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크리틱이란 무엇인가?: 박가분,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 제2부 비판

결국 가라타니가 2000년대 초반에 들고 나온 ‘트랜스크리틱’(횡단식/이동식 비평)이 그만의 고유한 ‘방법’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여전히 불분명하고 혼란스럽다. 따라서 그의 방법이 스타일로서는 통용되기 쉬워도 진지한 탐구를 낳는 방법론으로서 수용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당시 그가 내세운 트랜스크리틱은 한편으로는 (이를테면 두 시점과 시스템 사이의) ‘시차’를 통해 발견된 개별 시스템과 공동체를 넘어선 어떤 구조를 드러내는 그만의 비판적인 ‘방법’이면서도, 동시에 개념적인 순서와 추상 수준을 뒤섞는 ‘알리바이’가 되기도 한다. 여기서 나는 그가 ‘트랜스크리틱’과 ‘횡단식/이동식 비평’ 사이의 등식에 빗금을 쳐야 했다고 주장하고 싶다. 한 공동체와 체계 안에서 보이지 않는 어떤 세계의 보편적 구조를 비판적critical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처음에는 횡당신/이동식 계기와 추동력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발견한 보편적 구조의 개념적인 체계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최초의 횡단적인 관점을 폐기해야 한다.(박가분, 2014: 141)

‘트랜스크리틱(transcritique)’이 가라타니 고진을 대표하는 비평의 방법인데도 정작 이 방법이 정확히 무엇인지 불분명하다는 박가분의 주장에 상당히 놀랐다. 물론, 가라타니가 칸트의 ‘초월론적(transcendental)’이라는 개념을 다소 자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그의 지적은 정당하다. 가라타니가 ‘트랜스크리틱’이라는 방법을 명시적으로 정의하지 않고 있다는 그의 불평 역시 납득할 만하다. 그러나 트랜스크리틱이 “진지한 탐구를 낳는 방법론으로서 수용되기 어려운 점이 있다.”라는 주장은 그가 가라타니의 철학적 입장을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나로서는 가라타니를 단순한 비평가가 아니라 진지한 철학자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에서 정작 철학자 가라타니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방법인 트랜스크리틱을 이해할 수 없다는 고백이 나와서 당혹스러웠다. 더군다나, 이러한 고백이 가라타니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서, 가라타니의 사상을 총체적으로 소개하고자 하는, 국내에 유일한 가라타니 해설서에서 나왔다는 점에서도 의아하였다. 책이 전체적으로는 성실하게 쓰여 있는데도 트랜스크리틱에 대해 다루는 부분에서는 이상할 만큼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 같아서 더욱 아쉬웠다.

가라타니가 주장하는 ‘트랜스크리틱’이란 이율배반적 관계를 맺고 있는 두 입장 사이를 이동하는 과정에서 제3의 대안을 찾고자 하는 비평의 방법이다. 나는 ‘트랜스크리틱’에 크게 세 가지 계기가 있다고 해석한다. 첫째는 이율배반적 관계를 맺고 있는 두 입장 A와 B를 모두 비판하기 위해 A의 관점에서 B를 비판하고 B의 관점에서 A를 비판하는 ‘횡단적 비판(transversal critique)’이다. 둘째는 A와 B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상호 비판으로부터 두 입장 중 어느 쪽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타자 x를 도출해내는 ‘종단적 비판(vertical critique)’이다. 셋째는 타자 x의 관점에서 A와 B를 동시에 지양하여 보편성의 지평을 드러내는 ‘초월론적 비판(transcendental critique)’이다.

