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의 한계?: 제임스 코넌트의 「형이상학의 극복에 대한 두 가지 개념: 카르납과 초기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단상

제임스 코넌트의 「형이상학의 극복에 대한 두 가지 개념: 카르납과 초기 비트겐슈타인(Two Conception of Die Überwindung der Metaphysik: Carnap and Early Wittgenstein)」이라는 논문을 드디어 다 읽었다. 세상에, 내가 왜 이 논문을 작년에 S대학교 K씨에게 추천받고서도 그동안 논문 뭉치에 짱 박아두고 있었다가 이제서야 읽었는지 모르겠다. (50쪽이나 되는 논문이라 솔직히 읽기 귀찮았다.) 정말, 매우, 대단히 훌륭한 논문이다.

(1) 나는 '의미의 한계'를 긋고자 하는 시도에 대한 코넌트의 비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코넌트는 형이상학을 바라보는 카르납과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날카롭게 대비하면서, 카르납에 반대하여 비트겐슈타인을 옹호한다. 즉, 카르납은 의미의 한계를 미리 설정한 뒤에 형이상학의 언어가 그 한계를 넘어가 있다고 비판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아무런 의미의 한계도 미리 설정하지 않고서 다만 형이상학의 언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명료하게 하고자 한다. 전자는 형이상학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이 상정한 '이론'을 입증해야 하는 부담을 짊어지지만, 후자는 아무런 부담을 짊어지지 않고서 오히려 입증의 부담을 명료하게 말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쪽에 넘겨버린다.

(2) 특별히, 이러한 논의는 '초월론적 조건(transcendental condition)'의 정당화 문제와 관련하여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칸트 이후로, 칸트를 계승하여, 칸트의 기획을 세련화하고자 한는 수많은 철학들은, 바로 이 초월론적 조건을 기준으로 의미의 한계를 명확히 긋고자 한다. (비트겐슈타인을 일종의 칸트주의자로 해석하는 풍경 선생님 같은 해석자들은 비트겐슈타인의 기획 역시 '논리적 통사론의 원칙the principles of logical syntax'이나 '문법의 규칙the rules of grammar'이라는 일종의 초월론적 조건을 바탕으로 의미의 한계를 긋고자 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이 초월론적 조건이라는 것은 어떻게 정당화되어야 하는 것인가? 독단적 형이상학을 비판하기 위해 의미가 초월론적 조건에 매개되어 있다는 강조하는 사람들은 '초월론적 조건'이라는 지평을 다시 독단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3) 실제로, 이런 문제는 현대철학의 핵심 쟁점 중 하나로서, 칸트 연구뿐만 아니라 현상학-해석학-해체주의-실용주의 등 다양한 영역에서 끊임없이 제기된다. 가령, 하이데거가 후설의 '의식' 개념을 비판하면서 '존재' 개념을 강조하고, 레비나스가 다시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을 비판하면서 '타자' 개념을 강조하는 것은 모두 대상의 주어짐을 가능하게 하는 초월론적 조건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과정에서 기존 초월론적 조건을 갱신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바티모가 가다머에 반대하여 해석학이 니힐리즘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역사성' 같은 초월론적 조건을 상정하는 입장이 결국은 과거의 형이상학을 다시 도입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우려하기 때문이다. 하버마스가 칸트를 옹호하면서 어떻게든 다시 '초월론적'이라는 개념을 복권시키려고 하고, 로티가 헤겔을 옹호하면서 '초월론적'이라는 개념을 신랄하게 공격하는 것도 모두 '초월론적'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가 철학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4) 따라서 코넌트의 논문은 비트겐슈타인 연구의 범위를 넘어서는 중요한 철학적 의의를 지닌다. 이 논문은 카르납과 비트겐슈타인 사이의 대비를 통해 초월론적 조건을 옹호하는 입장과 그렇지 않은 입장 사이의 차이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또한 왜 초월론적 조건을 폐기해야 하는지도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다. 둘 모두는 현대철학의 핵심 쟁점을 건드리고 있다. 초월론적 조건을 둘러싼 현대철학의 논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논문이 제시하고 있는 논쟁 구도에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5) 특별히, 이 논문은 하이데거의 철학을 강력하게 변호해주는 면모도 지니고 있어서 하이데거 연구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코넌트는 카르납이 하이데거의 '무(das Nichts)' 개념을 비판한 논문인 「언어에 대한 논리적 분석을 통한 형이상학의 제거(The Elimination of Metaphysics through the Logical Analysis of Language)」를 정말 잘근잘근 비판한다. 가령, 하이데거는 분명 '아니(nicht)'와 '무(das Nichts)'라는 용법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는데도 카르납은 자신의 논지를 성립시키기 위해 하이데거의 구분을 무시해버린다. 또한, 하이데거의 언어가 정말 무의미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 언어는 (a) 일상의 문법적 통사론의 관점에서는 잘 조직되어 있으면서도 (b) 논리적 통사론의 관점에서는 문제가 있어야 하지만 애초에 이 두 가지 조건이 동시에 성립할 수는 없다. 오히려 카르납 자신이야 말로 하이데거를 억지로 비판하려는 과정에서 자신이 거부했던 심리주의에 빠지고 있다.

