈이죠.)
(4)
가장 기본적인 용어조차 이렇게 차이가 나버리는 상황에서, 원서를 못 읽어버리면 2차 문헌이 가정한 프레임-틀에 끌려다니는 상황이 올 수 밖에 없습니다.
(5)
그래서 전 1차 문헌에서 과연 이게 무슨 현상을 설명하려는 것인지 집중하는 편입니다. 이게 외부 세계를 지각하는 문제일지라도, perception인지 attention인지 아니면 다른 문제인지.
이걸 작성자가 명확히 알고 있어야, 1차 문헌의 용어가 어떤 의미로 쓰인건지 이게 2차 문헌의 번역어(그리고 그 역어가 전제한 이론틀)와 얼만큼 차이가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있으니깐요.
아, 직접 말을 들어보니, Mandala님에 크게 반대할 것 같진 않습니다. 우선 첫번째로, 전 영어 번역서를 염두에 두고 있었거든요. 한국어 번역서는 거의 안 읽어봐서 어떤지 잘 모르고, 딱히 이런 저런 생각도 없습니다. 두번째로, 제가 생각했던 래디컬한 쪽은 번역서를 아예 읽지 않고 원어부터 읽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Mandala님은 번역서를 먼저 접한 후 번역어를 알아가는 것까지는 받아들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반대를 하진 않습니다.
번역어 부분은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혹시 belief가 믿음으로 번역될 순 없을까요?
저도 독일어-영어 번역어에 대해서 잠깐 얘기를 해보자면 (재밌으니깐요),
일부 독일 관념론에서 belief/faith의 단어 차이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둘 다 Glaube를 쓰거든요. 또, Gegenstand/Objekt가 둘 다 object로 번역이 되지만, 두 단어는 독일 관념론에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굳이 번역하자면 mind-dependent object/ mind-independent object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우선 belief는 한국어로 '믿음'이라 번역됩니다. 철학에서도 그렇고 일상적으로도 별 문제 없이 쓰이죠. 문제는 고전 중국어인데 고전 중국어에서는 belief-know을 구분해서 사용한 것 같지 않습니다.
보통 '믿다'는 중국어로 '신'으로 번역됩니다. (한문 타이핑이 불편해서 한국어 독음만 적습니다.) 한국어에서는 신뢰-신앙에서 이 신자를 씁니다. 문제는 고전 중국 문헌에서 '신'은 belief보단 faith-trust의 의미로 쓰입나다. belief을 의미하는 것 같을 때는 보통 지, 한국어로는 '알다'에 해당하는 단어를 쓰죠. (지식-지성의 지가 모두 이 지입니다.)
아마 이는 belief-knowledge를 구분하는 기준인 정당화(justification)에 일대일 대응하는 개념어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