1. 횡단적 비판

‘트랜스크리틱’이라는 단어의 접두사 ‘트랜스(trans)’에는 이율배반적 관계를 맺고 있는 두 입장 A와 B 사이의 관점 ‘이동(shift)’ 혹은 ‘변위(displacement)’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일차적인 의미에서 ‘트랜스크리틱’이란 이율배반을 구성하는 양 극단 A와 B를 모두 비판하고자 하는 일종의 양비론적 방법이다. 여기서 A와 B에 대한 비판은 두 관점을 끊임없이 옮겨 다니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즉, A를 비판하기 위해 B 관점에 서고 B를 비판하기 위해 A의 관점에 서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비평을 수행한 대표적인 철학사의 인물로는 칸트와 마르크스가 언급된다. 가령, 칸트는 근대 인식론의 두 입장인 합리론과 경험론 사이를 이동하는 과정에서 합리론의 관점으로 경험론을 비판하고 경험론의 관점으로 합리론을 비판한 인물로 묘사된다. 마르크스 역시 아키즘(archism, 국가주의)과 아나키즘(anarrchism, 무정부주의) 사이를 이동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놓인 맥락에 따라 두 입장 중 한 쪽에 서서 반대 입장을 비판한 인물로 설명된다. 가라타니는 ‘트랜스크리틱’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 칸트는 상대가 관념론일 때에는 합리론에서 비판하고, 상대가 합리론이면 경험론에서 비판했습니다. 마르크스도 마찬가지로 독일에 있으면 영국을 들고 왔지만, 영국에 있으면 헤겔을 들고 왔습니다. 이런 이동과 전회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관념론이라면 OK, 유물론이라면 OK일 수 없습니다. 디컨스트럭션이라면 무조건 OK일 수도 없습니다. 디컨스트럭션이 책임회피의 둔사(遁辭)처럼 되어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때문에 나는 그런 이동을 내포한 비평을 트랜스크리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가라타니, 2006: 171-172)

2. 종단적 비판

트랜스크리틱은 양립불가능한 입장 사이의 이동을 통해 두 입장 중 어느 쪽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제3의 대안으로서 타자 x 를 찾고자 한다. 단순히 A와 B를 끊임없이 이동하기만 하는 비평은 일관성 없는 자기분열로 남고 만다. 이러한 이동이란 우리가 A와 B 중 어느 한쪽에도 결코 완전히 머무를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한에서 의의를 지닌다. 즉, A에 대한 비판이나 B에 대한 비판 자체보다도 A와 B가 모두 우리에게 만족스럽지 않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다. 우리가 이율배반을 극복하기 위해 A와 B를 동시에 넘어설 필요가 있다는 통찰이야 말로 이동 속에서 주어지는 진리이다. 여기서 A와 B 중 어느 쪽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제3의 대안은 미래에 도래할 타자로서 남겨진다. 주의해야 할 사항은, 이때의 ‘타자’가 현재의 관점에서는 확정될 수 없는 미지수 ‘x’로 열려 있다는 점이다. 타자 x는 이동을 통해 예감되는 대상이지 이동을 통해 구성되는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A와 B를 넘어서는 제3의 대안으로서 타자 x가 어떠한 형태를 지니고 있을지에 대해 미리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타자 x는 현실에 실현되는 입장이라기보다는, 이율배반의 양쪽을 비판하기 위한 영원한 이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가라타니는 칸트와 마르크스의 논의를 통해 타자 x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칸트를 빌리자면, 그것은 이념이지요. 초월론적 가상이지만, 규제적으로 작용하는 이념입니다. 국가와 자본이 지양될 때까지 혁명이 계속된다고 마르크스가 말하는 것도 그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x라는 차원은 종교적인 또는 이념적인 것에 매우 가깝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이르는 길을 구조론적으로 또는 유물론적으로 드러내 보일 수 있다곡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는 아닙니다.(가라타니, 2006: 231-232)

3. 초월론적 비판

트랜스크리틱을 통해 주어진 타자 x 는 이율배반을 구성하고 있는 양쪽인 A와 B를 모두 넘어서는 보편성의 지평을 드러낸다. 여기서 ‘보편성’이란 ‘일반성’과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두 입장 A와 B 중 어느 한쪽에 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그 입장이 보편성을 지니지는 못한다. 설령, 어느 한쪽에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이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역시 보편성에 도달하기 위한 조건은 만족되지 않는다. 다수가 동의하는 입장이란 단지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널리 통용된다는 의미에서 일반성만을 지닐 뿐이다. 이러한 일반성으로는 다수에 의한 폭력, 상대주의의 문제, 공동체 전체가 오류를 범할 가능성 등에 적절하게 대답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일반성의 지평을 넘어선 곳에 보편성의 지평을 상정해야 한다. 다수를 비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타자 x에서 찾고자 해야 한다. 모든 이율배반을 넘어서는 지점, 모든 비판을 넘어서는 지점, 모든 입장을 넘어서는 지점에 타자 x를 상정하여 x의 관점에서 현재 우리가 지지하고 있는 입장을 비판적으로 살펴보고자 해야 하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타자 x가 보편성의 지평을 가능하게 만드는 초월론적 조건이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칸트가 ‘보편성’을 추구했을 때 불가피하게 ‘타자’를 도입해야만 했다는 것, 그 타자는 공동 주관성이나 공통 감각에서 나와 동일화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초월적인 타자(신)가 아니라 초월론적인 타자다. 그와 같은 타자는 ‘상대주의’를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것만이 보편성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칸트의 그러한 ‘비판’의 철저성은 그가 취미 판단에서의 보편성 문제, 요컨대 ‘비평’의 문제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가라타니, 2013: 85)

4. 트랜스크리티컬한 대항 운동이란 무엇인가?