(6) 적어도, 나는 철학적 입장에 있어서 만큼은 이 논문이 제시하고 있는 견해를 전적으로 옹호한다. 초월론적 조건을 찾고자 하는 시도는 무엇이 의미 있고 무엇이 의미 없는지를 미리 결정해버린 채 형이상학을 비판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 자체가 결국 일종의 독단일 뿐이다. 어디까지가 의미 있는 언어이고 어디부터가 의미 없는 언어인지를 결정하는 기준은 애초에 무엇이란 말인가? 오히려 이러한 기준은 자신이 의미 있는 언어를 제시한다고 말하는 쪽에 넘겨져야 한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사람을 향해 "네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나에게 좀 더 명료하게 설명해 달라."라고만 요청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사람의 말이 의미 있는지 무의미한지 미리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어디에도 없다. 코넌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The role of a philosophical elucidator is not to pass verdicts on the statements of others, but to help them achieve clarity about what it is that they want to say. Thus the conversation does not break off if the other cannot meet the demand to make himself intelligible to the practitioner of philosophical elucidation; rather the burden lies with the one who professes to elucidate—not to specify a priori conditions of intelligibility, but rather to find the liberating word: enabling the other to attain intelligibility, where this may require helping him first to discover that he is unintelligible to himself."(Conant, 2001: 61)

(7) 다만, 내가 의문인 건, 왜 코넌트가 이렇게 훌륭한 철학적 입장을 『논고』에 대한 다소 억지스러운 자신의 해석과 연결시키는가 하는 점이다. 코넌트의 입장은 굳이 『논고』와 연결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대단히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코넌트의 입장이 『탐구』에 대한 해석에 사용되었다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나는 『탐구』와 관련해서는 코넌트의 해석이 해커의 해석보다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코넌트가 잘 지적하는 것처럼, 해커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문법의 규칙'이 마치 어딘가에 미리 존재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문제는, 이 입장이 『논고』에 대한 해석으로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의미 있는 명제, 의미를 결여한 명제, 무의미한 명제를 엄격하게 나누고자 한 것으로 유명한 『논고』의 기획이, 코넌트의 논문에서는, 모든 명제가 우리의 의미 부여 방식에 따라 의미가 명료해질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입장으로 과격하게 해석되어버리고 만다. 이런 무리한 『논고』 해석만 없었더라도, 코넌트의 비트겐슈타인 해석은, 『논고』에 대한 주석 논쟁에서 해방되어, 지금보다 훨씬 더 정당하게 대우받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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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iceright님의 댓글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저와 voiceright님은 사실상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데도 사용하는 표현이나 강조점을 두는 내용의 차이 때문에 마치 의견이 갈라지는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이 자신의 발화를 이해가능하게 만들지 못하더라도 대화는 박살나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당연히 동의하는 부분이니 저 구절을 인용했죠.

help them achieve clarity about what it is that they want to say.

이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코넌트의 경우는 저와 반대의 용법을 쓰죠. 그 뒤에 보면,

rather the burden lies with the one who professes to elucidate

라고 나와 있으니까요. 해명한다고 공언하는 쪽에 책임이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 '해명하는 쪽'이란 아마 '철학적 해명의 실천가(the practitioner of philosophical eludication)'일 것이고, '해명'이란 "이해가능성의 선험적 조건을 구체화시키지 않으면서, 오히려 언어를 자유롭게하기를 발견하는 것"이 되겠죠.

그런데 (a) 철학적 주해자가 자신의 대화 상대를 명료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과 (b) 대화 상대가 제시한 주장을 철학적 주해자가 자신의 진리로 떠맡을 것인지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입니다. 철수가 "우리집 뽀삐는 정말 예뻐"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 말을 듣는 제가 반드시 거기에 동의해야 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요. 저는 이해가능성의 문제보다도 진리의 문제에 더 관심이 있어서, 형이상학자의 주장을 제가 저의 진리로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의 문제에 더 초점을 맞출 뿐입니다.

요약하자면, 제가 코넌트의 주장을 이해하는 방식은 이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주장에 대해서 미리부터 판단하지 마라. 너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대화가 중단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의미와 무의미의 기준은 너가 쥐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는 상대가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을 가지고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니, 너는 단지 말하는 사람이 최대한 명료하게 자신의 말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줘라."

그리고 저는 이 모든 주장에 동의하면서, 한 가지를 더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맞다. 상대는 상대가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을 가지고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나는 그런 언어 사용이 명료해지도록 얼마든지 도와줄 수야 있다. 하지만 상대의 언어 사용 방식이, 나의 언어 사용 방식인 것은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런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하길 원하지 않는다."

댓글을 다시 읽다가 문득 떠올린 것인데, 혹시라도 voiceright님께서 제가

The role of a philosophical elucidator is not to pass verdicts on the statements of others

라는 문장에서 "pass verdicts"라는 숙어를 "입증 부담을 넘긴다."라고 영어를 잘못 해석해서 위와 같은 주장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셨다면, 그건 오해입니다. 저는 저 부분을 전혀 그렇게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pass a verdict"은 그냥 "~에 대해 판단하다."라는 숙어죠. 저는 저 부분을 딱히 입증 책임에 대한 구절로 해석하지 않고 그냥

철학적 해명자의 역할은 타인의 진술에 대해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읽었습니다. '입증 책임'이라는 표현은 단지 제가 평소에 자주 사용하는 표현일 뿐이고, 저는 이 표현이 코난트가 제시한 논쟁 구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해서 이 표현을 사용했을 뿐입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해명(eludication)'이란 상대방이, 상대방의 언어로, 상대방의 기준에서 해야 하는 것이고, 철학적 해명가는 상대방이 해명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는 있어도, 그 해명이 의미 있는지 없는지 판단할 아무런 자신의 근거는 지니고 있지 않으니까요.

저는 이런 상황을 '입증 책임'이라고 표현한 것이죠. 더 나아가서, 이렇게 해명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여전히 상대방의 언어를 제가 '저의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의 문제는 열려 있다는 점에서, 그 언어를 저에게 납득시켜야 할 '입증 책임'은 여전히 상대방에게 있다고 이야기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