가라타니는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이 결코 일면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자각으로부터 ‘트랜스크리틱’이라는 방법을 강조한다. 그는 ‘자본=네이션=스테이트’라는 삼위일체적 구조(혹은 보로메모의 매듭)에 대한 자각 없이, 단순히 화폐를 거부하거나, 국가 질서에 대항하는 탈주를 주장하거나, 총파업을 수행하거나, 정부에 의한 재분배만을 강조하는 순진한 방식으로는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 체제를 결코 극복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즉, 화폐의 무한한 증식, 국민들 사이의 상호부조적 감정, 국가에 의한 재분배 시스템은 우리 시대에 서로 긴밀하게 결탁해 있다. 세 요소는 서로 견제하고 서로 보완하는 과정에서 사회를 이루고 있는 시스템을 고착화시킨다. “예를 들어 각각의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마음껏 자유롭게 행동하고, 그것이 경제적 불평등과 계급적 대립으로 귀결되면, 그것을 국민(nation)으로서의 상호 부조적인 감정에 의해 제거하고, 국가에 의해 규제하여 부를 재분배한다고 하는 식이다.”(가라타니, 2013: 428)

따라서 ‘자본’, ‘네이션’, ‘스테이트라는 세 요소를 한꺼번에 극복하지 않고서는 우리 시대의 질서를 근본적인 의미에서 변화시키기란 불가능하다. 가령, ‘자본’만을 일면적으로 비판하고자 하는 시도는 ‘네이션’이라는 요소를 강화하는 민족주의나 ‘스테이트’라는 요소를 강화하는 국가사회주의로 귀결된다. ‘네이션’만을 일면적으로 비판하고자 하는 시도 역시 ‘자본’의 무한한 증식을 방치하는 신자유주의를 허용하거나 ‘스테이트’에 의한 관리 체제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마찬가지로, ‘스테이트’만을 일면적으로 비판하고자 하는 시도 역시 나머지 두 가지 요소를 강화하게 된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자본=네이션=스테이트’라는 순환 굴레 안에 갇혀 다른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트릴레마 상황에서 가라타니가 제시하고자 하는 비전이 바로 타자 x 로서의 ‘어소시에이션’이라는 사회 구성체이다. ‘어소시에이션’이란 자본=네이션=스테이트를 완전히 넘어선 미래의 공동체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우리는 ‘어소시에이션’이라는 이름으로 예감되고 있는 공동체가 어떠한 내용을 지니게 될지 미리 확정할 수는 없다. 다만, 자본=네이션=스테이트를 극복하기 위한 공동체가 이율배반의 양쪽 중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택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성립될 수 없다는 사실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가령, 자본을 비판하고자 하는 운동은 화폐를 무조건 없애버리는 방식으로도 성공할 수 없고 기존 화폐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도 성공할 수 없다. 우리가 현재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자본의 형태로 변하지 않는 ‘대안적 화폐’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국가를 비판하고자 하는 운동은 국가를 무조건 전복시키는 방식으로도 성공할 수 없고 국가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도 성공할 수 없다. 우리가 현재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기존 자본이나 국가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일종의 ‘생산-소비 협동조합’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런 내용이 없어 보이는 x =어소시에이션은 적어도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규제적 이념이 되어준다. 이러한 규제적 이념이 없이는 ‘자본=네이션=스테이트’라는 굴레를 벗어날 방안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 오히려 우리는 현재의 고착화된 세계경제 체제야 말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체계라고, 자본=네이션=스테이트 사이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찾는 작업이야 말로 우리가 수행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라고, 다수의 사람들이 현재 무엇을 지지하고 있는지야 말로 우리가 옳음/그름, 선/악, 정당/부당을 판단하기 위해 의지할 수 있는 최선의 기준이라고 합리화해버리고 말 것이다. 규제적 이념으로서의 x=어소시에이션이 비록 아무런 내용을 지니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상실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본=네이션=스테이트에 맞서는 트랜스크리티컬한 대항 운동이란 x=어소시에이션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통해 가능해지는 것이다.

5. 트랜스크리틱에 대한 비판

나는 가라타니의 트랜스크리틱이 칸트의 초월철학과 마르크스의 코뮤니즘을 대단히 독창적이고 체계적인 형태로 발전시킨 사유라고 생각한다. 비평의 방법으로서 트랜스크리틱은 결코 단순히 “스타일”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고 “불분명하고 혼란스러운” 것도 아니다. 오히려 트랜스크리틱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대단히 뚜렷하다. 즉, (1) 이율배반적 관계를 맺고 있는 두 입장 A와 B를 모두 비판하라. (2) 두 입장을 모두 넘어설 수 있는 타자 x를 요청하라. (3) 타자 x의 관점으로부터 보편성의 지평을 발견하라. 이러한 방법은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사이의 이율배반이라는 이론철학의 문제로부터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의 삼위일체적 구조라는 실천철학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포괄적인 영역에 적용될 수 있는 확장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트랜스크리틱이 “현대의 자본의 제국에 대한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반대 기지를 재건설하기 위한 가장 독창적인 시도 중 하나”(Zizek, 2004: 121)라는 지젝의 주장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트랜스크리틱은 일종의 순환논증을 받아들이고 있는 방법인 것으로 보인다. 트랜스크리틱에 내재되어 있는 ‘횡단적’ 층위와 ‘종단적’ 층위 사이에는 상호 의존관계가 성립하고 있다. 즉, 횡단적 층위에서 두 입장 A와 B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종단적 층위에서 타자 x가 전제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종단적 층위에서 타자 x가 전제되기 위해서는 횡단적 층위에서 두 입장 A와 B가 비판되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A와 B를 타자 x의 관점에서 모두 지양하고자 하는 시도가 정당성을 상실하고 만다. 타자 x의 관점이란 단순히 A와 B가 틀렸다고 동어반복적으로 말하기만 할 뿐이다. A와 B에서 무엇이 틀렸는지, 왜 틀렸는지, 어떻게 틀렸는지는 전혀 해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따라서 트랜스크리틱이 놀라운 독창성과 확장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트랜스크리틱을 통해 과연 이율배반을 근본적으로 비판할 수 있을지는 굉장히 의문스럽다. 우리의 논의를 보다 자세하게 다듬어보자.

한편으로, 트랜스크리틱은 횡단적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A와 B 사이의 비판을 통해 종단적 층위에 존재하는 타자 x 를 정당화하고자 한다. 여기서 타자 x는 A도 아니고 B도 아닌 이율배반 너머의 관점으로서 정의된다. 따라서 이율배반적 관계를 맺고 있는 두 입장 A와 B에 대한 비판이 타자 x를 설명하기 위한 조건이다. A와 B가 모두 지양되어야 하는 잘못된 입장이라는 전제 위에서만 타자 x의 관점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a) 타자 x는 이율배반적 관계를 맺고 있는 두 입장 A와 B에 대한 비판을 전제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트랜스크리틱은 종단적 층위에 존재하는 타자 x 를 통해 횡단적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A와 B 사이의 비판을 정당화하고자 한다. 여기서 A와 B가 모두 지양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보다 더 상위의 관점인 타자 x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통해 해명된다. 따라서 타자 x가 이율배반적 관계를 맺고 있는 두 입장 A와 B를 모두 비판할 수 있는 근거이다. 타자 x의 관점이 옳다는 전제 위에서만 A와 B가 모두 지양되어야 한다는 비판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b) 이율배반적 관계를 맺고 있는 두 입장 A와 B에 대한 비판은 타자 x를 전제한다.

(a)와 (b) 사이에는 상호 의존적 관계가 성립한다. A와 B에 대한 비판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타자 x가 필요하고 타자 x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A와 B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는 A와 B가 왜 모두 비판받아야 하는 것인지도 타자 x의 관점이 왜 정당한 것인지도 해명되지 않는다. 어느 주장도 다른 주장에 정당성을 제공할 수 없다. “이율배반적 관계를 맺고 있는 두 입장 A와 B가 모두 비판받아야 한다.”라는 주장과 “타자 x의 관점은 정당하다.”라는 주장이 결국 같은 말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근거로 A와 B를 비판해야 하는지, 왜 타자 x의 관점을 상정해야 하는지, 어떻게 트랜스크리틱을 전개시켜야 하는지는 해명되지 않은 상태로 남고 만다.

참고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이신철 옮김, 도서출판 b, 2013.

가라타니 고진, 『근대문학의 종언』,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2006.

박가분,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 자음과모음, 2014.

Zizek. Slavoj., “The Parallax View”, New Left Review​, Vol. 25, 2004, 12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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